며칠째 서진우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그는 유치장에 구금된 상태였고 며칠 후에나 풀려날 예정이라고 했다.안다혜의 생활도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다만 윤해준은 여전히 바빴고 두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안다혜는 마음속에 걱정이 있어 좀처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시간은 흘러 어느새 생일 파티 날이 되었다.“나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파티에 조금 늦을 것 같아.”윤해준은 집을 나서기 전 안다혜에게 이 말을 남겼다.그래서 안다혜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안소현이 보낸 문자를 떠올리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쥔 채, 속으로만 생각을 삼켰다.결국 안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마 윤해준은 그의 첫사랑을 만나러 가느라 바쁠 것이었다.그러니 지금 같은 때에 괜히 시비 걸면 그건 진짜 눈치가 없는 거였다.이런 생각에 안다혜는 윤해준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알 수 없는 감정을 털어내려 애썼다.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안다혜는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꺼냈다.생일 파티 일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오늘 일부러 휴가를 냈다.안다혜는 선물을 들고 우아한 옷차림으로 안 씨 저택에 도착했다.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안소현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얘, 왜 혼자 왔어? 남편이랑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니? 엄마한테도 말씀드렸는데, 이러면 분위기 깨지잖아.”김미진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거실에는 안소현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와 있었다. 대부분 상류층 인사들이나 사업가들이었다. 안씨 가문도 사업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기에 김미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모두 서로 사업 이야기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다들 좋은 파트너를 찾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덕분에 거실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안소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안다혜에게는 충분히 잘 들렸다. 듣기 거북한 빈정거
안소현은 안다혜의 말에 당황한 듯 입꼬리가 굳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안다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다혜야, 너 오늘 일부러 와서 사람 괴롭히려고 작정했니? 네 언니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잖아. 그때 넌 서진우를 쫓아다닌다고 자존심 다 내려놓고 3년이나 매달렸잖아. 근데 결국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으면서.”허종혁은 안소현을 감싸 안으며 안다혜의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이 말에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말싸움에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안씨 가문의 둘째 딸이잖아? 진정한 사랑을 찾겠다고 집까지 나갔다며?”“맞아. 근데 남자가 쟤 안 좋아해서 차였다던데.”“쟤 얼마 전에 결혼했다며? 남편 누군지 알아? 왜 혼자 왔대?”“남편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인가 보지. 그러니까 혼자 왔겠지. 연애에 미친 사람들은 정말 무섭다니까.”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안소현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다혜야, 네가 또 사람 잘못 만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이번에 너무 급하게 결혼한 것 같아서. 남편 될 사람을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고 다 같이 검증해 보는 게 좋지 않겠니? 예전처럼 마음고생하는 건 언니로서 보기 힘드니까.”이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돌던 추측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셈이었다.“소현아, 그만해. 쟤는 자존심만 세서 남의 말은 듣지도 않아. 몇 년 동안 매달렸는데도 차였잖아? 내가 보기엔 저렇게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성격으로는 절대 좋은 사람 못 만나.”허종혁은 불쾌한 듯 안다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비꼬았다.말하고난 뒤, 그는 안소현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구경꾼들이 너무 많았고 오늘은 김미진의 생일 파티였기에 더 큰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아무도 2층에서 내려오고 있는 김미진을 보지 못했다. 김미진의 얼굴은 몹시 굳어 있었고 안다혜를 향한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매서웠다.“내 남편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들이 상관할
“괜찮아요. 바쁜 거 다 아는데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안다혜는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사람들은 다정하게 속삭이는 두 사람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김미진조차 윤해준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안소현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깥에 주차된 차를 바라보았다.방금 저 남자가 타고 온 차는 최근에 나온 신형 모델이었다. 전국에 딱 10대뿐인 비싼 차였다.허종혁도 그 차를 사려고 했지만 이미 다 팔린 후였다.‘저런 차를 어떻게 저 남자가 갖고 있지?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제비 같은데. 설마 다혜가 비싼 돈을 들이고 렌트해서 제비에게 빌려준 건가?’그런 생각이 든 안소현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다혜야, 네가 집에 걱정 끼치기 싫어서 잘 사는 척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나랑 엄마까지 속이려고 하면 안 되지. 차 렌트하는 데 돈 많이 썼을 텐데, 없으면 없는 대로 솔직하게 말해. 괜히 허세 부리다가 웃음거리만 될라.”안소현은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윤해준의 차와 선물이 렌터카와 빌린 물건이라고 비꼬았다.그녀는 정말 말을 잘하는 재주가 있었다.안다혜가 안소현을 쏘아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윤해준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녀는 눈을 들어 남자의 미소 띤 눈길과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묘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두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안다혜는 그의 뜻을 알아챘다.안소현의 ‘호의적인 조언’에도 윤해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여보, 많이 피곤하지? 저쪽 소파에 가서 좀 쉬자.”그는 안다혜의 손을 잡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자, 오늘 좋은 날인데 이런 일로 분위기 망치지 맙시다.”김미진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안소현은 속으로는 불쾌했지만 김미진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안다혜의 뒷모습을 쏘아보고는 김미진에게 다가갔다.“엄마, 화 푸세요. 다혜 걱정하는 마음에 말이 좀 심하게 나갔
