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원은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머리에 천둥과 벼락을 맞은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왜 이렇게 된 것일까?어렵게 임신한 아이를 강지현이 지우라고 한다.“왜, 왜요?”조예원은 목소리가 떨렸고 온몸도 떨렸다. 강지현이 이토록 매정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아이는 필요 없어요.”강지현이 말했다.조예원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싸늘해졌다. 기쁨은 사라졌고 가슴이 너무 시렸다.“지현 씨, 지현 씨의 아이예요. 겨우 몸조리해서 어렵게 임신한 아이를 어떻게 지워요?”“아이는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강지현의 말투는 기복 하나 없었다. 감정 없는 차가운 로봇 같았다.조예원이 울며 말했다.“아이가 필요 없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낳아준 아이가 필요 없는 거예요? 임신한 사람이 정유진이라면 그래도 지우라고 할 거예요?”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의 표시이다.조예원은 알 것 같았다.“내 말이 맞았네요. 지현 씨는 다른 여자가 낳는 아이를 원하지 않을 뿐이에요. 임신한 사람이 정유진이라면 배 속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든 그 여자가 낳으면 다 되는 거였어요. 다!”조예원은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강지현 씨, 나 좀 봐주시면 안 돼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요. 우정, 자존심, 사업,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나를 안 봐주는 것인데요?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데요?”강지현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조예원은 잘생긴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너무 멋있다. 눈이 깊고 콧날이 오뚝하다. 얇은 입술은 차갑고 매정했다.얼마가 지났는지 모른다. 저린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고 눈물도 말랐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계속 아무 말도 없다.그녀는 몸을 가누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텅 빈 것 같았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잠깐.”강지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조예원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지현 씨?”강지현은
조예원은 밤새 잠을 못 잤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눈뿐만 아니라 얼굴도 부었다.하지만 개의치 않다.정유진과 닮은 구석이 없다. 아무리 따라 해도 소용이 없다.어젯밤 그녀는 밤새도록 생각한 끝에 떠나기로 결정했다.떠나지 않으면 강지현이 배 속의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이 아이를... 지울 수 없었다.짐을 다 정리하고 나니 여기서 산 몇 달 동안 그녀의 물건이라고는 고작 옷가지뿐이었다.언제든지 오고 언제든지 가는 여행객처럼 이 집의 여주인은 처음부터 그녀가 아니었다.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강지현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그는 조예원이 떠나는 것이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손에 쥔 짐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지난밤, 강지현은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하지만 조예원은 강지현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강지현이 그녀에게 카드 한 장을 건넸다.“무슨 뜻이에요?”조예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강지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이 카드 가져가세요. 아이를 어떻게 처리하든 앞으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강지현은 그녀가 갈 것을 진작 예상한 듯했다. 그래서 일찍이 돈을 쥐여주며 보내기로 한 것이다.그도 그녀가 이 아이를 남길 것으로 추측했기 때문에 그녀와 관계를 끊으려고 했다.“강지현 씨, 사람이 왜 그렇게 독해요?”그녀가 카드를 받지 않자 강지현은 그 카드를 그녀의 가방에 직접 쑤셔 넣었다.“카드 안에 20억 원이 있어요. 그동안의 보상이라고 생각해요.”강지현의 눈빛에는 한 치의 미련도 없었다. 심지어 아무런 감정조차 읽을 수 없었다.조예원에게 그는 시종일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였다.남으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조예원은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심장은 계속 아팠다.그렇게 짐을 끌고 혼자 외롭게 상록수 별장을 떠났다.처음에 그녀가 혼자 짐을 질질 끌며 이곳에 찾아왔을 때처럼 말이다.마중을 오는 사람도 배웅하는 사람도 없었다.이명자는 꼬박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연우를 재운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강지찬은 침대 옆에 앉아 정유진이 자기 전에 읽던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정유진의 기척에 강지찬이 고개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눈빛이 반짝였다.정유진은 드라이 헤어캡에 흰색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길고 하얀 목은 사람을 유혹했다.강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빛은 이글거렸다.“가서 자.”정유진은 바로 반대편에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젖히고 누웠다.강지찬은 눈썹을 찡그렸다.이때 매트리스 절반이 아래로 내려갔다. 정유진은 온몸이 굳었다.“왜 올라와요?”아이가 깰까 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분명히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강지찬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귓가에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말했다.“같이 있어 주러 왔지.”그러더니 몸을 바짝 댕겨 정유진에게 바싹 달라붙었다.정유진은 멍해졌다. 방금까지 잠옷을 입고 있던 이 인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잠옷을 벗어버렸다.얇은 옷 너머로 정유진은 상대방 몸의 온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내려가요!”강지찬은 내려가기는커녕 그녀를 더 꼭 껴안았다.“내 와이프와 아이하고 같이 자는 것인데 안 돼?”생각이 짧았다.아이 앞에서 적어도 과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본질이 불량배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그뿐만 아니라 그 나쁜 손은 어느새 그녀의 잠옷 치마 안을 헤집고 들어갔다.정유진은 그의 손을 잡았다.“강지찬, 꺼져.”“잠깐만 안아보자.”뜨거운 호흡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정유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아이 앞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나 안 했어.”관계를 하지는 않지만 기회를 틈타 나쁜 짓을 하고 있다.점점 더 건방진 손놀림에 정유진은 화가 났다. 애가 깰까 봐 두려워하던 마음도 사라졌다. 바로 몸을 돌려 강지찬을 침대에서 걷어찼다.‘쿵’ 소리만 들렸다.연우는 얼떨결에 일어나 두 사람을
