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번호를 묻고 백아영은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같은 시각 일 층에 도착한 1번 엘리베이터가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고 안에는 휠체어를 밀고 있는 위정과 앤니가 있었다.그들은 이성준과 함께 남원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앤니가 위정을 도우려고 돌아서는 순간,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백아영을 발견하고선 깜짝 놀랐다.‘젠장, 여긴 왜 또 온 거야!’이성준이 가면을 쓰지 않았고 옆에 위정까지 있으니 아무리 숨겨도 들킬 상황이었다. 백아영이 이 모든 걸 알게 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간다.당황함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르며 백아영을 향해 걸어갔다.백아영은 급히 엘리베이터로 다가갔고 그녀의 시선에는 엘리베이터의 안쪽이 보였다.확인하려 하던 찰나에 앤니가 갑자기 시야를 가리더니 백아영을 세게 밀치며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아영 씨,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죠? 설마 미행했어요? 이제 우리 성준 오빠한테 그만 집적거려요.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말 몇 마디에 순식간에 내연녀가 되었다.백아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혐오스러운 눈길로 앤니를 바라봤다.백채영을 제외하고 그녀에게 앤니는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자 마주치고 싶은 않은 사람이 됐다.앤니의 존재는 시시각각 실패한 이성준과의 사랑을 상기시켰다.또한 주위에 이성준이 있다는 걸 의미했기에 백아영은 주먹을 불끈 쥐고 싸늘하게 앤니를 바라봤다.“앤니 씨, 이성준과의 관계를 끝낸 건 저예요. 계속 만나고 있었더라면 앤니 씨한테 눈길조차 안 줬을걸요? 그러니까 앞길 막지 말고 꺼져요.”백아영은 망설임 없이 앤니를 밀어냈다. 계속하여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무런 타격 없는 백아영의 모습에 앤니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그래도 덕분에 1번 엘리베이터가 닫히면서 2번이 열렸다.백아영이 2번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앤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쌓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쳤다.“백아영 씨, 알고 있겠지만 성준 오빠가
“싫어요!”앤니는 울먹이며 애원했지만 이성준은 안중에도 없었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백아영은 서둘러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남자가 묵고 있는 VIP룸을 찾아갔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순간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안을 들여다보니 방을 청소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발견했다.“저기요, 여기 묵고 있던 사람 혹시 퇴실했어요?”“네.”손님이 퇴실했으니 직원이 들어와서 청소하지 않겠는가? 이건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직원의 대답을 듣자 백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남자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가?“언제 퇴실했대요?”백아영이 포기하지 않고 캐묻자 다행히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답변해줬다.“얼만 안 되었어요. 아마 지금쯤 1층에 계시지 않을까요?”‘방금 갔다고?’휠체어를 타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인지라 남들보다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으니 아직 따라잡을 가능성이 있었다.백아영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갔다.1층에 도착하는 순간 엘리베이터를 뛰쳐나온 그녀는 호텔 로비에서 두리번거리며 휠체어를 탄 남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자 다시 밖으로 달려 나갔다.호텔 밖에는 행인과 차들이 오고 갔지만, 남자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출입구에 서 있는 백아영은 눈앞을 지나가는 사람과 차를 바라보며 속상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또 놓치다니.그를 찾을 기회를 코앞에서 놓쳐버렸다.이 세상에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정녕 인연이 닿지 않아서 구해주지 못한다는 건가?백아영은 호텔 입구의 기둥에 털썩 기대더니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호텔을 나선 남자는 이원을 떠나기 마련이기에 앞으로 80억 인구 중에서 다시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백아영은 한참을 멍하니 입구에 서 있었고, 마음이 텅 빈 듯 공허했다.“손님, 아직도 못 찾으셨어요?”VIP룸을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들고 내려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왔다.백아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넋을 잃은 백아영의 모습을 보자 남자친
백아영이 제경에 도착했을 때 이미 늦은 시간이라 불쑥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므로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찾아갔다.통성명을 마치고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한씨 일가의 가주인 한건우를 만나게 되었다.“아영 씨께서 우리 아들의 병을 치료해주겠다고요?”한건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선우 의가 의술이 뛰어난 건 알고 있지만, 병세가 워낙 위중해서 아영 씨일지언정 치료가 불가능할 지도 몰라요. 괜히 정력이나 낭비하지 마세요.”백아영도 그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만약 혈삼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녀도 포기했을 것이다.“친구로서 아드님을 도와주고 싶어요.”“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세요.”한건우는 도우미를 불러서 말했다.“아영 씨를 셋째 도련님 방으로 안내해.”백아영은 곧바로 도우미를 따라 그의 방으로 향했다.한편, 남원.앤니를 강제로 돌려보낸 이성준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공식적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옆에 서 있는 위정은 산만 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사장님, 다른 방법은 어떠신가요? 교통사고는 너무... 끔찍하잖아요.”차에 치여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이성준이 고통과 피바다 속에서 허덕이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정은 가슴이 찢어졌고, 차라리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본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성준은 슬프지만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이내 다리를 내려다보며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낫지.”적어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킬 수 있으니까.결국에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반신불수의 상태로 침대에 누워 존엄 따위 찾아보기 힘든 식물인간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비록 교통사고 자체는 끔찍하지만, 모두가 납득할 만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위정아, 엄마랑 현무를 잘 부탁해.”이성준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고, 속으로는 미련과 아쉬움이 가득했
