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남준은 엄제후와 엮인 일련의 흑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어떤 것들은 심지어 많은 돈을 주고 겨우 삭제한 자료들이다.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 휴대폰을 깨뜨릴 뻔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 엄제후의 전화가 걸려왔다.상대방이 전화로 욕설을 퍼부었다. 엄제후도 이 내용을 받았다.“무슨 짓이야? 어떻게 강지찬을 건드릴 수 있어? 이 자료들이 터지면 나뿐만 아니라 너의 고씨 집안도 영향을 받게 된다는 거 몰라?”고남준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분명 빈틈없이 잘 처리했는데 말이다. 경찰에서 그 여자를 찾아도 못 자기가 배후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강지찬은 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창원과 엄제후 쪽에서도 손을 댔으니 지금은 정말 진퇴양난이다.“제후야, 성원이 곧 내 손에 들어올 거야. 그런데 지금 나더러 그만하라고?”“그럼 내가 망하는 걸 보겠다는 거야? 만약 또 사고가 나면 너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나를 안 볼 거야. 게다가 너와 고씨 집안까지 연루되었으니 나를 죽도로 미워하겠지.”고남준이 망설이자 엄제후가 타일렀다.“성원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천천히 해. 조급해하지 말고.”두 사람은 오래 통화했다. 결국 고남준은 엄제후를 무너뜨리는 것이 두려워 강지찬의 심기를 더는 건드리지 못했다.정유진은 밤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지 않고 양치를 한 뒤 침대에 털썩 누웠다.부경원을 나갈 수 없으니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커튼을 치지 않아 바깥이 맑은지 흐린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다.심지어 연우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은 환청까지 생겼다.자신이 미쳤다고 느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러나 그 ‘엄마'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발소리까지 났다.정유진 벌떡 일어났다. 환청이 아니다!정말 연우가 그녀를 부르고 있다.바로 그때, 누군가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이내 작은 그림자가 뛰어 들어왔다.“엄마, 엄마.”“애기야!”
방경숙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점심을 준비하게 했다.세 식구가 집에서 점심을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분이 좋은 강지찬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정유진은 웃지 않았지만 연우는 기분이 좋았다.녀석은 할머니가 입원한 줄도 몰랐다. 정유진은 차마 녀석에게 알릴 수 없었다. 녀석은 아직 엄마 아빠와 함께 밥을 먹는 기쁨에 잠겨있었다.방경숙은 기뻐서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밥을 먹고 정유진은 연우를 데리고 낮잠을 자러 갔다.이 일이 연우에게 트라우마를 남길까 봐 특히 걱정했다. 다행히 연우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고만 할 뿐 두려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이내 그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강지찬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밥을 먹고 외출했다.그는 며칠 동안 회사에 가지 않았다. 먼저 병원에 가서 정명학에게 연우를 데려왔다고 알렸다. 장모님을 본 후 K그룹으로 갔다.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그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성원의 강 대표님이 왔습니다.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강지찬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웃는 듯 말 듯 한 얼굴로 프런트 직원을 바라봤다.“죽겠어요. 우리 강 대표님은 왜 점점 더 멋있어 지고 있는 것일까요?”“그러게 말이에요. 며칠 안 보니까 더 멋있는 것 같아요.”위층에서 최의현과 강지현은 눈을 부릅뜬 채 마주 보고 있었다.최의현은 너무 답답했다.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너무 통쾌하다. 정말 통쾌하다. 크게 웃고 싶다.전에 성원을 차지하기 위해 역겨운 강지현의 얼굴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지금은 상대방이 먼저 와서 계약서를 체결한다.뜻밖에 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정말 물어보고 싶다. 혹시 고남준의 세컨드가 아니냐고...강지찬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고남준은 감히 빼앗을 배짱이 없다.강지찬이 들어오자 최의현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으며 강지찬에게 말했다.“강 대표가 계약서 쓰러 왔는데 한참 기다렸어.”강지찬은 외투를 벗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내와 애랑 같이 밥을 먹느라 늦었어. 잠까지 재우고 나오
