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이 병원으로 도착할 때쯤, 병원에는 이미 강소원과 조예원이 있었다.강지현은 병원 침대에 기대있었고 조예원과 강소원은 각각 침대의 양측에 서있었다.조예원은 아마도 금방 도착했을 것이다. 옆에 있는 식탁에 도시락통이 쌓여있었다.입구에 서있던 정유진은 이명자가 손수 만들어준 국을 들고 다소 머쓱했다.“유진 씨 왔어요?”강지현이 웃으면서 인사했다.강소원도 이내 얼린 일어서서 정유진에게 인사를 했다.“언니, 오셨어요.”‘언니’라는 말에 정유진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와 강지찬은 부부 사이이고 강지현은 그녀를 형수님이라고 불러 마땅했다.그러나 구소원은 지금 아직 명분이 없었다. 진짜 여자친구도 아니었기에 올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강 부인이라 부르자니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 같아 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언니라는 호칭이 좀 친한 느낌이 들었다.“이건 저희 엄마가 끓여준 국이에요. 식사하셨어요?”정유진은 강지현을 보지 않고 구소원을 향해 물었다.구소원은 정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보온병을 얼른 받아서 들며 웃었다.“저희는 아직 안 먹었는데 밥 시켰어요.”그녀의 말을 듣자 하니 강지현에게 조예원이 가져온 점심 식사를 먹게 할 생각이 없었다.“지현 씨, 먼저 국부터 드실래요?”구소원이 강지현에게 물었다.강지현은 머리를 끄덕였다.정유진은 다소 어색한 듯이 서있었는데 집으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상태는 좀 어때요? 상처는 아직 아파요?” 강지현의 안색은 아직 조금 창백했지만 정신상태는 좋아 보였다.“전 괜찮아요. 겉만 조금 다친 것뿐이라 금방 나을 거예요. 앉아요.”구소원도 강지현에게 국을 떠주며 정유진에게 앉으라 손짓했다.정유진은 곁눈질하며 조예원을 쓱 보고는 말했다.“아니에요. 회사에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 가봐야 해요. 몸조리 잘하세요.”강지현의 표정이 옅어졌다.그는 오전 10시쯤에 깼는데 일어나자마자 구소원만 보았고 정유진은 없었다.그런데 지금 병실의 분위기는 확실히 좀 어색해서 정유진을 보낼 수밖에 없
“대표님, 고 부인이 간 곳은 개인병원이고 확실이 내원 기록과 퇴원 기록이 있습니다.”장형준은 사진 더미를 건네며 말했다.“고 부인은 요즘 집을 나서면 보통 산모와 아기용품점과 요가 스튜디오에 갔으며 스케줄은 전부다 정상적인 것입니다.”강지찬은 그 사진을 받지 않았고 장형준은 손을 거두었다.“그 남자를 찾을 수 없다면 친자 확인 검사로 가.”강지찬이 말했다.장형준은 망설였다.“대표님, 혹시 그 아이가 정말 어르신의...”강지찬은 냉정하게 코웃음을 쳤다.“그럼 어때? 만약 아니라면 내가 손 쓸 필요도 없이 깨끗하게 끝나는 거지.”장형준은 이해했다. 만약 고세연 배 속의 아이가 강홍식의 아이가 아니라면 무사히 태어날 수나 있겠는가?어차피 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 강지찬과도 상관이 없었다.만약 맞다면...“고 부인이 요즘 치밀하게 행동하고 있으니, 전태연 씨와 한통속인지 확인하려면 아무래도 전태연 씨 쪽부터 착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강지찬은 덤덤히 말했다.“증거는 필요 없어. 확실히 그 여자야. 최대한 빨리 친자 확인서를 받아와.”“네.”말이 끝나기 바쁘게 집사가 다급하게 찾아와 어르신과 고세연이 다투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 강홍식은 태안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세연은 허리를 부추기며 울먹거렸다.“지찬아, 네 아빠가 날 오해해. 자기가 날 믿지 않아서 화가 나서 쓰러진 거야. 난 정말 미안할 짓 한 적 없어. 내가 예전에 너한테만... 네 아빠와 결혼하고 나서는 그런 마음은 싹 다 버렸는데 지금 내가 외도를 한다고 의심을 하잖니... 나도 억울해...”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강홍식이 고혈압이 도졌다고 했다. 강지찬은 고세연의 헛소리를 듣기 귀찮아 침울한 얼굴로 병실을 나갔다.강홍식은 아직 깨지 않았다. 듣기로는 강지현도 태안으로 병원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형으로서 병문안을 갈 생각이었다.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강지찬은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마침 다들 병원에 있으니 친자 확인 진행해.”장형
