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은 축사, 덕담 등 잡다하게 진행됐고 어느새 30여 분이 지났다.시간을 따졌을 때 이쯤이면 이성준은 기력을 되찾고 춘란과 함께 마을을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어느덧 맞절의 순서가 다가왔다. 비록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식에서 서로 맞절했다는 건 다른 의미에서 이 관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기에 그와는 더더욱 맞절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백아영은 이성준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야 했다.“신랑 신부의 맞절이 있겠습니다.”백아영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굽히려 했다. 오늘 밤에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적이었지만 다른 한편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맞절의 역겨움도 금방 사리질 거란 희망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자, 신랑 신부 맞절.”사회자의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가 울렸고 바보 아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맞절하면 내 마누라가 된다. 헤헤.”백아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허리를 굽혔다.“백아영, 하기만 해봐!”갑자기 분노에 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심장이 찌릿하며 떨려온 백아영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뒷마당에서 걸어 나온 이성준을 발견했다.그는 여전히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있었고 곳곳에 난 상처는 딱지가 앉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분노와 살기를 내뿜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백아영은 넋을 잃은 채로 그를 바라봤고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왜 도망 안 갔지? 도대체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의사는 적어도 3일이 지나야 깨어날 수 있고 완전히 몸을 일으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멀쩡하게 서 있는 이성준의 모습에 아주머니 역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의사의 소견만 듣고 무방비 상태로 그를 혼자 방에 내버려뒀다. 그런데 하필 맞절하는 관건적인 순간에 나타나다니!아주머니는 곧바로 호통을 쳤다.“백아영 씨 스스로 제 아들과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깨어나니까 더 좋네요. 친구의 결혼을 지켜볼 사람이
석양이 지자 두 사람의 그림자는 담벼락에 비쳤고 서로를 꼭 끌어안는 모습은 눈부시게 빛났다.이성준과 백아영이 진짜 부부든 아니든 결혼식장에서 신부에게 입을 맞춘 것만으로도 신랑 일가에서는 더 이상 백아영과 결혼할 면목이 없게 된다.아주머니는 노발대발하며 입을 열었다.“빌어먹을 것들. 감히 내 아들의 결혼식을 망치다니! 대철아, 당장 저 사람들 잡아. 오늘 죽여버릴 거야!”대철은 아주머니의 큰아들로, 나이는 서른이 넘었고 체구가 커서 유난히 험악해 보였다. 그는 곧바로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거닐고 이성준을 향해 돌진해 왔다.이성준은 아쉬운 듯 입맞춤을 멈췄고 고개를 들더니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대철의 배를 걷어찼다.그의 발차기에 몇 미터 날아가 바닥에 쓰러진 대철은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었다.이성준은 한 손으로 백아영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벽 모퉁이의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고, 곧바로 싸움을 이어갔다.부상입고 상처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건장한 청년들은 때려눕히는 그의 잔혹함에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서로 돕겠다며 나서려던 사람들은 바닥에 하나둘씩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에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서더니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죽고 싶으면 덤벼!”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들을 바라보며 건방지게 한마디 말을 남기더니 백아영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쿵!문이 닫히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그 시각 방안에 들어온 이성준은 힘이 빠진 듯 그녀를 향해 쓰러졌다.“성준아!”백아영은 황급히 그를 껴안고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그제서야 핏기 없이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발견했다. 숨결마저 점점 약해져 갔고 몸에 난 상처는 터져버려 피가 쉴 새 없이 흘러왔다.방금 엄청난 힘으로 싸운 건 전부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백아영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졌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그러게 왜 돌아온 거야? 춘란이랑 같이 이 마을에서 벗어났으면 안전했을 텐데!”이성준은 그윽
“잠깐만, 배가 왜 이렇게 아프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저도 배가...”“대철 엄마, 여기 음식이 상한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금방이라도 들이닥칠 듯 기세등등해서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통스럽게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향했다.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문은 금세 조용해졌다.백아영은 바깥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폈고 마치 전쟁을 끝낸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가 아파서 다행이네, 안그러면...”고개를 돌리자, 생각보다 담담한 이성준의 모습에 뭔가 깨달았다.“설마 음식에 뭐 넣었어?”“설사약.”백아영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제 생각해 보니 깨어났을 때 바로 나타난 게 아니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간 동안 약을 탄 게 틀림없다.비겁한 방법을 사용한 건 맞지만, 덕분에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백아영은 방 안의 약초를 끌어모아 은침과 함께 이성준의 상처를 치료했다.안 그래도 부상을 심하게 입은 상황에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하자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몇 시간이 지난 후, 설사약은 어느새 약효를 잃었고 문밖에서는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아주머니는 욕설을 퍼부으며 사람들을 모아 들이닥칠 계획을 짜고 있었고 낡아빠진 문은 삐걱삐걱 소리내기 시작했다.백아영은 신경이 곤두섰다. 이성준에게 놓았던 은침도 이제 효과를 잃어가고 전투력도 바닥났다.이 상태로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면 그녀와 이성준은 맞아 죽을 게 분명했다.도망칠 기회조차 없었기에 1초라도 더 버티자는 생각으로 서둘러 방 안에 있던 탁자와 장롱으로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았다.그렇게 간신히 30분을 버티다가 결국 인원수에 밀려 문과 장롱이 함께 쓰러졌다.백아영마저 중심을 못 잡고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 누군가가 안정감 있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이성준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생했어.”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절망으로 가득 찼다.문이 열렸으니 이제
