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아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갑게 도윤을 바라보았다.“비록 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쌍둥이는 확실히 네 아이야.”도윤은 바로 기분이 좋아졌고, 그는 기쁘면서도 놀랐다.지아는 차갑게 한 마디 덧붙였다.“그리고 넌 방금 그들을 죽일 뻔했어. 너 같은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로 될 자격이 없어.”“지아야, 미안해.”도윤이 그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바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이도윤, 내 얼굴을 봐. 이 뺨은 그 의사가 때린 게 아니라 네가 때린 거야.”지아는 의자에 앉더니 나른하게 등받이에 기댔다.임신 후, 그녀는 신체적인 부담이 아주 커서, 움직일 때마다 많은 힘을 썼는데, 지금 지아는 정말 피곤했다.도윤이 진짜 믿은 것을 보고 지아도 더는 도윤에게 많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도윤은 입을 벌리고 말을 하려다 멈추더니 지아의 피곤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몸을 껴안고 감탄했다.“지아야, 나도 네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어떡해, 무슨 일이 발생하든 난 너를 놓아주고 싶지 않단 말이야.”지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오직 눈물만 눈가에서 흘러내렸다.그녀도 발버둥 치지 않았고, 한참 후에야 가볍게 입을 열었다.“정말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응.” 도윤은 지아를 더욱 꽉 안았다.“그럼 만약에 내가 죽으면, 날 놓아줄 수 있겠지?”도윤은 얼른 지아의 턱을 들어올렸고, 슬픔 대신 죽길 원하는 그녀의 눈을 마주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기 시작했다.그러나 도윤은 곧 이 생각을 단념했다.“아버님은 서서히 회복하고 있고, 너도 지금 아이가 생겼잖아. 지아야, 넌 누구보다도 살아남고 싶어 했으니, 어떻게 쉽게 죽겠어?”지아는 탄식했다.“네 말이 맞아. 난 누구보다도 살아남고 싶어.”그녀는 살고 싶어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비록 지아는 이미 반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위험기
도윤이 떠나자 지아도 철저히 우울해졌다.강미연은 지아의 눈빛에서 가까스로 나타난 빛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조용히 창문 앞에 앉았는데, 비록 얼굴의 부기가 적지 않게 가라앉았지만 얼굴은 창백하고 혈색이 없었다.그녀는 멍하니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눈빛에 아무런 초점도 없었다.“아가씨, 배고프시죠? 주방에서 방금 만들었는데, 얼마 전에 짜장면 먹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아가씨가 드시고 싶었던 맛인지 한 번 먹어봐요.”“놔둬, 지금 배 안 고파.”“배고프지 않아도 좀 먹어야 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도요.”오직 아이를 언급해야 지아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다. 미연은 지아가 손끝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재빨리 젓가락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뜨거울 때 얼른 드세요, 제가 아가씨 대신 맛 좀 봤는데, 맛이 아주 좋아요.”미연은 혀를 내둘렀다.“죄송해요, 이것은 대표님의 분부였어요. 앞으로 아가씨가 드셔야 할 모든 음식은 모두 사전 검사를 마쳐야 하고 또 저희가 먼저 시식해야 해요.”원래 미연은 도윤을 칭찬하려 했지만, 얼마전에 발생한 일을 생각하니 그녀는 또 하려던 말을 삼켰다.미연은 몇 번이나 입을 열어 묻고 싶었지만, 또 자신의 신분이 비천하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방안에는 지아가 짜장면을 먹는 미세한 소리만 났는데, 거의 들리지가 않았고, 가끔 단무지를 먹을 때에만 그녀는 소리를 좀 냈다.지아는 순순히 밥을 먹고 있었지만, 미연은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짠했다.지아는 마치 아이를 위해, 소계훈을 위해 사는 것 같았지만, 유독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그사이 지아는 여러 번 구역질이 났지만 참고 또 계속 먹었다.마치 영혼 없는 로봇처럼 계속 입에 넣었다.“그만 드세요.” 미연은 젓가락을 그녀의 손에서 빼앗았다.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할게요. 이씨 가문이 파산할 것도 아닌데, 아가씨는 드시고 싶은 것으로 시키시면 돼요.”그러나 지아는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나 같은 건 뭘 먹어도 상관없어. 배만 채우면 되니까.”“아가씨,
