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원래 그런 것, 예로부터 모든 것을 갖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소시후는 기침을 몇 번 했다. “선생님, 제 선생님과 또 무슨 협의를 하신 거예요?”지아는 무거운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시후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연구 기금과 일부 약품 협력의 대리권을 제공했는데, 루이스가 동의했어. 너도 알잖아? 연구란 원래 돈이 많이 드는 일이지. 네 선생님은 연구 머리는 있지만, 상업적인 머리는 없잖아.”“그렇죠.”루이스가 만들어낸 물건들은 독충에게 공급되었고, 명성까지 떨치게 되었다. 만약 그가 스스로 특허를 신청해 시장에 내놓았다면, 꽤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끌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끌어야죠. 선생님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개조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도윤이랑은 화해한 거야? 옛날에는 사이가 꽤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 지아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렇죠, 우린 피할 수 없는 악연이에요.” “사실, 인생은 찰나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것에 불과해. 그러니 본인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 외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니까.” “소 선생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변하셨네요.” “너도 많이 변했어, 지아야. 너와 내가 만난 것도 인연인 것 같은데,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그때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시영이의 몸은 뼈가 되었을 거고, 우린 지금까지도 아무것도 몰랐을 거야.” “그건 그저 손쉬운 일이었을 뿐이에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소 선생님, 여기서 치료받는다는 걸 가족분들은 알고 계시나요?” 그녀는 루이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실험 기지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외부인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이었다. 시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소씨 가문을 떠났을 때보단 몸이 훨씬 좋아졌어.” 지아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루이스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일들은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기에, 금방 감을 찾을 수 있었다. 루이스도 그런 지아에 대해 아주 만족해했다. “너는 하나만 알려줘도 열을 아는구나. 확실히 저 바보들과는 달라.” 지아가 유리 전시대에 놓인 기계 팔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백채원에게 해줬던 것보다 훨씬 정밀했는데, 루이스는 변태적인 완벽주의자라서 손의 질감까지도 사람의 피부와 똑같이,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매끄럽고 섬세하게 만들어냈다. 그녀가 기계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루이스는 매우 기뻐했다.“봐, 그게 내가 새롭게 업그레이드한 버전이야. 겉으로 보기엔 어떤 흠도 없는 것 같고, 인간의 손가락보다 유연해 보이지. 민서야, 안심해. 네 몸에 사용하는 건 최고를 쓸 테니까.” 이 일을 언급하자, 지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단지 시간을 갖고 싶을 뿐이죠. 마음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잖아요.” “네 걱정이 일리가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안심해. 난 2년 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시험해 봤어. 그 사람한테 팔과 다리를 장착한 후에 지금까지 데이터를 관찰 중이지.” “팔과 다리를 장착했다고요?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대범해요?”지아가 물었다.“오늘 밤 약을 받으러 올 그 아이지. 오늘 밤에는 내가 있으니, 그 아이의 기계 유지 보수를 해줄 수 있겠군. 원래 그 아이의 손과 발은 힘줄이 끊겼고, 뼈까지 부서진 상태였어. 그래서 내게 부탁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고, 난 그 아이로 실험을 한 거야.”“덕분에 많은 데이터를 추가해서 여러 번 계량했고, 끝내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거지.” “손과 발의 힘줄이 끊겼다고요?”지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선생님, 몇 시에 약속하셨어요?” “8시.”루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갔다.“민서야, 이 다리 모양 좀 봐. 네 다리가 워낙 예뻐서 여러 버전을 만들었
그 당시, 지아가 사고를 당했을 때, 도윤은 지아를 위해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친여동생의 손발을 직접 부러뜨렸고, 평생 여동생을 속박하려 했다. 사지를 잃은 사람이 어찌 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도윤은 예린의 결심을 얕본 듯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어서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강했기에, 단지 손발이 사라진 것만으로 포기할 리가 없었다. 도윤과 그의 어머니는 예린을 개과천선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린은 끈기 있기 힘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도윤은 너무 바빴고 예린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숨겨졌다고 하더라도 도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예린을 본 순간,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손목을 만졌다. 당시에 예린에게 당한 손목의 상처가 아릿하게 아파져 왔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았고, 흉터도 사라졌지만 말이다. 지아는 그 총알이 손목이 아닌 마음에 박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쪽은...”예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다. 지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저는 루이스 선생님의 보조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착각인 것일까. 예린은 눈앞에 흰 가운을 입은 채 가면을 쓴 여자의 몸매가 조금 익숙하다고 느꼈다. 사실, 사랑뿐만 아니라 증오 역시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을 단번에 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예린은 이내 이 생각을 뒤로했다.‘하긴, 소지아 같은 여자가 어떻게 루이스랑 엮일 수 있겠어?’ ‘걔는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수고가 많으시네요.”예린은 조용히 지아의 뒤를 따랐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알 리가 없었다. 과거의 일들이 지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도윤의 냉정한 눈빛, 소씨 가문의 파산, 소계훈의 교통사고, 조율의 죽음, 자신이 납치당했던 일, 하루가 옥상에서 떨어져 눈앞에서 죽었던 일까지.지아는 이
