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의 손은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고, 지아를 곁에서 잃어버린 시간 동안 지아와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이 되었다.비록 물건을 올려보내기 전에 청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규칙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진행자가 첫 번째 상품을 소개할 거라는 말을 듣고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였지만 지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나 도윤의 생각대로 조이는 지아를 마지막에 보낼 것 같았다.팔걸이를 움켜쥔 도윤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시간이 1분 1초 지날수록 미리 엄청난 물건이 온다는 예고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모두들 앞에서는 크게 흥분하지 않고 피날레에 집중했다.도중에 하빈은 도윤에게 물을 여러 번 건넸지만 도윤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마지막 피날레가 되자 조이가 직접 무대에 올랐다.조이는 타이트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그런 관능적인 모습에 남자들은 눈을 크게 떴고 몇몇은 아래에서 휘파람을 불었다.조이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악한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밤새워 기다리셨으니 다들 궁금하실 텐데, 오늘 밤의 피날레를 바로 공개하겠습니다.”조이가 박수를 치자 그녀의 부하들은 검은색 커튼으로 덮인 거대한 물건 두 개를 밀고 들어왔다.도윤의 가슴이 조여왔다.“질질 끌지 말고 얼른 보여줘.”“그래, 하루 종일 저것만 기다렸다고. 빨리 물건 올려.”조이의 시선이 가면을 훑어보던 중 도윤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남자는 사람들 한가운데 앉았고, 얼굴 전체를 가면으로 가려서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었다.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이겼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인 것 같았다.멀리서 봐도 도윤의 몸에서 나오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왠지 모르게 조이는 지금 눈앞의 남자가 신비한 거물의 아우라를 풍기며 자신이 상상하던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미 상황은 오래전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조이는 보스가 배에 없지만 배
도윤은 심호흡을 하고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모녀는 화려하고 빈티지하며 섬세한 긴 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은색 체인과 어우러져 특별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가리지 않은 소망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커다란 스크린에 드러났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천사 같은 얼굴에 매료되었는지 모른다.약을 먹지 않은 아이의 큰 눈이 맑고 또렷했다.머리에는 크리스털과 깃털로 장식한 헤어 액세서리로 이국적인 공주처럼 꾸몄다.천진난만한 눈망울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듯 울지도 않으며 마치 늑대 굴에 들어온 호기심 많은 사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분홍빛이 도는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고 도윤은 스크린을 통해 아이의 입 모양을 보았다.“엄마, 삼촌.”도윤의 손은 이미 무기를 만지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즉시 무기를 뽑아 들고 조이를 공격하고 싶었다.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쁜 어린 소녀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심지어 이미 컬렉션에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고, 사서 데리고 가 몇 년 더 키워 애인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변태적인 사람들도 많았다.게다가 일부 사람들은 어린 소녀가 너무 예뻐서 엄마는 더 예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지아는 소망처럼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고, 철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도윤은 망할 자식이 지아에게 약물을 사용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지아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조이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과장 하나도 보태지 않고 이 여자는 제가 봤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어요! 시공간을 넘어 이 땅에 도착한 요정 같죠. 그러니 오늘은 색다르게 놀아볼까 합니다. 경매를 시작하기 전 다들 이 여자의 가면을 벗겨보고 싶지 않나요?”다들 의견이 분분했고 심지어 조이가 지나치게 밑밥을 깐다고 욕설을 퍼부었다.욕설은 차치하고서라도 지아의 이런 전략은 모두의 흥미를 자극했다.아이가 이렇게 예쁘니 여자는 얼마나 예쁠지 다들 상상이
조이는 도윤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도윤은 분명 지아가 가면을 벗고 다른 남자들이 지아의 얼굴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도윤이 돈을 내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지불해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공개를 위한 첫 단계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2억은 기본 가격이자 조이가 도윤의 경제력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단 한 번의 키스였고, 뒤로 갈수록 비용은 적지 않은 금액일 텐데 도윤이 무슨 수로 돈을 꺼내겠나?하지만 뒤의 경매를 위해 그 돈을 아꼈다가 지아는 다른 남자와 키스할 것이다.도윤이 무엇을 선택하든 조이는 그를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하지만 조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윤이 난 놈이란 사실은 간과했다. 도윤에게 사랑이 부족하다 할지언정 돈이 부족하단 말은 못 한다.이씨 가문은 백 년의 가업을 이어온 데다 어릴 적부터 사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도윤의 집안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이었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돈을 다 합친다 해도 도윤은 감당할 수 있었다.단순히 경매는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도윤은 저 여자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려 자신에게 방해 공작을 할까 봐 걱정이었다.2억부터 시작한 가격은 자리에 있는 90% 사람들을 거르고 시작했다.배에 탑승한 사람들은 꽤 부유하지만 얻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키스를 사기 위해 멍청하게 2억이나 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돈으로 사면 얼굴도 볼 수 있었기에 다들 2라운드 경매를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10%의 재벌들은 돈을 마구 흩뿌리고 있었다.“2억 2천만 원.”“2억 4천만 원.”입찰가가 2천만 원씩 올라갈 때마다 지아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처음에는 소망이 무사한 걸 보고 안도했지만 지아는 곧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임강욱도 왔을까?’약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 약물의 영향으로 잘 볼 수 없었고 시야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엄마.”딸이 지아를 불렀고 지아는 애
