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며 또박또박 말했다.“백채영, 절대 가만 안 둘 거야.”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평판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복수를 하리라 다짐했다.증오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백아영의 눈을 보더니 백채영은 문뜩 겁이 나기 시작했다.백아영은 벼랑 끝에 몰린 토끼처럼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 같았다.‘하지만 네가 그래봤자 토끼지, 나에게 대미지를 입히지 못할 거라고!’백채영은 다시 진정을 되찾더니 고개를 높게 쳐들고는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금테두리가 새긴 청첩장을 꺼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날 가만 안 둘 거라고?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이건 나랑 성준 씨의 결혼식 청첩장이야. 다음 달 30일, 나랑 성준 씨는 남원에서 가장 럭셔리한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난 가장 우아한 신부가 될 거라고.”백채영은 청첩장을 백아영 얼굴에 내던지며 말을 이어갔다.“그때면 사람들은 경악하겠지, 성준 씨 전처가 얼마나 악독하고 저질스러운 사람이었는지를. 성준 씨가 너랑 이혼하고 나랑 결혼한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거야.”청첩장은 뾰족한 송곳처럼 백아영의 가슴을 푹푹 찔렀다.쓸쓸한 그녀의 마음은 시린 바람 타고 초라하게 나부꼈다.백아영은 백채영이 왜 지금 자신이 감옥살이했던 일을 폭로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백채영은 그녀의 아픔을 처참히 짓밟고는 자신의 무결함을 드러냄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다.백아영은 분노가 끓어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당장이라도 백채영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선을 넘을 수 없었다. 백채영이 떠날 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반짝반짝 빛나는 청첩장을 보고는 코끝이 찡했다.착잡한 마음에 그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백아영...”민우진은 한참 수소문한 끝에 백아영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다급하게 찾아왔다.그는 계단 복도에서 백채영과 백아영의 대화를 모두 듣게 되었다.
오도연은 오재문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백아영을 도발하는 듯이 당당하게오재문에게 찝쩍댔다.그러다가 오도연은 재수 없게 무너진 가로등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그녀는 워낙 많은 피를 흘렸고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백아영은 개인적인 원한을 뒤로하고 최선을 다해 응급처치를 하고 그녀의 목숨을 지켜냈다.하지만 오도연은 의식을 되찾은 후 백아영이 ‘작정하고 팔을 못 쓰게 만들었다’ 는 소식을 듣고 백아영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다.오도연은 손해배상금을 모두 거부하고 백아영이 감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백아영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오도연과 떼내려야 떼낼 수가 없는 관계가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갈등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오도연이 아무리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백아영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있던 오도연의 얼굴을 보고 백아영은 흠칫하더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2년 전 기고만장하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지금 앙상하게 말랐고 얼굴도 혈색 없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랫동안 영양 부족과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한쪽 손으로 음식이 담겨있는 커다란 접시를 빠르게 손님이 있는 테이블에 옮겼다.그러고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가고는 다음 음식을 내오곤 했다.그녀는 이마에 땀이 나도록 분주했는데 여전히 식당 사장에게 혼나야 했다.“오도연 씨, 한 번에 접시 하나밖에 나를 수밖에 없는 탓에 이미 다른 사람보다 느린데 빨리라도 뛰어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 잘리고 싶어서 그렇게 늦게 뛰는 거예요?”“오도연 씨가 불쌍하기도 하고 일당도 3분의 1만 요구하니 내가 쓰는 것이지, 아니면 오도연 씨를 왜 쓰겠어요?”“더 빨리 뛰어요! 조금이라도 늦게 달린다면 곧바로 잘릴 줄 알아요.”이렇게 혼나면서도 오도연은 화를 내기는커녕 연신 사과를 하며 사장의 말대로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문밖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백아영은 마음이 착잡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오도연을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백아영, 이거 가짜 맞지? 왜 가짜 내역을 만들어 날 속이려고 하는 거야?”“오도훈이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백아영은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오도훈은 돈만 밝히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부모를 일찍 여읜 탓에 오도훈은 오빠로서 어린 여동생을 보살펴야 했었는데 그는 이웃들이 종종 보내온 음식을 뺏어 먹으면서 동생인 오도연을 굶기곤 했다.나중에 오도연이 의대에 합격하고 대성할 것 같으니 오도훈은 그제야 오도연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그래서인지 오도연은 그래도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과연 좋은 사람이 맞는지 이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했다.감기에 걸려도 오도훈은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주며 관심을 보였지, 돈이 아까워 약 한 번 사주질 않았다.그런 반면, 오도훈은 종종 여자친구를 데리고 고급 레스토랑으로 가곤 했다.그녀가 사고 나고 팔이 절단된 후, 오도훈은 그녀가 다신 의사가 될 수 없는걸 알고 갑작스럽게 태도가 급변했다.상처 때문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와도 그는 처치하는 일절 도와주지 않았다.심지어 상처가 제대로 낫기도 전에 그녀더러 돈을 벌어오라며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도연은 단 한 번도 오빠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녀 몰래 배상금을 받고 그녀가 번 돈까지 받아 가며 말이다.“쿵!”오도연은 넋을 잃은 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아무래도 충격이 큰 모양이다.백아영이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백채영과 내가 어떤 사이인지 너도 잘 알잖아. 걔는 내가 평생 감옥살이를 할 것을 원할 거야. 하지만 왜 네 오빠에게 배상금을 줬겠어?”“정말 그 돈이 배상금이라고 생각해? 그 뒤에 어떤 거래가 오갔을 수도 있잖아.”백아영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상황을 유도했다.“네가 정신을