강지현이 발걸음을 떼자 최의현은 폭소를 터뜨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 했다.“강지현이 들어오는 표정을 네가 못 봐서 그래. 영상 찍지 못한 게 정말 아쉽네.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고남준 그쪽은 해결됐어?”“해결됐어.”강지찬은 무표정한 얼굴이다.“시간 내서 술 한잔하기로 했으니까 그때 같이 가.”최의현은 멈칫했다.“무슨 뜻이야? 그 인간, 계속 서울에 있겠대?”강지찬은 ‘응’이라고 대답했다.최의현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강지찬은 고남준의 생각을 추측할 기분이 아니다.“나중에 다시 생각해. 성원 쪽은 이제 너에게 맡길게. 서둘러 하루빨리 재상장할 수 있도록.”최의현이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내일 당장 성원으로 짐 옮길게. 강지현 사무실은 인테리어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어. 새것들이라 바로 쓸 수 있겠더라고. 다만 성원의 오래된 직원들이 많이 나갔어. 그 사람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이런 작은 일들을 강지찬은 신경 쓰기 귀찮았다. 회사의 급한 용무를 처리한 후 다시 연우 인테리어에 갔다.연우 인테리어는 요즘 강예중이 보고 있다. 정유진이 요즘 일이 생겨서 회사에 못 나간다고 강지찬이 강예중에게 전했다.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했다. 바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주겠다면서 말이다.연우 인테리어 직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정유진의 집에서 사고가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강지찬과 정유진이 부부인 이상 굳이 옆에 있는 사람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게다가 연우 인테리어는 K그룹의 든든한 백이 있다. 굳이 걱정할 필요 없었다. 연우 인테리어에서 나온 강지찬은 추호에게 길을 막혔다.“강 대표님, 누나가 전화를 계속 안 받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며칠 동안 추호는 병원을 몇 번이나 돌아다녔지만 정유진을 만나지 못했다.사람이 안 보이고 전화도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무슨 일인데요?”강지찬은 이 자식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추호는 건들건들하며 말했다.
강지찬은 저녁 6시가 넘은 후에야 부경원으로 돌아왔다. 마침 정유진과 연우와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집에서 반나절이나 쉰 탓에 연우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학교의 친구들과 선생님이 그립다고 했다.유치원 쪽은 이미 정비가 끝나 마침 월요일에 다시 개원했다.다음날 강지찬은 연우를 직접 학교에 데려다줬다. 그러면서 유치원 한 바퀴를 돌아봤다. 정원에 카메라와 경비원이 대거 늘었고 담벼락도 반 미터 높아졌다. 후문까지 경비원 두 명을 배치했다.그리고 각 반에 생활 선생님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원장은 강지찬을 직접 데리고 유치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식은땀을 닦으며 힘든 얼굴로 강지찬을 대문 밖까지 바래다줬다.차에 탄 후 장형준이 보고했다.“대표님, 사모님이 집에서 화를 내세요.”“방씨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부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부수라고. 대신 사람은 절대 다치면 안 된다고.”점심에 강지찬은 외출했다. 정유진은 오전에 물건을 이것저것 부순 탓에 온몸이 녹초가 됐다. 2층에 있는 물건들이 많이 부서졌다. 하지만 쓰레기는 이내 치워졌다.“강지찬, 나 엄마, 아빠 보러 병원에 가야 한다고! 회사도 가야 하고! 나는 당신이 기르는 애완견이 아니야.”정유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강지찬을 목 졸라 죽일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강지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애완견이 아니지. 그렇게 비싸지 않은데. 당신에게 자유를 주고 존중해 주고 싶지만 당신은 그걸 누릴 자격이 없어!”정유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알아, 내가 이렇게 호화로운 별장에 살 자격이 없는 거. 그러니까 K 그룹 대표이사님, 이만 저를 놓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안 돼.”정유진은 심호흡한 후 말했다.“경찰 쪽은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고남준은 잡혔어요?”순간 강지찬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정유진은 피식 웃었다.“참, 내가 어떻게 잊겠어요. 서울에선 강 대표님이 대통령이신데. 성원을 손에 넣으셨죠? 그럼 고남준은 무사하겠네요. 이
