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장형준이 대문 밖을 지키고 있는 장형준을 본 정유진은 기사더러 차를 세우라고 했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사모님, 대표님이 저를 쫓아냈어요. 임미연이 저를 싫어한다면서요.”정유진은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지찬 씨는 아직도 회사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예요?”장형준도 운전 기사더러 내리라고 한 뒤 본인이 운전석에 앉은 후 말했다.“임미연이 태동이 느껴졌다면서 집에서 아이를 돌봐줘야 한다고 했어요.”사실 정유진도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싶지만 그녀가 K그룹에 가지 않으면 모든 업무 전화들이 그녀에게 올 것이다.강지찬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K그룹에 도착하니 강지현도 있었다.정유진은 강지현더러 장형준에게 상황을 말하라고 지시했다.“이 일은 장형준 씨가 처리할 테니 치료에 신경 쓰세요.”정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몸으로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강지현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시간 낭비라니요?”정유진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강지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원훈이 고남준 회사에 투자해 지분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북쪽 교외에 있는 땅을 얻으려고 노리고 있고요. 어제 강원훈이 임미연을 만나러 간 것은 땅과도 관련이 있을 거예요. 이 사람들은 유진 씨와 정면돌파를 하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해요.”정유진은 마음속이 너무 복잡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귀띔해 줘서 고마워요.”강지현이 말했다.“북쪽 교외에 있는 땅 때문에 얘기가 잘 안 되는 것 같으니 사람을 찾아 얼른 사인하게 할게요.”정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말했다.“그 땅은 이전에 한 사건에 연루되었어요. 올해 새로 전근된 간부들이 상당히 중시하고 엄격하게 토지를 통제하고 있고요. 전에 몇 번 만났는데 계속 검토해야 한다면서 몇 달째 미루고 있어요.”“내가 해결할 테니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말을 마친 강지현은 이내 밖으로 나갔다.임우연과 장형준은 서로 번갈아
그래도 임우연에게 번호가 있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정유진은 전혀 화가 난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강지찬 씨, K그룹이 동네 시장도 아니고 여기 와서 소란 피우지 말고 직접 오셔서 친척들을 모시고 가세요.”임미연의 어머니 장혜수는 얼른 다가가서 핸드폰을 향해 소리쳤다.“지찬아, 나 미연이의 엄마야. 너의 회사 구경하러 왔어. 괜찮아. 곧 갈 테니까.”큰이모인지 둘째 이모인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도 다가왔다.“지찬아, 회사는 네가 맡아야지. 이렇게 큰 회사를 어떻게 생판 남에게 맡길 수 있어.”다른 친척들도 한둘씩 다가와 강지찬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정유진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때 경비원이 올라왔다.“모두 쫓아내세요. 또 소란 피우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정유진은 차가운 얼굴로 돌아섰다.임우연은 정유진에게 따지기 위해 올라온 그 여자들은 막았다.경비원도 달려들어 잡아당기자 임미연의 친척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왜 우리를 쫓는 건데. 여기는 지찬이 회사야. 네까짓 게 뭔데?”“지찬이가 잠시 너에게 K그룹을 관리하라고 했을 뿐, 네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아? 경찰에 신고까지 해서 우리를 잡으려고? 그럴 체면은 있고?”갑자기 하얀 무언가가 무리 안에서 나오더니 정유진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너무 빨라서 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고 그렇게 ‘퍽'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깨졌다.곧이어 차가운 액체가 머리카락을 타고 어깨까지 흘러내렸다.깜짝 놀란 비서들은 서둘러 수건을 가지러 갔다.정유진은 이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경찰에 신고해.”임우연은 군말 없이 경찰에 신고했다.정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비서들은 얼른 그녀 머리 위의 계란물을 닦아줬다.비서가 그녀보다 더 억울해하며 말했다.“그 사람들 너무해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정 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그런 사람과 따져봤자 대표님만 격이 떨어져요.”“정 대표님이 가서 좀 씻으세요. 제가 뜨거운 물 받아줄게요.”정유진
