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준은 강지아를 일 층까지 바래다줬고 엘리베이터까지 눌러줬다.“모레 오후 5시에 데리러 올게요. 화장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회사에 스타일리스트가 있으니까.”서원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서울의 최고급 동네답게 곳곳에 CCTV가 있었고 24시간 순찰하는 경비원이 있어 싱글이고 돈 많은 여자들이 살기에 아주 적합했다.강지아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차 한 잔 알래요? 이틀 동안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서원준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아니에요. 가서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감기약 먹어요. 내일 꼭 따뜻하게 입고요.”“네.”강지아는 대답을 하며 그에게 코트를 돌려주었다.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서원준은 손을 흔들며 떠났다.집은 정기적으로 하인이 와서 청소하고 냉장고는 방경숙이 정기적으로 와서 여러 음식과 음료수를 넣어줬다.난방도 잘되는 집이라 강지아는 맨발로 걸어 나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온유한에게서 걸려온 전화이다.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고 핸드폰을 탁자 위에 놓고 방으로 가서 잠을 잤다.K그룹.점심을 먹은 정유진은 근처에 있는 유명한 마사지 가게에 가서 사우나를 했다.요즘 너무 바빠서 요가 할 틈이 없었기에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목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옷을 벗을 때 목과 가슴에 키스 마크가 보여 당황하기도 했다.사우나를 마치니 온몸이 편안해졌다.K그룹 로비에 들어서자 프런트 데스크 안내직원이 멀리 보고 반겨 주었다.“정 대표님, 누가 찾아왔습니다.”“어디에 있는데요?”“유진 언니, 나예요.”고개를 돌려보니 임미연이 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다가왔다.임신한 티가 나지 않은 상태에 이런 동작을 하니 보기에 좀 이상했다.정유진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일, 일이 있어요...”정유진의 목덜미를 바라본 임미연은 순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착각이 아니라면 정유진의 목에 있는 것은 분명 키스 마크이다.목에 어떻게 키스 마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설
강지찬은 최근 다시 살아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고 점심에는 아예 드러누운 채 두 부녀가 티타임을 가졌다.연우는 종업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즐겁게 먹었다.강지찬은 옆에 있는 장형준의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그 사람의 죽음, 역시 사고가 아니었어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찾고 있는데 아마 금지 물품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강지찬은 눈썹을 찡그렸다. 진짜로 속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다.경솔하게 굴다가 들통날 수 있기에 그는 장형준에게 더 이상 알아보지 말라고 했다.저녁에 정유진과 이야기를 나누자 정유진이 말했다.K그룹이 땅을 손에 넣자마자 강원훈과 고남준이 다시 조용해졌어요. 셋째 숙부는 심지어 매일 회사에 오고요. 참,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찾아보면 알겠지?”강지찬은 무심히 대답했다.금방 샤워한 정유진인지라 손끝이 너무 부드러워 앞에 있는 남자는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오늘 임미연이 회사에 찾아왔어요.”“자기들끼리 소란 피우게 내버려 둬. 신경 쓰지 말고.”강지찬이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정유진은 불타오르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손으로 그의 입술을 가렸다.“오늘 밤은 안 돼요.”“왜 안 돼요?”“그날이에요.”강지찬은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자기 물건을 만지더니 순식간에 맥빠진 개처럼 그녀의 목에 머리를 묻고는 길게 들이마셨다.그리고 다시 일어나 샤워를 하며 욕망의 불씨를 가라앉혔다.그 모습이 정유진은 너무 우스웠다.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보며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휴대전화에는 서울의 재벌 집 사모님들이 단톡이 있었다. 그 단톡에서는 한창 온유한과 주유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그해 고등학생 때, 온유한과 주유정이 학교에서 얼마나 유명한 커플이었어요][주유정이 결혼 안 한 이유가 아직도 온유한을 못 잊어서일 거라고 우리 모두 의심하고 있잖아요.][둘 다 나이가 찼으니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어요.][근데 그때 왜 헤어진 거예요?][장거리였으니까
