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은 눈앞의 이혼 합의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맞은편에는 몸매가 살짝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정유진이 앉아 있었다.넥라인에 있는 단추를 풀자 그녀의 하얀 목에 남겨진 키스 마크가 그대로 드러났다. 강지찬이 눈썹을 찡그리자 정유진이 물었다.“지금 시간 있어요? 아니면 밥 먹고 호텔로 갈까요?”순간 강지찬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여자는 이혼을 위해서라면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말이다.“정유진, 이리 천박한 사람이었어?”그런 말 따위에 더 이상 흔들리고 상처받을 정유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미소까지 살짝 지으며 말했다.“한 번 자나 여러 번 자나 별 차이가 있을까요?”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의 눈에는 그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무나와 자는 여자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때 사무실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경호원을 대동하고 들어온 전태연의 모습이 보였다. “강 대표님, 우리 엄마가 닭고기 수프 좀 끓였는데... 당신이 왜 여기 있어?”정유진을 발견한 전태연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정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강지찬 씨에게 이혼 도장 받으러 왔어요. 전태연 씨, 때마침 잘 왔네요. 강 대표님 좀 설득해 주시죠? 전태연 씨에게 유부남이나 만난다는 꼬리표를 붙일 수 없잖아요. 저는 얼마든지 강씨 집안 사모님 자리를 양보할 수 있으니 전태연 씨가 강지찬 씨 좀 설득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네요.”책상 위에 있는 이혼 합의서를 본 전태연은 정유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 알았다. 전태연은 경호원에게 수프가 담긴 보온병을 내려놓으라고 한 다음 일단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경호원이 나간 후, 그녀는 강지찬의 옆에 다가와 말했다.“강 대표님, 제가 사적인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은데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발목이 잡혀 대표님 인생을 허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말을 마친 전태연은 고개를 든 순간, 정유진의 목에 있는 키스 마크를 발견했다. 그녀는 정유진을 가리키며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유진은 오늘 취할 작정이었다. 취하기 전에는 어디도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작정하고 취하려면 정신이 오히려 더 말짱해질 때가 있다. 정유진 또한 두 병이나 마셨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의식이 또렷했다. 그녀는 이내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강지찬의 사촌 동생인 경은우라는 것을 알아챘다.“형수님, 왜 혼자 술을 드시고 계세요?”정유진이 또다시 술병을 들자 경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서 술을 빼앗았다.경은우의 직업이 머릿속에 떠오른 정유진은 그를 보며 물었다.“이혼소송 잘하는 변호사 좀 소개해 주실래요?”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한마디 덧붙였다.“간이 큰 사람이어야 할 거예요. 경은우 씨 형과 소송하려면.”그녀의 말에 경은우는 살짝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그건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그러자 맞은편에 자리 잡은 한규진이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뭐가 어려워? 이혼소송이잖아. 내가 할게.”경은우는 어이가 없어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우리 형의 사적인 일이야. 우리 엄마 아빠도 감히 뭐라고 못하는데 참견하지 마.”하지만 한규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정유진을 보며 말했다.“강지찬 씨와 진짜 이혼할 겁니까?”“네, 진짜로 이혼할 거예요.”정유진은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한규진을 쳐다보며 말했다.“그쪽도 변호사인가요?”그녀의 물음에 한규진이 대답했다.“네, 저도 변호사예요. 도와드릴 수는 있지만 제가 좀 비싸요.”한규진의 진지한 얼굴에 경은우는 어이가 없었다.“너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나는 우리 형의 손에 죽고 싶지 않으니까.”말을 마친 경은우는 얼른 강지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규진이 형수님의 이혼소송을 도와주겠대. 형이 와서 좀 어떻게 해봐.]한참 후, 경은우와 한규진도 술을 끊임없이 마시는 정유진을 막지 못했다. 강지현이 술집에 도착했을 때, 정유진은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지현이 형, 혹시 형수님... 데리러 온 거야?” 경은우는 그를 반겨
강지현은 이불을 잡아당겨 정유진에게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방에 가서 샤워를 마쳤을 때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도련님, 큰 도련님이 밖에 계십니다.”순간 강지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강지찬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집사더러 가서 쉬라고 한 후 계단을 내려갔다.대문 밖에 서 있는 강지찬의 안색은 강지현보다 더 어두웠다.그는 정유진의 집에 찾아갔다가 그녀가 없는 것을 보고 여기에 왔던 것이다. 강지찬 또한 강지현이 정유진을 집에 바래다주지 않고 상록수 별장으로 데려왔을 줄은 몰랐다.이제는 아예 티를 내고 다니겠다는 것인가?이때 옆에서 장형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작은 도련님께서 나오셨습니다.”가운을 입고 나온 강지현은 금방 샤워를 마쳐 온몸으로 개운하고 산뜻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강지현의 모습을 본 강지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정유진은?”강지현은 강지찬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유진 씨는 이미 잠들었어.”가운을 입고 나온 강지현이 나와서 하는 말이 정유진이 잠들었다니! 이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두 남자는 철문을 사이에 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강지찬이 굵직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문 열어.”강지현이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늦었어. 형도 이만 돌아가.”강지현의 행동은 강지찬과 끝까지 맞서 보겠다는 것이 틀림없었다.강지찬은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강지현! 내가 이혼하지 않은 한, 정유진은 나 강지찬의 아내야!”정유진의 목에 난 키스 마크가 생각난 강지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래서 뭐? 두 사람은 원래부터 아무 감정이 없었잖아. 그리고 유진 씨의 마음에도 더 이상 형이 없어.”“그럼 너는 있어?”강지찬이 되묻는 물음에 강지현은 피식 웃었다.“내가 지금 유진 씨를 깨운다고 쳐. 그럼 유진 씨가 우리 집에 남으려 할까, 아니면 형과 같이 가려고 할까?”강지찬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
