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한빈이 또 찾아 왔다.이번에 성원이 한발 물러섰다. 정유진이 협력 제안을 받아 주면 조예원과도 계속 협력하겠다는 입장이었다.“왜 꼭 나여야 하는데?”정유진의 물음에 한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인테리어 총괄 디자이너잖아. 너를 찾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게다가 서울시에서도 이번 프로젝트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미안한데 거절할게. 나와 예원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우리 사이의 신뢰는 완전히 깨졌어.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어.”한 번 결심한 것은 절대 굽히지 않는 정유진의 성격을 너무 잘 아는 한빈은 지금 이 상황이 그저 골치 아프고 화가 날 뿐이었다. 한빈이 떠난 후 키키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며 말했다.“누나, 우리가 보낸 광고 주문들이 전부 다 거절당했어요.”정유진은 흠칫 놀랐다.“무슨 말이야?”키키는 휴대전화를 정유진에게 건넸다. 화면에는 누군가와의 채팅 기록들이 있었다.“상대방에서 우리의 주문을 못 받겠대요. 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플랫폼에서 다 우리의 광고 주문을 거절하고 있어요.”채팅 기록을 보니 홍보할 수 없다고만 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누군가 일부러 뒤에서 이런 짓을 꾸미고 있는 거 아닐까요?”개업하자마자 누군가에게 저격을 당하고 있으니 앞으로 비즈니스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인테리어 회사의 대부분 비즈니스 고객은 온라인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각 광고 업체들마다 연우 인테리어의 광고 주문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 뜻인즉슨 연우 인테리어에는 고객이 없다는 것이다.고객이 없으면 인테리어를 할 곳도 없다.키키는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누나, 우리 이제 어떡해요?”정유진은 이미 다른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 듯 얼굴이 한없이 평온했다. “일단 손에 있는 일들은 계속 진행해. 나머지는 내가 방법 좀 생각해 볼게.”키키와 그가 데려온 디자이너들은 모
“강지찬, 이 뻔뻔한 자식!”정유진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서류를 강지찬의 얼굴에 내던지고 싶었다.아마 서울 전체에서, 아니 전국에서 정유진만이 강지찬에게 삿대질하며 이렇게 욕을 퍼부을 수 있을 것이다.정유진에게 하도 많이 혼난 탓인지 강지찬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내가 뻔뻔한 거 오늘 처음 알았어?”“뭐라고?”강지찬의 뻔뻔함은 정말 사람을 미치도록 화나게 했다.“어차피 결론은 하나야. K그룹과 협력해. 그렇지 않으면 그 회사는 절대 제대로 운영되지 않을 테니까.”화가 잔뜩 난 정유진은 강지찬을 쏘아보며 말했다.“인터넷 광고가 안 되면 내가 알아서 고객들을 찾을 거예요. 온라인 하나 컨트롤 한다고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요.”강지찬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그래? 어디 한 번 해봐.”정유진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다음날, 홍보하기로 했던 모든 플랫폼에서 연우 인테리어의 주문을 거절했다. 그 어떤 플랫폼에서도 연우 인테리어의 홍보 광고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이 뜻은 연우 인테리어에 고객들이 없고 영업팀 직원들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정유진은 직원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온라인이 안 되면 오프라인으로 진행하자고 누군가가 제안했다.이때 키키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최근 새로 분양을 시작한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판촉 활동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 관리비만 좀 내면 될 거예요.”정유진과 조예원도 예전에 이런 프로모션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온라인 홍보에 돈이 필요했지만 예담 스튜디오가 설립되었을 초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객들도 꽤 많이 잃었다.일 처리 하나만큼은 똑 부러진 키키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바로 판촉용 전단지를 디자인해 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영업팀 사람들을 데리고 고급 아파트에 가서 판촉을 시작했다.하지만 판촉 활동 반나절 만에 아파트 관리원에게 쫓겨났다.쉽게 의지를 굽힐 수 없었던 키키는 또 다른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 아파트 관리원들
드디어 큰 주문을 받았지만 결국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는 직원들의 기분은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연우 인테리어는 안 그래도 직원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런데 온전한 고객조차 없다면 어쩌면 지금 있는 직원들마저 떠날 수 있다.강지찬은 일거수일투족 모두 간섭하고 있었다. 정유진이 한 건의 주문도 못 받게 하려고 작정한 듯하다.어차피 회사에 돌아가도 할 일이 없던 정유진은 직원들에게 휴가를 줬다.지엘 별장으로 돌아오니 조예원이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하려던 조예원은 정유진을 보자 다시 전화기를 가방에 넣었다.조예원은 정유진의 차를 뒤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여긴 왜 왔어?”조예원을 본 정유진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물었다. 조예원을 초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비밀번호 바꿨어?”조예원의 물음에 정유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피곤하니까.”여전히 깔끔한 단발머리에 프로페셔널하게 차려입은 조예원은 한눈에 봐도 예쁘고 똑 부러지는 커리어 우먼이였다.조예원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네가 피곤할 게 뭐 있어? 연우가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어. 네가 강지찬을 건드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힘들 게 뭐가 있어?”어려운 상황이 그대로 들통나자 정유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조예원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언급되니 말이다. 그동안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정유진은 자기의 경험과 실력으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쯤은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그런데 강지찬이 이 정도로 비열한 수법으로 그녀의 앞길을 막아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정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본 조예원은 또다시 거리낌 없이 말했다.“지금은 고객이 없는 것에 그치겠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인테리어 자재들도 구매하기 어려울걸? 업계 사장님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누가 감히 강지찬의 심기를 건드리려 하겠어.”“뭐라고?”이 말은 정유진도 처음 들었다. 만약 인
