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연의 번호는 지난번 강씨 가문의 본가에 갔을 때 저장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때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당시 먼저 연락처를 교환한 것은 고세연이었다. 전태연은 이 여자와 교집점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고세연 맞은편에 앉았는데, 얼굴에는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전 양, 아직도 저를 기억하시나요?” 고세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전태연의 태도는 다소 냉담했다. “무슨 일인데요. 말씀하세요.”전태연의 멸시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고세연은 은근히 그것을 싫어했다.고세연이 서울의 연예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전태연 이 꼬맹이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그녀는 강홍식과 강제로 결혼한 후에야 이름을 날렸다. 근데 지금 전태연이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있을 줄이야.고세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얘기했다.“전 양, 방금 규진 도련님의 생일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이시죠. 저희 지찬이 봤어요?”전태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저희 지찬이요? 당신이 뭔데요?”고세연은 화를 내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저든 강씨 가문과 결혼했으니 적어도 영감이 살아있는 한, 저를 건드릴 사람은 없습니다. 전 양, 당신은요?”전태연의 안색이 확 변했다.“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저는 당신의 헛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어요.”고세연이 말했다.“전 양이 저희 지찬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저 역시 전 양이 지찬이와 완벽한 짝이라고 생각됩니다.”전태연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돕고 싶다는 말이에요?”고세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도 알잖아요. 영감도 이젠 나이가 들어서 저도 반드시 동맹을 찾아야 강씨 집안에서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정유진과는 약간의 트러블이 있어요.”전태연의 가슴이 설레었다.한규진의 생일 파티는 아주 늦게까지 이어졌지만, 정유진은 오래 있지 않았다.강지찬은 그녀를 지엘 별장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서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회사의 기자간담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정유진도 아름다운 배경으로서 완벽한 역할을 했다.간담회가 끝난 후 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정유진은 그가 간담회에서 한 말을 생각하며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 모든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이미 말고 있는 거죠?”강지찬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매우 깊었고, 아무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를 암시하는지 이해했다.과거에 강지현을 언급하면 항상 강지찬이 짜증을 내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곤 해서 정유진은 그가 또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그런데 이번에 강지찬은 화를 내지 않고 매우 평온했다.“아직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강지찬이 말했다.강지찬이 이렇게 큰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는 것이다.그의 신중한 행동 스타일로 미루어 볼 때, 강지찬은 이 문제가 끝까지 조사되더라도 강지현에 대한 조사까지는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과거에 그는 강지현을 과소평가했다.그가 강지찬의 눈 밑에서 성원이라는 큰 회사를 키워냈다는 것만 봐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기자 간담회 후, 인터넷에서 강씨 가문의 회사에 대한 악의적인 댓글이 많이 줄었고 대부분의 네티즌도 강씨 가문이 다른 사람의 모함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후에 회사가 일련의 홍보 수단을 쓰고 부동산 매출은 현저히 좋아지는 추세를 보였다.정유진은 이 일을 통해 강씨 가문의 회사가 견뎌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난번에 한규진의 생일파티에서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를 추가했지만 다들 별 소식이 없었다.지난 이틀 동안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간 날 때 차라도 한잔하자면서 약속을 잡고 파티에 요청하기 시작했다.이것은 회사의 위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이 시간 동안 정유진은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한 여러 학술 교류에 참여하는 등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또 국내에서 열린 주택 디자인 공모전에 초대되어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소미는 매우 놀라워
