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연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고, 생각지도 못한 슬픔과 속상함이 엿보였다.“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텐데...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완벽한 존재, 아영아, 앞으로 넌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겠군.”심은아가 콧방귀를 뀌었다.“온씨 가문이야말로 백아영 인생의 종착역이죠.”...비록 온유성과 같이 들어 왔지만, 백아영은 여러 단계의 신원 인증을 거쳐 온씨 가문의 혈육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나서야 무사히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덕분에 온씨 가문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몸소 체험했다.장치가 얼마나 많은지 설령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진입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우강이라는 위험천만한 불법 지대에서 이 정도 방어 장치는 절대로 과한 게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백아영은 불안과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그녀는 시종일관 은침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내부로 진입할수록 벌레 한 마리도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방어 장치를 제외하고 타락한 천사의 조각상이 곳곳에 보였다. 시커먼 조각상과 부러진 날개, 그리고 눈동자가 사라진 텅 빈 동공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하지만 이런 게 바로 온씨 가문의 신앙이지 않겠는가?거실에 들어서자 중앙에 집주인이 사용할 법한 가구들이 있는 게 아니라 높이가 3m 정도 되는 타락 천사 조각상이 떡하니 나타났다. 다른 조각상과 달리 마치 피에 물든 것처럼 시뻘건 눈은 보기만 해도 오싹하고 스산했다.그러나 온유성은 조각상을 향해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더니 절을 연신 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주님, 신도 온유성이 찾아뵙습니다.”옆에 서 있는 백아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온유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동안 신도다운 면모를 보여준 적이 없는지라 경건한 모습이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심지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타락한 천사를 믿고 따르다니.“벌써 20년이네?”연로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검은색 도포 차림의 백발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날카로우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온유성을 바라보다 다시
“엄마는? 엄마는 어떻게 됐어요?”흐느끼는 백아영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그제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 알게 되었다. 경비가 삼엄한 온씨 가문에서 외부인의 침입은 물론 한 번 들어오면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온유성에게 속아 발을 들인 이상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네 엄마?”온유성의 말투가 유난히 쌀쌀맞았다.“온씨 가문 혈육을 수도 없이 낳고 피연꽃의 먹이로 주고 있지.”이내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물었다.“죽었어요?”온정이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정한 말에 백아영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껴줬는가? 과연 몸까지 날리면서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차를 막아주던 자상한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지금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매정하고 무자비하며 감정 따위 찾아보기 힘든 짐승 같았다.자기 아내를 당연하다는 듯이 애를 낳는 기계로 생각하고 생사 따위 관심 없는 모습이라니.백발노인의 안색이 어두웠다.“선우정현이라는 여자가 꽤 독하던데? 더는 애를 낳지 못하게 스스로 몸을 망가뜨렸어.”온유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얼굴에 혐오감이 가득했다.이내 쌀쌀맞은 말투로 대답했다.“그렇다면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죠.”그래서 이미 선우정현을 죽였단 말인가?백아영은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고,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백발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비록 아이를 낳지는 못하지만, 피는 꽤 괜찮은 자양분으로 쓸 수 있거든.”말을 마치고 나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그렇게 괴로운가? 정이 깊은 아이로구나. 오히려 좋지, 뭐. 다루기도 쉽고.”그는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따라와, 네 엄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 테니까.”백아영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실감이 나지 않아 비틀거리며 따라갔다.한참을 걷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나고 나서야 비린내가 진동하는 늪에 도착했고, 한가운데에 집이 한 채 있었다.방 안에는 선홍빛 연꽃으로
어쩌면 핏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엄마라는 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대뜸 붉어졌다.“네가...?”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는 마치 모든 힘을 끌어내서 겨우 쥐어짜 낸 듯싶었다.“내 아이야?”“네, 맞아요. 엄마,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백아영은 울면서 피로 가득 찬 연못으로 뛰어가 흐느끼며 말했다.“오랫동안 고생이 많으셨어요.”“우리 딸 벌써 이렇게 컸어? 엄마의 예상대로 너무 예쁘네.”선우정현이 무의식중으로 손을 뻗어 백아영을 만지려고 했지만, 쇠사슬에 묶여 있는 탓에 버둥거리는 순간 짤랑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작 이런 움직임에도 그녀는 벌써 지쳐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이내 심호흡하더니 한숨 돌리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백아영을 향해 웃기만 했다.초췌한 얼굴과 창백한 입술, 그러나 미소만큼은 자애로웠다.“엄마...”백아영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그녀가 갓난아기 때 선우정현이 다른 곳에 보낸 바람에 여태껏 살면서 모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부럽기도 하고, 유감스럽기도 하며, 이미 해탈도 했다.성인이 되고 나서는 모성애 따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머니도 단지 호칭에 불과하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고스란히 느끼게 되었다. 만약 선우정현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더라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로 자랐을 게 뻔했다.그러나 설령 키워주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자기 목숨과 인생까지 바쳐서 딸아이의 삶을 20년 동안이나 지켜줬다.“엄마는 우리 딸을 봐서 이제 여한이 없구나. 얼른 도망가, 여긴 위험해!”“도망가긴 어딜 가?”