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는 왜 백채원이 갑자기 이렇게 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평지에서 넘어지다니. 그 목소리를 듣고, 백채원이 고의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백채원은 진작에 이도윤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가 여기에 나타났고, 그래서 그녀가 아이를 안고 넘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그 각도에서 넘어지면 아이는 다칠 것이 뻔했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백채원은 뜻밖에도 이렇게 독하게 아이를 그녀의 카드로 삼았다.이지윤이 넘어지려는 순간, 소지아는 더 빨리 달려가 즉시 이지윤을 받아 그가 자신의 몸에 떨어지게 했다.소지아의 팔에는 수액주사를 놓기 위해 수액관이 삽입되어 있었고, 의사가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말라고 재삼 당부했기 때문에 더욱 팔을 다치게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아이가 떨어졌을 때, 소지아는 그렇게 많은 것을 계산할 수 없었다. 비록 갓난아이는 아니지만, 이지윤은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지아는 자신의 몸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소지아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넘어져서 머리가 어지러웠고, 팔의 통증은 더욱 심했다.소지아는 눈을 뜨고 아이가 자신의 품에 엎드려 큰 눈으로 궁금해하며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이도윤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고, 백채원은 즉시 일어나 소지아를 비난했다.“소지아 씨, 나도 당신이 날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윤은 어린아이일 뿐인데 어떻게 아이에게 이렇게 못된 짓을 할 수 있죠?”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소지아가 달려들어 아이를 다치게 하려는 것 같았다.백채원에게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었기에 소지아도 그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통증에 시달리면서 온 머리가 땀투성이가 되었고 등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으며 숨을 내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이도윤은 소지아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이지윤을 안았다. 이지윤은 소지아를 떠나려 하지 않으며 작은 손으로 한사코 소지아의 옷깃을 놓지
소지아는 이도윤이 차에 오를 때까지 계속 수를 셌지만 그는 결국 뒤돌아보지 않았다.잊혀진 소지아는 그 동작을 유지하며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약물치료 이후, 후유증은 비록 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몸은 여전히 매우 허약했다. 방금 그렇게 세게 넘어졌으니 마치 뼈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진환과 직원들은 모두 이도윤을 배웅하러 나갔다. 전에 별장에 장 씨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떠난 이후, 이렇게 큰 별장은 텅 빈 느낌이었다.하늘에서 눈보라가 흩날리며 차가운 한기가 사방에서 엄습했고, 소지아는 손발이 꽁꽁 얼었다.누구든 와서 자신을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방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몸을 돌려 핸드폰을 꺼낼 힘도 없었다.그녀는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눈물이 볼을 타고 살며시 흘러내려 입에서는 가벼운 소리를 냈다.“885,886...”1038까지 세었을 때, 소지아는 몸이 많이 나아졌다고 느꼈고, 그제야 다른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이때의 그녀는 온몸이 차갑게 얼었고, 부른 차가 도착했을 때, 코가 빨개져 다른 한 손조차 들 수 없어서 멀쩡한 손을 내밀어 입가에 입김을 불었다.“아가씨, 많이 춥죠, 혼자 병원에 가는 거예요? 이렇게 늦었는데 조심해야 해요. 될수록 가족과 같이 다녀요. 아가씨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요즘 독신 소녀가 실종됐다는 소식이 자꾸 떠서요.”기사는 그녀가 이렇게 늦었는데도 혼자 병원에 가는 것을 보고 주의를 주었다.소지아는 손을 내려놓았고, 차안의 난방은 그녀의 몸을 조금씩 따뜻하게 했다. 그녀는 차창 밖의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난 괜찮아요. 가족이 곧 올 거예요.”그러나 소지아에게는 이 세상에 더 이상 가족이 없었다.다행히 지금 이 시간, 임건우는 이미 퇴근했을 것이고, 소지아는 당직 의사를 찾았다.그러나 문을 열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흰 가운을 입은 임건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콧등에 있는 은테의 눈은 안경은 그
