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몽환제의 독성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태윤 씨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홀렸으니 말이야.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할 수 있지?’...“쓰읍!”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손등에서 전해지자 백아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물어뜯은 뱀을 물리쳤다.그녀는 밤새 잠을 못 잤고, 또 걱정거리가 많아 뱀을 죽이는 와중에도 계속 집중을 못해 뱀에게 몇 번이나 물렸었다.가죽을 벗기는 작업에서도 실수를 많이 저질러 지석은 홧김에 그녀를 내쫓았다.백아영은 실험실 밖에 서서 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바람의 찬 기운이 너무나도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왜 이곳으로 왔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빚을 갚기 위해서?하지만 뭔가를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잃었다.그녀는 낙심한 채 집으로 돌아갔고 마음이 뒤집히는 고통을 뒤로하고는 이성준에게 밥을 해주러 부엌으로 갔다.칼을 들자마자 이성준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은 왜 그래요?”백아영의 손에는 뱀에게 물려 난 상처가 몇 개 있었다. 아직 피가 흐르는 상처도 있었고, 딱지가 눌러앉은 상처도 있었는데 그녀의 손등은 곳곳에 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다.그는 미간을 구긴 채 걸어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는 물로 헹궈줬다.“해독약을 먹어도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않는다면 뱀독이 남아있다는 걸 몰라요? 흉터도 남을 거라고요.”속상해하고 그녀를 관심해 주는 이성준의 모습에 백아영은 코끝이 찡했다.“아직 내가 신경 쓰이는 거죠? 맞죠?”이성준은 흠칫하더니 눈빛이 흔들렸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연하죠, 아영 씨는 내 친구잖아요.”친구뿐이라고?두 사람은 관계를 확실히 한 적이 없었지만 분명 서로에 대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므로 절대 친구 사이일 뿐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은...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자연스럽게 백아영은 그에게 단지 친구였을 뿐이다.백아영은 이토록
함부로가 아닌 백아영은 제대로 준비하고 갈 생각이었다.새벽에 실험실에서 돌아온 백아영은 역시나 이성준이 방에 없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미리 준비해 둔 은침, 독 가루를 챙기고는 이성준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가는 길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백아영은 그 흔적을 따라 산을 넘어 은밀한 곳에 도착했다.산꼭대기에 인접한 곳에 대나무 집이 여러 채 있었다.대나무 집은 깨끗했는데 분명 누군가가 살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고 말로 이룰 수 없는 괴로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작정하고 찾아온 건 맞지만, 어떤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마주하려고 하니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그녀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발바닥에 통증이 전해지자 가져온 독 가루를 챙기고는 대나무 집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대나무 집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반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달빛이 비쳐 들어와 대충 안의 상황이 훤히 보이기도 했다.대나무 집에는 많은 방이 있었는데 제약실, 서재가 있는가 하면 고문실도 있었다. 고문실에는 여러 가지 형구가 있었는데 말라버린 피딱지가 묻어 있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웠다.백아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설마 홍미주가 저 형구들을 이미 태윤 씨에게 쓴 건 아니겠지? 이미 두 번이나 같이 밤을 보냈으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지...’백아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독 가루를 손에 쥐고 문을 확 발로 걷어찼다.깊은 밤이라 문이 열리는 ‘끽’ 소리가 또렷하게 났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이불도 깔끔하게 개어져 있었는데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두 사람 어디 갔지?’백아영은 미간을 구긴 채 대나무 집에서 뛰쳐나와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그리고 다행히 대나무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발견했다.넓은 호수 위에 한 척의 배가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차가운 달빛이 배 위에 앉은 두
그러니까...홍미주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약실을 둘러보면서 반드시 약을 훔친 도둑을 찾을 기세였다.“당장 안 나와?”백아영은 긴장된 마음에 독 가루를 더 꽉 쥐었다.독 가루는 기습에 가장 적합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홍미주를 제압할 수 있었다.하지만 만약 그녀에게 들켜 정면 승부를 펼친다면 실패할 확률이 70%였다.홍미주가 어디 있는지 모른 채 섣불리 공격을 펼치는 건 너무 위험했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백아영은 이미 물러설 곳이 없었다.“안 나와? 나한테 잡히면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거야.”홍미주는 유독 세게 발음해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제약실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검사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백아영이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갔다.가까워져 오는 그림자를 보며 백아영은 긴장된 얼굴에 숨이 멎은 채 독 가루를 꽉 쥐고는 필사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2m, 1m, 0.5m...백아영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어 공격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이성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요?”홍미주가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이성준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몽환제를 복용해 그녀와 사랑에 빠진 사람은 100% 충성을 다할 것이고 절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점점 멀어졌고 백아영은 이미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홍미주와 이성준이 인기척을 따라 한참을 뒤쫓았지만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이성준은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미안해요.”“아니에요, 태윤 씨 탓 아니죠.”홍미주가 따뜻한 말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대나무 집을 바라보더니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도둑이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그곳에 영원이 있게 해야겠네요.”말을 마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앱을 켜고 작동시켰다.덤덤한 반응을 보였던 이성준의 얼굴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이건 뭐예요?”“도난 방지 시스템이에요.”홍미주가 으쓱해하며 자랑했다.