온유성이 피로 가득한 연못으로 천천히 다가가 한동안 ‘사랑했던 아내’를 마주하면서도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고 온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선우정현, 네 딸이 곧 당신을 대신해서 피연꽃을 키워줄 예정이거든? 이제 그만 저세상으로 가도 될 것 같아.”간신히 고개를 든 선우정현이 온유성을 바라보았다.이내 동공이 커지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온유성이 말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저 여자는 죽을 거야!”백발노인의 악을 쓰는 목소리가 10m 밖에서 들려왔다. 그는 독 안개 밖에 서서 손에 검은색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백아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리까지 잠근 피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느낌이 들면서 한기가 피부 속을 파고드는 듯싶었다.“백아영, 얼른 독 가루를 치우지 못해?”백발노인이 명령했다.“아가야, 엄마는 상관하지 마. 만약 도망갈 능력이 있다면 목숨 걸고 도망쳐!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고. 난 이미 이 지경이라 구해준다고 한들 살아남지 못할 거야. 비록 내 인생은 끝장났지만, 네 인생까지 망칠 수는 없잖아. 가! 얼른 가라고.”선우정현은 자신의 생사 따위 전혀 개의치 않고 초조한 얼굴로 기를 쓰고 외쳤다.“네가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선우정현은 반드시 죽을 테니까 알아서 해.”백발노인은 악랄한 말로 협박했고, 백아영을 바라보는 눈빛에 탐욕이 가득했다.“차라리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선우정현이 몇 년은 더 버텼을 텐데, 네가 제 발로 찾아온 이상 피연꽃의 제물로 굳이 선우정현을 쓸 필요가 없거든. 만약 선우정현이 죽는다면 자기 엄마를 죽인 원흉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백아영의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 같았다.“저 늙은이 말 듣지 마! 난 어차피 사느니 죽는 것보다 못한 나날을 보내왔어. 죽음은 나에게 곧 해탈이니까 오히려 네가 날 구해준 거야.”만약 움직일 수만 있다면 선우정현은 가까이 다가오는 뾰족한 가시를 향해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을 것이다.“아영아, 가라고! 얼른 가.”백발노인이 리모컨을 누르자 가시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고, 날카롭고 뾰족한 부분이 선우정현의 살갗을 찔렀다.이내 새빨간 피가 그녀의 가냘픈 몸에서 흘러나왔다.비록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안간힘을 써서 꾹 참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재촉했다.“얼른, 가...”백아영은 독 가루가 든 병을 꽉 움켜쥔 채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마치 뾰족
이미 기력이 다해서 힘도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백아영은 울컥하는 마음에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우리 엄마는 건드리지 마! 같이 자면 될 거 아니야! 하지만 오늘 밤은 안 돼, 오늘은... 그날이라서...”“그렇게 공교롭다고?”남자는 믿기지 않은 눈치인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백아영은 흠칫 놀랐다.아니면 피눈물도 없는 인간들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이거 놔! 놓으라고!”그녀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순간 쇳덩이 같은 손바닥에 뺨을 세게 맞았다.얼굴 뼈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면서 백아영은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입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반면, 남자는 뺨을 때리고 나서 바짝 다가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강제로 움켜쥐었다.그리고 표정이 일그러지며 험상궂게 변했다.“너 임신했어?!”그는 맥을 짚을 줄 아는 게 확실했다.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지며 그녀는 황급히 배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거친 욕설과 함께 남자의 무쇠 다리가 배를 강타했다.‘악!’가슴을 파고드는 고통과 영혼을 떨게 하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백아영은 새우등을 하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아가야, 내 아가...’“괜히 시간 낭비만 했네!”남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욕설을 퍼붓더니 대뜸 명령했다.“유산약 가져와!”“아, 안 돼!”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백아영은 배를 끌어안고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내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줘. 제발, 아이는 내버려둬! 기꺼이 피연꽃의 제물로 될 테니까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제발 내 아이만큼은 건드리지 마.”“어차피 온씨 가문 아이도 아닌데 살려둬봤자 아무 소용 없어. 당장 지워버려.”백발노인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협상의 여지 따위 없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약이 도착했다.시커먼 탕약을 보자 백아영은 아픈 배를 움켜쥐고
이성준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고 어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역시나 온씨 가문과 손을 잡았군.”20여 년 전, 선우 일가를 곤경에 빠뜨린 원흉이 마치 제갈 일가처럼 보였지만 선우정현은 생뚱맞게 온씨 가문에 갇혔다. 따라서 세 가문의 연결고리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제갈연준이 온씨 가문에 등장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대단한데? 대체 모르는 게 뭐야?”제갈연준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 소용 없지. 아영을 구해주겠다고 무작정 달려드는 바람에 결국은 내 손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니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서 커다란 그물이 솟아올라 이성준을 가둬두었다.이성준은 재빨리 단검을 꺼내 그물을 자르고 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빠져나오는 순간 제갈연준이 옆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비수로 그의 배에 푹 찔러넣었다.이내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나왔다.제갈연준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통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이성준, 너 때문에 제갈 일가는 망했어. 꿈에서도 널 갈기갈기 찢어버려 죽이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소원을 이뤘군.”...“온유성, 당신 인간 맞아? 무려 네 친딸이잖아. 얼른 구해주지 않고 뭐해? 네 손자를 구하라고!”선우정현은 애처로운 얼굴로 목이 터지라 외쳤다.하지만 온유성은 말뚝처럼 꼿꼿이 서서 유산약을 억지로 마시는 백아영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뱃속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백아영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이내 뜨거운 액체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아가, 내 아가야! 안 돼! 안 돼!!”그녀는 괴로운 듯 배를 움켜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배 속의 작은 생명체가 점점 사라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안 돼, 내 아가! 우리 아가야, 가지 마. 엄마를 두고 떠나지 마...”결국 백아영은 이성의 끈을 놓았다.“몸조리 잘하고 다음 달에 임신할 수 있도록 준비해.”