다음날 정유진은 제시간에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 턱수염이 눈앞에 있었다.그 아래로 낯익은 목젖이 보였다.고개를 드는 순간 깊고 또렷한 눈을 마주쳤다.깜짝 놀라 서둘러 아이를 찾았다.중간에서 자던 연우는 어느새 그녀가 있던 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대신 그녀가 중간에 누워있었다.“네가 스스로 내 품에 들어온 거야.”강지찬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믿을 정유진이 아니다.“파렴치한 놈!”얼른 강지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강지찬은 나른하게 침대 끝에 기대어 있었다. 어젯밤에 잘 잤는지 나른한 표정이었다.정유진은 그를 외면하고 욕실로 향했다. 다 씻은 뒤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헬스룸에 들어가 잠시 요가를 했다.요가를 마치고 돌아오니 강지찬과 연우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2층 작은 홀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분홍색 공주 치마를 입고 있는 연우는 머리에 다이아몬드 핀까지 꽂고 있어 아주 예뻤다.강씨 집안에서 강지찬은 그녀를 완전히 공주처럼 대했다.식사를 하던 중 강지찬이 말했다.“오늘 날씨도 좋은데 연우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자.”그러자 연우는 눈을 반짝이며 환호성을 질렀다.“야호, 놀이공원이다!”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어제 그녀는 특별히 지엘 별장에 가서 방을 정리하고 음식도 한가득 샀다. 지금은 돌아갈 핑계가 없다.밥을 먹은 뒤 세 식구는 서울에서 가장 큰 놀이공원에 갔다.정유진은 그제야 강지찬이 일찌감치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이공원에 도착하니 누군가가 그들을 안내했다. 굳이 땡볕에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연우는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계속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있었다.흰 셔츠를 입은 강지찬은 놀이공원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특히 하늘을 찌르는 듯한 외모의 세 식구, 그리고 주변에 경호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가는 곳마다 시선을 끌었다.강지찬은 원래 별로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특히 아내와 아이가 옆에 있으니 더욱 힘을
류선의 두 번째 재판이 열리기 전 강지현은 마침내 그녀를 만나러 갔다.자리에 앉자마자 류선은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양심도 없는 자식! 나는 어떻게 너같이 배은망덕한 놈을 낳았을까, 애초에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너를 낳으면서 내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갇히지도, 면회 오는 사람 한 명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너는 그 양심 없는 너의 아빠와 똑같아. 다 나쁜 인간들이야!”류선이 말을 멈춘 후에야 강지현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욕 다 했어? 나 이제 가도 돼?”류선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책상에 엎드려 울부짖었다.“세상에,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아들을 암만 잘 키워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한평생 뼈 빠지게 노력한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차라리 나를 죽여!”류선이 아무리 처절하게 울어도 강지현은 무표정이었다. 마치 맞은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친엄마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강지현이 계속 아무 반응이 없자 류선은 그제야 울음을 멈췄다.건너편 아들을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너는 너의 그 양심 없는 아버지보다 더 냉혈한 인간이야.”강지현은 반박하지 않았다.“할 말이 있으면 해.”류선은 하나뿐인 아들을 보며 또 슬퍼했다.“나 이렇게 됐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네가 보고 싶어서 그러지. 혹시 누가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말이야. 지현아, 나는 너의 엄마야. 너를 해칠 리가 있겠니?”이 한마디에서 유선의 슬픔이 어느 정도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강지현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류선이 아무리 흐느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류선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바람에 바깥일은 전혀 모른다.강지현의 회사가 이미 강지찬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또다시 강지찬을 욕하기 시작했다.“아들, 걱정하지 마. 성원이 없어도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우리 집 금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 그 안에 계약서 양도 협의서가 있어.”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너의 아버지가 술
