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힘 빼세요. 제가 마사지해 드릴게요. 곧 두통이 완화될 거예요.”여자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지만, 그만큼 낯설었다.‘누구지?’백아영이 천천히 눈을 뜨자 여자의 낯선 얼굴과 처음 보는 방이 나타났다.방안은 로맨틱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로 꾸며졌고, 침대에 누우면 커다란 통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여긴 어디죠?”백아영은 목이 건조한지 목소리가 갈라졌다.여자가 즉시 대답했다.“사모님, 여긴 맨빌 아일랜드입니다.”맨빌 아일랜드는 유럽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평범한 섬인데, 관광 개발을 전혀 하지 않은 탓에 현재 지역 주민만 거주하고 있다.이곳은 마치 지도에 있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마을 같은 느낌이다.백아영도 예전에 제갈연준을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배를 타고 지나쳤을 때 선원의 수다를 엿듣고 나서 알게 되었다.선원이 언급한 이유도 사실 이 작은 섬이 발전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 탄식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섬 주민은 이대로 쭉 가난한 생활을 이어갈지도 모른다.이를 떠올린 백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불안함이 밀려왔다.곧이어 서둘러 물었다.“날 데리고 온 사람은 누구죠?”“당연히 사모님의 남편분 아니겠어요?”여자의 두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다.“사모님이 몸이 안 좋다고 하셔서 남편분께서 일부러 요양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다는데, 정말 사모님을 잘 챙겨주는 것 같아요.”남편? 요양이라니?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한 남편의 인상착의를 물어보려던 찰나 귀에 익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아영 씨, 일어났어요?”회색 정장 차림의 민우진이 손에 방금 딴 꽃다발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백아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외는 없었고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은 역시나 민우진이다.“이곳을 이미 계약했으니까 앞으로 우리 둘의 집이 될 거예요. 저랑 같이 여기서 살아요, 괜찮죠?”그녀를 바라보는 민우진의 눈빛은 꿀이 뚝뚝 떨어졌고,
민우진의 표정은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다.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명했다.“제가 어떻게 아영 씨를 다치게 할 수 있겠어요? 부작용 테스트하면서 컨디션이 나빠져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그래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약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동안 부작용 테스트하면서 체력이 떨어져 컨디션이 나빠진 건 사실이지만 무기력한 정도는 아니었다.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의 사심을 반영한 저가 회복약 탓이 컸다.민우진은 백아영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다이닝 룸에 앉혔다.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오픈형 다이닝 룸에서는 광활한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식사하는 건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그러나 백아영은 전혀 식욕이 없었다.“아영 씨가 좋아하는 설렁탕과 갈비찜을 했는데 맛이 어떤지 먹어봐요.”민우진은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서 백아영의 앞접시에 놓으려고 했다.이때, 백아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우진 씨가 만들었어요?”예전에 민우진이 옆집에 살았을 때 그녀를 위해 요리한 적이 있는데 백아영은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한동안 사이좋게 지냈던 화면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며 민우진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눈앞에 앉아있는 백아영을 보자 더없이 만족스러웠다.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요, 앞으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해줄...”다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목구멍으로 삼켰다.백아영은 문득 요리가 담긴 접시를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그대로 엎어버렸다.음식과 기름이 사방으로 튀자 옆에 서 있던 도우미 두 명이 아연실색하며 뒤로 물러섰고, 의아한 얼굴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 아까는 꽃다발을 집어던지더니, 이젠 요리까지 엎어버려?남편분이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남의 성의를 마구 짓밟냐는 말이다.그러고 나서 백아영은 싸늘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요리를 바라보았다.“우진 씨가 만든 요리가 또 있어요?”민우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이
“무리하지 말고 산책하기 싫으면 돌아가서 쉬어요. 제가 안아서 방으로 데려다줄게요.”백아영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이내 몰래 이를 악물면서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하리라 다짐했다.민우진이 백아영을 데리고 떠난 뒤 두 명의 도우미는 서둘러 바닥에 쏟아진 요리를 치우기 시작하면서 현지어로 투덜거렸다.“이 사모님은 정말 복에 겨워서 좋은 줄 모르나 봐. 이렇게 훌륭한 남편이 얼마나 다정하게 챙겨주는데 웬 난리래? 남편분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조차 없어.”“그러니까, 만약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거야! 그리고 내가 훨씬 더 잘해주겠어!”“아쉽지만 이 분은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민우진은 백아영을 침대에 눕히려고 몸을 숙였는데 거의 바짝 붙어있다시피 했다.한약을 먹는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약초 향이 풍겼는데 여태껏 맡았던 그 어떠한 약재보다 냄새가 좋았다.결국 냄새를 좀 더 맡기 위해 그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입술이 백아영의 목을 향해 점점 다가갔고, 곧 닿기 직전...“저리 가요!”백아영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목을 가리고 얼굴을 반쯤 내놓았다.결국, 민우진의 입술은 건조하고 뻣뻣한 이불에 닿았다.