이 사람들은 모두 청하군에서 왔다.장혜수는 정유진을 감싸는 임우연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정유진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절대 남겨두면 안 된다고 결심했다.“당연히 사위더러 너를 해고하라고 하겠지, 넌 대체 뭐 하는 사람이고 월급은 얼마야?”임우연은 담담하게 말했다.“월급을 다 합치면 2억 정도 될 것 같아요.”“뭐라고? 월급이 2억이라고? 그럼 연봉이 20억이 넘어? 무슨 비서가 그렇게 많은 월급을 받아?”임우연이 말을 하지 않자 임미연의 이모는 장혜수를 잡아당겼다.“동생, 너의 조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세일즈 매니저를 하고 있잖아. 차라리 지찬이 옆에 와서 이 일을 하는 게 어때. 연봉 20억 말고 10억만 줘도 돼.”다행히 장혜수는 머리는 맑은 편이었다.“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지찬이를 만나면 한번 말해볼게.”“그래. 지찬이가 우리 미연이를 그렇게 예뻐하고 160억짜리 대저택도 바로 사는 거로 봐서는 사촌 오빠에게 일자리 하나 마련해 주는 건 문제없을 것 같은데?”순간 몇 명의 여자들이 장혜수를 둘러싸고 온갖 아첨을 했다. 더는 임우연에게 매달리지 않아 그도 그제야 한가해졌다.한 시간쯤 지난 후, 강지찬과 임미연이 왔고 정유진도 이내 뒤따라 왔다.목욕하고 머리를 말린 뒤 안에는 검푸른 모직 정장 한 벌에 겉에는 긴 흰색 모직 코트를 걸쳤다.긴 웨이브 헤어스타일에 하이힐을 신고 세련된 화장을 한 모습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원래부터 작지 않은 키인 그녀가 임미연 옆에 서자 카리스마가 순식간에 임미연을 압도했다.방금 기록을 하던 두 경찰관은 정유진을 본 후 다시 임미연을 보더니 서로 눈을 마주쳤다.남자 경찰은 속으로 생각했다.‘강 대표가 사람 볼 줄 모르네?’여자 경찰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역시 집에 선녀가 살아도 남자들은 바깥의 비린내를 참지 못하나 봐.’임미연은 강지찬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었지만 그러면 정유진이 강지찬 옆에 서게 된다. 게다가 움직일 기회도 없었다. 고모 무리들이 그녀를 보
옆에 있던 경찰들은 이 상황을 눈을 뜨고 지켜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날뛰는 내연녀 집안을 본 적이 없다.정실 부인더러 체면이 없다고 말하다니?게다가 강지찬더러 본인 편을 들라고 한다. 강지찬 보고 정실부인을 공개적으로 저격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강지찬을 바라본 정유진은 그가 임미연 친정 식구들 앞에서 어떻게 편을 들어주는지 궁금했다.강지찬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정유진은 빨간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사과를 안 하겠다면 더 쉬운 방법을 알려드리죠. 나에게 계란을 던졌으니 나는 그쪽 머리에 물을 쏟을게요.”옆 테이블에는 나이든 경찰이 금방 우려낸 차가 있었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찻잎만으로도 주전자의 절반을 차지해 색이 매우 진했다.“감히!”장혜수는 사위가 본인 편을 들지 않았지만 가슴을 쭉 펴더니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두려워하는 기색 없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주눅 들어 있었다.정유진의 카리스마가 대단하기 때문이다.정유진은 찻주전자를 든 뒤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사과하세요.”강지찬에게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은 임미연은 정유진에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언니, 내가 우리 이모와 고모 대신 사과할게요. 네?”‘언니'라는 단어에 정유진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임미연 씨,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나는 외동딸이고 동생 같은 건 없어요.”정유진은 찻주전자를 놓지 않았고 강지찬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가 여자는 독립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남자를 노리는 사람이 나에게 삿대질할 줄은 몰랐네요. 강 대표님, 새 장모님이 말하길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끼어든 제3자라고 하는데 맞나요?”강지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사과해.”이 말에 임미연과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어리둥절했다.장혜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사위, 이 일은 정말 우리 탓이 아니야. 이 여자가 사람을 너무 업신여겨...”정유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강지찬은 임미연을 차에 태우지 않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의 친척은 네가 알아서 해.”말을 마친 뒤 임미연 앞에서 차 문을 닫았다.임미연은 제자리에 멍하니 있다.