기세등등하던 아주머니마저도 시퍼렇게 멍이 든 채 누워있었고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백아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먹였다.“우리 살았어...”“응.”이성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말했잖아. 내가 있는 한 그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다고.”그는 몰래 설사약을 넣을 때 주방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아 위정에게 위치를 보냈고 몇 시간 동안 위정이 사람을 데리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백아영은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봤다.“성준아, 우리... 성준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성준은 그녀의 몸 위로 쓰러졌고 아마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백아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다급하게 외쳤다.“위정 씨, 성준을 침대로 옮겨주세요. 제가 치료할 테니까 얼른 구급상자도 가져와요!”위정이 막 가지러 가려던 참에 문 앞에 나타난 백채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백채영은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침대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냈다.“백아영, 넌 진짜 왜 그러냐? 네가 성준 씨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자격으로 치료한다는 거야? 저리 꺼져!”아직 상처가 완벽하게 치료되지 않은 백아영은 바닥에 쓰러지며 상처가 터졌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아파할 겨를도 없이 혼수상태에 빠진 이성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많이 다쳤어. 지금 당장 치료해야 해. 내가 할게...”“이사람 다친 건 내가 사람 구해서 치료할 테니까, 너랑은 아무런 상관없어!”백채영은 침대 곁으로 가서 이성준을 품에 안으며 그녀를 위협했다.“앞으로 성준 씨한테서 멀리 떨어져! 만약 다시 한번 귀찮게 매달리고 힘들게 만든다면 내가 널 죽여버릴 거야!”말이 끝나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방으로 들어와 재빠르게 이성준을 옮겼다.“백아영, 며칠 후면 우리 결혼식이야. 그러니까 똑똑히 기억해. 저 사람은 내 약혼자고 내 남편이야!”백채영의 눈빛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그녀를 찔렀다.“그 사람이 널 구한 건 그냥 동정심이야. 염치가 있다면 다시는
백아영은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우진이 달려왔다.그는 며칠 동안 필사적으로 그녀를 찾으러 다니며 걱정되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상처투성이가 된 채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민우진은 가슴이 아파왔고 성큼성큼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는 목이 메어 울컥하며 입을 열었다.“아영 씨, 미안해요. 산속까지 알아보며 좀 더 일찍 찾아냈어야 하는데.”조금이라도 빨리 발견했으면 이렇게까지 다치지도 않았고, 하마터면 목숨마저 잃을뻔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민우진에게 안긴 백아영은 적응이 안 됐는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게 어떻게 당신 탓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심각한 거 아니니까 며칠 지나면 금방 나을 거예요.”민우진은 그녀의 병세를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되어 마음을 놓았다.“누가 그곳으로 데려갔어요?”“노경우.”백아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백채영 전 남자친구예요.”서로 아무런 원한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그녀를 죽인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백채영이 떠올랐다.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민우진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눈빛에서는 싸늘함이 느껴졌다.“제가 사람 시켜서 한번 알아볼게요.”“당신은 이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 노경우 지금 살인 혐의로 수배 중이어서 자극한 순간 무슨 짓이든 저지를 사람이에요. 이 일은 경찰한테 맡겨요. 전 당신이 다치는 걸 보고싶지 않아요.”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민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숨긴 채 몰래 알아볼 계획이었다.백아영의 목숨을 위협한 사람을 이렇게 가만둘 수 없었다!“아영 씨, 지금 백채영뿐만 아니라 노경우도 호시탐탐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손 안 쓸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남원에 남아있는 건 정말 위험한 것 같아요.”민우진은 진지하게 제안했다.“내일 당장 남원을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민우진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성준을 만날 수 없더라도 내일 당장 떠날 결심을 내릴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계속 남원에 머무르는 건 변수가 너무 많다.민우진은 더 이상 백아영에게 사고가 생기는 걸 용납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성준과의 만남이 그녀의 마음속에 낙인을 남겨 마음이 커지는 걸 더 용납할 수 없었다.어떻게서든 백아영을 이곳에서 떠나게 만들어야만 한다.잠깐 생각에 빠진 그는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아영 씨가 직접 이성준을 만나 안부를 확인할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볼게요. 다만 확인한 후 바로 남원을 떠날 거라고 약속해 줘요.”