예린은 시후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해당화.”밤바람을 타고 세 글자가 속삭이듯 날아들었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왔어? 너 누구랑 있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예린은 곧장 전화를 끊고 재빨리 달려갔다. 그녀는 기계 다리를 이식받아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반면, 시후는 몸이 좋지 않아서 몇 걸음 뒤쫓다가 숨이 차서 그대로 화단 옆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그는 예린이 다시 돌아와 자신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줄은 몰랐다.“괜찮으세요?” 그녀는 화단 옆에 기대어 앉은 시후를 보고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것이었다. 시후가 예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잡았다, 해당화.”해당화는 천웅에서 사용하는 그녀의 가명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하며 부드러웠는데, 예린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녀가 인생에서 단 한 번 얻은 구원이 소시후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 탈출한 예린이 시후와 마주친 것은 운명이었다. 그는 그녀를 천웅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고, 재활을 도와주었으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이후, 그녀는 독충을 따라 천웅을 떠났으나, 단 한번도 시후를 잊은 적이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새 사람을 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예요?” 시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얘기 좀 할까?” 예린은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시후는 화단을 짚고 일어서며 꽉 잡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내 예린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예린은 가로등 빛을 빌어 두 사람이 맞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소 선생님의 손이라니!’ 그녀가 시후와 손을 맞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방은 그의 성격처럼 단정하고 밝
시후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난 아직도 네가 처음 나한테 왔을 때가 기억나. 아주 말랐고, 아주 아담했었지...” “그만하세요, 소 선생님.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말하고 싶지 않다고요.”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말할 수 없는 거야? 해당화, 네 뒤에 누군가 있지, 그렇지? 나한테 말해봐, 그 사람이 누구길래, 네 오빠의 행복까지도 저버리고 한 가족을 갈라놓으려 하는 거지?” 예린은 시후의 압박을 받고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의 두 눈은 그녀 마음속의 가장 깊은 곳을 보려는 듯했다. 예린은 시후를 밀쳐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소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할 수 없어요.” 시후는 그녀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그 온화하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한 예린이 다시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초조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너랑 얘기했던 남자는 누구야?]“루이스의 보조야.”예린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보조?]“그게 아니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데? 참, 나한테 부탁할 건 또 뭐야?”[소지아가 루이스 곁에 있는지 좀 알아봐 줘. 만약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여자를 제거해 줘!] 예린이 나지막이 되뇌었다.“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래! 지금이 최고의 기회야.] 바로 이때, 멀리서 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해당화 씨, 얼마나 더 걸리나요?” 예린은 곧장 전화를 끊고 지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아는 고독하게 어두운 밤 속에 서 있었고, 조명이 그녀의 마스크를 비췄지만, 그녀의 표정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린은 지아가 지금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손에 서류철을 든 채 여우처럼 우아하게 서 있었다. 예린이 지아를 스쳐 지나가며 한 마디를 던졌다.“많이 변했네.” 지아는 확실히 많이 변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고,
루이스의 말은 거센 따귀 한 대가 예린의 얼굴을 세차게 치는 듯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였기에, 지아와 비교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는 자존심 강한 예린에게는 큰 타격이었으나, 그녀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억눌렀다. “네.”“따라오세요.”지아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기나긴 지하통로를 걷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알아,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거.”“나도 알아, 너도 복수하고 싶겠지.” 두 사람은 서로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영역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독충은 루이스에게 의지해야 했고, 지아는 루이스가 좋아하는 제자였다. 그래서 예린이 어리석게 루이스와 적대할 리 없었다.게다가 그녀는 루이스에게 중요한 데이터 감시 대상이라, 지아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거래가 끝난 후, 예린이 지아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정말 놀랍네. 