“미연아, 지찬이 갔어?”임미연은 초라한 친엄마를 보며 화가 나서 말했다.“고향에 잘 있을 것이지 여기는 왜 온 거야?”“사위가 사준 대저택을 보러 왔지.”찬 바람이 불자 장혜수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지찬이는 왜 간 거야? 우리는 어떡하라고?”임미연은 강지찬이 화가 나서 간 것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냥 거짓말로 둘러댔다.“일이 있어 나더러 엄마를 호텔에 데려다주라고 했어.”그러자 큰이모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멀리서 왔는데 호텔에 묵으라고?”임미연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5성급 호텔이야. 큰이모. 여기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은 이모 집보다 더 편할 거예요.”그러자 옆에 있던 큰고모가 말했다.“맞아, TV에 다 나오잖아, 호텔 욕조가 우리 집 화장실보다 더 크고.”임미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얼른 택시를 잡아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K그룹에 간 강지찬이 회사에 들어서자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가 모두 멍해졌다.“강, 강 대표님?”“강 대표님! 강 대표님 안녕하세요.”“강, 강 대표님 안녕하세요.”모두의 의아한 시선 속에 강지찬은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대표이사실 비서들은 그를 보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강 대표 오셨습니까?”젊은 친구들은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설마 내연녀 대신 따지러 온 것일까?강지찬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대표이사실로 들어갔다.정유진은 비서 진수영더러 차를 몇 개 골라 파출소로 보내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진수영은 찬장에 가득한 찻잎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정 대표님, 한두 개 드리면 돼요. 이 차들은 적어도 천만 원짜리인데.”이 찻잎은 강지찬이 소장한 것들이다. 대부분이 다른 사람이 보내준 것으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여기에
이 인간은 역시 임미연의 복수를 위해 나선 것이다.정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고 심장은 찢기는 듯이 아팠다.“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가슴속의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이런 남자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하지만 심장은 그래도 너무 아팠다.없을 때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니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다.강지찬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정유진은 책상 위 장식품 하나를 집어 들어 바닥에 부수려 했다.이때 강지찬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그녀를 제지했다.“그건 안 돼. 이건 대가가 만든 거야. 이미 돌아가신 사람이라 다시 살 수도 없어. 한정판이라고.”이런 상황에 한정판을 생각할 겨를이 있다고?정유진은 바로 가로채서 옆으로 버렸다. 그 물건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망가지지 않았다.강지찬은 얼른 줍더니 안쓰러운 듯 만지작거렸다.“부서지지 않아서 다행이야.”화가 잔뜩 난 정유진은 눈앞에 있는 사람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물건을 제자리에 놓은 강지찬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정유진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홍식이 전화를 걸어와 정유진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임미연이 하혈해 병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무표정한 얼굴로 욕을 먹고 있는 정유진은 조금 전의 그 이상한 느낌이 온데간데없었다.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하며 강지찬까지 함께 듣도록 했다.“경고하는데 정유진, 미연이는 내 손자를 품고 있는 몸이야.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넌 강씨 집안으로 들어올 생각하지 마. 예전에는 지찬이가 지켜줬을지 몰라도 이제는 없어. 누가 지켜주나 보자고. 어차피 지찬이도 돌아왔으니 눈치껏 K그룹에서 썩 꺼져.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미연이에게 사과해. 들었어?”정유진은 싸늘한 얼굴로 강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들었어요.”전화기 너머의 강홍식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콧방귀를 뀌고는 전화를 끊었다.“강지찬 씨, 나에게