김미진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점점 굳더니 허종혁이 준 옥병을 보며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윤해준이 선물한 것도 옥병인데 허종혁이 준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두 사람이 준 선물이 똑같은 거지? 오래된 물건은 하나도 찾기 어려운데 어떻게 이런 기막힌 우연이 다 있어?”“이 옥병 내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경매할 때 누군가 높은 가격으로 사 갔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거야.”“그렇다는 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가짜를 줬다는 거 아니야.”안소현이 이내 반응하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불만을 털어놓았다.“제부, 차는 렌트할 수 있지만 오늘 엄마 생일인데 적어도 선물은 진짜를 가지고 왔어야죠.”“보는 사람도 많은데 가짜를 들고 오면 동생이 쪽팔려서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요? 아니면 동생 체면 따위는 상관없다는 건가?”허종혁도 어두운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내가 어떤 신분인데 가짜를 선물하겠어요? 윤해준 씨도 그래요. 없으면 선물하지 말지 체면 차리다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내 남편이 준 게 가짜라고 어떻게 단정해요? 감정은 해봤어요?”윤해준 옆에 서 있던 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아이고, 이제 그만해요. 그런다고 가짜가 진짜 되는 것도 아닌데 사과하면 끝날 일을 왜 그렇게 질질 끄는 거예요?”“그러게요. 일이 커지면 누가 더 손해인데.”윤해준이 눈썹을 추켜세우고 태연하게 자리에 서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듣다가 안다혜의 손을 꼭 잡았다. 뜨거운 열기에 고개를 든 안다혜가 윤해준의 차분한 눈동자를 발견했다. 윤해준이 안다혜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허종혁이 그런 두 사람을, 그것도 윤해준을 하찮다는 듯 바라봤다.‘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가짜를 준 것도 모자라 하필 똑같은 거라니,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간댕이가 부어도 너무 부었네. 내가 얼마나 큰 돈을 주고 샀는데 가짜일 리가 없지.’하여 먼저 이렇게 말했다.“어머님
허신우가 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장갑을 끼고 옥병을 자세히 더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허신우가 다시 고개를 들어 허종혁을 바라봤다.“얼마 주고 들이셨나요?”허종혁이 우쭐거리며 고개를 쳐들더니 손가락을 몇 개 펴 보였다.“어머님만 좋아하시면 얼마든 괜찮아요.”그러자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감탄했다.“큰맘 먹고 샀네. 역시 허씨 가문, 저렇게 통 큰 선물을 주다니.”“통이 커도 너무 크잖아.”어깨에 힘이 들어간 허종혁이 웃으며 허신우를 바라봤다.“어때요? 어르신. 흠집 하나 찾아내기 힘들죠?”허신우가 턱에 난 수염을 정리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타깝네요. 그렇게 큰돈을 들였는데 가짜에요.”순간 허종혁의 안색이 변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요. 제가 얼마나 큰 돈을 들여서 샀는데요.”허종혁이 이렇게 말하며 옆에 놓인 옥병을 가리켰다.“내가 산 게 가짜라면 내가 사기를 당한 거예요. 돈을 주고 산 건 확실하니까요. 윤해준 씨가 준 옥병은요? 돈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품을 사요? 저거 무조건 가짜에요.”안다혜가 윤해준을 바라봤다. 눈앞에 선 남자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입꼬리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허종혁이 일부러 그를 깎아내리고 있었지만 윤해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허신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신우는 그런 윤해준의 눈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다른 옥병을 들고 자세히 관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놓더니 손뼉을 쳤다.“이거 진짜예요.”허종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어르신,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이 세상에 닮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단번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해요? 윤해준 씨가 어디서 S급을 들고 와서 일부러 나 엿먹이려고 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하지만 허신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눈꺼풀도 들지 않고 바로 반박했다.“내가 유물과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한 번도 틀린 적 없어요. 이 두 옥병은 눈 감고
진실이 밝혀지자 김미진도 흥이 깨졌고 파티도 껄끄러운 분위기로 끝나고 말았다. 윤해준과 안다혜도 차를 운전해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윤해준의 눈빛이 뜨거우면서도 강압적으로 변했고 안다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는 마치 당장이라도 안다혜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오늘따라 너무 예쁘더라.”윤해준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마음속 깊이 담아둔 말을 털어놓았다. 안다혜는 이글이글한 윤해준의 눈빛에 얼굴이 점점 빨개져 윤해준의 가슴을 밀어내며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오늘은 놔줘요. 너무 피곤해서 자야 할 것 같아요.”하지만 윤해준은 이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안다혜를 번쩍 안아 들고 성큼성큼 안방으로 향했다. 윤해준의 눈빛은 안다혜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쉽게도... 늦었어.”안다혜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더니 두 팔로 윤해준의 목을 감쌌다.“뭐 하는 거예요. 얼른 내려줘요.”윤해준이 안다혜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안다혜의 다리를 벌리고는 그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한 손으로 안다혜의 두 팔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린 윤해준은 다른 손으로 안다혜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억지로 그를 마주하게 하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지금은? 지금도 졸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이 쏟아지던 안다혜는 어느새 강렬한 성욕에 사로잡혔다.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한 안다혜는 윤해준의 가슴을 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먼저 샤워해요.”윤해준이 멈칫하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래.”그러고는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안다혜의 눈빛이 자기도 모르게 침대맡으로 향했고 그곳에 놓인 윤해준의 핸드폰이 보였다. 힐끔 쳐다보니 아직 잠기지 않은 핸드폰은 메모장이 켜져 있었고 제목은 첫사랑이었다. 마음이 철렁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갔고 대충 쓱 훑어봤다.[그녀는 매운 음식을 좋아해.][치약은 박하 맛.]여러 감정이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몰려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윤해준은 지금까지 첫사랑을