강지아가 잠에서 깼을 때 방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정유진과 온유한이다.“새언니? 왜 여기에 있어요?”“성유 송년회 보러 왔어.”정유진은 온유한을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송년회가 끝나가는데 현장을 예쁘게 디자인이 한 사람이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강지아는 머리를 쥐여 잡으며 말했다.“같이 소란 피우기 싫어서 잠깐 눈을 붙인 건데... 새언니, 이제 가려고요? 같이 가요.”정유진이 엉겁결에 온유한을 쳐다보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강지아는 마치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를 공기처럼 여겼다.그 모습에 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일 있으면 먼저 가봐요. 지아는 내가 데려다줄게요.”온유한이 떠나자 강지아는 두 눈이 멍해졌다.정유진이 다가가 안아주자 계집애는 이내 정유진을 꼭 껴안았다.극도의 안정감이 필요한 모양이다.“새언니, 왜 같이 왔어요?”“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있었어.”강지아는 잠이 쏟아지는 눈으로 정유진을 바라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첫사랑과 같이 안 있고 여긴 뭐하러 왔대요?”“네 생각엔? 성유의 송년회가 유한 씨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 네가 걱정되어서 온 게 아닐까?”“그런 걱정 따위 필요 없거든요.”“그럼 주유정과 재결합하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강지아는 뽀로통하게 말했다.“새언니, 굳이 자기 것이 아니라면 뺏을 필요도 없겠죠.”정유진은 본인 기분이 강지아에게 영향을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진짜로? 정말 너의 유한 오빠를 다른 사람에게 줄 거야? 내가 알기로는 지금 주유정과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한 번 도전해 보지 않을래?”강지아는 짜증이 난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몰라요. 그 여자가 돌아온 이후로 연락을 잘 안 해요.”“이렇게 내버려 두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너도 유한 씨를 놓지 못하겠다는 뜻이야. 어찌 됐든 너의 오빠와 나는 항상 너를 응원할 거니까 너의 행복이 제일 중요해.”“새언니가 제일 좋아요!”정유진은 그녀에게 옷을 건네며 말했
드디어 방학이 되었다. 강지찬은 가족을 데리고 곧장 해성시로 날아갔다.그가 설 쇠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본가는 아내와 아이, 장인어른과 장모를 데리고 해성시에 나가 설을 쇤다는 말을 들었다. 강홍식은 하마터면 화가 나 기절할 뻔했다.임미연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지찬 오빠와 유진 언니가 해성에 갔다고요?”“그럴 리가.”고세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속은 은근히 통쾌했다.강씨 가문은 절대 쉽게 들어올 수 없을뿐더러 강지찬과 정유진도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임미연 같은 여자가 들어온다면 고세연의 그동안 고생은 헛된 것이 아니겠는가?“강지찬과 정유진이 화해한 거 아니에요?”임미연이 서운한 얼굴을 보이자 고세연은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래서 요즘 본가에 통 나타나지 않은 거였네요. 그리고 얼마 전에 연우를 데리고 놀이공원과 승마장에 갔다고 하던데 인제 보니 계속 정유진의 집에 머물고 있었네요.”임미연의 안색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고세연은 아주 통쾌했지만 일부러 아닌 척했다.“미연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파요?”임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던; 억울한 듯 강홍식을 바라봤다.“어르신, 지찬 오빠를 불러주면 안 돼요?”강홍식은 난처했다.강지찬이 부른다고 쉽게 온다면 매일 그를 불효자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대여섯 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다닌 강지찬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그, 그게...”강홍식이 우물쭈물하자 임미연은 다시 말했다.“지찬 오빠는 강씨 집안의 기둥이고 집안의 가장이에요. 가장이 없는데 설을 어떻게 보내요? 밖에 다른 사람이 알면 우리 강씨 집안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맞는 이치지만 강지찬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에게 직접 말할 사람은 없었다.임미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어르신, 배 속에 강씨 집안의 장손이 있어요.”원래부터 귀가 얇은 강홍식은 손자 체면을 봐서라도 전화는 걸어야 했다.하지만 직접 걸지 않고 집사에게