고개를 들자 거부와 혐오로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맞닥뜨렸는데, 마치 괴물을 보는 듯했다.민우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 설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고, 속상함과 아픔만 남았다.예전에 백아영은 이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관계가 더욱 나빠져 친구 사이마저 돌아가기 어려웠다.잠깐의 허탈함을 끝으로 민우진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피식 웃었다.“어차피 아영 씨는 이제 내 거예요.”그는 쭈뼛쭈뼛 이불을 끌어 내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입술로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그녀의 목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백아영은 흠칫하더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관계는 이토록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이성준이 민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이미 텅텅 비었다.사실 심유미와 협력할 때부터 민우진은 사생결단하기로 결심했다. 겉으로는 저가 회복약으로 선우 일가를 곤경에 몰아넣어 모든 사람을 속였지만, 실상은 민씨 가문 사람과 자산을 몰래 빼돌렸다.이제 민씨 가문에서 쓸만한 단서는 남아있지 않았다....“민우진이 이렇게 지독할 줄은 몰랐네요. 가업까지 전부 포기하고 현금만 챙겨서 도망가다니!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네요.”위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민씨 가문에서 사람과 자산을 빼돌린 상황을 조사했지만, 유용한 정보는 입수하지 못했다.그나마 연락이 닿는 민씨 가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이제 어떡하죠?”선우철이 초조하게 물었다.큰 이변이 없는 한 민우진은 백아영을 데리고 이미 출국했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고작 사람 한 명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현재는 민우진의 자금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추적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죠. 모든 자금 흐름을 낱낱이 파헤치면 무엇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위정은 이성준의 서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사장님께서 어느 정도로 조사했을지...”그는 말을 이어가며 서재의 문을 열었고, 눈앞의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사장님? 이게 대체...”위정은 목소리마저 떨렸다.“며칠째 밤을 새우고 계신 거예요?”커다란 서재 안에 무수한 서류가 널브러져 있었고, 프린터기에서도 용지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반면, 이성준은 PC 앞에 앉아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몰골은 이미 말이 아니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채 잘생긴 얼굴도 덥수룩한 수염에 가려졌다. 안색은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창백했고, 핏발이 선 두 눈은 시뻘겠다.백아영이 납치당하기 전에 이성준은 해커를 상대하려고 수많은 밤을 지새웠지만, 지금은 마치 각성한 사람처럼 잠자기를 포기했다.아무리 무쇠 같은 몸을 지닌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쓰러지기 마련이다.“사장님! 이제 그만 쉬세요
비록 말로는 보살펴 준다고 하지만 사실상 감시와 다름없었다.백아영은 속으로 비웃었다. 불필요한 실랑이를 벌일 정도로 체력이 넘쳐나는 게 아니라서 이내 정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어차피 오늘은 도망치기 위해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 차원에서 움직인 것이다.맨빌 아일랜드는 가난한 만큼 으리으리한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가 있는 별장은 섬에서 그나마 제일 괜찮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민우진이 인테리어한 덕분에 이 정도로 좋아졌다.정원은 원래 더 작았는데, 민우진이 2주 전에 사람을 보내 재건축하면서 공간이 확장되었다.그러나 시간이 촉박한 만큼 증축 공사는 절반만 완성했고, 나머지는 아직 진행 중이다.백아영은 아직 담장이 세워지지 않은 공사장을 바라보며 눈빛이 반짝거렸다.저녁에 사람이 없을 때 어쩌면 이곳을 통해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른다.“빨리 공사를 마무리해서 아영 씨에게 예쁜 정원을 선물하려고 일부러 세 팀을 나눠서 24시간 공사하기로 했어요.”이때, 민우진이 공사장에서 걸어 나왔다.몸에 먼지가 묻은 그는 가볍게 툭툭 털어냈고, 다시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갑자기 산책하고 싶어졌어요? 여기는 먼지가 많으니까 나랑 같이 다른 데 가서 산책해요.”그는 손수건으로 손을 깨끗이 닦고 나서 백아영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백아영은 싸늘한 얼굴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고 나서 홱 돌아서더니 다른 방향으로 혼자 가버렸다.민우진이 굳이 24시간 쉬지 않고 공사한다고 언급한 이유는 여기서 도망치려는 그녀의 생각을 단념시키기 위해서였다.이미 공사가 끝난 다른 정원은 환경이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람 키보다 높은 담장에 빙 둘러싸였고, 윗부분에 추가로 설치한 철조망이 보였다.비록 보기에는 날카롭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다치는 것쯤은 감수한다면...“철조망에 전기가 통해요.”민우진은 마치 백아영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영 씨, 괜히 시도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아영 씨를 다치게 하고 싶