정유진은 대표이사실로 들어오자마자 온미정이 먹다 남은 커피를 강지찬의 얼굴에 끼얹었다.뒤따라 온 임우연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강 대표님!”강지찬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의자에 앉은 채 한 바퀴 빙 돌았다. 커피는 뒤의 책장에 뿌려졌고 극소량만 강지찬의 다리와 책상 위에 쏟아졌다.임우연은 얼른 사무실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사모님, 진정하시고 무슨 일이든 말로 하세요.”조금 전까지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었던 정유진의 분노도 이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말로 하라고요? 고객도 다 차단하고 인테리어 자재 업체들에게 연락해 내가 납품받지 못 하게 뒤에서 수작을 부렸어요. 일부러 작정하고 손을 쓰는데 어떻게 말로 해요? 말은 사람과 하는 거예요.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말이에요!”정유진의 목소리가 대표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강지찬도 이토록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휴식실에 있던 온미정은 속으로 정유진을 응원하고 있었다.임우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상황을 중재하는데 나섰다.“사모님, 화내지 마세요. 연우 인테리어가 K그룹과 협력한다면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최고의 인테리어 회사가 될 거예요.”그 말에 정유진은 강지찬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그런 거 필요 없어요. 강지찬 씨, 설마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협력하려는 거예요?”티슈로 바지를 닦던 강지찬의 손이 순간 멈췄다.“나가.”정유진과 임우연은 동시에 어리둥절해졌다. 임우연은 곧바로 나가라는 말이 자신을 보고 한 말임을 알았다.“강 대표님, 사모님. 천천히 얘기하세요... 커피 준비해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임우연은 도망치듯 대표이사실을 나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식실로 갔다.휴식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온미정은 갑자기 들어온 강지찬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 여기 왜 들어왔어! 이러다 들키겠어!”강지찬은 귀찮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 저 바
정유진이 뿌린 커피 때문에 다리가 끈적끈적해 강지찬은 어쩔 수 없이 샤워한 것이었다.이 남자는 매일 꾸준한 운동으로 역삼각형의 탄탄한 체형을 보유하고 있었다. 몸 관리도 열심히 하고 있어 방안은 성숙한 남자의 호르몬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개를 홱 돌린 정유진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강지찬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그리고 이내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수십 층에 달하는 K그룹의 창가에 서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정유진은 마치 서울의 제일 꼭대기에 서 있는 듯했다.이 회사 대표는 확실히 서울의 꼭대기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큰 도시에 그녀의 설 자리가 없었다.뒤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정유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어디 지옥 끝까지 따라와 보든지요. 강지찬 씨.”말을 마친 정유진은 강지찬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K그룹 나왔다.강지찬은 조금 전 정유진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봤다.이렇게 큰 서울에서 한 사람을 붙잡는 것조차 이렇게 어렵다니...다음날 연우 인테리어의 직원이 물건을 구매하러 갔을 때, 인테리어 자재 원재료 업체는 역시나 그들에게 자재를 팔지 않았다.“대표님, 건축자재 시장을 다 돌아다녀 봐도 우리에게 팔려고 하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 어떡하죠?”어제저녁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정유진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서울에서 구할 수 없으면 다른 도시에서 물건을 들여올 수밖에.”옆에 있던 키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러면 원가가 많이 오를 텐데...”“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강지찬이 다른 도시까지 쫓아올 거라고 그녀는 믿지 않았다.키키는 서둘러 새로운 건축 자재 공급업체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다른 도시에서는 정상적으로 주문할 수 있었다.오후에 온미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객을 소개해주겠다며 나와서 차 한잔 마시자고 했다.정유진은 별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온미정의 체면을 봐서 일단 갔다.약속장소에 도