강지찬은 꼬맹이의 말에 격분했다.온 용산을 뒤져봐도 그의 앞에서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은 정유진 말고는 이 아이가 처음이었다.“비켜, 아니면 널 내쫓아버릴 거야.”강지찬은 눈썹을 치켜뜨며 자신이 지금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꼬맹이도 전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당신은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신사답지 못한 남자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분명 아이를 잘 가르치지 못할 거예요!”강지찬은 화가 나다 못해 그 상황이 웃겼다.“꼬맹이, 네 부모도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겠지?”그는 말을 하며 꼬맹이의 옷깃 뒤쪽을 잡고 옆으로 들어서 놓은 다음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아이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남자를 보며 커다랗게 뜬 눈에는 인성에 대한 의혹이 가득 찼다.화가 나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연우야!’라고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뒤돌아보니 정유진이 놀라서 뛰어오더니 아이를 덥석 안고는 얼굴이 하얗게 겁에 질려있었다.“아가야, 엄마 놀라서 죽는 줄 알았어. 이후에는 혼자 몰래 도망가고 그러면 안 돼. 엄마 옆에 꼭 붙어있어야 해. 알겠어?”단지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전화 통화가 끝나니 연우가 없어져서 정유진은 겁에 질려 다리가 후들거렸다.“엄마, 걱정하지 마요. 남자친구 사진이 떨어져서 주으러 왔었어요.”말을 마친 후 연우는 사진을 배에 문지르며 입을 삐죽거리면서 엄마한테 일러바쳤다.“아까 어떤 아저씨가 엄청 버릇없었어요. 남의 물건을 밟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고 엄청 사나웠어요.”정유진은 다른 사람이 사나운지 아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기 딸만 무사하면 되었다.몇 가지 주의 깊게 설명한 후, 그녀는 연우를 데리고 온미정을 보러 갔다.온미정은 방금 수술을 마치고 쉬면서 모녀 둘을 데리고 병원 옥상의 카페로 향했다.“크면 클수록 이뻐지네. 모태 미녀야.”온미정은 부럽기에 그지없었다.정유진은 연우에게 과일샐
강지찬은 강지현의 병실에서 나와 온미정 쪽으로 갔다.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강지찬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문 뒤의 테이블 뒤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꼬맹이를 보았다.강지찬이 문을 열고 나와 문패를 다시 보았다. 온미정의 사무실이 맞았다.이 꼬맹이가 왜 여기 있는 거지?온미정이 온씨 가문 몰래 사생아를 낳았나?강지찬은 차갑게 연우를 바라보았고 연우도 그를 바라보았다.“사과하러 온 거예요?”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강지찬은 아이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물었다.“온미정과 무슨 사이야?”알고 보니 그 남자는 자신에게 사과하러 온 것이 아니어서 연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어떻게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를 안 할 수가 있지?이 아저씨는 너무 무례했다. 연우는 무례한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그래서 꼬마는 머리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강지찬과 말을 하지 않았다.강지찬은 32년을 살면서 정유진에게 무시를 몇 번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무시를 당했다.특히 이번에는 어린아이에게.그러나 강 대표님이 어린 아이와 따질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았다. 온미정이 아이를 혼자 사무실에 뒀다는 것은 조금 있다가 바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겠지.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는 꽤 착했다. 전혀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착하게 앉아 있었다.그러나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무례한 아저씨와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몇 번 슬쩍 쳐다보게 되었다.이 아저씨는 싹수가 없었지만 정말 잘 생겼었다. 강 아저씨보다도 잘 생겼다.처음에는 강지찬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꼬맹이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연우가 훔쳐보는 동작이 너무나도 선명해 그도 연우가 흘끔 쳐다볼 때 시선을 주었다.꼬맹이는 훔쳐보다가 들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강지찬은 그 애를 보며 갑자기 왠지 모르게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런데 어디가 낯익은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그가