아직 9시도 안 되었고 저녁 식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유진은 강지찬을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다.3일 정도 출장을 갔다 오니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강지찬에게 정말 물을 한 병 건네주었다.최근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평화로웠고, 정유진도 그와 딱딱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만약 계속 이렇게 서로 소통을 잘 한다면 언젠가는 이 사람도 생각을 마치고 그녀와 이혼을 하지 않을까?"몇 가지 요리 주문할게요. 뭐 먹을래요?"강지찬의 시선이 그녀의 목을 훑어보았다.상처는 흉터 없이 완전히 아물었다."장종현이 이미 시켰어. 바로 배송될 거야."알고 보니 그는 물을 마시러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 저녁 식사가 도착했다.강지찬은 평소처럼 테이블의 메인 자리를 차지하고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했다."다음 주에 프로젝트가 다시 시작되니까, 업무에 복귀하도록.""이미 다 처리한 건가요?"강지찬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이 두 프로젝트는 내가 이길 건이 뻔해.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이 아직 수사하고 있어."이는 이전의 온라인 여론에 휩싸였던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강지찬은 식사를 마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청예로의 가로등은 말썽꾸러기 아이들에 의해 또 부서져서 등불 2개만 끈질기게 반짝거리고 있었다.여기 주변은 오래된 동네인데 어제 비가 와서 움푹 팬 도로에 물이 많이 고여 있었다.한빈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차에서 내려 물웅덩이에 발을 디뎌 비싼 가죽 신발이 젖었다.“젠장, 이런 쓰레기 같은 곳이 있다니!”저주를 퍼부으며 그는 다시 차 문을 닫았다.볼캡을 쓴 남자가 골목에서 뛰어나왔다. 그 남자는 키가 크지 않았고, 구부정한 자세로 한빈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로 서 있었다.“너 미친 거 아니야! 용산으로 오다니!”한빈은 얼굴에 혐오감이 가득 찬 채 분노에 찬 저주를 퍼부었다.볼캡을 쓴 사람은 원숭이처럼 생겨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사실 저는 용산 사람이고 바로 이 뒤에 살아요. 한
한빈은 바로 상록수 별장으로 갔다.강지현이 집에서 리모컨으로 문을 열어주고 한빈은 차를 밖에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갔다.별장 전체에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고 거실 불만 밝혀져 있었다.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강지현은 여전히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단정했다. “강 대표님, 저 방금 마유구씨를 만나러 갔습니다.”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빈은 감히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유규?”한빈은 마유구의 음란한 얼굴만 떠올리면 토할 것 같았다.“전에 연락했던 물타기 조직 두목인데, 그 애가 뒤에서 몰래 뒷조사를 하고 있었고 찾아왔습니다.”강지현은 마유구가 누군지 알아낼 기분이 아니었고, 그저 담담하게 앉으라고 했다.그제야 한빈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조금 놀랐다.강지현의 집에 처음 와본 그는 강지현이 실제로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한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경찰 측에서 아직 수사 중이니 머지않아 진준수까지 수사망을 좁혀 올 것입니다. 비록 해외에 있지만 강지찬 측에서 진준수를 끝까지 추적할 것 같습니다.” K그룹의 전 재무 책임자였던 진준수는 강지찬이 직접 감옥에 보냈다.강지현은 물을 끓여 한빈에게 한 컵 따라주었다.“진준수 쪽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당신이 말하는 마유구가 다루기 어렵다면 입 다물게 할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한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강지현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강지현은 금색으로 된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잘생기고 또한 고급스러워 보였다.한빈은 상록수에서 나온 후 핸들을 너무 꽉 쥔 탓에 등줄기에 한기가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시간이었는데, 마침 위층에서 물 한 잔을 들고 있던 메마른 그림자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도망치듯 1층의 계단 칸으로 숨었다.한빈은 화가 난 표정이었고, 마유구를 생각하니 더욱 짜증이 났다.위층에서 소희는 마스크 팩을 하느라 얼굴에 검은색 팩을 바르고 있었다
정유진은 요즘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연우 인테리어의 업무의 질도 더욱 향상되어 더 이상 온라인 주문을 받지 않아도 고객이 직접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K그룹 측은 입찰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특히 정유진 측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이날은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정유진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얼핏 보니 발신자 표시창에 강지현이 표시되어 있었다.그녀는 무시했다. 그러나 강지현이 곧바로 메세지를 또 보내왔다.‘연우를 데려왔어요.’그녀는 한참 동안 메시지를 응시하고 1분 동안 얼어붙은 채로 상대방이 보낸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반응하지 못했다.강지현이 연우와 다른 사람들을 데려왔다고?정유진은 혼란에 빠졌다.요즘 너무 바빠서 부모님과 통화하는 횟수도 많이 줄었다.강지현이 그들을 데려왔다고?정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자료를 정리한 후, 대표인 강지찬에게 한마디 말도 건넬 겨를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일제히 강지찬을 바라보았다.강지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멈춰요? 계속해요!”회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되었다.그녀는 무려 회사의 사모님이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강지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방금 전 정유진이 허둥지둥하던 것을 분명히 보았다.무슨 문제가 생겼나 보다.강지찬은 옆에서 임우연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임우연 휴대폰을 들고 준비를 하러 나갔다. 정유진은 차에 올라타서 강지현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대방은 즉시 전화를 받았다. 강지현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게 들렸다. “유진 씨, 아직 이동 중입니다. 지엘 별장으로 바로 모셔다드릴 테니 서두르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죠.”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강지현과 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그녀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당에서 계속 기다렸다. 10
