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긴장해서 숨도 쉬지 못했지만, 그것은 단지 이도윤의 입에서 나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도윤은 총을 내려놓으며 무척 흐뭇했다.“그래, 사나이답군. 다만 아무도 그의 목숨을 대신할 순 없어.”그는 전효에게 다가갔고, 바로 이 순간 전효는 재빨리 총을 뽑아 그의 이마를 겨누었다.“움직이지 마!” 순간, 주위의 저격수들은 총을 전효에게 겨누었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줄곧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나야 목숨이 천한 사람일 뿐, 만약 이 대표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결코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닐 텐데.” 전효의 가면 아래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웃고 있었다.그는 소지아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는데, 마치 지금부터 그녀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전효는 자신이 총을 쏘는 순간, 총알이 사방팔방에서 그를 향해 발사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도망갈 수 없었다.소지아는 어리둥절해졌고, 그 누구도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그녀와 전효는 함께 지낸 지 두 주일도 채 안 되었는데, 그녀는 또 어떻게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겠는가?“안 돼, 총 쏘지 마!” 소지아는 미친 듯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전효가 자신의 이마를 겨누자, 이도윤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도리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살아남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기 할까?”소지아는 큰 소리로 말했다.“전효 씨, 총 쏘지 마요, 절대 쏘면 안 돼요!”일단 총을 쏘면 아무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비극이라는 것이다.전효가 총을 쏘기도 전에 소지아는 이미 두 사람 중간에 서서 그들을 가로막았다.“총을 쏘려면 먼저 나를 죽여.”이도윤은 눈살을 찌푸렸고, 소지아가 갑자기 끼어든 이 행위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그녀를 끌어내.”소지아는 얼른 달려들어 이도윤을 껴안았고, 따뜻한 눈물은 그의 목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제발.
철이와 민이의 곁을 지날 때, 두 아이는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소지아를 바라보았다.소지아는 그들을 향해 살짝 웃으며 위로를 표시했다.전효는 말을 하지 않고 줄곧 그녀가 헬리콥터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금이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도윤은 여기서 죽을 수 없었고, 그는 이 섬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이 섬을 벗어난다면…….’전효의 눈빛에는 흉악함이 가득했고, 이도윤은 마치 이를 감지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은 마치 사자와 호랑이처럼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고, 위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그들은 모두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소지아는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작은 섬을 떠났다. 그녀는 그 오두막집, 거대한 벚꽃나무, 문앞에 선 아주머니와 이웃집의 이모,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는 전효. 햇빛은 그의 뒷모습만 포착했고,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늑대처럼 숲속에서 점차 사라졌다.‘안녕, 작은 섬.’소지아는 눈을 감았다. 아쉽게도 그녀는 여전히 벚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했다.그리고 이도윤이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었고, 그 사람들에게 이미 발각될 수도 있었으니 그녀의 계획도 망한 셈이었다.“왜? 아쉬워?” 이도윤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소지아는 지금 자신의 언사에 엄청난 주의를 돌리고 있었는데, 행여나 말을 잘못하여 이도윤을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하게 말하면, 이도윤을 화나게 할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그는 또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이도윤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소지아의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그녀는 심지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도윤도 이것을 의식한 듯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다가갔고, 소지아는 마치 놀란 고양이처럼 몸을 떨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렇게 깜짝 놀란 여자를 보며, 이도윤은 손을
소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요 며칠 그녀는 이도윤이 자신을 잡으면 어떤 짓을 할 지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했다.유독…….이런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다.이도윤은 마치 사막에서 수원을 갈구하는 나그네가 가까스로 맑은 샘물을 찾은 것처럼 다시 잃어버릴까 봐 조심스럽게 키스를 하며 그녀의 입술을 맛보았다.소지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햇빛 속에서 남자의 가벼이 떨리는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 밑의 감정은 그 뒤에 숨어 그녀는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오랜만에 드러내지 않았던 부드러움이 지금 이 순간, 이도윤에게 나타났다니.소지아가 멍해진 사이, 이도윤은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고, 따끔한 통증이 전해왔다.이도윤의 목소리는 차갑고 잠겼다.“또 그 남자 생각하고 있는 거야?”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뿐인데, 또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있겠는가.소지아는 굳은 얼굴로 냉담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우리는 단지 친구일 뿐이라고.”