요 며칠, 임건우는 소지아가 무엇을 겪었는지 몰랐다. 분명히 전에 그녀는 살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눈은 삶에 대한 갈망도, 죽음에 대한 동경도 없었다.잔잔한 호수처럼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그 남자 때문이야? 손도 그 남자가 다치게 한 거고?”소지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그래도 그와 관련이 있는 거잖아? 내가 아는 천재 후배는 이러면 안 되는데.”임건우의 차분한 얼굴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창밖에 흩날리는 하얀 눈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아마도 그해 겨울, 그는 확실히 너를 사랑했겠지, 그러나 올해 겨울, 이미 다른 사람을 선택했으니 넌 더 이상 과거에 빠져서는 안 돼.”다른 사람의 눈에 있어 소지아는 사랑에 빠져 자신을 잃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사실 그들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소지아가 죽어야 끝난다는 것을 몰랐다.소지아는 이도윤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그가 자신을 향한 복수를 그만둔다 하더라도 이예린의 죽음은 마치 그의 마음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그를 평생 고통 속으로 빠지게 했다.지금 이도윤은 이미 선택을 했고, 백채원과 결혼하려 했으니 소지아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으로 이 매듭을 풀어야 했다. 만약 소계훈이 깨어난다면, 이도윤도 더는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이 편이 양쪽 모두에게 좋아.’임건우가 다시 살펴보자 소지아의 눈빛에는 이전의 취약함보다는 단호하고 확고한 태도가 더 많이 느껴졌다.그는 한숨을 쉬었다.“네가 이미 결정한 이상, 나도 할 말이 없어. 지아야, 너는 수액관을 꺼내고 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거야.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임건우는 항상 자신에게 이 문제를 묻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소지아는 웃으며 말했다.“후회 안 해요.”그녀는 옷을 절반만 벗고 하얀 팔뚝과 뽀얀 어깨를 드러냈다. 전의 상처는 이미 아물고 새 살이 자랐다.소지아는 마취를 하지 않아도 됐기에 많은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소지아는 일어나는 동작조차 약간 비틀거렸고, 허약하게 웃었다.“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어요. 여러 해 동안 사랑했고,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어요.”임건우는 눈물투성이가 된 소지아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럴 입장이 못 됐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눈물이 뾰족한 턱에서 미끄러 떨어지자 소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이런 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살아서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본다고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예요. 삶에 의미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최근에 읽은 문장인데, 만약 이 사람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운명인데, 이 사람을 특별히 사랑한다면, 그 과정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결과를 원하는 건지 확실히 알고 선택을 하든가, 아니면 몸을 돌려 가는 게 나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더군요.”소지아는 자신을 비웃었다.“만약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몸을 돌려 떠나는 것을 선택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내 운명이었기에 도망칠 수 없어요. 나는 그와 마지막으로 합의했어요. 나와 마지막 한 달동안 함께 있어 주기로 했어요, 한 달 후, 우리는 이혼할 것이고, 그때 나는 선배가 말한 그 넓은 세상을 보러 갈 거예요.”임건우는 그녀가 오른손으로 왼팔의 어깨를 안은 채, 비틀거리며 걸어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선배, 선배가 나를 위해 한 모든 것에 매우 감사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선배와 어울릴 자격이 없어요.”소지아는 싸늘한 복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고, 밖에는 또 함박눈이 퍼부었고, 그녀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졌다.임건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리창을 통해 그녀가 점차 시선 속으로 사라진 것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지금, 상황은 이 지경까지 됐는데, 그녀는 왜 아직도 버티고 있을까? 그럴 가치가 있을까?임건우는 소지아가 마치 경건한 신도처럼, 사막 속에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자신만