이명자는 건강이 좋지 않고 심장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조기 은퇴를 하곤 했다.정유진은 감히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고 서둘러 인터넷에서 전문의를 예약하여 종합 검사를 받을 생각이었다.“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너무 상쾌하더라.” 이명자가 말했다.노부부는 연우를 위층과 아래층을 왔다 갔다 하며 둘러보고 새집에 매우 만족했다. 이명자의 얼굴도 불그스레하며 혈기가 좋아 보였다.그녀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정명학과 함께 쇼핑을 나갔다. 장을 봐서 집에서 밥을 해먹으려는 생각이었다. 강지현도 남아서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정유진도 그들을 막을 수 없어서 그냥 보내주었다.그녀는 강지현에게 인사도 마저 못 한 채 연우를 데리고 목욕을 하러 갔다. 두 모녀는 방에서 한참을 투덕거렸다.목욕 후 연우는 눈이 더 또렷해지고 똑똑해 보였다. “엄마, 엄마가 자란 도시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저도 너무 좋았어요.”정유진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너무 만족스러웠다.“앞으로 다시는 엄마랑 연우가 떨어질 일이 없을 거야. 기쁘지?”“기뻐요!” 연우는 말을 하며 올라서서 정유진의 얼굴에 연달이 뽀뽀를 했다.“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서 살도 빠졌어요.”정유진은 자기가 없는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동통하게 키워놓은 연우의 얼굴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이 아이의 말솜씨는 참 누구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이를 생각하니 정유진의 가슴이 살짝 떨렸다.이때 강지찬은 막 회의를 마친 상태였고, 장형준은 그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 보고했다. “대표님, 사모님은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훑었다.“사모님이 집으로 가시고 둘째 도련님도 바로 따라갔습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참, 사모님의 부모님도 귀국하셨습니다.”“뭐라고?”강지찬은 얼어붙었다.장형준은 휴대폰을 가져왔다.“제 부하들이 찍은 사진입니다. 한 노부부가 사모님 집에서 나오는데, 제가 보기
귀국 첫날밤, 연우는 당연히 엄마랑 자야 했다.시차 때문에 꼬맹이는 밤새 쫑알쫑알 거려서 엄마와 딸 모두 잠을 자지 못했다.다음날 출근한 정유진은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강지찬을 만났다.“왜 이 모양이야?”강지찬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젯밤 뭐 훔치러 갔어?”이때 마침 출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오갔다. 정유진은 그를 따라 대표 전용 엘레베이터에 타고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얼레베이터가 곧 도착하는 것을 본 강지찬이 갑자기 말했다.“밤에 집에 잠깐 들를게.”정유진은 너무 놀라 잠이 깰 정도였다.“당, 당신이 우리 집에는 왜요?”“가정 방문. 안돼?”말이 떨어지자 정유진의 엘레베이터가 도착했다.그녀는 멍해서 강지찬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는 당황하기에 그지없었다.이 사람이 왜 갑자기 집으로 간다는 거지? 뭔가 발견했나?엘레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정유진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강지찬을 노려보았다.강지찬은 고고한 눈빛으로 그녀를 곁눈질했다.“내 사무실 가서 얘기 좀 나눌래?”정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는 듯이 다급하게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사무실로 돌아간 그녀는 놀라서 손에 땀이 찼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이 모든 것을 예상하지 않았었나? 연우는 절대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강지찬은 언젠가 연우의 신분을 알 것이었다.오전에 정유진은 강지현으로부터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현 변호사는 제 친구인데 이혼 소송을 잘 하니까 점심에 시간 나면 같이 식사하지 않으실래요?”정유진은 망설여졌다. 강지찬과 이혼은 하고 싶었지만 이것은 온전히 그녀와 강지찬 사이의 사정이었지 강지현과는 상관이 없었다.그녀도 지금은 강지현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강지현이 덧붙였다.“어제 장종현의 부하들이 지엘 별장 밖을 지키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유진 씨, 일찍 계획을 세워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형님이 연우를 보
정유진도 빙빙 둘러서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부모님이 방금 귀국해서 친척들과 친구들의 방문 일정이 빽빽하게 잡혀 있어서 오늘 집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들을 만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강지찬이 말했다.“5분 전, 차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갔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아마 집에 도착했을 거야.”“사람 시켜서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었어요?”정유진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찼다.게다가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너무 자연스럽게 장인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다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거지. 나는 그냥 네가 날 못 가게 할 핑계가 없게 할 뿐이야. 까놓고 말해서, 장인어른 장모님이 귀국하는데 사위 되는 사람이 당연히 집으로 가서 얼굴을 봐야지. 이미 호텔을 예약해 뒀어.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소미는 강지찬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눈치껏 퇴근해서 지금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었다.