이성준을 만나 그의 안부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걱정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이씨 일가의 개인병원, 백아영과 민우진은 청소부 옷을 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 독채인 VIP 병동으로 향했다.“이성준은 1층에 있어요. 미리 확인했으니까 지금 들어가서 청소한다면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사전에 이곳의 상황을 모두 파악한 민우진은 백아영을 데리고 목적지를 향해 다가갔다.그러나 병실 입구에 도착하려던 찰나 백채영이 이영철과 오미란을 데리고 오는 걸 보았다.“지금 들어가면 안 돼요.”민우진은 재빨리 백아영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병실 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성준은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고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백아영은 심장이 무언가에 눌린 듯이 가슴이 아팠다.민우진은 그녀를 데리고 독채에서 나와 외벽을 따라 꽃밭으로 들어갔다.“저 앞에 있는 창문이 이성준 병실이에요. 일단은 밖에서 엿들으면서 상황을 지켜봐요.”이영철과 오미란이 왔으니 틀림없이 이성준의 병세를 얘기할 거고, 그걸 듣고 백아영이 마음을 놓을 수만 있다면 이것 또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민우진을 따라 창가로 걸어가자, 뜻밖에도 이성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아픈 곳 없어요.”‘깨어난 거야?’백아영은 기쁨을
이성준이 곧 결혼할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동고동락한 시간이 무색하게 다시 한번 두 귀로 똑똑히 확인한 백아영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모든 잡념이 씻겨 내려가 오로지 씁쓸함만 남았다.공허한 마음속엔 자조뿐이었다.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이지? 애초에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야 했다.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백아영을 보자 민우진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내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말투만큼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컨디션은 괜찮나 봐요, 이제 갈까요?”“...네.”백아영은 창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마치 환영처럼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운명의 장난에 놀아났을 뿐, 이제 꿈에서 깼으니 그녀도 떠나야만 했다.백아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고 뒤돌아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그녀가 떠나는 찰나 이성준은 본능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병원을 떠나 민우진은 백아영을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갔다.“아영 씨가 실종된 날에 짐을 몽땅 우리 집으로 가져왔는데, 괜찮죠?”민우진이 그녀의 짐을 잃어버리지 않게 대신 챙겨줬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오히려 고맙죠. 아니면 빈손으로 남원을 떠날 뻔했다니까요? 안 그래도 가진 게 없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네요.”민우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빈손으로 떠나진 않을 거예요.”이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는데 볼록하게 뛰어나왔다. 손바닥 안에는 평생 단 한 번만 주문 제작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남원을 떠나는 그 날 민우진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계획이다.백아영은 민우진이 짐을 가리키는 줄 알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거리의 풍경을 내다보았고, 마음속으로는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씁쓸함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이번에야말로 진짜 이 도시를 떠나는 건가...?곧이어 차는 별장 앞에 천
지하실에서 목격했던 허수빈의 악독하고 매정한 모습은 마치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았고, 엄마에 대한 모든 환상을 깨부쉈다. 그녀는 평생 다시는 허수빈을 마주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다.이 말을 듣자 허수빈은 흐느끼기 시작했다.“아영아, 엄마가 지하실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실수할 때가 많아. 하지만 네가 찾아왔던 그날은 멀쩡했어. 당시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는데 그 자리에서 감히 내 딸이라고는 못했거든. 괜히 나 때문에 너도 선우 일가에 연루될까 봐 겁이 났어.”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그래서 선을 긋기 위해 잔인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해야만 널 지키지 않겠어?”생각지도 못한 변명에 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하지만 그날 악을 쓰는 허수빈의 모습은 절대로 연기는 아닌 듯한데...“아영아, 엄마 믿지? 우린 피와 살을 나눈 혈육인데, 내가 어찌 널 싫어할 수 있겠어? 만약 정말 널 미워했다면 네가 무사히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 갖은 수를 써서 보육원에 보내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말을 이어갈수록 허수빈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아영아, 이런 엄마를 용서해줄래? 혹시 기분이 상했다면 엄마를 욕하고 때려도 좋아. 다만 제발 못 본 척하지 말아 줘.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족은 너뿐이니까.”마지막 한 마디는 백아영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렸다.그날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을 지우고 싶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수빈의 눈물을 차마 외면하지는 못했다.갈등과 망설임 때문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허수빈은 곧바로 다가가 백아영의 손을 잡았다.“아영아, 네가 어렸을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지만 앞으로 최대한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게. 이제 더는 떨어져서 지내지 않아도 돼.”비쩍 마른 허수빈의 손가락은 뼈마디만 남아서 아플 정도로 딱딱했고, 애정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반감만 들었다.백아영은 친어머니와 같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느낌이 과연 맞는 건지 짐작이 잘 안 갔다.결국 그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