설날 강원훈이 집에서 아이를 때렸고 강지호의 울음소리가 본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주연지는 아들과 새해에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강원훈이 번복해 강지호가 소란을 피우다가 결국 얻어맞았다.아들이 숨을 내쉬며 우는 것을 보니 주연지도 답답했다.“호텔까지 다 잡았는데 왜 못 간다는 거예요? 내연녀가 같이 있어 달래요?”강원훈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순간 이 모자를 집안에 데려온 것이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으니 말이다.“닥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짐 싸서 꺼져!”말을 마친 뒤 떵떵거리며 계단을 올라갔고 그 모습에 주연지는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고 강지호만은 옆에 가만히 있었다.옷을 갈아입은 강원훈을 보니 외출하려고 하는 것 같다.주연지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설날 아침부터 어디에 가려고요?”강원훈이 코웃음을 쳤다.“요즘 한 여대생이 눈에 띄더라고.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어. 왜, 불만이 있어?”주연지는 온몸을 떨었지만 강원훈은 아무런 미련 없이 가버렸다.이 사람이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닌 것을 알지만 아들 때문에 한 번도 여자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최대한 주연지에게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주연지도 그냥 모른 척해다. 여자가 없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적어도 강원훈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확실한 명분도 주지 않았는가? 강씨 집안의 셋째 사모님 명의가 있고 아들에게 돈이 있으니 더 욕심낼 것도 없었다.그런데 지금 강원훈은 아들 앞에서 바깥 여자 얘기를 꺼냈다.“강원훈, 이 나쁜 놈!“주연지는 고가의 값비싼 꽃병을 깨뜨렸다.조예원도 셋째 집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었다.휴대폰 영상 속에서 조예원 어머니가 정유진에 대해 물었다. 조예원 어머니는 두 사람이 손절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당부했다.“날씨가 따뜻해지고 유진이가 한가해지면 아이들과 함께 돌아와. 나도 유진이를 본지 오래돼서 보고 싶어.”조예원은 자기 어머니가 외손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커먼 한약을 강지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신 뒤 그릇을 조예원에게 건네며 겨우 입을 열었다.“밖에 무슨 일이 있어요?”“셋째 집안에서 싸우고 있어요. 강원훈이 집을 나간 것 같아요.”강지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쟁반을 들고 문앞까지 걸어간 조예원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정유진이 가족과 함께 해성시에 가서 설을 쇤다는 얘기 들었어요?”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매우 두꺼운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뒷모습은 전혀 뚱뚱해 보이지 않았다.조예원이 말했다.“비행기표를 끊었으니 우리도 같이 나가서 진찰을 받읍시다.”강지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괜찮아요.”조예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지현과 함께 출국해 병원에 가기로 한 이상, 반드시 가야 한다.강지찬과 정유진 가족은 닷새 만에 돌아왔다.강지아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에게서 온 친구 신청을 받고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누구야?”정유진이 물었다.“주유정이요.”강지아는 친구 신청을 수락했다.그러자 주유정에게서 바로 전화가 오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오늘 서울 돌아온다며? 언제 도착해? 나 오늘 이사하는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오늘 서울 돌아온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유한이 오늘 이사 도와주러 왔어. 친한 친구 몇 명 불러서 집들이 겸 축하 파티를 열 예정이니 너도 와.”“네...”강지아가 대답하자 정유진이 물었다.“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마. 왜 스스로에게 난처한 일을 만들어?”강지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로 돌아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이번에 거절하면 또 다음이 있겠죠. 매번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겁이 나서 피하는 줄로 알 거예요.”강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가는 게 뭐 대수라고.”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서원준과 같이 가자고 메시지를 보냈다.서원준은 난처한 처지인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두말없이 승낙했다.금방 설이 지난
