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이 아주머니의 방에서 나올 때, 온몸은 차가웠다.후에 그는 아주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그 한마디만 남았다.‘왜 죽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지아였을까?’도윤은 문득 오래전에 자신도 소지아에게 같은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왜 죽은 사람은 네가 아니라 예린이었을까.”‘이 말이 사람을 이렇게 아프게 할 수 있구나.’‘그때 지아는 어떻게 버텼을까?’도윤은 그 긴 복도를 바라보았다. 한 여자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수술실의 대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순간, 그는 마치 지아가 큰 배를 이끌고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대표님, 무엇을 보고 있는 거죠?”진환은 도윤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복도에 있는 사람이 낯선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도윤은 목소리가 잠겼다.“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의 화면을 나에게 보내.”“예.”도윤은 차에 올라탈 때 몸이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설령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소계훈은 이예린을 살해한 살인범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컸다.만약 그라면, 상대방은 이렇게 큰 신경을 써가며 감출 필요가 없었다.이 일은 조사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연루된 사람과 일이 갈수록 많아졌다.도윤은 며칠간 휴식하지 않아 극히 피곤했지만, 조금도 자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죽 좌석에 기대어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일만 생각했다.‘만약 소계훈이 정말 살인자가 아니라면, 내가 지아를 2년 동안 고문한 것은 또 뭐로 되는 거지?’이 가능성을 생각하니 도윤은 등골이 싸늘했다.지아는 도윤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지만, 그는 가장 날카로운 검으로 그녀의 가장 치명적인 곳에 하나하나 꽂았다.지아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간들간들하게 이 진흙탕 속에서 살고 있었다.도윤은 두 손으로 머리를 안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호되게 잡았다.‘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대표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은 틀림없이 무사할 거예요.”“그래요, 상
소지아는 주씨 집안의 작은 정원에서 몸을 휴양하고 있었고, 요 며칠 날씨가 화창해서 그녀는 낮에 벚나무 아래에서 햇볕을 쬐었다.한바탕 바람이 불어오자, 벚꽃이 흩날리며 떨어졌다.흰 고양이 몇 마리가 정원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꼼지락거리니 유난히 아름다웠다.이런 평화로운 화면을 보며 지아는 마음을 시종 내려놓을 수 없었다. 지금 밖의 사람들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고 인터넷 기사들은 더욱 떠들썩했다.백채원이 내연녀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변진희를 자신의 딸을 팔아먹는 독한 여자라고 욕했다.백씨 집안은 적지 않은 돈을 써서 지웠지만, 삭제하면 곧 새로운 댓글들이 떴다.오히려 지아의 개인정보는 아주 잘 보호되어 조금도 누설되지 않았다.온통 백채원을 욕하는 댓글을 보면서 지아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결국 이번 게임에서 그녀나 백채원이나 모두 패자였다.지아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 앞에 노출된 소계훈과 행방불명된 전효였다.지아는 전효가 무슨 문제에 부딪쳤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에 없어졌을지도 모른다.“지아 누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주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고, 지아는 넋을 잃고 있어서 눈을 가볍게 떨었다.“우리 아빠 생각. 그 사람은 내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우리 아빠에게 손을 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어.”주원은 방금 씻은 신선한 과일을 가져다가 지아의 앞에 건넸다. 그는 몸을 반쯤 웅크렸고, 한 쪽 무릎을 구부린 채 딸기 하나를 지아에게 먹였다.지아는 주원의 자태가 매우 낮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주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지아를 기쁘게 하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누나,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내가 대신 아저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어요.”지아는 이 말을 듣고 눈이 밝아졌다.“정말? 너 너무 귀찮게 하는 거 아니야?”주원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고 그의 눈에는 찬란한 빛이 넘쳤다.“누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나의 영광인데 어떻게 귀찮겠어요? 다만