비록 아이를 지켰지만, 도윤은 지아의 세계에 있던 마지막 희망을 가져갔다.도윤은 이미 지아 뱃속에 있는 아이가 그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더욱 쉽게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 게임에 지아는 이미 질렸다.지아는 자신이 마치 큰 그물에 갇힌 것 같았고, 아무리 도망쳐도 도망갈 수 없었다.그녀는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지 몰랐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임신한 지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를 한 번 또 한 번 쓰다듬으며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랐다.소계훈은 지아가 우울한 것을 눈치챘다. 지금 소계훈의 다리는 많이 좋아져서 이미 자유롭게 집에서 왔다갔다할 수 있었고 부축할 필요가 없었다.여름이 되자, 날씨는 점점 더워졌고, 지아는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서 잠을 잤다.그녀가 깨어나자, 몸에 얇은 담요가 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소계훈은 어린 시절처럼 부채를 들고 그녀를 위해 모기를 쫓아주었다.비록 엄마가 일찍 떠났지만 소계훈은 지아에게 모든 사랑을 주었다.그녀는 어릴 때 엄마가 없다고 해서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소계훈의 사랑 속에 지아는 서서히 자신감 있고 우수한 아이로 성장했다.그때의 지아는 눈과 몸에서 따뜻한 태양과 같은 빛을 발산하였는데, 소계훈도 사실 진작에 눈치챘다.그가 깨어난 후, 지아는 거의 웃지 않았고, 자신의 앞에서 이도윤이라는 세 글자를 언급하지도 않았다.그리고 지아는 가끔 얼굴에 부드러운 빛이 떠올랐는데, 지금은 먹는 것 외에 자는 것이었고, 깨어날 때는 대부분 멍을 때렸다.비록 지아는 소계훈에게 억지로 웃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노력을 했지만, 필경 자신이 키운 아이였기에 소계훈은 지아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지아의 모든 변화는 도윤에서 비롯되었다. 소계훈은 도윤이 무엇을 했는지 몰랐는데, 지난번에 지아를 데려다준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소계훈은 마음이 아팠고, 매일 대부분 시간을 지아의 곁에서 보내곤 했다.지아는
소계훈은 놀라움에서 충격을 느끼며 마지막엔 무척 기뻐했다.“진, 진짜야?”소계훈은 그제야 안심했다. 지아와 도윤 사이의 문제가 이미 해결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으니 이는 좋은 일이었다.“내가 왜 아빠를 속이겠어요?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그것도 쌍둥이에요.”소계훈은 매우 흥분했다.“그래, 정말 좋구나.”전에 소계훈이 교통사고로 입원한 후, 지아도 아이를 잃었다. 비록 그때 자신을 보러 올 때마다 지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몸은 나날이 수척해졌으니 소계훈은 또 어떻게 개의치 않을 수 있겠는가?두 사람은 지금 아이가 생겼고 또 감정기초가 있었으니, 소계훈도 좀 안심할 수 있었다.“그럼 너와 도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아이가 생긴 후 도윤은 오히려 널 보러 오지 않는 거야?”지아는 참고 또 참았고,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지금 소씨 가문이 파산한 데다 소계훈 자신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이런 일을 말하면 그는 도윤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또 매일 답답함을 느낄 뿐이었다.“도윤의 신분이 특수해서요. 최근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는데, 우리가 위험해질까 봐 이곳으로 보내서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게다가 난 임신한지 아직 3개월이 되지 않았으니 좀 조심해야 하고요.”지아가 이렇게 말하자, 소계훈도 납득할 수 있었다.“어쩐지 지금 매일 나에게 전화를 하지만 우릴 만나러 오지 않더라니. 지아야, 그럼 네가 말해봐라. 넌 도윤에 대해 도대체 어떤 태도지?”지아는 아랫배를 만지며 본심에 어긋난 말을 했다.“비록 과거에 좀 다투었지만, 도윤은 결국 내 아이의 아빠잖아요.”“그래, 너희들은 아직 젊지. 그리고 싸우지 않는 젊은 부부가 또 어딨겠어? 너도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태교에 전념해. 이번에는 꼭 아이를 지켜야 한다. 아이가 있으면 모든 것이 좋아질 테니까. 이 아이는 말이야, 부부 두 사람 연결시키는 고리야. 아이만 있으면 너희들
소계훈은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럼 내가 이렇게 물어보지, 만약 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난 또 무엇을 얻을 수 있지?”지아는 침묵했고, 소계훈은 계속 말했다.“내가 얻는 건 원망뿐이고, 그 뒤로는 끝도 없는 무시뿐이야. 네 엄마는 나를 욕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후엔 매일 날 미워하면서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할 거야. 그리고 네 엄마의 눈에는 빛이 사라져 입가에 웃음 따윈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될 걸. 