“방씨 아주머니, 이 여자는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예요?”강지아는 화를 참고 말했다.“오빠가 일부러 전화해서 나가라고 했잖아요. 여기는 오빠와 새언니의 집이에요. 그런데 본인이 뭐라고 계속 여기에 있는 거예요?”강지아가 욕설을 퍼붓기 전에 정유진은 얼른 연우의 귀를 막았다.방경숙은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아가씨. 저는...”“아주머니와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거니까.”임미연이 나서서 방경숙의 난처함을 풀어줬다.지금 임미연은 임신한 상태이고 이 아이가 진짜로 강지찬의 아이인지 아닌지 방경숙은 몰랐기에 본인이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이상, 억지로 내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나가기 싫다고? 네가 뭔데 나가기 싫다는 거야?”강지아는 경호원을 노려보며 말했다.“거기서 멍하니 뭐 하는 거예요. 이 여자 당장 쫓아내요. 게스트 룸에서 쓰던 물건들은 다 버리고요.”당장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 정유진은 연우의 귀를 막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엄마, 저 이모 누구야? 왜 우리 집에 있어?”“응, 손님이야.”정유진은 딸을 침대에 눕힌 뒤, 코트를 벗겼다. 하인더러 욕조를 소독하게 한 후, 아이에게 목욕을 시켜줬다.녀석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왔는지 물어보라고 했다.연우는 혼자 소파에 올라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래층에서 강지아의 성난 목소리가 또 들렸다. 강지찬이 돌아온 것 같지만 정유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임미연이 아직도 집에 있는 것을 본 강지찬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 장형준에게 임미연을 내보내라고 했다.강지찬을 보름이 넘도록 보지 못한 임미연은 자기를 만나자마자 나가라고 할 줄은 몰랐다.“지찬 오빠, 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임미연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눈시울을 붉혔다.“나는 오빠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집을 사줬잖아? 거긴 조용하니까 임산부에게 좋아.”강지찬은 아무렇지
온유한이 여기 있는 것이 의외는 아니었지만 강지아는 뭐가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문을 연 온유한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강지아도 그를 바라봤다.흰 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진 모습은 평소 빈틈없는 온 선생과 딴판이었다.“온 선생님, 또 만났네요? 안 들여보낼 거예요?”서원준이 웃으며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가 강지아 대신 준비한 집들이 선물이었다.강지아 자신도 미처 선물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이때 주유정이 다가와 물었다.“유한 씨, 누구야... 지아가 도착했네. 어서 들어와.”온유한은 그제야 손잡이를 잡은 손을 놓고 집안으로 두 사람을 들어오라고 했다.서원준은 들고 있던 선물을 주유정에게 건네며 말했다.“지아가 준비한 거예요.”“고마워. 지아야. 선물까지 준비하다니.”강지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준비한 것 아니에요.”주유정의 미소가 굳어졌다.서원준은 조용히 혀를 내두르며 팔을 들어 강지아의 목을 감았다.“내가 준비한 거나 네가 준비한 거나 다 똑같잖아. 뭘 그렇게 따져?”그러자 주유정이 얼른 말했다.“맞아, 누가 준비하든 똑같지. 고마워.”강지아가 한마디 했다.“아직 안 뜯어봤잖아요.”주유정의 얼굴이 다시 얼어붙었고 얼른 선물 포장을 뜯었다.서원준은 혼자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이 계집애는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해도 본인이 난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선물은 바디 전체가 하얗고 목이 가느다란 예쁜 꽃병이었다.“조 대가의 작품이네요.”주유정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서원준 씨도 조 대가의 팬일 줄 몰랐어요. 이 하얀 꽃병과 매칭되는 검은색 꽃병도 있지 않아요? 이 선물 너무 소중해요. 전에 잡지에서만 보고 실물은 본 적이 없는데.”이번에는 서원준이 난처해졌다. 집들이용으로 쓸 만한 물건을 고르다가 집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가져온 것인데 바로 마음에 들어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마치 그가 정성을 들여 특별히 고른 것처럼 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