이 바닥에서 방탕하게 놀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하씨 가문의 힘도 있다 보니 그와 경쟁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도윤은 하씨 가문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일이 커지면 하씨 가문의 노인은 그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둘만 계속해서 입찰하는 가운데 금액이 8억까지 올라갔다.하건휘도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자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도대체 어떤 멍청한 자식이 나랑 해보자는 거야?”“도련님, 저희가 확인했지만 상대방 정체가 비밀리에 감춰져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도련님이 가격을 부를 때마다 곧바로 따라붙는 걸 보아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 나중을 위해 이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하건휘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래, 나도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저 여자가 8억의 가치가 있는지 두고 보자고. 억울해 펄쩍 뛰진 않을까 걱정이네.”결국 최고가 8억에 낙찰되었고, 모두들 대체 어떤 놈이 키스 한 번에 8억을 썼는지 궁금했다.한편으로는 그만큼의 돈을 꺼낼 수 있는지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는 가운데 남자는 손으로 수표 한 장을 휙 던졌다.조이는 무표정한 도윤을 흘겨보며 역시나 자기가 생각한 대로 8억은커녕 1억도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렇다면 오늘 자기 여자가 돈 있는 사람에게 능욕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쯤 그날 밤 자신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궁금했다.‘그때 그렇게 모질게 굴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을 텐데.’전부 그의 잘못이다!지아는 멍한 상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무대에 올라온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나른한 몸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움직이면서 몸에 두른 은색 체인에서도 선명한 울림소리가 났다.“안 돼, 오지 마!”남자는 열쇠를 가지고 천천히 잠긴 자물쇠를 열었다.철창은 남자의 키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약간만 허리를 굽히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관중들의 기대 속에 그 남자는 지아에게 다가와 지아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원래도 갸름했던 지아의 얼굴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자 이목구비가 더욱 섬세하고 뚜렷해졌고, 특히 메이크업이 더해져 마치 3D 모델링을 한 듯한 얼굴이 완성됐다.특히 잘록한 허리는 날씬해 보였지만 가슴은 작지 않았고, 긴 다리와 새하얀 피부가 돋보였다.정교한 분장 덕분에 마치 가상 세계의 인물이 현실에 나타난 것 같았다.평소 지아가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던 도윤도 지아를 보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지아의 눈동자에는 은색 렌즈가 장착되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노출된 피부는 미세한 스팽글과 함께 아련하게 반짝였고 도윤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예를 들어, 해안에 좌초된 인어, 인간 세계에 떨어진 요정, 실수로 지구에 들어간 엘프, 너무 아름다워서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값을 올렸을 텐데.”하건휘가 화를 내자 옆에 있던 사람이 서둘러 말했다.“도련님, 저 여자 예쁘긴 한데 처녀도 아니고 저렇게 큰딸 안 보이십니까? 키스가 뭡니까, 손에 넣으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데.”하건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그래, 데리고 가면 퍼퓸 가든에 보내. 집에 있는 영감탱이 알게 하지 말고.”“그건 당연하죠.”“그런데 저 얼굴 낯익지 않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저렇게 아름다운 미인을 봤다면 도련님이 잊어버렸을까요?”“하긴.”지아가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낸 지 몇 년이 지났고, 그때는 몸무게가 10킬로 이상 불어난 데다 젖살이 아직 남아있었을 때였다.얼굴도 많이 갸름해지고 분위기도 달라진 데다 특수 분장까지 해서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하건휘는 그 여자가 도윤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아내라는 사실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모두가 키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가면을 벗기고 뒤로 물러섰다.모두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조이는 임강욱의 사람이라고 의심하기도 했다.그런데 정말 임강욱의 사람이었다면 왜 임강욱이 직접 올라오지 않았을까?“선생님, 왜 이 특별