그리고 난 네 엄마란 사람을 얻더라도, 결국 그 마음을 얻지 못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이미 지독하게 붕괴된 집안을 얻을 뿐이야. 너 또한 성격이 어두워질 거고.”“난 네가 조심스럽게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잊지 않았어. 넌 분명히 어린 아이였고, 다른 또래들이 무심하게 놀고 먹는 동안, 넌 눈치를 살피면서 최선을 다해 엄마의 기분을 맞추려고 했지. 그런데 결국 네 엄마의 마음을 얻지 못했잖아? 이런 집안에서 자라는 건 총소리가 없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어? 그렇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너도 네 엄마처럼 될 거야.”“공작새가 아름다운 이유는 넓은 천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만약 그것을 작은 철장에 가둔다면, 꼬리조차 펼 수 없을 텐데, 또 어떻게 아름다움을 선보일 수 있겠는가?”“그리고 난 네 엄마를 놓아주기로 선택했으니, 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나를 미워하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그 사람은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자유를 얻게 됐지. 나도 정신적인 만족을 얻었어. 유일한 아쉬움은 네가 엄마 없이 자랐다는 거야. 그래서, 난 이 세상의 일들은 모든 것이 결과가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노력한다고 해서 동등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건 우리가 어떻게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변할 거야.”지아는 그때의 상황을 상상했고, 그것은 마치 지금 자신이 도윤의 곁에 있는 것과 같았다.“아빠, 그럼 엄마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겠네요?”“그래, 어떻게 사랑하지
조율에서 이예린까지, 지아는 자신이 이미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소계훈은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기억은 여전히 몇 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지아야, 넌 네 아빠를 그렇게 못 믿는 거야? 내가 만약 정말 아이를 원했다면, 먼저 조율에게 명분을 줬을 거야. 게다가 네 동의를 거친 다음 또 모든 상황이 안정적이고 적절할 때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일을 할 수 있겠어?”만약 소계훈 본인이 말하지 않았다면, 지아는 아마 평생 그를 오해했을 것이다.그녀는 조율 뱃속의 미처 자라지 못한 태아가 소씨 집안의 핏줄인 줄 알았다.“그 사람은 아빠를 엄청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죠?”소계훈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전에 자주 말했잖아. 젊은이들은 항상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그 아이는 홧김에 날 떠난 후 클럽에 가서 술을 마셨고, 그 후 술김에 다른 남자와 그런 일을 한 거야. 후에 나는 그 아이를 찾아 나의 태도를 표명했고, 우리가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아이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발견했어.”“그럼 아빠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 지아는 소계훈을 바라보았다.“나는 그 아이가 확실히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줬다는 것을 인정해. 그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는 기분이 유난히 홀가분했거든. 그러나 난 그 뱃속의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 나보다 그렇게 어린 여자애와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마련인데, 이제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까지 키우다니. 비록 나는 자선가이지만, 귀찮은 일 싫은 것도 사실이야.”소계훈의 눈빛은 더욱 예리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기업가 특유의 냉정함이었다.“나에게 있어 딸은 지아 너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때 아이를 가질 계획은 없었어. 그리고 그 아이와 난 단순히 사귀는 사이였지 선을 넘은 적은 더더욱 없었으니 내가 또 어떻게 남의 아이를 받아들이고 키울 수 있겠니? 게다가 난 20대에 이미 뼈