“대표님, 어르신께서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모님과 함께요.”서류를 보고 있던 강지찬은 알았다고 대답했다.이때 장형준이 말했다.“둘째 도련님도 들어갔습니다. 조예원과 헤어진 것 같아요.”강지찬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장형준을 바라봤다.“언제?”“둘째 도련님은 금방 이사했습니다. 조예원과 언제 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강지찬은 코웃음을 쳤다.“자리는 잘 찾아가네.”강지찬은 지금 바쁘다. 회사도 바쁘고 아내의 마음을 얻기도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유치원에 연우를 데리러 갔다.녀석은 오늘 학교 공연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며 아빠를 보자마자 기뻐하며 자랑했다.강지찬은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았다. 부녀의 비주얼은 매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차에 올라타자 장형준이 말했다.“대표님, 방금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강지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확실해?”장형준이 말했다.“확실합니다. 아직 유치원 근처에 있을 거예요. 올 때는 없었어요.”강지찬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장형준이 계속 말을 이었다.“아가씨를 보호하도록 비밀리에 사람을 붙여 어린이집 전반을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아이 앞에서 강지찬은 말을 아꼈다.이때 연우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아빠, 또 나쁜 사람이 날 잡아가요?”강지찬은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무섭지 않아?”“안 무서워요. 엄마, 아빠가 나를 지켜줄 거니까.”연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유치원에서 아빠가 데리러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게요. 아빠가 최고예요!”녀석의 표정은 가끔 강지찬과 똑같다.강지찬은 마음이 너무 뿌듯했다.의기양양한 얼굴로 연우를 회의실까지 안고 왔다.회사 대표가 아이를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본 직원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임우연은 서둘러 작은 의자와 책상을 가져와 강지찬의 옆쪽에 놓았다.딸을 의자에 앉힌 뒤,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보며 말했다.“멍하
화요일 오후, 장형준은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하지만 강지찬은 방심하지 않았다. 수요일 오후, 그와 정유진은 연우를 데리러 갈 수 없다. 장형준더러 여러 명과 함께 가서 연우를 유치원에서 데려오라고 했다.시찰 프로젝트는 강지찬이 지난해 정유진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유진과 함께 진행했다.공사장에 도착한 후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다행히 봄비라 많이 쏟아지지는 않았다.강지찬은 정유진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눈앞의 공터를 가리켰다. 마치 그녀에게 자신이 이뤄낸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지금 눈에 보이는 산과 땅은 모두 내 것이야. 당신 회사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정유진은 강지찬을 보며 말했다.“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그녀에게 온갖 핍박을 한 것은 강지찬이다. 친어머니의 생명으로 그녀를 위협했지만 연우 인테리어가 더 큰 회사로 거듭날 수 있게 지원해 주고 있는 것도 강지찬이다.강지찬은 자신의 악행에 대해 핑계를 대지 않고 정유진의 눈만 쳐다봤다.“그럼 이번 약은 안 먹을 거야?”정유진은 이를 악물었다.“먹어요!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강지찬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나 강지찬 여자답네. 호불호가 확실하고. 역시 내 마누라야.”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파렴치해 보이지만 전혀 가식적이지 않다.이번에 시찰에 나선 사람은 적지 않다. K그룹의 프로젝트 관계자와 몇몇 임직원 외에 정부 인원들도 있었다.일행은 검은 우산을 들고 시찰을 하며 큰 기세를 내뿜었다.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는 별로 영향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질척이는 길 때문에 하이힐을 신은 정유진은 걷기 힘들었다.“차 안에 신발이 있으니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할게.”강지찬이 경호원에게 지시하려 할 때, 정유진이 그의 팔을 잡았다.“아니에요. 거의 끝나잖아요. 조금만 버티면 돼요.”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에 사소한 일로 이슈가 되고 싶지 않았다.“사람 부르지 말아요...”말을 마치
정유진은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꿈속에서 그녀는 관중석에 앉은 관중처럼 강지찬과의 삶을 다시 한번 돌이켰다.거듭된 오해와 갈등, 거듭된 실랑이와 소외...두 사람 모두 한 발 크게 앞으로 내디뎠지만 이런저런 사고로 다시 한 발짝 물러서기도 했다.정유진은 너무 힘들었다. 왜 하필 강지찬이라는 사람을 만났을까?만약 이 사람이 없었다면 현재 사업은 그저 그랬을지 모르지만 인생은 결코 지금처럼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을 것이다.갑자기 너무 피곤했다. 눈을 감고 잠을 푹 자고 싶었다.수술실 밖에서 강지찬은 온유한의 멱살을 잡고 분노한 사자처럼 외쳤다.“상황이 좋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술이 잘 됐다며. 그런데 좋지 않다고? 안 돼!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반드시 살려내야 할 거야!”강지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은 가능한 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칼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찌른 거야. 빗나갔으니 다행이지 조금만 더 왼쪽으로 찔렀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진정해.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할 테니. 지금은 그저 최악의 상황을 말하는 것뿐이야. 마음의 준비를 잘해. 잊지 마. 집안의 어르신들은 아직 몰라. 너의 장모님의 몸은 더 이상 자극을 받으면 안 돼.”화가 잔뜩 났던 강지찬은 마침내 조금씩 냉정해졌다.연우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내일 온미정이 휴가이기에 장형준더러 온미정의 집에 데려가라고 했다.정씨 집안 어르신 두 분에게 강지찬은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유진과 시찰을 하러 갔다가 이틀 후에 돌아온다고 했다.이 거짓말을 두 어르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정유진은 아직 중환자실에 누운 채 온몸에 튜브를 잔뜩 꽂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기력해 보였다.강지찬은 미칠 것만 같았다. 병실 밖을 지키며 유리창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정유진을 바라봤다.장형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대표님, 김주환이 다른 사람에게 지시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저 대표님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강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