안다혜는 윤해준이 어떤 표정을 짓듯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그를 등지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뒤에서 들리는 기척에 귀 기울였다.탈칵.불이 꺼지자 따듯한 색깔의 무드 등이 켜졌고 침대 한쪽이 살짝 꺼지는 게 느껴졌다.윤해준은 자리에 눕기 전 안다혜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아무래도 아까 파티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기분이 잡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김미진이 수양딸임에도 불구하고 안소현을 편애하는 건 윤해준도 느낄 수 있었다. 안다혜가 아니라 다른 그 누구라도 기분이 잡칠 수밖에 없었다. 친딸보다 수양딸을 더 예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윤해준은 김미진이 그때 무슨 원인으로 안소현을 입양했는지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재벌 집은 원래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에 윤해준이 예민하게 반응한 게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한편, 윤해준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안다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이 대용품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고 이유라면 그것이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번개 결혼이라 하지만 서로 간의 존중은 필수였고 이는 안다혜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밤새 잠을 설친 안다혜는 주말이라 9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깼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거실에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서야 몸을 일으켰다.예전 같으면 윤해준은 주말에 회사로 나가지 않고 집에서 업무를 봤지만 오늘은 바깥이 너무 조용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나온 안다혜는 그제야 윤해준이 집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식탁에 준비해 놓은 샌드위치가 아직 뜨거운 걸 봐서는 윤해준이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은 안다혜는 일단 아침을 배불리 먹고는 식기를 세척기에 넣고 집에서 남은 서류 몇 개를 처리하려 했지만 민초연이 전화를 걸어와 쇼핑하러 가자고 했다.“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집에 있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안다혜는 민초연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그러자고 했다. 민초연과 약속 장소를 잡은 안다혜가
안다혜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들어보니 밖에 모자를 쓴 남자가 그녀와 민초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은 마치 서진우 같았다. 더 자세히 훑어본 안다혜는 수상한 남자가 서진우라는 걸 확신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서진우 잡혀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와서 괴롭히는 거지?’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대놓고 어쩌진 못할 것 같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맞은편 매장에 치마 봤어? A 브랜드 신상인데 잘 어울릴 것 같아.”민초연은 A 브랜드를 즐겨 입었기에 A 브랜드 신상이 나왔다는 말에 윤해준에게 넥타이를 사줘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채 얼른 안다혜를 끌고 매장으로 향했다.안다혜는 윤해준에게 넥타이를 사주기가 싫어 일부러 안다혜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넥타이를 사 들고 가면 민초연이 그 뒤에 가려진 의미를 윤해준에게 알려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만약 안다혜가 그를 묶어두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속으로 어떻게 비웃을지 모른다. 고작 대용품 주제에 첫사랑을 제치고 싶어 하니 말이다.안다혜는 다시 기분이 잡쳐 커피를 한 모금 쭉 들이켜며 애써 진정하려 했다. 혹시나 민초연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힐끔 쳐다봤지만 민초연이 아무것도 모른 채 치마만 살피자 일단 한시름 놓았고 매장 밖을 쳐다봤지만 서진우는 보이지 않았다.안다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냥 우연히 마주친 건가?’작은 해프닝이라 생각해 안다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민초연과 함께 신나게 쇼핑했다. 2시간을 돌아다닌 두 사람은 전리품을 가득 안고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아, 역시. 쇼핑이 제일 스트레스 풀린다니까.”민초연이 흡족해서 말했다.“근데 너는 별로 안 사고 나만 샀네.”안다혜는 사실 쇼핑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웃으며 메뉴를 건넸다.“뭐 먹을지 봐봐.”민초연이 손사래 쳤다.“알아서 주문해. 내가 뭐 좋아하는지 알잖아.”민초연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이렇게 많이 샀는데 인스타에 올리지 않으면 섭섭하지.”안
윤해준이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오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태안 그룹 지하 주차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찾아봐. 안다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해.”오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켜고는 위치추적기로 안다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몇 분 후, 오정우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찾았어요. 누군가가 안다혜 씨를 납치해서...”“서쪽 창고로 데려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오 비서도 서쪽 창고로 와.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윤해준은 엄숙한 어조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정우는 윤해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동안 윤해준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독한 남자였다.오정우는 안다혜를 납치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해준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그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서쪽 창고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려도 멈추지 않고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대를 잡고는 생각에 잠겼다.‘다정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한편, 서쪽 창고.안다혜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훈은 임유정의 옆에 서서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서진우는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는 악마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훈한테 안다혜를 괴롭히는 영상을 잘 찍어서 전송하라고 지시했었다.건달은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다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건달을 노려보았다.“나한테 손대지 마!”안다혜는 저도 모르게 윤해준을 떠올리면서 울먹였다. 그가 곁에 있어 주면 늘 든든했고 하늘이 준 선물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윤해준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바랐다.“성격도 화끈하니까 가지고 놀 맛이 있네.”“반항해도 소용없어. 소리 지르지 말고 우리랑 재밌게 놀자.”이훈이 옆에 서서 다급