정유진도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현재 우리의 관계로 봐서 같이 밥 먹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지 않나요? 이런 겉치레는 됐어요.”강지찬은 다시 고고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그렇게 깨끗이 정리해?”정유진은 강지찬이 하고 싶은 일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미리 부모님에게 말을 끝냈었다.정유진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호텔 위치 보내요. 집으로 갈 필요는 없어요. 바로 가라고 말씀드릴게요.”강지찬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한 걸음 물러나 장종현에게 정유진에게 주소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저희 부모님은 죄수가 아니에요. 감시하는 사람들 철회해 주세요.”장종현에게 말했다.장종현은 서둘러 정중하게 말했다.“사모님, 마음 놓으세요. 이미 철수했습니다.”정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지찬이 예약한 호텔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들이 도착할 때, 정명학과 이명자는 벌써 도착했다.강지찬을 본 노부부는 만감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
온유한이 회의를 마치자마자 전성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선생님, 집에 일이 생겼습니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사건 경위를 말하고 있었다.“보석이 박힌 그 장신구를 지금 사람들은 잘 안 써요. 다만 온씨 가문 며느리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 정말 돈이 급할 때 쓰기 위해 남겨둔 것이에요. 오늘 전문적인 청소 담당자를 불러서 청소를 할 때 금고를 깜빡하고 안 잠근 채 주방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층에 올라가 보니 가보와 장신구 몇 점이 보이지 않았어요. 몇천 만원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요. 경찰분들, 아마 분명 이런 물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훔쳐 갔을 거예요. 현채영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집이 파산해 돈이 부족한 여자예요. 이 여자가 보석들을 방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혹시나 인정하지 않을까 봐 동영상까지 촬영했어요. 증거까지 있는데 계속 발뺌할 수 있을까요?”경찰 몇 명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온씨 가문 사모님은 억울한 척하며 말했지만 말 한 마디마다 빈틈이 있었다.진짜로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이 집안사람 모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장신구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건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온유한이 돌아왔다.현채영은 그가 돌아오자 웃음을 지을 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최신애는 흥분하며 앞으로 걸어갔다.“아들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 손버릇이 아주 나빠. 빨리 내보내.”온유한은 경찰 몇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얼굴로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돌아오는 길에 대충 들었어요. 하지만 채영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채영이를 믿어요.”“또 이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최신애가 아니었다.“이
현채영이 잠에서 깼을 때 최신애는 점심을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어머니, 점심 먹을 때 부르라니까요. 왜 안 부르셨어요?”최신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깼잖아?”“그래도 불렀어야죠. 그러다가 배를 곯으면 유한 씨가 어머님을 나무랄 거예요.”최신애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현채영이 밥 먹으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야채가 너무 많네요. 이 음식은 아무 맛이 안 나요.”최신애는 겨우 화를 참았다.“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담백해졌어. 못 먹겠으면 이 집에서 꺼져도 돼. 널 불잡을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현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유한 씨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짭짤하면서도 단 것을 좋아해요. 탕수육 같은 거 좋아하니까 다음번에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하인은 최신애의 눈치를 살피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현채영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한마디 했다.“왜요? 밥 먹는 것조차 어머님이 허락해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현채영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신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하고 놓았다.“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테이블을 내리쳐!”최신애가 격노했다.“현씨 집안이 이 지경으로 전락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정말 교양이 하나도 없네!”그 말에도 현채영은 화를 내는 대신 ‘흥’하고 콧방귀만 뀌었다.“최씨 가문 식구들은 교양이 있어서 성격이 이렇게 모났나 봐요. 유일한 친아들마저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너 정말...”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여봐라, 어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누가 감히 할 수 있는지 나야말로 보고 싶네요.”현채영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어머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걸 힘들어하면 유한 씨도 같이 나간다고 했어요. 집도 이미 다 장만했어요.”“뭐라고?”최신애는 어리둥절해 했다.“너에게 집도 사줬어?