소지아는 머리를 번쩍 들더니 주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정말? 너 정말 레오를 찾을 수 있어?”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사실 지아는 그다지 믿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이도윤조차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주원은 거짓말을 할 줄 아는 것 같지 않았기에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작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네, 전에 내가 사람을 부탁해서 알아봤는데, 레오가 외국에서 사람을 잘못 건드려 잠시 숨었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그를 찾을 수 없지만, 마침 내가 아는 사람이 좀 많아서요.”‘어쩐지 이도윤이 찾을 수 없다고 했더라니.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구나.’“그럼 우리 아빠 수술은…….”“지아 누나, 누나는 국내에서 있으면 위험하잖아요. 그 사람은 누나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으니 또 그럴지도 몰라요. 심지어 아저씨조차도 누나를 따라 위험에 부딪칠 거고요. 내 말은 누나가 아저씨와 함께 외국에 가는 거예요. 위험을 피하는 동시에 아저씨를 치료하는 거죠.”지아는 눈썹을 찡그렸는데, 이것은 그녀가 여태껏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없다고 하기보다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도윤은 마치 지아 마음속에 가로놓인 큰 산과 같았고, 이미 그녀의 몸에 여러 갈래의 쇠사슬을 감았기에 지아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누나, 외국에 난 의대 친구들이 엄청 많아요. 그들은 모두 의학 최고의 전문가들이에요. 비록 누나의 위암을 100% 치료해 줄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생존율은 국내보다 높을 거예요.”주원은 입술을 핥으며 계속 말했다.“난 누나가 이미 전 남편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럼 여기에 미련을 둘 만한 일이 또 뭐가 있겠어요? 누나는 외국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지아는 마치 마른 우물에 오래 머물렀던 개구리와 같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단 듯이 중얼거렸다.“그럴 수 있을까…….”그리고 주원은 가지에 서 있는 작은 새처럼, 끊임없이 지아에게 우물 입구 밖의 천지가 얼마나 넓은지 말해주고 있었다.“그
소지아는 이 일을 남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지만 주원은 줄곧 자신을 도와주었고 심지어 그녀의 장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지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주원은 이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그래서 그 사람이 이런 짓을 했군요. 이 대표님더러 누나와 백채원 중 하나를 선택을 하게 하다니.”“그래, 주원아, 네가 말한 거 나도 매우 설레거든.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일이 바로 이거야. 그 주모자는 소씨 집안을 망쳤고, 우리 아빠를 그렇게 만든 데다 또 내 목숨을 원하고 있어. 게다가 우리 아빠의 명성까지 모두 망쳤는데, 나는 지금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어?”지아는 두 손을 자신도 모르게 꼭 잡았다.“그녀는 오랫동안 계획하여 가까스로 이렇게 큰 함정을 만든 데다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나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고,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해서 그런 사람의 미움을 샀는지 모르겠어.”주원은 가볍게 말했다.“잘못한 사람은 누나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라면요?”지아는 영문 몰라 하며 주원을 바라보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말은 누나는 이렇게 착한데, 어떻게 뭘 잘못할 수 있겠어요? 잘못이 있어도 그건 다른 사람이 잘못한 거예요. 이 세상에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나쁜 놈이 있으니까요.”지아는 고개를 저었다.“너도 참.”“뭐가요, 나의 지아 누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가씨예요. 이도윤이 누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의 문제죠.”주원은 목소리가 맑았다.“누나, 전에 바다에 뛰어들기 전에 그런 말을 했으니 이도윤은 틀림없이 계속 조사할 거예요.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누나보다 더 자세히 조사할 거고요. 그러니 이 일은 안심해요. 진상은 꼭 밝혀질 테니까요. 나는 그와 시간차를 벌이고 싶어서 그래요. 현재 이도윤은 아직도 시체를 인양하고 있었으니 이 틈을 타서 우리가 A시를 떠나는 거죠. 