안다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치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납치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안다혜가 밉보인 사람은 그 몇 명뿐이었던 것이다.이훈이 당당하게 걸어오자 안다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는 안다혜의 턱을 거칠게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눈 깔지 못해?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어? 얼른 대답해 봐.”안다혜는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떼어달라고 눈짓했다. 임유정이 테이프를 뜯으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회의실에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납치당해 보니 기분이 어때? 정말 짜릿하지 않아? 울면서 나한테 빌면 기분이 좋아서 너를 풀어줄 수도 있어.”임유정은 안다혜의 볼을 매만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혜가 침을 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납치해도 태안 그룹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안다혜가 이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이훈은 안다혜가 협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혜의 몸매를 훑어보면서 침을 삼켰다.이훈과 눈이 마주친 안다혜는 속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를 탓할 게 아니라 너를 원망해.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납치당한 거야.”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훈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이때 건달이 4명 정도 들어오자 안다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정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어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개 같은 년, 내가 기회를 주었을 때 나한테 빌었어야지.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건달들은 의자에 묶인 안다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과 굴곡진 몸매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마침 서진우도 안다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훈은 서진우의 힘을 빌려서 안다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그는 울고 있는 임유정을 달래주고는 창가로 가서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유정은 눈물을 그치고 이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이훈이 회사에서 거만하게 굴었던 건 안씨 가문 첫째 아가씨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도련님이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가 서진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안다혜를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한편,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훈의 이름만 보면 그동안 안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찾느라고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카운터에서 마주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능한 이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서진우가 전화를 받고는 차갑게 말했다.“쓰레기 같은 놈,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다혜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랬더니 풍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어. 내 일을 망치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감시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쫓기다니...”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진우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진우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다른 방법을 토론해 보려고 연락한 거예요.”“다른 방법이라니?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서진우는 지난번에 연회에서 안다혜한테 한 방 먹은 후로 갖은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보내서 안다혜한테 복수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주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제일 믿었던 이훈마저 회사에서 해임당했기에 점점 화가 났다. 이훈이 임유정한테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제안했다.“서진우 도련님, 이번이야말로 안다혜한테 복수할 기회예요. 임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가 괴롭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서진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네 여자 친