“유희야, 네가 잘못 짚은 거 아니야? 유한이가 현채영에게 점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최신애는 분통을 터뜨렸다.“강지아에게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저게 연기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일부러 강지아를 괴롭혔는데 전혀 반응이 없잖아.”임유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 예상이 맞아요. 현채영은 유한 오빠가 저와 어머니를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데려온 거예요.”“그런데 강지아는 서원준과 사귀고 있잖아.”최신애는 임유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온유한이 강지아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떻게 강지아보다 현채영에게 더 잘할 수 있겠는가?강지아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고?온유한의 성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것은 참지 못할 것이다.“유희야, 일단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유한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해. 유한이가 너를 진짜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화내는 거야. 너는 너무 착해. 현채영 그 여자를 봐, 하루 종일 유한에게 붙어서 별짓을 다 하잖아.”임유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현채영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온유한이 하루 종일 현채영과 붙어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힘들었다.다음 날 아침 현채영은 또 늦게 일어났고 온씨 가족이 식사가 끝난 뒤에야 방에서 나왔다.“아버님, 어머님, 임유희 씨, 굿모닝.”그러더니 온유한의 볼에 입까지 살짝 맞췄다.“유한 씨, 좋은 아침.”온씨 집안사람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임유희는 입에 넣은 밥을 뱉어내고 싶을 정도였다.온유한이 현채영의 손을 잡더니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졸려서 밥 먹기 싫다며? 네 아침은 남겨놨으니 피곤하면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먹어도 돼.”“출근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꿀을 탄 듯 달콤한 현채영의 목소리에 최신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다.“먹을 거야, 말 거야? 안 먹을 거면 꺼져, 아침부
“쇼핑 더 할 거야?”화령의 두 손에도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맞은편 가게에서 현채영이 치마를 입어보고 있었고 온유한이 그녀의 어깨끈을 고쳐주고 있었다.“이제 가자. 거의 다 샀어.”강지아가 말하는 순간 화령은 무슨 생각이 난 듯 한마디 했다.“곧 금성 씨의 생일이라 선물 좀 사야 할 것 같아. 같이 골라줘.”두 사람은 남성복 가게에 갔다.최금성은 항상 이 브랜드의 옷을 입었기에 가게에도 그의 옷 사이즈가 있었으므로 화령은 스타일만 고르면 되었다.양복과 셔츠 외에 화령은 넥타이도 골랐다. 총 2천만 원이 넘었다.“서 대표에게 뭐 안 사줘도 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는 멍해졌다.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필요 없을걸?”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지아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강지아지만 여자친구로서 주는 거라면... 왠지 이상했다.화령은 서원준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사람이 재미있기도 하고 강지아에게 일편단심이었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부모님의 인품도 좋다고 했다.“서원준에게 아무거나 하나 골라줘 봐. 요 몇 년 동안 일이 없을 때마다 날아가서 너와 같이 있어 주고 그랬잖아. 알 사람들은 다 알아.”화령의 말은 사실이었다.강지아는 어쩔 수 없이 서원준을 위해 은회색의 패셔너블한 넥타이를 골랐다.“괜찮아?”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강지아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잘 어울리겠지?”“당연히 잘 어울리지. 서 대표가 얼마나 스타일리쉬한데. 이런 컬러 잘 어울려.”강지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사기로 결심하고 종업원에게 건넸다.“이거 포장해 주세요.”뒤돌아선 순간 온유한과 현채영이 어느새 가게에 들어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현채영이 온유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유한 씨, 넥타이 사기로 했잖아. 내가 골라줄게.”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며 강지아의 옆을 지나갔다.종업원은 강지아와 화령의 물건을 재빨리 포장했다. 이
“강지아 씨, 이 치마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지아 씨처럼 피부가 뽀얀 사람들만 소화해낼 수 있을 거예요.”종업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평소 이런 색상을 거의 입지 않은 강지아마저도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그래요. 이걸로 살게요.”이때 옆에 있던 임유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치마가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그러자 최신애가 말했다.“그럼 사.”임유희를 본 종업원은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죄송합니다. 이 치마는 저희가 새로 출시한 한정판 신상품이라 사이즈별로 한 벌씩밖에 없어요. 고객님도 S사이즈시죠? S사이즈는 더 없습니다. 대신 다른 스타일로 추천해 드릴게요. 저희 가게에...”“다른 스타일 말고 저걸로 줘.”최신애의 말에 종업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강지아는 상대하기 귀찮았다. 두 집안이 이미 인연을 끊었기에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드레스 룸에 가서 다른 치마로 갈아입었다.