강지찬이 온미정을 찾아온 것은 말싸움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세연의 검사도 태안 병원에서 했기 때문에 그는 고세연의 친자확인 건에 대해 온미정에게 말을 꺼냈다.온미정은 초조하게 연우의 귀를 막았다.“네 집안의 일은 나한테 말하지 마. 고세연은 내 병원의 환자고 내 의무와 책임은 임산부와 배 속의 태아를 잘 보살피는 일이야. 네 집안의 사정은 나와 상관없어.”온미정의 태도에 대해 강지찬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는 온미정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단지 미리 귀띔해 주는 것뿐이었다.그는 온미정이 꼬맹이의 귀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비아냥댔다.“꼬맹이가 설마 알아들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온미정은 정유진이 갑자기 돌아올까 봐 얼른 강지찬을 보낼 생각이었다.“다른 일 있어? 없으면 빨리 꺼져. 표정 썩어서 우리 애 놀랄라.”강지찬은 입을 삐죽거리며 사무실을 떠났다.가기 전에 이상하게 뒤를 돌아 연우를 보고는 비웃는듯한 말투로 말했다.“네 남자친구 못 생겼어, 다른 애로 바꿔.”연우는 눈을 크게 뜨고는 가만히 있었다.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강지찬은 만족하며 떠났다.연우는 책가방에서 사진을 꺼내며 화가 나서 온미정에게 물었다.“이모할머니, 제 남자친구 멋있지 않아요?”온미정은 강지찬이 너무 어이없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매정하게 말하는 쓰레기는 처음이었다.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연우는 거의 울 것만 같았다. 온미정은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정유진이 돌아올 때 다급히 위로를 하고 있었다.“왜요? 무슨 일이에요?”온미정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양 강지찬의 욕을 한바탕하고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정말 못돼먹었다니까. 어린 아이랑 말다툼을 하다니. 그 놈, 혹시 연우가 누군지 알면...”“엣헴.”정유진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딸을 품에 껴안고 달랬다.“안 못생겼어. 우리 딸 눈 높아. 우리 딸이 좋아하는 남자는 세계에서 최고로 잘 생긴 남자야.”한참을 달래서야 연우가 웃음
정유진은 다른 지인을 만날까 봐 온미정의 사무실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고 서둘러 연우와 함께 떠났다.그녀는 연우를 데리고 외출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강지찬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다음날 회사에서 강지찬을 만났을 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조금 떳떳하지 못했다.회사는 명성을 다시 되찾았고 프로젝트 입찰을 준비하며 거의 매일 회의를 열어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이날 프로젝트 팀은 회의로 인해 퇴근이 두 시간 지연되었고, 회의가 끝나고 임우연에게 말을 전하러 왔다. 강 대표가 회사의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정유진은 집에 있는 부모님과 아이를 생각하여 가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임우연은 강지찬도 가니 그녀도 안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 직원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부부였다.“사모님, 강 대표님이 아직 처리할 업무가 남았다며 좀 기다려달라고 하십니다.”다른 동료들이 쳐다보는 것을 보고 정유진은 이렇게 말했다.“그럼 올라가서 기다릴게요.”마침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강지찬도 요즘 매우 바빠서 정유진을 만날 시간조차 낼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강지찬은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금방 끝나, 먼저 앉아.”임우연은 정유진에게 물을 부어주려고 했지만 정유진은 사양했다.사무실에는 둘 밖에 남지 않았고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다.사고가 터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강지찬이 강지현의 일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정유진은 놀라는 동시에 자신이 너무 하찮다고 느껴졌다. 설마 이 사람이랑 싸우는 게 익숙해져서 다투지 않는 게 어색한 건가?강지찬이 서류에 사인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정유진은 그의 업무가 거의 끝났다고 추측하고 말을 꺼냈다.“전태연의 일을 당신한테 맡긴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됐어요?”강지찬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요즘 너무 바빠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어.”강지찬이 사인을 다 하고 서류를 닫은 후 고개를 들었다.“이 일은 급하지 않아.”정유진은 할 말이