게다가 선우경진은 그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훼방을 놓냐는 말이다.선우경진은 이성준을 재빨리 일으켜 세웠고,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그나마 늦지 않게 도착해서 천만다행이었다.“성준 씨, 아직 죽으면 안 돼요. 아영이가 한씨 일가 셋째 도련님 찾으러 갔거든요.”만약 백아영이 한씨 일가 셋째 도련님을 만나게 된다면 휠체어를 탄 남자가 이성준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즉, 바보가 아닌 이상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마련이다.그때가 되면 여태껏 이성준이 저질렀던 몹쓸 짓과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이유도 그녀의 의심을 사게 된다.따라서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전부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이성준이 죽고 나면 백아영은 고통 속에서 허덕일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둘이 만나게 해서는 안 돼요!”반면, 백아영은 한씨 일가 셋째 도련님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도우미가 문을 똑똑 두드리면서 말했다.“도련님, 아영 씨가 도련님을 뵙고 싶답니다.”“누구?”방 안에서 중년 여성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우미는 재빨리 대답했다.“선우 의가에서 온 백아영 씨라고 합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딸칵 열리면서 40대처럼 보이는 아리따운 여성이 나타났다.그녀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아영 씨가 우리 아들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죠?”도우미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셋째 도련님의 어머니인 이나연이라고 귀띔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백아영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아드님을 치료해줄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도움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정말요?”깜짝 놀란 이나연이 서둘러 백아영의 손을 붙잡았다.“우리 아들을 치료해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과 다름없죠. 자, 어서 들어와요.”이나연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강한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거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옷장 옆에 서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곧이어 그가 천천히 돌아섰고, 얼
백아영의 손가락이 맥박에 닿기 직전 남자가 갑자기 손을 뒤로 빼냈다.“필요 없다고 했잖아요.”이내 버럭 화를 내며 호통쳤다.“전 이미 죽음이라는 결말을 받아들였으니까 괜히 저한테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마세요. 아영 씨, 그럼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그는 쉴새 없이 말을 내뱉은 탓에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이내 가면 아래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이를 본 이나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의 등을 두들겨주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아영 씨는 우선 나가주시겠어요?”“전...”의사로서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당연히 치료해주는 게 맞지만, 그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도우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백아영이 방을 나가고 나서 남자는 비로소 가면을 벗었다. 이내 준수하면서 훈훈한 얼굴이 드러났지만,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그는 티슈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침대에 털썩 기댔다.이나연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아들, 선우 일가의 의술은 소문이 자자할 정도란다. 그중에서도 아영 씨는 유독 능력이 뛰어난데, 그런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건 치료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 아니겠어? 대체 왜 거절하는 거야?”이나연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아들은 치료를 기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뒤 수많은 의사가 찾아와서 치료해주겠다고 했을 때 설령 눈곱만큼의 희망일지라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사람이었다.따라서 백아영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엄마, 그분은 절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에요.”방금 그는 이성준과 통화하던 중이었다.백아영의 방문 목적을 전해 듣고 나서 잽싸게 예전에 여행하면서 샀던 가면을 찾아 얼굴을 가렸다.이나연에게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얼른 아영 씨를 설득해서 돌려보내요. 그래도 안 된다면 내 방만큼은 절대 들여보내지 마세요.”이성준이 선우경진에게 치료를 부탁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방금 잠이 들었어요.”이나연은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머뭇거리다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우리 아들을 치료해주러 찾아와서 너무 고마워요. 다만 우리 아들의 상태를 직접 봐서 알겠지만, 고통에 허덕이고 있죠. 이미 희망을 잃고 그 어떤 치료도 받지 않으려고 해요.”백아영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절 돌려보내려는 건가요?”이나연은 제 발 저린 듯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눈 딱 감고 말을 이어갔다.“태윤이가 하루에도 기분이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니 나도 설득할 방법이 없네요. 