2층 작은 거실에서 정유진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화가 너무 났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아래층에는 이미 점심이 차려졌다. 다른 하인들이 2층에 함부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지만 방경숙은 언제라도 올라와서 내려가서 밥 먹으라고 할 것이다.“강지찬, 짐승 같으니라고!”“칭찬 감사해.”강지찬은 씨익 웃었다.“나 짐승 맞아. 당신 몸속에서 죽지 못하는 게 한스럽네.”정유진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졌다.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몸은 성실했다.계단 쪽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정유진은 긴장한 나머지 미친 듯이 사람을 밀쳐댔다.“그만, 그만, 뻔뻔한 자식, 그만해!”그녀에게 휘둘린 강지찬은 숨을 들이쉬더니 웃으며 말했다.“빌어봐? 그럼 용서해 줄게.”“당신 진짜...”정유진은 잘생긴 이 얼굴에 따귀를 날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방경숙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정유진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지찬의 파렴치한 모습에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정도이다. 너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이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제발, 제발, 용서해 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유진의 몸이 순간 가벼워졌다.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강지찬에게 안겨 방경숙이 오기 전에 침실로 들어갔다.정유진은 몸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반항할 힘도 없었다.결국 방경숙은 점심을 내려가 먹으라고 와서 노크하지 않았다.강지찬이 언제 외출했는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자 방경숙이 직접 들어와 일어난 정유진의 시중을 들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정유진은 이제 부끄럽지도 않다. 이런 꼴을 한두 번 보였냐 말이다.“사모님, 안 배고프세요?”당연히 배가 고프다. 점심도 먹지 않고 운동을 열심히 한 정유진은 허리와 무릎이 시큰거리고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방경숙은 실크 가운을 입혀주며 웃었다.“주방에 국물을 데워놓았어요. 어젯밤에 끓인 거예요. 대표님이 사모님 몸보신하여야 한다고 특별히 지시하신 겁니다.
정유진은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안 갈아입으면 도저히 안 된다. 목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키스 마크가 잔뜩 있었다. 반폴라 레깅스를 찾아 입음으로써 겨우 강지찬의 흔적을 가릴 수 있었다.추호는 그녀를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었다.“누나, 전남편이 미녀를 아예 숨겨놓을 작정인 거예요?”정유진은 대답 대신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 담을 넘다니, 경찰에 신고해서 잡혀가면 어쩌려고요.”추호는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누나가 갇혔는지 보려고 왔어요. 실은 자현거 근처에서 이틀 동안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누나 전남편이 한 번도 그쪽에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여기로 찾아왔어요.”이 녀석이 입에서 말하는‘누나 전남편’의 단어에 정유진이 골치가 아팠다.“회사는 어때요?”“좋아요. 다행히 누나 전남편이 사람을 보내서.”추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전 가망이 없을 것 같아요. 누나 전남편 같은 남자는 함부로 못 건드리겠어요.”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자극했다.“고남준과도 싸우면서 강지찬을 못 건드리겠다고?”고남준의 말이 나오자 추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건 달라요. 내가 고남준의 비밀을 잡고 있거든요. 그래서 고남준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도 무섭지 않고. 하지만 누나 전남편은 달라요. 고남준의 미움을 샀으니 쉽게 뿌리칠 수 없을 거예요. 고남준 그 자식, 아주 음흉하거든요.”정유진은 피식 웃었다.“그 사람들 이제 곧 협력할 거예요. 미움을 사다니요.”그녀의 마음속에서 강지찬과 고남준은 한 패이다.“아니에요. 누나가 틀렸어요. 고남준 그 인간 뒤끝이 얼마나 심한데요. 누나 전남편한테 꼬투리가 너무 많이 잡혀서 미워 죽을 지경일 거예요. 특히 서울에 사업을 하러 왔다가 강지찬의 손에 잘못 넘어갔는데 이 화를 쉽게 삼킬 수 있을까요?”당시 강지찬이 성원에게 집착하지 않았다면 고남준이 성원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우는 놓아줬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찬도 절대 쉽게 물러날