이도윤은 소지아의 졸렬한 거짓말을 들추지 않고 식탁 옆에 서서 그녀를 불렀다.“손 씻고 와서 밥 먹자.”불빛은 남자의 몸을 비췄다. 정장 차림을 하지 않은 이도윤의 주변에 따스한 기운이 맴돌았으며, 그 냉담한 얼굴조차도 싸늘함이 적어졌다.그는 3년 전 자신이 사준 앞치마를 매고 있었는데, 마치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소지아는 웃으면서 이도윤을 향해 달려갔다. 식탁에는 온통 그녀가 지난날 즐겨 먹었던 매운 요리로 가득했다. 만약 그가 요즘 장 씨 아주머니가 자신에게 해준 음식에 주의를 돌렸다면, 아마 자신의 입맛이 변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이도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자신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위장하려고 애썼지만, 현실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많은 일은 소리 없이 끝났다. 마치 그의 사랑처럼. 사랑에 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오직 침묵과 무관심만이 영원한 답이었다.비록 소지아는 더 이상 맵고 기름진 요리를 먹을 수 없지만, 이 한 테이블의 요리는 그녀가 2년 동안 줄곧 생각해온 음식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참으며 먹었다.사람의 남은 생명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할 때, 소지아는 자신이 먹었던 모든 밥을 각별히 소중히 여겼다. 왜냐하면 이 한 끼가 마지막 한 끼로 될 수 있었다.결국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기 때문에, 소지아가 정말 기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런 척하고 있는지, 이도윤은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억지로 웃고 있었다. ‘내가 2년 동안 밥을 하지 않아서 밥이 맛없단 말인가?’줄곧 조용하던 이도윤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입맛에 맞지 않는 거야?”“아니야, 맛있어. 너 요리 솜씨 여전하네. 나는 단지 우리가 얼마 만에 함께 밥을 먹은 건가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예전의 이도윤이라면 영원이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창밖의 눈송이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소지아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런 어리석은 문제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한 달, 그
예전에, 자신의 말 한마디에 6개월 만에 장미 정원을 직접 가꾸던 남자가 이제는 단 며칠이란 시간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이도윤은 그녀를 사랑할 때, 정말 사랑했고, 이제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 이상, 정말 매정했다.소지아는 가볍게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부탁했다.“나 시간이 얼마 없는데, 그냥 허락해주면 안 돼?”“소지아, 선 넘지 마.” 이도윤은 소지아를 차갑게 바라보며 단지 그녀가 말한 것이 한 달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매정하게 거절했다.“이것도 선을 넘는 건가?” 소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너는 단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뿐이지. 지금은 약혼을 준비하는 거야? 그렇지?이도윤의 늘씬한 손끝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코 소지아를 향해 보았다.“나는 이미 너에게 내가 곧 약혼한다고 말했어.”그의 얼굴에는 비록 많은 표정이 없었지만, 소지아는 그의 눈동자 속의 조롱을 알아차렸다.‘겨우 사정사정해서 얻은 한 달이니 이런 취급은 당해도 싸다.’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웃었다.“결국 내가 헛된 꿈을 꿨네, 미안.”소지아가 문을 열고 떠나자 뒤에서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국내라면, 한 곳 하나 골라봐.”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얼굴에 기쁨이 더해졌다.“그럼 우리 여수에 가자.”이번에 그는 부정하지 않고 목젖을 가볍게 굴렸다.“좋아.”소지아는 기뻐하며 떠났다. 여수에서 오로라를 볼 확률은 없지만 이도윤이 자신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과 함께 밤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지아는 이미 만족했다.밤이 깊어지자 그는 가볍게 그녀의 옆에 누워 잠을 잤다. 소지아는 잠들지 않고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렸다. 그와 그녀의 거리는 마치 깊은 바다를 사이에 둔 것 같았다.소지아는 그에게 팔의 상처를 들킬까 봐 감히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사실 이도윤은 눕자마자 몸을 돌려 다른 한쪽을 향해 누웠다. 전혀 소지아를 상대할 의사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밤에 소지아는 소리 없이