연우와 통화하는 강지현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통화했는지 꽤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스 불을 끄고 돌아선 강지현은 그제야 뒤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정유진을 발견했다. “엄마가 일어났는데 바꿔줄까?”강지현이 전화기 너머의 연우에게 물자 녀석은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네! 네!”강지현이 귀에 있는 이어폰을 빼며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정유진은 이어폰을 받아 직접 귀에 꽂으려 했다. 하지만 강지현이 다가오더니 직접 그녀의 귀에 꽂아줬다.전화기 너머의 연우가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바람에 정유진도 더 이상 강지현의 행동에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 잠꾸러기야!”딸의 목소리에 정유진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내일부터 엄마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게. 우리 애기,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응...”강지현이 밥을 그릇에 옮겨 담는 모습을 본 정유진은 얼른 가서 그를 도왔다.그는 직접 밥도 짓고 두 가지 야채 요리까지 볶았다. 게다가 가스 불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빵까지 있었다.두 사람이 아침 식사 준비 중이라는 것을 안 연우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찐빵까지 할 줄 알아요? 그동안 못했었잖아요?”정유진이 엄지를 척 내보이자 강지현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찐빵은 아줌마가 한 거예요. 오늘 하루 쉬라고 집에 보내 드렸어요.”“아, 그랬군요.”정유진은 웃으며 접시를 들고 냄비에서 만두를 꺼내 옮겨 담았다. 그러자 강지현이 다시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채소와 밥은 다 제가 한 거예요.”정유진은 기분이 꽤 좋은 듯했다.“고생했어요.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강지현은 할 말이 많았지만 다시 목구멍으로 삼켰다.아침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 정유진이 강지현을 보며 말했다.“저 예담에서 나왔어요.”순간 강지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왜요?”정유진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예원이가 연우를 빌미로 저더러 지찬 씨를 찾으러 가라고 해서요. 그 일로 싸우다가
정유진과 조예원이 처음 회사를 차릴 때 창업자금은 1억도 채 안 되었다. 사실 이 돈도 두 사람이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끌어모은 것이었다.조예원이 이체한 4억이라는 돈을 본 정유진은 순간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그녀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새로 구한 작업실부터 인테리어 시공에 돌입해야 했기 때문이다.다행히 예전에 알고 지내던 시공 아저씨들과 계속 연락을 이어왔고 어떤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일은 그나마 쉽게 바로 할 수 있었다.자기가 지낼 사무실이었기에 도면도 일찍 완성되었고 인테리어도 빨리 시작했다.정유진은 매일같이 공사장에 틀어박혀 인테리어 진도를 체크했고 가끔은 강지현도 와서 그녀를 도왔다.어느 날, 정유진이 강지현과 한창 작업자들이 모델하우스를 공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때 키키가 갑자기 찾아왔다.“누나, 저도 그만뒀어요.”“왜?”정유진은 장갑을 벗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예담의 규모가 이제 점점 커지고 있는데 처음부터 예담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면 어떡해?”키키는 머리를 쥐어 잡으며 말했다.“더 이상 못 있겠어요. 회사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야 모두 조 대표님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데 저는 누나가 직접 키워준 사람이잖아요. 누나가 없는데 내가 있어서 뭐해요?”키키는 돌려 말했지만 정유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인간은 현실적인 사람이다. 정유진이 퇴사를 했으니 회사에 있는 키키의 입장도 난처했을 것이다.정유진은 키키에게 장갑을 던지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너는 그냥 나와 같이 일하자. 때마침 나도 일손이 부족하던 참이었어.”키키가 기다린 것 또한 그녀의 이 말이었다.“누나, 나도 누나만 보고 온 거예요.”키키는 바로 장갑과 안전모를 쓰고 모델하우스 시공자들 지휘에 돌입했다. 키키의 합류로 정유진의 마음은 더없이 든든해졌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노을빛 프로젝트의 입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K그룹에서 입찰을 포기한 바람에 정부에