“2년 전 그날, 내 팔을 못 쓰게 만든 사람은 백아영이 아니라 백채영이었지?”오도연은 어금니를 깨물며 물었다.“네가 그걸 목격해서 백채영한테 돈을 받은 거지?”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오도연이 알고 있으니 오도훈은 가슴이 철렁했다.게다가 이체 내역까지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오도연, 그 입 다물지 못해? 백채영 돈을 받은 건 맞아. 하지만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너 다른 사람한테 이 일을 뻥긋하기만 해봐. 그랬다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오도연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내가 지금 이 지경으로 되었는데 죽는 걸 두려워할 줄 알아?”“오늘 이 일을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이체 내역을 언론사에 보낼 거야. 너랑 백채영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이야.”“짝!”분노에 차오른 오도훈은 오도연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X발, 너 미친 거야?”오도훈은 힘을 잔뜩 실었기에 오도연의 입가에는 피까지 났다.하지만 이는 오도연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그녀는 휴대폰으로 이체 내역을 사진 찍고는 언론사에게 당장이라도 메시지를 전송할 기세였다.“제대로 말할래, 말 안 할래?”오도훈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그래, 말할게.”그는 바닥에 침을 한 번 뱉고는 말을 이어갔다.“네가 다친 그날, 내가 사건 현장에서 백채영을 봤어. 내게 돈을 주며 자기를 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오도연이 따져 물었다.“그냥 사건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 왜 돈을 몇 번이나 보내줘? 날 해치는 걸 너도 봤지?““아니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그런데 왜 굳이 숨기려는지 나도 몰라. 아무튼 돈 주니까 그냥 주는 대로 받았어.”“그런데 1억 가지고 뭘 할 수 있어? 그래서 또 찾아가서 겁을 줬지. 돈 안 주면 모든 걸 다 밝힌다고. 그래서 백채영이 계속 나한테 돈을 보냈던 거야.”“돈 주는 대로 받았다고?”오도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백채영이 아무 짓도 안 했다면 왜 계속 너한테 협박을 당한 건데? 내가 팔을 못 쓰게 된 게 백채영
성유비는 바로 휴대폰을 백채영에게 건네고는 말했다.“언니, 이 기사 봐봐요. 녹음에서 들린 얘기는 언니를 모함하는 거죠? 사실 아니죠?”기사를 빠르게 읽은 백채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오도훈이 내가 돈을 줬다는 사실을 얘기했어? 그것도 녹음되어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잖아!’“언니, 지금 사람들이 모두 오도연을 해친 사람이 언니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거 모함 맞죠?”성유비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언니는 워낙 착한 사람이라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맞죠?”백채영은 찔린 마음에 휴대폰을 움켜쥐었다.당시 그녀는 백아영이 구조 대원을 데리러 간 틈을 타 몰래 오도연이 다친 부분에 손을 썼다. 그러면 백아영은 고의 상해죄의 죄명을 덮어쓰게 될 것이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오도훈을 발견했다.오도훈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고 생각해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오도훈을 이끌고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에게 1억 원을 주고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다.돈에 눈이 먼 오도훈은 바로 승낙했다. 나중에 경찰이 조사할 때도 이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그 병신은 왜 오도연에게 지금 말한 거야? 그래도 내가 오도연을 해쳤다고 말을 안 했으니 다행이지. 혐의만 받고 있는 셈이네...’“어머님, 유비 씨, 제발 나 믿어줘요. 정말 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에게 제가 왜 그랬겠어요?”백채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도훈 씨에게 돈을 줬던 건 사실이에요. 그들은 백아영의 배상금을 일체 거절했단 말이에요. 도연이가 팔을 잃은 게 너무 불쌍해서 오도훈 씨에게 돈을 줬어요. 그런데 오도훈 씨가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네요.”이윽고 백채영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마치 불쌍한 마음에 선행을 베풀었는데 배신당한 사람처럼 말이다.성유비는 워낙 백채영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의심 없이 백채영을 믿었다.“오도훈이라는 사람이 정말 배은망덕한 거네요. 언니, 울지 말아요
역시 이성그룹 다웠다. 그들은 빠르게 기사를 내렸다.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각 매체와 여론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사장님, 아무래도 민우진 씨가 뒤에서 소식을 퍼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사를 내려도 열기가 식지 않습니다.”위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기사를 더 내려도 의미 없습니다. 백채영 씨가 사장님과 결혼을 해도 반드시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 있을 겁니다.”“지금 여론이 완전히 잠잠해지게 만드는 방법은 해명밖에 없습니다.”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성준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그럼 해명하라고 해.”“지금 해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2년 전 당사자의 담당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2차적 피해가 없었다는 걸 증명하게 되면 백채영 씨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위정은 한참 주저하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담당의가 고 선생님이시라... 아시잖아요, 만만치 않은 분이시라는걸...”