경비원들이 임유정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카운터 직원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태안 그룹에서 사원을 내쫓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이때 한 경비원이 임유정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던지면서 말했다.“앞으로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신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경비원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뒤돌아 갔다. 그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임유정의 물건을 전부 상자에 넣어서 던졌다.임유정은 팀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임유정을 힐끗 쳐다보면서 깔깔 웃어댔다.임유정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당한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몇 배로 갚아줄 테니 두고 봐.’카운터 여직원이 임유정을 쳐다보면서 다른 직원을 향해 말했다.“회사에서 내쫓긴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봐요.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어요?”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아도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회사 단톡방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 동료의 기획안을 표절했대요. 그리고 이훈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했어요.”“회사에서 내쫓을 만하네요.”두 사람은 임유정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임유정은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원이 아니기에 카운터 직원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손가락질해도 임유정은 반격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유정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안다혜한테 몇백 배 돌려줄 거야.’임유정은 택시를 타고 이훈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이훈은 해임당한 뒤로 취직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가끔 서진우와 연락하면서 안다혜를
“안다혜 씨,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요?”안다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유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임유정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을 수도 있었다.안다혜가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이었다면 임유정한테 당해도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다혜는 차가운 두 눈으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 임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안다혜 씨,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하라는 대로 하고 죽은 듯이 지낼게요.”임유정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모두 멀리하고 싶어 했다.이지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아까 안다혜가 나서지 말라고 할 때 속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안다혜가 현명하게 처리해서 임유정의 만행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안다혜는 임유정의 손을 내치고는 팀장을 향해 말했다.“임유정 씨가 제대로 반성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임유정이 기뻐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사에서 내보내고 이 업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임유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기에 해임당하면 이 업계에서 취직할 수 없을 것이다.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에요. 안다혜 씨 말대로 해요.”안다혜는 임유정을 스쳐 지나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임유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다혜의 얼굴을 잡아 뜯으려고 덤볐다.“안다혜, 이 개 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해!”안다혜가 재빨리 옆으로 비키자 임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임유정이 씩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보여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안다혜는 임유정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PPT를 한 장씩 넘겼다. 임유정이 발표한 것과 완전히 다른 기획안이 눈앞에 나타났다.이미 협업할 연예인을 섭외했고 구체적인 대안을 정리해서 적어두었다.안다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임유정 씨가 발표한 기획안은 저의 초안이에요.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건 최근에 완성한 기획안이에요. 온천 휴양지는 럭셔리한 이미지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지금 보시는 화면은 초안의 단점을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내용이에요. 유명한 브랜드 회사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어요. 저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요.”그 자리에 있던 사원들이 전부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조금 전에 임유정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훌륭했다.안다혜는 사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기획안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유능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유정이 안다혜의 기획안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임유정 씨가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익을 챙기려고 했네요.”“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곧 해임당하지 않을까요? 오늘 밤에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할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놓고 보면 위험한 인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다혜를 향해 말했다.“안다혜 씨,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표절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애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팀장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처음부터 진행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거든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찾아냈고요. 임유정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다혜는 임유정을 내팽개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닦았다. 임유정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안다혜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다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안다혜,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당장 무릎 꿇고 나한테 빌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짓도 벌일 수 있어.”임유정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다혜의 기획안을 훔쳐서 발표한 사람은 임유정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처럼 굴었다.