“허.” 그는 냉소를 지었다.그에게 있어 소지아는 바람을 피운 아내와 다름없었고, 그녀의 어떤 말도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도윤의 감정은 더욱 격해지더니, 손끝으로 소지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남자 네 몸 만졌지?”소지아는 두 눈을 부릅떴고,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아니, 제발 적당히 좀 해!”그의 모든 말은 칼처럼 그녀의 심장을 쪼갰고 심지어 그 위에 소금까지 뿌린 것 같았다. 몸의 상처는 마음속의 고통과 전혀 비교할 수가 없었다.“네 손 만졌잖아.” 이도윤은 떼를 쓰는 아이처럼 손가락이 미끄러지더니 소지아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소지아는 입을 벌렸으나 한 글자도 말하지 못했다.그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소지아는 자신의 감정을 꾹 참고 이도윤이 화나지 못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타협하는 태도도
이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드리우며 소지아를 바라보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물소리 외에 욕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그의 손목을 잡은 손은 지금 두 사람의 사이처럼 따뜻하면서도 촉촉했다.소지아는 그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가지 마.”이도윤은 그녀의 턱을 잡으며 냉담하게 말했다.“지금까지도 넌 여전히 그를 위해 사정하고 있군.”소지아는 자신이 소 귀에 경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남자의 마음속에는 오직 자신이 바람을 피웠고 그를 배신했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배신한 사람은 분명히 당신인데!’소지아는 또다시 초조해졌고, 철이와 민이의 젊은 얼굴을 생각하자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그녀는 욕조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이 젖었다는 것을 무시하고 이도윤을 껴안았다.그의 흰색 셔츠에 물기가 조금씩 번졌지만, 이도윤은 그녀를 떼어내지 않았다.소지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고, 붉은 입술은 그의 목젖에 살짝 닿았다. 순간, 그녀는 이도윤의 몸이 경직해진 것을 느꼈다.“이도윤, 난 널 배신하지 않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 그리고 말투 속에는 처량함과 억울함이 묻어났다.남자는 옆에 늘어진 손으로 그녀를 세게 감싸더니 뜨거운 입맞춤이 떨어졌다.소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다.이것은 두 사람이 2년만에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었다. 예전에 그렇게 그리워하고 의지했던 가슴을 보며, 이도윤이 백채원과도 이런 일을 했다는 생각에 소지아는 구역질이 났다.그녀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고 할 때, 이도윤의 전화가 울렸다.백채원을 위해 설정한 벨소리였다.소지아는 한숨을 돌렸고, 백채원이 이렇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이도윤은 여전히 계속하려 했지만, 그 벨소리는 줄곧 욕실에서 울리며 메아리쳤다.이도윤은 시끄러워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는 짜증을 내며 전화를 받았고, 백채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의 미간은 갈수록 세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불쾌하게
소지아는 떠난지 꽤 오래 됐으니 양기범은 틀림없이 그녀를 도와 단서를 찾아냈을 것이다.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양기범은 먼저 그녀의 몸 상태에 관심을 기울였다.“지아야, 몸은 좀 괜찮아?”지난번에 유람선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자 양기범은 시종 그녀를 염려했고, 사후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걱정시켜서 미안. 나한테 일이 좀 있어서 그동안 연락이 끊겼어. 지금은 이미 해결했고.”양기범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괜찮으면 됐어. 네가 전에 조사하라고 한 일, 내가 확실히 뭔가를 좀 알아냈어.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나?”소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전효 때문에 이도윤을 달래야 했으니, 또 양기범과 만난다면 그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반장, 사실 나도 상대방이 눈치챌까 봐 두려워서 그래. 지금 내 곁에 누군가가 날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반장은 조사할 때 남에게 안 들켰지?”양기범은 고개를 저었다.“걱정마. 나도 조심하고 있어. 네가 말한 그 문 의사는 이미 사직했어. 바로 간소연이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에.”“사직했으면, 그 남자는?” 소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그때 그 의사가 날 보는 눈빛이 적의를 품고 있었더라니.’“그는 문 의사가 떠난 전날에 사직했고. 난 특별히 상세한 조사를 했는데, 이 남자는 문 의사의 관계를 통해 들어온 임시 직공이었고, 이름조차 가짜였어.”“그 문 의사는? 그녀에게 의사 자격증이 있는 이상, 가짜일 리는 없겠지.”“문 의사의 본명은 문청이라고, 의대생이야. 심지어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녔고. 다만 우리보다 몇 학년 위일 뿐이야. 대학을 졸업한 후 외국에 유학을 갔다가 올해에야 귀국했어.”양기범은 잠시 멈추다 계속 말했다.“그리고 난 다른 하나 재미있는 일을 알아냈는데, 그녀는 전에 네 아버지의 후원을 받은 적이 있어.”소지아는 멈칫했다. 이는 분명히 우연이 아니었다.“반장, 이것 말고 또 다른 거 없어? 예를 들면 문청의 가족과 친구에 대