어둠 속에서 배전함을 찾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걸 내렸고 밝았던 공사장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뭐야? 정전이야?”“여긴 정전될 리가 없는데? 쇼트 난 것 같은데 내가 한번 가볼게.”작업자 한 명이 배전함을 향해 걸어왔다.그 시각 백아영은 일찌감치 찾았던 담벼락 아래 숨어있다가 슬그머니 풀밭을 밟고 의연하게 위로 올라갔다.철조망의 가장자리는 너무 날카로워서 닿는 순간 피부가 찢어졌고 백아영은 고통을 견디며 계속 위로 올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팔과 다리는 패인 깊이만 다를 뿐 온통 긁힌 상처로 뒤덮인 채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구더기가 몸을 파고드는 느낌 같았다.백아영은 이를 악문 채 끝까지 버텼고 마침내 벽 꼭대기에 올라선 후 과감하게 뛰어내렸다.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2m가 넘는 담장을 뛰어내렸고, 상처가 더 깊어지는 바람에 아픈 몸은 고통 속에서 쉴 새 없는 경련을 일으켰다.그래도 도망쳐 나왔다!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백아영은 이를 악문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계속 밖을 향해 걸어갔고 바닥에는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생겨났다.다행히 이곳은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 있었기에 백아영은 배에 머물고 있는 어부를 발견했다.“실례합니다만, 혹시 밖으로 보내주실 수 있나요?”배에는 백인 중년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일 년 내내 바람과 햇볕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피부가 매우 나빠 보였다.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백아영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알 수 없는 현지 언어로 입을 열었다.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영어로 말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그렇게 한참을 손짓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통증과 피로에 시달린 몸을 안고 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따뜻한 선실에 앉고 배에 시동이 걸리자 긴장감이 풀린 그녀는 마침내 의식을 잃고 잠들었다.그러나 몸에 난 상처가 따끔거리는 바람에 얼마 자지도 못하고 다시 깨어났다.고개를 숙이고 보니 상처 중 일부는 출혈이 멈췄고 일부는 곪아가고 있었다.이곳에서 벗어나면 선우 일가와 이성
“도망치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잖아요. 그저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왜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괴롭혀요. 제 곁에 있는 게 고통스러워요?”“네! 일분일초도 견딜 수 없을 만큼요!”백아영은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문 채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민우진 씨, 당신을 좋아하게 될 일은 죽어도 없으니까 꿈 깨요. 풀어주지 않으면 도망갈 거고 몸이 망가지고 목숨을 잃더라도 절대로 당신 곁에 있지 않을 거예요!”백아영은 민우진이 정신을 차려 이성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다.그러나 그의 집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상처가 아프든 말든 신경조차 안 쓴 채 백아영을 번쩍 안아 올려 섬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내가 아영 씨를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이니까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한번 지켜봐요!”그는 곧장 지하실로 향했고 어둡고 창문 없는 칠흑 같은 방에 그녀를 던졌다.문 앞에 선 그의 표정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아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아요. 그런데 도망치는 건 절대 안 돼요. 이건 제 기분을 상하게 만든 아영 씨한테 주는 벌이니까 여기서 반성하고 나와요!”말을 마친 민우진은 문을 세게 닫았고 그렇게 지하실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다.빛 한줄기조차 없는 어둡고 조용한 곳은 사람이 의지력을 잃기 가장 좋은 환경이다.민우진은 그녀가 현실을 수긍할 때까지 정신적인 고통을 더하며 끝까지 괴롭힐 생각이다!백아영은 어둠 속에 무기력하게 앉아서 옷자락을 찢더니 곪아 터진 상처를 더듬으며 싸맸다.약도 없고 은침도 없으니 감염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처치했다.모든 것을 끝낸 그녀는 이미 고통에 지쳐 기진맥진해 있었고 차가운 벽에 기댄 채 곤히 잠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백아영은 자다 깨다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는 바닥에 앉아 눈을 뜬 채 멍하니 어둠을 바라봤다.처음에는 냉
백아영은 무의식적으로 민우진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웃음을 띠더니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옳지, 착하지.”민우진이 잡으려던 순간 백아영은 그의 손을 뿌리쳤고 눈빛에서는 싸늘함뿐이었다.“우진 씨, 애완동물 길들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죠?”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한 백아영의 목소리는 허스키하면서도 괴상했지만 말투는 단호했다.“우진 씨가 뭘 하던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럴수록 우진 씨를 원망하는 감정만 커질 거예요!”힘을 세게 준 게 아니라서 손은 아프지 않았지만 민우진은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아팠다.그의 얼굴에 걸려있던 흐뭇한 웃음은 어느새 노여움으로 변했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으니까 며칠 후에 다시 올게요.”‘펑’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고 또다시 어둠이 엄습했다.어둠에 휩싸인 듯한 느낌은 숨 막힐 듯한 질식감을 동반했고 백아영은 겁에 질린 듯 벽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얼마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이 흐른 후 방문이 다시 열리며 민우진이 나타났다.그는 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아영을 바라봤다.“아영 씨, 이제는 반성했죠?”반성이라니? 잘못된 건 민우진의 집착인데 왜 백아영이 반성해야 하냐는 말이다!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민우진을 바라봤다.“우진 씨와 함께 할 바엔 차라리 이렇게 갇혀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민우진은 그녀가 이곳에 갇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그 고통을 받으면서도 백아영은 물러서지 않았다.민우진은 답답함에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그녀의 깊은 무기력감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제 곁에 있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잘해주든 감금하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지금 이 순간 백아영은 돌처럼 굳건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고집불통 같았다.“아영 씨,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밖으로 나가게 해줄게요.”민우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백아영이 마음에도 없는 빈말로 그를 속인다고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