아영 씨, 미안하지만 혹시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오면 안 될까요?”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두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한태윤의 병세는 심각한 수준이며,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며칠은커녕 한시라도 지체하면 위험할 지경인데 나중에 찾아오라는 이나연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기 마련이다.한태윤의 변화와 치료 거부, 그리고 이나연의 말도 안 되는 설득까지 더해 백아영은 점점 더 의심이 들었다.심지어 크루즈에서 만났던 남자와 한씨 일가 셋째 도련님이 동일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이 속에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단 말인지?백아영은 낱낱이 파헤치기로 마음먹었다.“사모님,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백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나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갑자기 방향을 틀어 한태윤의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아영 씨!”이나연이 아연실색하며 서둘러 쫓아갔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거기 서요!”한태윤은 절대로 백아영을 방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녀가 이대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게 들통나기 마련이다.하지만 악을 쓰고 뛰어가는 사람을, 그것도 한 템포 늦게 출발한 탓에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백아영은 단숨에 그의 방까지 달려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침대에 앉아 있던 한태윤은 갑자기 들이닥친 백아영을 발견하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엄한
백아영을 뒤따라 계단을 올라가던 이나연은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키가 훤칠한 낯선 남자에게 덥석 붙잡혔다.“누구야? 이거 놔... 읍!”남자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방으로 끌고 가서 찰칵하고 방문을 잠갔다.“읍읍읍!”이나연은 겁에 질린 얼굴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이곳은 무려 한씨 일가인데, 어찌 도둑이 들어 그녀를 해치느냔 말이다.설마 또 한태성이 벌인 짓인가?“엄마.”방에 휠체어를 탄 한태윤이 나타났고, 힘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조용히 해주세요.”한태윤을 발견한 이나연은 아연실색했다. 곧이어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오랜만에 보는 기분 좋은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성준 씨가 왔어요.”한태윤이 설명을 보탰다.“이 분은 성준 씨 비서입니다.”위정은 그제야 이나연을 풀어주며 정중하게 사과했다.“사모님, 아까 너무 급해서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세요.”이나연은 원망하기는커녕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성준 씨가 오셨다고요? 너무 잘됐네요! 우리 아들도 임무를 완수한 셈이네요? 그럼 우리 아들을 치료해주는 일도...”위정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미 준비를 마쳤죠. 도련님께서 지금 저와 함께 떠나시면 됩니다. 나중에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거라고 장담하죠. 그전까지 사모님께서 저희 사장님을 잘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이나연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당연하죠.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요.”...백아영은 한씨 일가 셋째 도련님의 병세를 대략 짐작만 하고 있다가 이제야 꼼꼼히 맥박을 짚고 진찰하고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탓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상황이다. 비록 혈삼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나 자칫 잘못 사용하면 사망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오늘 저녁부터 약을 지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드실 수 있도록 할게요.”진정한 수명 연장 효과를 얻으려면 다른 약물의 도움을 받아 약효를 보완해야 하
백아영이 혈삼을 손에 넣은 이상 생명 연장은 물론 어쩌면 진짜 기적이 일어나 구사일생할지도 모른다.만약 그날이 온다면... 다시 백아영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며, 헤어지거나 생이별당할 필요도 없다.방을 나선 백아영은 마침 이나연관 마주쳤고,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안에 말다툼하는 소리가 안 들리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혹시 우리 아들을 설득했나요?”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사모님, 댁에 한약 있나요?”한태윤이 벌써 두 달 남짓 병 치료를 했고, 방안에 진동하는 약 냄새까지 더해 약을 달고 산다는 건 안 봐도 뻔했기에 갖은 약재를 갖췄을 거로 예상했다.약을 짓기 위해서는 한씨 일가에 있는 걸 사용하는 게 가장 편했다.그러나 이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없어요, 필요한 약재를 말해주면 사 오라고 할게요.”백아영은 의아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그럼 이따가 처방전 드릴게요.”“나한테 주면 돼요.”이때, 중년 여성이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을 가로챘다.곧이어 빅사이즈 도우미 유니폼을 입은 중년 여성이 거실 중앙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예의란 찾아보기 힘든 말투로 말했다.“사모님, 회장님께서 식사하시라고 합니다.”이나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네.” “회장님께서 아영 씨도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시니 본채로 이동하셔서 함께 식사하자고 하셨습니다.”머릿속에 빨리 약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백아영은 완곡하게 거절했다.“초대해주셔서 감사하지만, 배가 고픈 게 아니라서 굳이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아영 씨, 셋째 도련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회장님께 치료법을 설명해 드려야 안심하지 않겠어요? 아니면...”중년 여성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회장님도 아무나 지은 약을 셋째 도련님께 함부로 먹이지 않을 거예요.”백아영이 처음 한씨 일가를 찾았을 때 한건우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태윤을 치료하는 걸 찬성하는 분위기였다.하지만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마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