소지아는 꽃바구니를 내려놓고 설명했다.“나는 친구예요. 잠깐 보고 떠날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낯선 사람은 그녀를 자극할 뿐이니 얼른 떠나세요.”간소연은 베개를 소지아의 품속에 넣으며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나의 아이를 데리고 빨리 가. 반드시 그녀를 잘 키워야 해. 내가 이 사람들을 붙잡고 있을 테니 빨리 도망가!”그녀는 소지아가 보낸 과일 바구니를 안고 주치의의 몸을 세게 내리쳤다.“이 악마 같은 놈! 바로 네가 나의 아이를 빼앗으려 했잖아. 너를 죽일 거야!”문밖에서는 방호 헬멧과 방패를 든 경호원이 뛰쳐나와 전기 충격기로 그녀를 쓰러뜨렸고, 이어 4명의 사람이 와서 그녀를 침대에 던져 재빨리 꽁꽁 묶었다.간소연은 아직도 울부짖고 있었다.“내 아이 돌려줘!”진정제를 주사하자, 그녀는 점점 저항력을 잃고 잠이 들었다.이 모든 것을 목격한 소지아는 여기가 병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옥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사가 아니라 간수였다.혼수상태에 빠진 간소연은 매우 억울해 보였고, 그녀도 병실에서 쫓겨나와, 묻고 싶은 말을 한마디도 묻지 못했다.소지아는 떠날 때 뒤돌아보았는데 마침 그 주치의가 간호사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녀들이 왜 자신을 들여보냈는지 욕하는 것 같았다.그녀가 머무는 동안, 주치의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한 번 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은 공중에서 마주쳤고, 주치의는 시선을 떼며 욕설을 멈추었다.소지아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특히 이 주치의에 대해서. 그녀는 분명히 자신을 알고 있었지만 소지아는 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이도윤의 자료에 따르면 간소연은 대학입시가 끝난 후, 소계훈에게 버림받았고 또 아이를 지운 뒤 정신이 이상해져 병원에 호송되어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그러나 그녀의 방금 상태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녀는 말끝마다 아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준 충격이 너무 큰 것일까?소지아는 간소연의 집으로 돌아가 그녀
소지아는 몇 사람의 근황을 알아보았는데 이도윤의 자료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원래 그 여자애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지만, 결국 그들은 이사하거나 고향에 돌아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소지아는 잠시 그만두고 간소연이 호전되면 다시 정신병원으로 찾아가려고 했다.오정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소지아는 카페를 나섰고, 바깥의 날씨를 보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지금은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혔다. 소지아는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택시에서 라디오를 방송하고 있었다.“풍원산 정신병원 투신 사건.”소지아는 눈을 뜨고 기사에게 소리를 좀 크게 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오늘 갔던 정신병원이 아닌가?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검색했는데, 사망자는 바로 그녀가 낮에야 방문했던 간소연이었다. 사진 속 그녀는 얇은 환자복을 입고 꼭대기 층에서 뛰어내렸고, 얼굴에는 괴상한 미소를 지었다.사진을 본 순간, 소지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기사는 얼른 말했다. “아가씨, 왜 그래요?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이 아가씨가 불쌍해서요.”“정신병 환자니까 이건 정상이죠. 우리 형님의 아이가 우울증이 있는데,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는지 몰라요. 이렇게 떠나는 것도 그들에게 해탈이겠죠.”소지아는 감히 동의하지 못했다. 방금 침대에 묶여 진정제를 억지로 맞은 여자애를 생각하면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간소연은 그렇게 젊었는데.그녀는 우울하게 집에 돌아왔고, 이도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소지아는 소파에 기대어 몸과 마음이 피곤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릿속에는 온통 간소연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화면이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돌처럼 큰 파문만 일으키며 사라졌다.머지않아 그녀의 결말을 생각하니, 그녀가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가족도 없으니 이도윤이 그녀를 위해 슬퍼할까? 아니면 한숨을 돌릴까?소지아는 휴대전화를 켜고 여수의 여행에 관해서 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아껴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이날 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