홍미주가 이 모든 걸 즐길 준비를 마쳤을 때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왜 그래요?”홍미주는 안달 난 듯이 재촉했다.이성준은 뒷걸음질을 치더니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미안해요, 집중이 안 되어서요.”오랫동안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먹기 위해 며칠 동안 굶어 이제 드디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구미가 당겨질 대로 당겨졌기에 홍미주는 1분 1초도 기다릴 수 없었다.하지만 그 음식이 갑자기 치워진 느낌이 들어 홍미주는 화가 치밀어 올라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왜요?”이성준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미주 씨도 알다시피 내가 아영 씨를 배신하고 미주 씨를 사랑하게 되었잖아요. 그 일이 너무 마음에 걸려요. 미주 씨를 가까이할 때면 자꾸 미안한 감정이 생겨요. 다른 여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 미주 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 그건 미주 씨에게 불공평한 일이잖아요.”홍미주는 사실 그의 마음은 개의치 않고 그저 빨리 그의 몸을 탐내고 싶었다.하지만 이틀 동안 그와 같이 지내온 결과 눈앞의 남자는 워낙 보수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몽환제에 중독되었다고 해도 그의 미안한 마음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 이 상황이 더는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걸 홍미주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홍미주는 욕구가 자극되어 1초도 기다릴 수 없었다.잠깐 고민한 후 홍미주는 휴대폰을 꺼내 파일을 하나 열더니 그 안의 내용을 이성준에게 보여줬다.“이거 보내줄게요. 그럼 아영 씨에게 보상으로 보내줘요. 그럼 서로 빚진 것도 없게 되잖아요.”이성준이 보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좋아요.”홍미주는 지체하지 않고 파일을 이성준에게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자기야, 계속하던 거 마저 할까요?”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이성준의 눈빛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더는 부드럽거나 그윽한 눈빛이 아니었다.홍미주는 멈칫하더니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왜, 왜 그래요?”“홍미주, 게임은 여기까지야.”말을 마친 이성준은 홍미주의 목
백아영은 애써 피했지만 결국 궁지에 몰렸다.그녀는 방구석에 붙어 앉아 좌우로 공격하는 철판에 받쳐 들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그녀를 찌르기 위해 과도가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하지만 백아영은 피할 길이 없어 그저 과도가 날아올 때까지 눈뜨고 지켜봐야만 해 절망감에 눈이 빨개지던 이때, 갑자기 창문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창문을 넘고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맨손으로 과도를 움켜쥐었다.피가 그의 손바닥을 따라 세차게 솟구쳤다.백아영은 멍하니 굳어졌다.고개를 들어보니 돌아온 한태윤을 발견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당신이 어떻게...”‘여기로 돌아왔어요?’이성준은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그녀의 크고 작은 상처를 보더니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는 그대로 과도를 구부려 꺾고 백아영을 구석에서 꺼내줬다.같은 시각, 다른 장치가 작동되어 두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안은 채 깔끔하게 몸을 피했고, 또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제약실 뒤쪽으로 뛰어가 바닥에 안착했다. 그곳에는 장치가 설치되지 않았는데 이성준이 장치의 공격을 피하면서 홍미주가 설치한 장치 위치에 근거해 찾아낸 안전 구역이었다.“내일까지 여기에 있어요, 그럼 장치가 모두 멈출 거예요.”이성준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상황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만약 그가 한발 늦게 왔다면 백아영은...그 생각에 이성준은 백아영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꽉 끌어안았다.백아영은 생사를 넘나들었기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지혈약을 꺼내고는 피가 흐르고 있는 이성준의 손바닥을 치료했다.“나 괜찮아요.”이성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지혈약으로 백아영의 몸에 난 상처에 발랐다.약이 상처에 닿자 따끔거리는 감각에 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이성준은 바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타이르며 말했다.“더 살살 할게요.”말을 마친 후 또 그녀의 상처를 후 불어주면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다.이성준의 행동에 백아영은 어안이
이어서 남자의 거친 키스가 퍼부어져 백아영은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이성준이 이럴 때 키스를 하게 될 줄이야...“웁! 아니...”그녀는 겨우 이성준을 밀어내며 말했다.“우리 다쳤잖아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방울 차가운 액체가 그녀의 얼굴에 떨어진 것을 느꼈다.그들이 있는 곳은 달빛이 보이지 않았고 그저 희미하게 서로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하지만 이성준의 얼굴에 흘린 땀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잘 보였다.백아영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왜... 왜 그래요?”그녀는 걱정되는 마음에 이성준의 맥박을 짚었는데 그의 맥박은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었다. 하지만 그 어떤 중독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증세를 보이지 않은 독은 몽환제밖에 없었다.그러면 설마?백아영은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홍미주가 이성준에게 몽환제를 투약했으니 발작해도 그녀가 아닌 홍미주와 사랑에 빠지는 게 맞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이성준은 분명 몽환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성준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또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아영 씨, 할까요?”