네가 루이스의 제자가 될 줄이야. 그 사람은 몇 년 동안 제자를 두지 않은 사람이야.”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멸이 묻어 있었다. 지아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나도 사지를 잃은 네가 다시 설 수 있을 줄 몰랐어.” “다 네 덕분이지. 네가 살아 있는 한, 널 가만둘 수는 없으니까.” 두 사람이 항구에 서자, 지아가 가면을 벗었다. 그 아래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예전의 연약함 대신 강인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이예린,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묵묵히 살아서 재판을 기다려!” 예린이 냉소하며 말했다.“내가 할 소리.” “솔직히 궁금하긴 해.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네 오빠는 널 선택할까, 아니면 나를 선택할까?” 지아가 다쳤던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겪었던 고통을 너도 맛보게 해주고 싶어.” “시간은 많으니까.”예린이 갑판으로 올라가자, 밤바람이 두 사람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들이 한 가족이 되었다면, 지아는 예린의 과거를 이해하고 그녀에게 따뜻하게
시후는 몇 마디로 상황을 정리하고 시월을 다독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지아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선생님, 왜 치료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시는 거죠?” 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군가 날 죽이려 해.” 말하는 톤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으나, 그 내용은 지아를 놀라게 했다. “소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게 의심되세요?” “내 가족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내 병이 너무 수상하게 시작됐어.” 그는 수년 동안 가족을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적합한 신장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신장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경로를 통해 신장 기증자를 찾을 때마다 그들이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수술은 계속해서 무산되었다. 한두 번이면 우연일 수 있지만, 계속 이상한 일이 반복되자 시후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비밀리에 조사했지만, 상대방은 너무 은밀히 행동했고, 겨우 몇몇 대리인만을 잡아낼 수 있었다. 시후는 그 사람이 틀림없이 소씨 가문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그는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소씨 가문을 떠났다. 자기 친동생들에게도 비밀에 부친 채.그리고 나서야 시후는 반년 동안 평온을 되찾았다. 비록 신장병이 금방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반년 전보다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시후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소씨 가문을 위해서도 신중해야만 했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여행 중인 사진을 계속 업로드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이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마 그 사람은 지금도 시후가 점점 파멸을 향해 다가가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비밀을 들춘 것 같아서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어. 우린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나는 이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렇지 않았다면, 셋
지아는 배에 타고 떠났는데,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평온했다.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A시에는 흰 눈이 펄펄 내렸다. 도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사적인 이유로 아이들을 부씨 가문에 데려가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부남진의 성격상, 아이들을 데려가면 틀림없이 떼어놓을 것이었다. 이미 아내를 만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으니, 아이들까지 만나지 못하게 될 상황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도윤은 아이들과 함께 지아가 함께 살았던 결혼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지아에게 많은 아픈 기억을 남겼던 곳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꿈이 시작되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지아가 찢어버렸던 결혼사진도 다시 걸려 있었다. 도윤은 특별히 휴가를 내고 매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부족했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모두 보충해 주려 애썼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독립적이어서 도윤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도윤은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운전해서 장을 보러 갔다. 가족 네 명이 마트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절로 그들에게 향했다. 그는 품에 무무를 안고 있었고 소망은 카트에 앉아 있었으며, 해경이 그녀를 밀고 있었다. 네 사람의 외모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히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무무는 작은 아기 천사 같았다. “아빠, 저 초콜릿 먹을래요! 감자칩도 먹을래요.”해경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소망이 말했다.“엄마가 그런 불량식품은 먹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널 감시할 거야.” 도윤은 쌍둥이 남매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감자칩 한 봉지를 카트에 넣었다. “가끔은 괜찮아.” “아빠가 먹어도 된다잖아.”해경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이 무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무는 뭐를 좋아해?” 무무가 과일 수입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