정유진은 강지찬의 유혹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게 큰 유혹에 혹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그런데 그렇게 한다면 그녀와 강지찬의 사이는 더욱 깊게 얽매이고 말 것이다.집에 돌아가자 연우는 이미 자고 이명자와 정명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저번에 사고가 일어난 후, 정유진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노부부는 잠에 들지 못하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말했잖아요. 강지찬 씨와 일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먼저 자라고요."정유진도 어쩔 수 없었다.이명자가 그녀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나랑 네 아빠가 잠이 안 와서 그래."이명자는 그녀의 안색을 보았다."무슨 일 있어? 근심이 많아 보이네."예전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조예원과 논의하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민을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부모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정명학은 조금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하고 싶으면 해. 네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냥 해."침실로 돌아간 후, 이명자도 따라 들어왔다.이명자의 표정만 보아도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갔다.연우가 새근새근 자는 귀여운 모습을 보며 이명자는 마음이 아팠다."아이 생각해서, 조금 더 고민해 봐."샤워를 끝내고 침대로 돌아간 정유진은 딸을 품에 안았다.보물 같은 딸의 몸에서 나는 분유 냄새에 매일 밤 깊은 잠이 들 수 있었다.연우가 유치원에 가는 첫날, 온미정이 정유진과 함께 갔다. 유치원 입원 수속도 온미정이 도움을 주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연우는 외국에서 유치원을 이미 1년이나 다녔다. 이제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었지만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친구 몇 명을 사귀고 웃으며 엄마와 손을 흔들었다.온미정은 주위의 학부모들을 보더니 정유진에게 말했다."빨리 가자. 여기서 유치원 다니는 집안은 다 용산에서 꽤 이름있는 사람들이야. 널 알아볼 수도 있어."정유진은 선글라스를 끼고 옷도 센스 있게 입어 많은 학부모가 그녀가 연예인인 줄 알고 있었다.연우가 유치원에 입학한 것을 축하하기 위
강지현은 사실 요즘 잘 지내지 못했다.마유구의 죽음도 K그룹 쪽에서 입을 떼지 않는 바람에 경찰에서 아직 수사하고 있었다.가장 큰 스트레스는 집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번에 상처를 입은 후 구소원이 계속 곁에서 강지현을 보살피고 있었다. 둘째 사모님 류선은 이런 며느리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들어 마치 과시라도 하는 듯이 구소원을 데리고 파티에 참석하고 강지현과의 결혼을 재촉하기도 했다.류선을 피하고자 강지현은 요즘 강 씨 본가에 돌아가지도 않고 계속 상록수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그는 아직 다리가 다 낫지 않아 어제 한번 나갔다 온 뒤로 계속 상처가 욱신거리면서 아파졌다. 그래서 다음날은 아예 집에서 쉬기로 했다.강지현은 9시 무렵까지 자고 일어났다. 아래층에서 이따금 말소리가 들려왔다.이 집은 방음이 잘 되어있어 침실 문을 닫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강지현은 류선이 온 줄 알고 급하지 않았다.그가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류선뿐만 아니라 구소원도 와있었다.구소원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긴 웨이브 장발에 메이크업도 정교하게 하고 정말 예뻐 보였다.가정 조건이든 구소원 본인의 조건이든 그녀는 확실히 명문가 부인의 눈에 참한 며느리의 표준에 딱 적합한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녀가 나타나자 강지현은 얼굴이 침울해졌다.강지현은 늘 신사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구소원을 보고도 뭐라 하지 않았다.류선은 정말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아들, 깼어? 소원이가 네 상처가 걱정된대서 같이 왔어. 빨리 와, 이건 소원이네 엄마가 며칠씩이나 공들여서 너 준다고 끓인 몸보신 국이야.”구소원은 눈치가 빨라 강지현의 기분을 바로 파악하고 조금 안절부절못하였다.그런데 이미 온 이상 용기를 가지고 인사를 건넸다.“지현 씨, 상처는 좀 회복됐어요?”“네, 덕분에요.”그는 앉지도 않고 류선이 뜬 국도 먹지 않은 채 구소원에게 말을 건넸다.“저희 마당에서 산책 좀 해요. 할 말이 있어요.”구소원은 그가 듣기 싫은 말을 할 줄 알고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