고 선생님은 명문 가문 출신이라 냉철하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이었다.그에게서 2년 전의 병력서를 얻어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로 힘들었다.하지만 이씨 가문과는 어느 정도 인연이 있었기에 이성준이 직접 가서 부탁한다면 고 선생님은 그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이성준은 조금씩 짜증이 몰려왔다.그는 시간을 이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곧 백채영과 결혼하게 되니 스캔들은 막아야 했고...이씨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그는 꼭 가야만 했다....민우진 때문에 백채영의 일은 열기가 식지 않았다.같은 시각, 백아영은 고 선생님을 찾아갔다.2년 전 오도연의 진단서가 나오자마자 백아영은 용의자로 선정되어 바도 경찰서로 향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그녀는 심문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백채영이 도대체 오도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채영이 한 짓을 알아내는 건 그녀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하지만 병원에 들어서고 진단서 요청을 하자마자 그녀는 고 선생님
그녀의 앞길을 막아버린 간호사를 보고 백아영은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성준아!”그녀는 다급하게 이성준에게 달려가며 말했다.이성준은 흠칫했지만 여전히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싸늘한 태도에 백아영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고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성준에게 부탁했다.“성준아, 나도 고 선생님을 찾으러 왔어. 중요한 일로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나까지 데리고 올라가면 안 돼?”기대에 찬 백아영의 눈빛을 보면서 이성준은 싸늘하게 대답했다.“안돼.”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백아영은 멍하니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이성준의 말은 그녀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이혼하더니 왜 저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졌어!’이성준이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자 가까 그 간호사는 또 그녀에게 다가왔다.백아영은 급한 마음에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달아갔다.너무 빨리 뛴 나머지 하마터면 이성준과 부딪칠 뻔했고 이성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스치자 이성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미, 미안해.”백아영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서고는 연신 사과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거의 닫혔던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급하게 달려온 간호사에 의해 열렸다.간호사는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백아영을 보며 말했다.“이봐요, 올라가면 안 된다니까요. 이제 그만 나와주시죠, 아니면 저 경비원 부를 거예요.”간호사는 엘리베이터로 들어와 백아영을 끌어내려고 했다.지금 쫓겨난다면 백아영은 고 선생님을 만나 뵙기는커녕,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오기도 힘들어질 것이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성준의 팔을 붙잡았다.“성준아, 나 진짜 엄청 중요한 일로 고 선생님에게 여쭤봐야 해. 내 앞날이 걸린 문제야. 제발 나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부탁할게.”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이성준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냉정한 사람이었다.이혼하면 두 사람은 남남
이성준은 백아영과 함께 고 선생님의 사무실로 향했다.고 선생님은 환한 얼굴로 이성준을 맞이했으나, 백아영을 본 순간 얼굴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당신은 왜 여기까지 올라온 거예요? 당장 나가요!”고 선생님이 또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자 백아영은 다급히 설명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이성준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 저도 마찬가지로 2년 전 오도연 씨의 진단서 때문에 찾아왔어요. 같은 일로 왔으니 이 사람도 듣게 해주세요.”“성준아, 하지만 나는 절대 진단서를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아.”이성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아버님, 이 일은 미래 이씨 가문 사모님의 명예가 달려있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고 선생님도 최근 이슈가 된 백채영 기사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 이성준과 백채영이 곧 한 달 뒤에 결혼식을 올릴 걸 알고 있었다.이씨 가문에서는 미래 며느리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씨 집안은 이씨 집안에 신세를 진 적도 있고, 또 이성준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고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이번 한 번뿐이야!”고 선생님은 얼굴이 굳은 채로 진단서를 가지러 갔다.결국 이성준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원하던 바를 이뤘으니 백아영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10분 후, 고 선생님은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 오고는 안에 들어있는 자료를 그들에게 보여줬다.“1차적 피해를 제외하고는 침구 치료를 받은 흔적밖에 없어. 덕분에 출혈을 막고 환자 상태가 안정되었으나...”고 선생님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침을 놓은 자리를 바꿨기에 환자는 팔을 하나 잃어야 했어.”“젊은 나이에 의술도 뛰어난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작정하고 사람을 해치려 마음을 먹었을까?”백아영은 진단서를 보더니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그녀는 바로 백채영이 그녀가 침 놓은 자리를 바꿔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백채영은 침구 요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그녀는 침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