정유진은 혼자 차를 몰고 뛰쳐나갔고 경호원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당연히 임미연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본가에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신호등 네댓 개를 지나자 정유진은 마음이 점점 안정됐다.이제 K그룹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예 일찍 퇴근해 집으로 돌아갔다.오늘 날씨가 꽤 좋아 정명학과 이명자는 연우를 데리고 놀러 갔다.냉장고에 반찬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정유진은 동네 슈퍼에 가서 야채와 과일을 좀 샀다.이렇게 장을 보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른다. 대부분 어르신들과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샀기에 매우 만족스러웠다.집에 돌아와 물건을 내려놓자마자 임우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조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임우연은 휴대전화 너머로 내일 일정을 보고했고 회의를 내일로 미뤘다고 말했다.“지찬 씨가 회사에 있지 않아요?”“정 대표님, K그룹의 일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강 대표님이 말했어요. K그룹은 정 대표님이 와서 지시하기를 기다려요.”그 인간 어디 아픈 거 아닐까?샤워하면서도 강지찬의 오늘 행동을 떠올린 정유진은 생각할수록 수상했다.에이프릴 홀.강원훈과 고남준이 잔을 들고 건배했다.“강지찬이 임미연의 복수를 위해 정유진의 사무실을 부순 일을 K그룹 모두가 알고 있으니 거짓은 아닐 거야. 고 대표님, 어떻게 할 생각이야?”고남준이 말했다.“그 여자가 정말로 태안병원에서 쉬고 있어?”강원훈이 바로 대답했다.“맞아. 강지찬이 아들을 많이 중시하나 봐. 그렇게 화를 내고 말이야. 정유진보고 임미연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잖아..”고남준이 웃었다.“그럼 임미연 씨에게 협조 부탁해야겠네.”임미연은 지금 기분이 매우 나쁜 상태이다.몇 명의 고모들을 호텔로 데려다준 후 아랫배가 더부룩하고 온몸이 불편했다. 화장실에 갔을 때 하혈한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태안병원에 와서 바로 입원했다.이참에 강지찬 앞에서 불쌍한 척하려고 했는데 강지찬이 지금까지 안 온 줄 누가 알았겠는가.장혜수는 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날씨가 매우 좋았다.강지현은 친구를 불러 산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얘기가 끝나자 상대방은 바로 자리를 떴다.이곳은 바람도 없고 태양도 강했다. 이렇게 따뜻한 겨울 태양 아래 앉아 햇볕을 쬐고 차를 마시며 눈앞의 서울과 먼 산을 바라보니 강지현의 마음은 모처럼 평온해졌다.맞은편에 마음속에 그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참지 못하고 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디어 그녀를 위해 좋은 일을 했기에 말투는 아주 여유로웠다.“유진 씨, 일이 해결됐어요. 시간은 예약했어요. 모레 오후 3시예요.”강지현이 이 일을 정말 해내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정유진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지현 씨, 고마워요.”“고맙긴요. 나도 K그룹의 주주잖아요.”강지현은 더 이상 ‘유진 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강지현은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휴대폰 너머로 정유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럼 일 보세요. 나는 만날 사람이 있어서.”말이 끝나자마자 고남준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앞에 빈 찻잔을 들여다본 고남준은 웃는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둘째 도련님, 일이 잘 돼가나 봐요. 차도 다 마셨네요.”강지현은 깨끗한 컵을 집어 들더니 차를 한 잔 따르며 말했다.“차는 다 마시지 않아도 되니 고 대표님은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고남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둘째 도련님, 우리가 그래도 한 때는 협력한 사이였는데 이렇게 체면을 안 세워주다니요. 너무한 것 아닙니까?”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고 대표님 마음속에 나라는 파트너가 있긴 했네요. 정말 영광입니다.”다들 똑똑한 사람들이었기에 강지현은 이내 상대방이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다만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고남준은 예전에 분명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강원훈과 협력한 이후로 그들은 접촉하지 않았다.따져보면 이미 파탄 난 파트너이다. 고남준이 설마 강지현이 북쪽 교외의 땅을 파는 일을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