이성준은 백아영의 얼굴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그의 목소리는 감미롭고도 매혹적으로 들렸다.백아영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그의 숨결이 얼굴에 닿았는데 불처럼 뜨거웠다.그녀는 힘겹게 이성준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태윤 씨, 지금 몽환제에 중독되었어요. 이거 놔요. 내가 해독해 줄게요.”“아영 씨니까 더는 자제하고 싶지 않은데요.”이성준은 백아영을 더 꼭 끌어안더니 입술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그러고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백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영 씨, 사랑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백아영은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온몸이 굳어졌고 남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숨결은 그녀의 온몸을 불타오르게 했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었다.지금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한태윤
그리고 같은 시각, 그들은 실험대 뒤에서 어렴풋이 바짝 붙어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선우경진은 깜짝 놀랐고 현무도 어안이 벙벙했다.“엄마...”“어린애는 보면 안 돼!”선우경진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현무를 잡고는 그의 눈을 막으며 안아 들어 대나무 집을 나섰다.인기척에 잠에서 깬 이성준은 재빠르게 외투로 밖에 드러난 백아영의 어깨를 가렸다.그 소리에 백아영도 잠에서 깨게 되었다.어젯밤에 너무 심하게 들볶았기에 어둠 속이었는데도 백아영은 몸도 마음도 모두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이 들어 그녀는 철저히 이성의 끈을 놔버려 몸이 이끄는 대로 그 상황을 즐겼다.상대가 한태윤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이 뒤섞여서 그런지 그녀는 상대를 이성준이라고 무수히 많이 착각했었다.한태윤을 안고 있는데 마치 이성준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한 번 또 한 번 이성준의 얼굴을 키스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었다.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눈을 떠보니 남자의 쭉 뻗은 쇄골이 보였고 코끝에는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성준아...”그녀가 말을 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밖에서 현무의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불쌍한 아빠. 끝내 한태윤 아저씨에게 당하고 말았네요!”백아영이 흠칫 놀랐다.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는 살을 에는 추위가 느껴졌다.“아영 씨, 왜 그래요?”남자의 잠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살며시 들려왔다.백아영은 그의 목소리마저 이성준과 똑같은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의 남자는 반쪽 가면을 쓰고 있었고, 이성준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은 두 사람이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다만 백아영이 혼자 착각하고 있을 뿐이었다.이런 상황에서 헷갈리게 되니 백아영 자신조차도 도대체 누구를 원하는지 몰랐다.“아영 씨?”그녀
정제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면 연구를 더 진행해 나갈 수 없다.성공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니.실망의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백아영은 꽤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어쩔 수 없죠.”원래 그녀는 몽환제 독약을 챙긴 후 강제로 이성준을 끌고 산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즉 진작에 정제 기술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원하는 일을 결국 모두 이루게 될 거예요.”이성준이 백아영 옆으로 다가가더니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그 위에는 홍미주가 그에게 보낸 파일이 있었다.파일을 발견한 백아영은 두 눈을 반짝였다.“이, 이거, 정제 기술 요점 정리 아니에요?”뜻밖의 선물에 백아영은 잔뜩 신이 났다.“태윤 씨, 이거 어떻게 구한 거예요? 너무 대단한 거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스스로 정제 기술을 공부할 수 있다고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파일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파일을 보낸 사람이 홍미주인 걸 발견하고는 바로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백아영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몽환제에 중독된 것처럼 연기한 것도, 홍미주와 데이트를 한 것도 정제 기술 요점 정리 때문이었어요?”백아영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을 알고는 가슴이 아팠다.“왜 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이성준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당연하죠. 아영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백아영은 감동이 밀려왔다.이 일이 해결된 후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 돌아가는 차에 탔다.백아영은 워낙 많은 일을 겪고 피곤했기에 곧바로 잠이 들었다.이성준은 그녀의 옆에 앉았는데 그녀가 편히 잠이 들 수 있게 품에 안았다.백아영은 또 꿈에서 이성준을 보았다.비틀거리는 산길에서도 그의 품에 안긴 채 편히 잠이 든 꿈 말이다.하지만 눈을 떠보니 눈앞의 사람은 한태윤이었다.그녀는 마치 몸이 두 동강이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머릿속으로는 자기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한태윤이고, 그와의 미래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