행여나 싶은 그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고, 둘 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사람 구하러 간다! 공격해!”밤새 집결한 선우 일가와 이씨 가문 사람들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온씨 가문에 쳐들어갔다.곧이어 독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다.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백아영이 좁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을 때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을 보아하니 벌써 점심이 된 듯싶었다.그러나 독 안개는 없었고,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백아영은 메마른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내 마음속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온씨 가문을 찾았을 때 삼엄한 경비를 몸소 체험했던지라 철옹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뚫기 힘들었다.게다가 어젯밤 그들이 독 가루를 압수한 이상 신속하게 방어 대책을 세웠을 것이기에 독 안개 공격도 무력화될 가능성이 컸다.선우경진이 사람을 구하러 여기까지 온다는 건 사실 큰 희망이 없었다.정신이 맑아질수록 점점 더 절망스러웠고, 백아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기 배를 만졌다. 배에 손이 닿는 순간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난히 싸늘하고 아팠다.철제 침대에 누운 그녀의 볼 위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이틀 후.익숙한 약 냄새와 함께 철 감옥 문이 끼익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또 약을 가져다주는 사람인가?백아영은 눈길도 돌리지 않고 철창 밖의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가 유산하게 된 이유는 약뿐만 아니라 온시혁이 발로 걷어찬 것도 있었다. 내상을 심하게 입은 탓에 약물 치료받아야만 했는데, 아니면 생식 기능조차 잃을지 모른다.자기 몸 상태를 잘 아는 백아영은 일부러 약을 가져다주는 족족 엎질러버렸다.즉, 치료받지 않을 작정이었다.“약 먹어!”누군가 침대맡에 약을 내려놓았고,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백아영은 눈을 번쩍 떴다. 핏발이 가득한 두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고, 한때 제일 사
“성준아...?”백아영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문 열어요! 열라고! 제발 들여보내 줘요.”하지만 온유성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쌀쌀맞은 말투로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사실 이틀 전에 이미 붙잡혔어.”다시 말해서 이성준은 이런 모습으로 그녀의 옆방에서 이틀 동안 누워 있었다는 뜻이다.심지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로!“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데 몇 시간만 더 지체한다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어떻게 하면 성준을 살려줄 건데요? 당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얼른 살려줘요. 제발, 살려달라고!”온유성이 말했다.“몸조리 잘하고 임신 준비해.”몸조리 잘하라는 안부의 말이 지금 상황에서 이처럼 아이러니하게 들릴 줄이야.백아영은 목덜미라도 잡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그녀가 고분고분 밥도 먹고 약까지 마신 덕분에 이성준이 간단한 치료라도 대충 받을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졌다.백아영은 옆방과 닿은 벽에 기대어 앉아 그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렀다.절망으로 가득한 어두컴컴한 곳에서 이성준은 그녀가 살아갈 유일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고, 이미 무참히 짓밟힌 탓에 사느니 죽는 것보다 못한 나날만 남았을 뿐이다. 결국 당장은 하루하루 무미건조하게 보내며 이성준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감금 생활은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흘러갔다.백아영은 고통에 시달리며 얼마나 오랫동안 버텼는지 모르겠지만, 드디어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힘들 때 희미한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아영아...”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했지만, 귀를 찢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백아영은 눈을 번쩍 뜨며 격앙된 표정으로 외쳤다.“이성준? 깨어났어? 이성준, 성준아!”“아영아...”또 한 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끊어질 듯 말 듯 한 어조로 뜸을 들였으나 아까보다 훨씬 뚜렷했다.“괜찮아?”눈을 뜨자마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