소지아는 기분이 아주 좋아서 양기범에게 연신 감사를 표시했다.“고마워, 반장. 나에게 정말 너무 큰 도움을 줬어.”이제 간소연의 아이를 찾아 소계훈과 친자확신만 하면, 소계훈이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안심해, 지아야. 나도 계속 그 남자를 찾을 거야. 다만 상대방은 이미 추적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증거를 아주 깨끗하게 인멸했어. 그래서 나도 일시적으로 찾을 수 없을 거 같아.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거든.”“똑똑똑.”밖에서 장씨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다 씻으셨어요?”소지아는 황급히 양기범과 전화를 끊었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다음 문을 열었다.“네.”“사모님, 배고프시죠? 내가 음식을 다 만들었으니 옷 갈아입으시고 내려와서 식사하세요.”장씨 아주머니 열정은 변함없었고, 소지아의 위는 또 은근히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엄마, 엄마!”내려오자마자 귓가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던 이지윤은 작은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순간, 모든 불쾌함이 사라졌고, 소지아는 이지윤을 품에 안았다.“꼬마야.”이지윤은 침을 흘리며 매우 귀엽게 웃었다. 소지아는 이도윤의 말을 떠올렸고, 자신이 그때 그렇게 충동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꼬마의 금 목걸이를 정리하고 소지아는 그를 안고 식탁 앞으로 갔다.섬에 있던 그 일주일, 그녀는 이미 아이를 돌보는 것에 익숙해졌다.장씨 아주머니는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작은 도련님 즐거워하시는 것 좀 봐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모님이 작은 도련님을 낳은 줄 알겠어요.”장씨 아주머니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입을 막았다.“사모님,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괜찮아요.”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즐겁게 밥을 먹었고, 식사를 끝마치자, 소지아는 갑자기 한 가지 일을 깨달았다.만약 전에 이도윤이 백채원에게 불려갔다면, 그녀는 밥이 아예 넘어가지
이도윤은 백씨 집안 사람들을 대처하고 돌아왔는데, 소지아가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았다.마치 예전처럼, 그가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그 가녀린 그림자가 거실 소파에서 자는 것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영원히 그에게 불을 남겨주었다.그러나 오늘, 이도윤이 현관의 문을 열자, 방안은 어두웠고 소파에는 소지아가 없었다.그는 술을 마셔서 약간의 취기를 띠고 있었다.만약 예전 같으면, 소지아는 이미 다가왔고, 원망하면서 그에게 해장국을 끓여 주었을 것이다.잔소리였지만 이도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지금은 방이 난방으로 무척 따뜻했지만, 그는 여전히 춥다고 느꼈다.문을 열자, 바깥의 불빛을 빌려 이도윤은 침대 위에 불쑥 튀어나온 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그녀는 이미 잠들었다.소지아는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따뜻한 품 속에 안겼고, 공기 중에 술 냄새가 풍기고 있어서 그녀는 꿈에서 놀라 깨어났다.“술 마셨어?”그녀가 방금 꿈에서 깨어난 목소리를 듣자 이도윤은 불쾌하게 말했다.“소지아, 너 마음이 변했구나.”소지아는 마치 무슨 농담이라도 들은 것 같았다.“지금 장난해? 먼저 변심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이도윤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이런 그는 포악함이 없어져서 마치 대형견 같았다.낮고 잠긴 목소리는 술기운을 띠며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난 변심한 적이 없어. 단 한순간도.”소지아는 그가 술 취해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와 백채원의 아들이 벌써 한 살이었으니 그는 무슨 자격으로 변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녀는 이도윤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이럴 때는 그러려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오늘 밤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소지아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격노시킬까 봐 조용히 이도윤의 품에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이도윤은 매우 흐뭇했고, 그녀의 허리에 놓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심지어 머리를 소지아의 어깨에 얹었다.“지아야, 내가 힘들게 너를 찾았으니 더 이상 도망가지 마, 응?”그녀
소지아는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이도윤은 자기 전에 옷을 벗지 않아 셔츠가 쭈글쭈글해졌고 단추도 몇 개 풀렸다.이도윤은 나른하게 문에 기대어 있었는데, 머리카락은 비록 약간 흐트러졌지만, 그의 예리하고 잘생긴 얼굴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소지아는 도둑이 제 발 저렸다. 그녀와 이도윤 사이의 관계는 얽히고설켜 끊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었다.얼마 전에 그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 섬에 있는 주민들을 생각하자 소지아의 첫 반응은 두려움이었다.“나…… 나 잠이 안 와서.” 그녀는 황급히 설명하며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소지아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있었고, 이도윤은 몸집이 커서 머리 위의 등불을 가렸는데,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었다.그의 눈빛은 맑았고, 술기운이 좀 사라졌으며, 새까만 눈동자에는 아무런 정서도 없어서, 그녀도 그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소지아는 허둥지둥 자료를 원래대로 놓으려고 했고, 말을 더듬으며 설명했다.“난 그냥 심심해서.”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는데, 뜨겁고 힘이 있었다.소지아는 마음이 조여오더니 바로 용서를 빌려 했다.“내가 잘못했어. 네 여동생의 서류를 건드려서는 안 됐는데, 화내지 마…….”이도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눈앞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소지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랑도 미움도 아닌 오직 끝없는 공포만 들어있었다.“너무 늦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잠겼다.소지아는 영문 몰라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이도윤은 그녀의 손에 있는 자료를 가져간 다음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았다.“낮에 시간이 많으니까, 이따 일어나서 봐.”소지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도윤의 뜻은 내가 마음대로 서재를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인가? 심지어 마음대로 서류를 찾아볼 수도 있고?’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이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널 속일 생각이 없었다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