조이의 선동 아래 모두가 새로운 입찰을 시작했고,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2억이었던 가격은 순식간에 두 배가 되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8억이 되어 마치 비행기를 타듯 더욱 가파르게 상승했다.지아의 상태가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보였는데, 그 얼굴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완벽했다.고화질 카메라 속 지아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눈이 방황하는 것을 보아 약효가 나오기 시작한 것 같았다.남자들은 과감하게 미녀를 위해 수억을 버리기도 했다.하건휘는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고, 무자비한 짐승들 때문에 입찰가는 14억까지 올라갔다.사업가들은 자신이 데리고 놀다 지키면 다른 사람들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이런 미인은 높은 상품 가치가 있기에 본전을 회수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다들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그 결과 가격은 치솟고 치솟아 18억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도련님, 상황이 안 좋습니다. 이 사람들 미친 걸까요?”“그래? 내가 볼 땐 제정신인 것 같은데. 놀다 지치면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이득을 취할 생각이겠지.”“하지만 이대로 계속 가격이 올라가면 우리도 난감해지는데요? 한 번에 거액을 움직였다가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형이 알면 뭐? 기껏해야 몇 마디 혼내겠지. 여자 하나 데리고 노는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말하며 하건휘는 팻말을 들었다.“20억.”진짜 싸움이 시작됐다.하빈이 작게 말했다.“보스, 허건휘 쪽에서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어요.”“따라가.”도윤은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얼마를 제시하든 따라.”재력만으로 하씨 가문은 이씨 가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물며 상대는 고작 하씨 가문 둘째 아들일 뿐이었다.하건휘도 자신이 가격을 올린 후 상대방이 입찰한다는 것을 눈치챘다.한 번에 1억씩 계속 쌓이고 쌓여, 뒤따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렇게 두 가문은 다시 맞붙었다.하건휘는 30억까지 오르자 다소 버거웠다.“젠장, 미친놈이잖아. 고작 여자 하나에 나랑 죽자고 달려들어?”“도련님, 이
조이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더 부르실 분 있나요?”하건휘는 카드를 올리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제지를 받았다.“도련님,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는 60억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여기 엄청난 상대가 숨어 있으니 포기하는 게 좋겠어요. 고작 여자 하나잖아요.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알았어.”하건휘는 마음속으로는 조금 꺼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남자의 힘은 재력에서 온다.도윤은 여전히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아우라를 풍기는 원래의 자세를 유지했다.조이는 도윤의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농담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60억, 60억, 60억... 거래 성립입니다!”조이는 마지못해 결과를 발표했다.남자는 정말로 60억이라는 거액을 꺼냈다!도윤은 일어나서 조이를 광대를 보는 듯이 바라보았다.“이제 사람 데려가도 되나?”진봉 일행이 30분 후면 도착할 테니 이젠 조이가 더 수작을 부려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조이가 물러서면 규칙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조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비록 이곳에서 보기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긴 했다.신뢰를 깨고 나면 앞으로 누가 다시 거래를 하러 오겠나?게다가 조이는 한낱 부하일 뿐인데, 또다시 큰일을 벌여서 보스가 알면 분명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도윤을 상대하고 싶어도 지금은 절대 안 된다.조이는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물론이죠.”도윤은 일어나 긴 다리로 무대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 조이에게 손을 내밀었다.“열쇠.”조이는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열쇠를 내밀어야 했다.이 남자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이야!60억을 동네 개 이름처럼 외쳤다.도윤은 먼저 소망이의 케이지를 열어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했다.소망이 도윤의 품에 뛰어들었다.“삼촌.”“착하지, 삼촌 왔으니 겁내지 마.”다행히도 여자는 어린아이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친 사람이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지아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아가 원한 것은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고 얼굴을 가리는 것뿐이었다.긴 드레스 치마가 상처 입은 인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도윤은 지아를 안은 채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고 하빈이 아기를 데리고 뒤를 바짝 따라갔다.“빨리 의사 좀 불러.”“네.”도윤은 화가 났다. 지아를 원했지만 이런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그 망할 조이가 지아에게 어떤 약을 주사했는지, 그것이 지아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의사가 지아를 진찰하는 동안 도윤은 지아를 피해 복도에서 담배를 피웠다.어두운 바다 위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었고, 헬리콥터를 본 하빈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보스, 사설 용병단을 움직인 겁니까?”하빈은 도윤이 신분을 이용해 정부 군대를 데려올 줄 알았는데 도윤이 사설 용병을 부를 줄은 몰랐다.이러면 뭔가 잘못되더라도 윗선에서 추궁할 수 없다.하빈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아니, 우리 사람들은 다...”도윤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 건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윗선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도윤은 아주 먼 섬에 자신의 군사 기지를 세웠다.헬리콥터로도 5시간 안에 오지 못하는데 어디서 이렇게 빨리 온 걸까?“급한 상황이라 남한테 빌렸어.”빌렸다고?이런 힘을 가진 사람이 또 누가 있지?하빈조차도 거대한 폭풍을 머금고 있는 도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보스, 계획이 정확히 뭐예요?”도윤은 입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몇 년 전에 우리 내에서 누군가가 다크 나이트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그때 내가 직접 명령을 받고 조사했어.”“알아냈습니까?”“아니, 상대방이 진작 눈치채고 깔끔하게 철수했지만, 그 덕분에 범위를 좁힐 수 있었어.”하빈은 얼어붙었다.“그럼 이번엔...”“지아를 데려가는 것 외에도 내 의심을 계속 확인하기 위해서 탄 거야. 얼마 전에는 배후에 보스가 누구인지 이미 확인했어.”하빈은 도윤이 이렇듯 화가 나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