소계훈은 계속 말했다.“지아야, 넌 어릴 때부터 나의 보호를 잘 받아서 사회의 잔인함을 몰라. 남자든 여자든 권력을 위해, 돈을 위해, 지위를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거든.”“이제 알겠어요.”“그때 조율은 나에게 충분히 많은 시간을 들였고, 난 가장 적합한 선택으로 된 거야. 일단 나에게 나쁜 습관이 없는 데다, 또 일편단심 한 사람만 바라보며 마음까지 정직하니, 조율은 나에게 시집온 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갈 거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아이보다 훨씬 큰 거지. 내가 죽으면 조율은 많은 유산을 받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아이는 내 명확한 대답을 얻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꼬시는 것을 포기했거든. 지아야, 넌 그날 밤 조율이 누구를 꼬시려고 했는지 아니?”지아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누군데요?”“바로 도윤이었어.”지아는 완전히 멍해졌다.“어떻게 도윤일 수가?”“그 아이는 눈이 높아서, 내가 줄곧 넘어오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 불만이 있었던 거야. 너와 도윤이 부부란 사실은 외부에 발표되지 않았기에 남들은 도윤이 이미 장가를 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어. 그러니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도윤을 꼬시려고 했겠지.”지아는 전에 확실히 이런 일을 걱정했었다. 도윤은 그렇게 잘생기고 사람들 눈에 띄었으니 틀림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를 넘보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도윤은 매번 부드럽게 웃으며 지아의 걱정에 대답했다.“난 너만 있으면 충분한데, 어떻게 또 다른 사람을 좋아하겠어.”다만 지금 조율과 도윤 두 사람을 연계시키니, 지아는 여전히 좀 믿기 힘들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조율은 이예린과 약간 닮았으니, 만약 도윤이 그녀를 보았다면 틀림없이 관심을 좀 가졌을 것이다. 그럼 조율은 도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그럼 조율 뱃속에 있는 아이는 도대체 누구의 아이일까요?”“내가 그때 알아낸 것은, 조율이 원래 도윤에게 약을 먹이려 했지만
지아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고 소계훈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많이 말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나 좀 봐, 너와 도윤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내 얘기만 했지? 지아야, 걱정하지 마. 도윤은 아주 좋은 남자니까 밖에서 이상한 짓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시집가기 전에 난 사람을 시켜 도윤을 조사했는데, 남녀 관계에 있어 도윤은 줄곧 잘 처리해왔더라고.”도윤에 관한 일에 대해 지아는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았다.“아빠, 그럼 아빠는 조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예요?”소계훈은 원래 이 화제를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아가 매우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계속 말했다.“처음에는 그 아이가 똑똑하고 영리하고 또 착한 줄 알았지만, 후에 그 아이가 한 짓을 보고 나서야 난 자신이 그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왜, 넌 조율을 알고 있는 거야?”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아빠의 연애사에 관심이 생겼을 뿐이에요.”소계훈은 부드럽게 웃었다.“다 지나간 일이야. 이제 아빠는 다른 생각은 없고, 그냥 매일 네 행복한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보아하니 소계훈은 조율의 죽음을 의외의 사고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고, 후에 도윤이 그녀를 위해 소씨 가문에게 ‘복수’를 한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아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아빠, 알았어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나와 도윤의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가 말한 것처럼, 싸우지 않는 부부가 또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우리도 싸운 게 아니라, 단지 도윤이 일 때문에 바빠서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서 그래요. 이건 별 영향 없으니까 아빠도 우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난 그냥 최근에 임신해서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잘 웃지 않는 거예요.”“그래, 그럼 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내가 디저트 가져다줄게.”소계훈의 안색이 좋아지고 또 엄청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지아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 일들, 난 언제까지 숨길 수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