그렇지 않고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비록 주원이 모든 준비를 하였음을 알고 있었지만 소지아는 여전히 그 경호원들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소계훈을 이전하려 할 때, 의외의 사고가 발생하였다.약속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주원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오늘 밤은 먹빛에 물든 것처럼 새까맸고, 하늘에 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정원은 여전히 아늑했고, 은은한 불빛 아래에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지아는 벚꽃나무 밑에서 기도를 했다.바람은 나무 위에 걸린 방울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연이은 방울 소리에 지아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땀을 쥐었다.“딸랑딸랑…….”방울은 심하게 흔들리면서 나뭇가지에 듬직하게 매달려 있던 방울은 바람에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불안한 소리를 냈다.붉은 방울은 흰 자갈길에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지아가 손을 뻗어 잡기도 전에 이미 한 사람의 발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주원은 손을 뻗어 붉은 방울을 주워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지아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누나, 나 돌아왔어요.”지아는 즉시 그를 향해 달려왔고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주원아, 너 괜찮니?”주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손에 든 붉은 방울을 가지고 놀았다.“누나가 진심으로 기도를 했으니, 나한테 무슨 일 생길 수 있겠어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다행히 아저씨는 내 사람들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어요. 시간이 좀 지체되었으니 누나 걱정 많이 했죠?”이 말을 듣고 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문제가 생겼어?”“우리 사람들 말고 또 몇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심지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쏠 정도로 날뛰었어요. 그리고 이도윤의 사람들도 왔고요.”지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틀림없이 그 주모자일 거야. 우리 아빠를 이용하여 나를 협박하려고. 사상자는 없지?”주원은 땅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과 피로 물든 흰 벽을 생각하면서 입가의 웃음은 여전히 해맑았다.“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어요. 난 아저씨만 챙기느라 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요. 다행히 내가 이번에
소지아는 울음을 멈추고 훌쩍였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그녀는 주원의 맑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안에는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쳐 있었고, 잘생긴 얼굴에는 소년의 앳된 모습이 조금도 없었는데 오히려 보기 드문 성숙함과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미련?소계훈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으니 복수는 그녀가 살아있는 이상, 기필코 성공할 것이다.머릿속에 이도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지아는 재빨리 그 얼굴을 지웠다.“아니, 다만 떠나기 전에 난 우리 아빠 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좋아요, 나에게 맡겨요.”지아는 계속 주원에게 상처를 처리했고, 거즈를 한바퀴 한바퀴 주원의 튼튼한 등에 감았다.지아는 주원의 몸에 상처가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주원아, 너 왜 상처가 이렇게 많은 거야?”주원은 가볍게 웃었다.“누나, 나 지금까지 내 가정에 대해 말한 적 없죠? 듣고 싶어요?”“음.”지아는 뜨거운 물 한 대야를 받아와 부드럽게 주원의 몸에 묻은 혈흔을 닦아 주었다.“우리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녀가 사실 우리 아빠의 핍박을 받아 죽었다고 말한 적이 없죠. 우리 아빠는 심각한 가정 폭력 증세를 가지고 있어요.”지아는 뜨거운 수건을 비틀더니 고개를 돌려 주원을 바라보았다.소년의 얼굴은 누르스름한 등 빛 아래 풋풋함을 벗고 유난히 성숙해 보였다. 그의 몸도 지아 기억속의 모습이 아니었다.주원은 고개를 살짝 들어 볼록한 목젖을 드러냈고 가볍게 웃었지만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우리 아버지는 평생 돈과 술을 좋아하셨어요.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술에 취해서 우리 엄마를 때렸고요. 내 몸에 있는 이 상처들도 거의 모두 그가 한 짓이에요. 엄마는 나를 위해 줄곧 참고 있었지만, 그 눈 오는 밤까지요. 우리 아버지는 주식에서 돈을 잃었고, 다리미로 날 데우려 했어요.”“누나, 그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가 마치 인두처럼 피부에 닿는 소리 들어봤어요? 숯불 위의 삼겹살 같아요.”“우리 엄마는 막으려고 했지만 절반밖에 막