한편 최신애는 아직도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내가 이 가게 VIP야. 지금 이 치마가 마음에 들어서 입어보겠다고 하잖아.”종업원은 골치가 아팠다.한편 다른 치마로 갈아입고 나온 강지아와 화령은 최신애가 없는 셈 치고 즐겁게 계속 쇼핑을 했다.강지아가 옷을 잔뜩 골라 종업원에게 주며 포장해달라고 했다.최신애는 빨간 치마를 뺏어오기로 마음먹은 듯 종업원이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빼앗아서 임유희에게 건넸다.“유희야, 입어 봐.”임유희가 치마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지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말했다.“이 치마는 제 거예요.”임유희도 물러서지 않았다.“아직 돈을 내지 않았잖아요. 그럼 당연히 강지아 씨의 것이 아니죠.”“내가 먼저 결정한 것이고 이미 사겠다고 얘기도 끝났어요. 대학교수면 누가 먼저인지 기본 도리는 알지 않나요?”“강지아 씨보다 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단아한 분위기의 임유희에게 빨간 치마가 더 잘 어울린다고?강지아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해장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임유희는 외출하려던 온유한과 마주쳤다.“유한 오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예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무시해 버렸다.명성 빌딩.늦게 집에 들어온 진수혁은 거실 소파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불을 켰다.“왜 또 왔어?”자기 집이 아니었기에 진수혁도 함부로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유한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게다가 온유한은 술까지 마셨다.온유한의 발 옆에는 이미 여러 개의 맥주 캔이 놓여 있었고 손에도 캔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지아의 발목 문신도 그쪽이 지운 거야?”“응.”진수혁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문신 지울 때 많이 아파?”“어떨 것 같은데?”“지아가 울었어?”“울진 않았어.”온유한이 맥주를 계속 마시자 진수혁도 마시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다.진수혁이 화가 나서 말했다.“내 싸구려 맥주가 그쪽 같은 부자들이 마신다니 참으로 영광이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가게가 어디야?”“뭐?”진수혁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한 뒤 진수혁은 가게 위치를 온유한에게 보냈다.주소를 확인했음에도 온유한은 집에 가지 않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잠들기 전 진수혁에게 한마디 했다.“내가 여기 있다고 지아에게 말하지 마.”진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재벌가들의 사랑싸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칠 후 강지아는 서원준과 함께 진수혁을 찾으러 갔다.빨갛게 부어오른 피부가 다 낫자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서원준은 옆에서 문신을 하는 아가씨가 아파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강지아를 잡고 말했다.“그냥 안 하는 게 어때? 흉터가 크지 않아서 별로 티도 안 나. 진짜로.”진수혁이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분은...”“지아의 남자친구 서원준이에요.”“안녕하세요.”진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지아를 향해 물었다.“할 거
현채영의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나서 가버렸고 임유희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집안에 들어서기 전, 뒤에 있던 임유희가 불쑥 물었다.“현채영 씨, 유한 오빠 입술에 난 상처... 진짜 현채영 씨가 그런 거예요?”현채영은 걸음을 멈춘 뒤 뒤돌아서 임유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면 임유희 씨가 그랬겠어요?”임유희의 눈빛은 아주 차분했다.“유한 오빠와 만나는 척하지만 현채영 씨에게서는 한 번도 키스 마크를 본 적이 없어요. 현채영 씨의 향수 냄새는 아주 강하지만 유한 오빠에게서는 한 번도 진한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고요. 늘 은은한 향수 냄새 그대로죠.”현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임유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저녁 강씨 가문 생일잔치에 간 거죠? 유한 오빠도 누구를 만나려고 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강지아 씨가 돌아왔나요?”현채영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시 임유희 씨, 대학 선생님답게 꼼꼼하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강지아 씨가 온 것은 맞지만 그게 유한 씨와 무슨 상관이죠? 유한 씨는 아이를 보러 간 거예요. 유한 씨가 옛 친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유희 씨도 잘 알잖아요.”그러자 임유희가 말했다.“그래요? 유한 오빠 입술 상처도 강지아 씨가 낸 거죠?”현채영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두 사람 오래전에 헤어졌어요.”임유희가 계속 물었다.“현채영 씨 역할이 뭔가요? 목적이 대체 뭐예요? 돈 때문이에요?”현채영은 박수를 쳤다.“임유희 씨, 상상력 하나만은 정말 탄복할만하네요.”“내가 돈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면 어머님이 주신 20억 원을 왜 안 받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 목적은 온유한이라는 사람 곁에서 온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왜 온씨 가문에 빌붙어 사는 거죠?”임유희가 말했다.“온유한 씨가 좋아서요.”현채영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따지고 보면 임유희 씨도 너무 불쌍해요.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