이때 팀장이 나서서 임유정을 말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임유정 씨, 동료끼리 싸우지 마세요. 안다혜 씨가 이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팀장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안다혜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임유정 씨는 저의 기획안을 표절했어요.”“웃기는 소리! 내가 언제 표절했다고 그래? 내 기획안이 욕심나서 일부러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유정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언성을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네가 팀장의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너를 감싸고 돌 리가 없잖아.”“임유정 씨의 말을 들어보니 문뜩 궁금해지네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훈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아주 특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요.”“뭐, 뭐라고?”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다혜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임유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팀장과 안다혜가 아니라 임유정과 이훈이 특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안다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임유정 씨가 이 기획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다시 설명해 볼래요?”안다혜의 말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이지영이 피식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다혜 씨의 말대로라면 임유정이
“임유정 씨의 기획안을 제출하면 회사의 명예에 먹칠하게 될 거예요.”안다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단상에 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임유정을 지켜보다가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이다.임유정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문했다.“안다혜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임유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설마 제가 안다혜 씨보다 먼저 승진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가요? 안다혜 씨는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이었네요. 동료를 시기 질투할 시간에 더 노력하지 그래요?”임유정은 안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안다혜의 컴퓨터에 있던 파일을 전부 복사한 뒤에 삭제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안다혜가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임유정이 먼저 발표했기에 이 기획안은 임유정의 것이 되었다.팀장이 안다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안다혜 씨, 설마 이 기획안을...”“팀장님!”임유정이 팀장의 말을 끊으면서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동료를 모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왜 안다혜 씨의 편을 드는 건가요? 설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겠죠? 어쩐지 저번부터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았어요.”임유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두 팀장과 안다혜를 번갈아 보면서 귓속말했다.팀장은 임유정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임유정 씨,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모두 조용히 하세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팀장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안다혜와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팀장이 아무리 부정해도 임유정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안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다혜는 피식 웃더니 임유정 쪽으로 다가가서 노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안다혜와 달리 임유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임유정과 안다혜가 나란히 서 있으니 비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을 한 임유정은 안
안다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안다혜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유정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멍청한 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 있다가 너를 처참히 짓밟아줄 테니 기다려. 언제까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이 기획안이 나의 것이 되면 너는 팀장한테 버림받겠지.’임유정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안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임유정은 USB를 컴퓨터에 꽂고는 준비한 기획안 파일을 클릭했다. 안다혜가 예상했던 대로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임유정이었다.임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도발했지만 안다혜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모습을 본 임유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안다혜, 내가 준비한 기획안을 보고도 웃음이 나와? 곧 울면서 나한테 빌겠지.’임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발표할게요. 풍산 그룹의 고급 온천 프로젝트는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하는 게 좋아요. 혹은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을 홍보대사로 초빙하면 더 좋고요. 그리고 풍산 그룹의 온천 휴양지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거예요.”임유정이 스크린에 PPT를 띄워놓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귀담아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발표가 끝난 후, 팀원들은 임유정이 이토록 훌륭한 기획안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팀장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정말 혼자 생각해 낸 기획안인가요?”임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팀장님,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팀장님이 저를 미덥지 않아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오로지 저의 힘으로 완성한 거라고요.”팀장은 조금 전에 임유정이 자신만만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