오후 내내 할머니를 모시고 고스톱을 친 결과 정유진은 드디어 이번 주문을 받는 데 성공했다.온미정이 집 키를 건네며 말했다. “강지찬이 일부러 너를 힘들게 하는 일을 할머니에게 말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할머니께서 연세가 많으신 것 같아도 모든 것을 다 꿰뚫고 계시니까.”정유진은 이런 온미정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고모님, 나중에 제가 꼭 밥 한 끼 살게요.”“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 말했잖아, 너는 젊었을 때의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하다고. 나는 그때 울기만 했어. 그러면서 인생을 다 망쳤지. 그때는 그러면 남자의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오히려 나에게서 더 정이 떨어졌지.”털털해 보이는 온미정이었지만 마음속에 큰 상처를 안은 채 살고 있었다.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다. 욕조에 누운 정유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겨우 주문을 받긴 했지만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모든 재료를 전부 다른 도시에서 사들여야 한다면 이윤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현이 그녀를 찾아왔다.강지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사 온 아침을 정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어려운 게 있으면 나부터 찾지 않고요?”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다 들었어요? 이런 거 잘 모르잖아요. 괜히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방법도 찾았고요.”강지현은 국을 떠주며 말했다. “무슨 방법인데요? 형이 이미 얘기 다 해놓았으니 서울 전체에서 연우 인테리어에 원자재를 공급하려는 곳은 아마 없을 거예요.”정유진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연우 인테리어에 안 팔아도 누군가가 가서 사면 팔겠죠? 키키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사달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거예요. 지찬 씨가 설마 이것까지 생각했겠어요?”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네요. 한 번 해보세요.”정유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에는 주문 건수가 없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어제 고모님이 저에게
정유진은 요즘 매우 바삐 보내고 있었다. 두 집의 설계도 모두 그녀가 담당해야 했다.인맥을 통해 겨우 받은 주문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어려워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키키의 아버지가 연우 인테리어의 건축자재 구매를 담당해줬다. 일단 물건 들여오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 방법도 얼마나 오래 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안 되면 저희 삼촌도 있어요. 사람은 많아요.”키키는 불굴의 의지로 맞서고 있었다.민 교수의 집은 위치가 아주 좋았다. 요란한 도시 생활 속에서도 주위가 조용하여 노인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했다.정유진은 사람들과 같이 직접 집안 이곳저곳의 사이즈를 재기 시작했다. 사이즈를 재는 것도 몇 년 만인지 모른다. 데이터를 기록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도 찍었다.한참 사이즈를 재며 사진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큰 손이 정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정유진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왜 여기 있어요?”강지찬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왜? 여기 있으면 안 돼?”하지만 정유진은 그와 입씨름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 기척 없이 다가온 이 인간 때문에 하마터면 그의 품속에 안길 뻔했다.이 사람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에 놓여있었다.정유진은 몸을 옆으로 돌려 강지찬과 멀찌감치 떨어졌다.“여긴 왜 왔어요?” 정유진은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강지찬은 그녀의 허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뭔가 미련이 남아 있는 눈빛이었다.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는 한 번 만지면 확실히 놓기 아쉬웠다.“수단이 생각보다 좋은데? 틈을 비집고 이렇게 할 줄은 몰랐네?”강지찬은 경멸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물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정유진은 이런 강지찬을 당장이라도 씹어먹고 싶었다.“서울에서 발 디딜 곳이 없어도 당신에게 타협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강지찬은 앞으로 한발 다가가 그녀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그래? 당신이야
강지현이 찾으러 왔을 때 정유진은 이미 반쯤 취한 상태였다.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강지현의 얼굴을 쳐다보던 정유진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두 사람, 생각보다 꽤 닮았네...”그녀 맞은편에 앉은 강지현은 웨이터를 불러 뜨거운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어디가요?”“큰 키에 높은 코, 그리고 그 깊은 눈.”정유진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지찬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노려보는 그 눈은 꼭 마치 내가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느낌이 사람을 너무... 너무 숨 막히게 하는 것 같아요. 그때는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갔으니...”강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조금만 마셔요. 형이 또 뭐라고 했어요?”잠깐 멈칫했던 정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더 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나와 협력하자고 강요하는 것 외에... 그 인간은 나를 모욕할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예담 스튜디오에 문제가 생기면 조예원은 당장 목숨 걸고 따지러 올 것이다.강지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 씨, 혹시 성원과 협력하는 것은 어때요?”“왜요?”“성원이 신생기업이기는 하지만 능력과 기세가 대단해요. 앞으로의 발전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성원과 K그룹은 경쟁하는 사이에요.”강지현에게 숨길 것이 없는 정유진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성원과 K그룹, 두 큰 고래 싸움에 내가 새우가 되어 등이 터질까 봐 그래요. 성원 배후에서 베일에 싸인 대표님도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고요. 그 사람과 지찬 씨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단순한 경쟁 관계일 수도 있잖아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강지현의 말에 정유진이 피식 웃었다.“이제 트라우마까지 생겼나 봐요. 배신과 이용만 당하다 보니 이젠 피해망상이 생겼어요.”정유진이 술을 더 가지러 가려 하자 강지현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정유진은 의아한 얼굴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