고남준은 녹음 펜을 강지찬 앞에 놓더니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잘 들으세요.”녹음 펜에서 강지현의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아이를 유치원에서 빼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 유치원은 서울에서 제일 좋은 유치원이에요. 보안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요.”이어 고남준이 말했다.“이건 다 작은 일이에요.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이 나를 의심하지 못할 거예요. 그때 그쪽이 성원을 나에게 주고 내가 아이를 당신에게 주면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구세주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녹음은 계속 있었지만 이 두 마디로 충분했다. 고남준은 녹음기를 회수했다.강지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정유진이 자신을 짐승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짐승은 따로 있었다.정말이지 강지찬은 고남준과 강지현이 한 편일 줄 몰랐다. 연우의 실종에 대해서 한 번도 강지현을 의심하지 않았다.자신이 가장 믿었던 사람이 배신한 사람이라는 걸 정유진이 알게 된다면 그 여자 성격상 못 견딜 것이다. 그 멍청한 여자는 본인이 이 모든 것을 일으킨 근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게다가 연우의 실종으로 이명자의 지병이 재발해 지금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이다.부모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그녀가 이 충격을 견딜 수 있겠냐 말이다.“강 대표, 이 녹취록이 필요한 거 맞죠?”고남준은 득의만만한 표정이다.이 녀석은 정말 나쁜 놈이다. 곧바로 강지현의 뒤통수를 치니 말이다.강지찬이 입꼬리를 올렸다.“어떤 조건이에요? 말씀하세요.”고남준이 말했다.“간단해요. 녹음 파일을 드릴 테니 손에 있는 걸 저한테 주세요. 물론 백업도 남겨두면 안 되겠죠.”“문제없어요.”강지찬은 원래부터 고남준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적으로 만들면 평생 방어하면서 살아야 한다.연우를 한 번 납치한 사람이 두 번 못하겠는가?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강지찬의 약점이다. 함부로 이 사람들을 걸고 도박할 수 없다.강지찬은 장형준을 불러 고남준의 면전에서 휴대전화에 저장된 모든 자료를
아침 식사를 마친 강지찬은 방경숙과 장형준에게 연우를 학교에 데려다주라고 했다.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정유진은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시선을 돌렸다.“멍하니 있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강지찬은 옷장을 열더니 안에서 얌전한 치마를 골라 침대에 내려놓았다.“이거 입어.”이 사람은 계속 그녀를 가두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왜 갑자기 외출을 허락한 것이지?“어디 가는데요?”“구청.”강지찬의 말에 정유진은 ‘하...’하고 탄식을 내뱉었다.“강 대표님, 잠이 덜 깼어요?”강지찬이 커프스단추를 꺼내 건네자 정유진은 저도 모르게 받았다.커프스 채우는 것을 도와주고 있을 때 강지찬이 말했다.“맞는 심장은 찾았대. 먼저 재혼 증명서를 받고 병원에 가자.”“뭐라고요?”‘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커프스가 바닥에 떨어졌다.정유진은 강지찬의 팔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뭐라고요? 맞는 심장이 나타났다고요? 진짜예요? 엄마가 살 수 있는 거예요?”강지찬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장모님과 심장이 맞대. 온유한 팀이 밤새 협의했어. 일이 잘 진행되면 오전에 돌아와 오후에 이식하실 수 있을 거야.”정유진은 눈물이 났다. 이명자의 목숨이 눈앞의 남자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강지찬을 바라봤다.“제발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지찬 씨, 꼭 살려주세요.”“우리 어머니야. 꼭 살릴 거야. 지금은 괜찮으니까 일단 먼저 재혼하러 가자.”강지찬이 또 말했다.정유진은 한참 후에야 반응했다.“재혼이요? 강지찬 씨, 그게 무슨 뜻이에요?”강지찬은 커프스단추를 주운 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재결합.”정유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지, 지금 우리 엄마로 나를 협박하는 거예요?”강지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재혼해야 나의 장모님이잖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구해야 하는데?”정유진은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모든 기쁨은 사라지고 분노만 가득 찼다.“파렴치한 놈!”그녀에게 이렇게 혼난 것이 강지찬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