밤이 깊어졌지만 소지아는 잠이 조금도 오지 않았다.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벚꽃을 보고 있었고, 하루는 나른하게 나무 밑에서 기지개를 켜고 발톱을 내밀어 나무 밑에서 마구 긁었다.지아는 이미 주원과 떠나겠다고 약속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초조하고 불안했다.지아는 주원이 제기한 건의와 선택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소계훈은 수술을 오래 끌수록 상태가 더욱 위험해졌으니, 주원이 레오를 찾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 자신의 위암을 치료할 수 있다면 지아가 떠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그러나 지아는 이 결정을 내린 후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 같았다.‘뭔가 이상해.’이때 갑자기 주원의 방에서 갑자기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나 때리지 마요!”지아는 급히 문을 열었고, 주원의 방은 매우 어지러웠으며 그는 구석에 숨어 마치 불쌍한 들개처럼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주원아, 겁내지 마, 나야.”지아는 조심스럽게 주원에게 다가갔고 소년은 마치 큰 개처럼 그녀를 와락 안았다.“지아 누나, 나 또 엄마가 죽은 그날 밤을 꿈꿨어요. 그는 다리미를 들고 마귀처럼 웃었어요.”지아는 손을 뻗어 주원의 상처를 피하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괜찮아.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야.”낯선 남자의 품의 온도가 이상한 것을 느끼자 지아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졌다.“너 열 나고 있어. 빨리 누워.”상처에 염증이 생겨 고열이 났을 수도 있었기에 지아는 바삐 들락날락 하며 주원의 열을 식히느라 바빴다.주원은 시종일관 불안하게 잠을 자면서 줄곧 지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아는 그 불쌍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은 모두 비슷했고, 그녀는 결코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지아는 인내심 있게 주원의 곁에 있으면서 이틀 동안 그를 돌보고서야 열이 내려갔다.새벽 햇살이 틈새를 뚫고 쏟아져 들어오자 지아는 속눈썹을 떨었다.침대가 텅 빈 것을 보고 그
소지아는 잠시 생각했다.“내 절친 좀 보고 싶어. 작별 인사를 할 필요는 없고 그냥 멀리서 바라보면 돼.”김민아는 최근 완전히 불쌍한 직장인으로 되어 매일 야근하느라 바빴다. 그녀도 틀림없이 그 기사를 보았을 것이고 그동안 미친 듯이 지아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지아는 민아와 작별 인사를 할 용기가 없었고, 또 그녀의 주위에 감시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까 봐 두려웠다.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지아는 다른 사람 때문에 계획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좋아요, 내가 도와줄게요.”지아의 요구라면 주원은 줄곧 들어주었다.그날 점심 휴식 시간에 지아는 민아를 만났다.그녀는 전에 지아와 불평을 늘어놓았던 출근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영혼이 뽑힌 인형처럼 맥없이 카페로 걸어갔다.음식을 주문한 다음 민아는 책상에 엎드렸고, 가끔 휴대전화가 진동하자 그녀는 재빨리 확인을 했지만 곧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다.넋을 잃은 민아는 밥을 먹을 때에도 그저 멍하니 입안으로 음식을 쑤셔 넣었다. 마치 배만 채우면 되니 무엇을 먹든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심지어 가장 싫어하는 미나리를 먹어도 민아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그녀는 몇 입 먹고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아는 민아의 뒤로 접근했는데, 휴대전화 화면에 바로 민아와 자신의 학창시절 사진이 있는 것을 보았다.그리고 지아가 창피하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결혼식에서 방영하겠다고 말한 사진들이 있었다.애석하게도 결국 지아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동경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알콩달콩 살지 못했다.그리고 민아의 눈물이 스크린에 송알송알 떨어졌다.지아는 그녀가 울먹이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지아야…….”이 말에 지아의 눈물은 이미 멈추지 못했다.민아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돈을 낸 뒤 가방을 들고 비틀거리며 떠났다.만약 예전 같았다면 민아는 바로 지아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민아는 지아의 행방불명과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소식에 휩싸였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