조예원이 회사로 찾아 왔을 때 정유진은 한창 키키와 샘플 작업을 논의하고 있었다.“유진아, 시간 돼? 할 얘기가 있어.”조예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커피숍을 찾았다.요즘 정유진은 공사현장을 돌보느라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다녔다. 하지만 심플한 옷일수록 그녀의 화려한 얼굴이 눈에 더 띄었다.어떤 사람은 용포를 걸쳐도 자태가 나지 않지만 정유진은 허름한 옷을 두르고 있어도 미모가 여지없이 드러났다.모카 두 잔을 주문한 조예원은 웨이터가 저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렇게 빨리 회사를 차릴 줄은 몰랐어. 작업실까지 이미 다 꾸며놨네.”정유진은 조예원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할 말이라는 게 뭐야? 빨리 얘기해.”직접 찾아온 조예원의 모습에 정유진은 마음이 심란했다.물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원수를 진 것도 아니었기에 친구로서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유진아, 예담으로 다시 돌아와.”조예원의 말에 정유진이 물었다.“왜?” 조예원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정유진이 조금만 알아보면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원이 낙찰받았다는 말은 들었지?”“응, 알아. 축하해.”이때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왔다. 한 모금 마신 조예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진아, 난 가끔 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조예원의 갑작스러운 멘트에 정유진은 아리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얼굴이 이쁜 것은 인정해. 하지만 나도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네가 없었다면 학교 퀸카는 나였을 수도 있겠지. 너는 공부도 잘했어. 하지만 내 성적도 괜찮았고. 그러나 우리 과의 모든 교수들은 너만 좋아했어. 프로젝트가 있으면 항상 너부터 찾았어. 그때 얼마나 많은 애들이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닌 줄 알아? 네가 분명 정정당당하게 따낸 것은 아닐 거라며 너를 더러운 여자라고 그랬지. 하지만 나는 알아. 너는 절대 그런
조예원의 표정도 매우 심각했다.착하고 여린 사람 같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한 정유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한빈과 강지찬이라는 사람을 겪은 이후로 정유진은 자기를 해친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대했지만 일단 상처를 받으면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절대 다시 마음이 약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정유진의 어두워진 안색에 조예원은 그제야 자기가 말실수했음을 알아채고 다급히 설명하려 했다.“그런 뜻이 아니야. 이 프로젝트는 네가 담당한 거잖아. 네가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내가 다 들어주겠다는 뜻이야.”정유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조예원, 사실은 너도 잘 알잖아. 내가 더 이상 너와 협력할 일 없다는 거. 네가 연우를 들먹이며 나를 협박할 때부터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어. 그리고 한빈이 말은 믿지 않아도 돼.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일 리는 없으니까. 아마 일부러 너를 난처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일 거야.”말을 마친 정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바빠서 먼저 가볼게.”멀어지는 정유진을 바라보고 있는 조예원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한빈은 이번 결정이 성원의 대표님 뜻이라고 했다.그렇다면 성원의 대표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하지만 그 누구도 성원의 대표가 누구인지 모른다.조예원은 정유진의 말에 어쩌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원의 사장이 누구든 정유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어쩌면 한빈이 일부러 꾸며낸 말일지도 모른다.분명 정유진을 잊지 못해 끌어들이려는 게 틀림없다.요즘 정유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인테리어에 신경 쓰는 것 말고도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가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준비가 잘된 덕분에 무사히 사업자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연우 인테리어, 입에 착 감기는데요?”키키는 역시 아부에 약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회사 대문 앞 파라솔 아래에 앉아 디자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햇빛을 가렸다.
정유진은 단지 소희를 상대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욕설을 서슴없이 퍼붓다니! 정유진은 손에 물 한 바가지를 들고 와 바로 소희에게 뿌렸다.바로 얼굴에 뿌리지 않았지만 물이 옆으로 쏟아지며 소희의 몸에 튀었다.“지금 나에게 물을 뿌린 거야? 미쳤어?”깔끔한 구두에 물이 튀자 소희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났는지 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정유진도 마찬가지였다.“잘 알아보고 얘기해. 내가 한빈을 찾으러 간 게 아니라 한빈이 직접 본인 발로 찾아온 거야. 나도 바쁘니까 이만 꺼져.”“그럼 누가 나더러 여기에 오라고 했는지 알아?”소희는 오늘 정유진을 톡톡히 혼내주기로 다짐하고 온 듯했다.“누구인데?”“조예원.”소희는 피식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하하,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네? 너의 절친이 말하길 성원이 너와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고 나더러 가서 막아달라고 그랬어. 물론 조예원은 이 일로 내가 한빈과 싸우길 원했겠지. 하지만 내가 바보야? 한빈과 싸우게? 너도 제일 친한 친구에게서 배신당하는 날이 오네? 벌 받은 거야. 알아?”정유진은 그녀를 상대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성원과 협력하기 위해 조예원은 또다시 정유진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예전의 그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길 건너편 검은색 승용차에서 장형준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여부를 알게 된 장형준은 바로 강지찬에게 알렸다.“대표님, 성원에서 조예원과의 협력을 뒤로 미뤘습니다.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성원 대표님의 결정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성원 대표님은 계속 해외에 있어서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강지찬이 진지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알아볼 필요 없어. 때가 되면 얼굴을 드러내겠지.”한빈이 성원의 부사장이 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강지찬은 분명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몇 년을 찾아도 찾지 못하자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대표님, 성원이 콕 집어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