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후는 그동안의 경험을 대략 지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의 그의 신장병은 아주 심각했지만, 아쉽게도 적합한 신장 기증자를 찾지 못했다.몇 번이나 생사를 헤맸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적합한 신장 기증자를 만나 수술을 받았다. 다만 좋은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몸에 거부 반응이 생긴 후, 그는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생명이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어쩔 수 없이 루이스를 찾게 된 것이었다. 시후와 루이스는 거래 관계인데, 지아가 루이스가 인정한 제자인 것과는 달랐다.“소 선생님, 제가 맥을 짚어 드릴까요?”“고마워.”시후는 눈앞의 침착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지아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병약하고 쇠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긴 세월을 거치면서 이미 빛나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루이스에게 인정받을 걸 보면, 틀림없이 대단한 사람일 거야.’ 그는 당시의 그녀가 절망에 가득 찬 채 말한 것을 떠올렸다.“제겐 미래가 없어요. 그러니 제 신장을 드릴게요.” 시후는 살아남으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었다. 지아는 의학을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으나, 아주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천웅에 가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천웅에 대단한 의사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같이 공부하고 싶네요.” 우여곡절이 흐른 후, 지아는 결국 그가 바라던 대로 오지 않았으나, 뛰어난 의사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시후의 맥박을 짚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 선생님이 반년간 살았다고는 하지만, 나처럼 순조롭게 융합되진 않은 모양이야.’ 그의 상태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그저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소 선생님...”시후는 지아가 말하려다가 멈추는 것을 보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오빠 같은 눈길에서는 남녀 간의 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뻐. 네가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지아는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를 보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시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왠지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지아도 병마에 시달린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회복되었다. 하지만 시후는 여전히 소용돌이 속에서 힘겹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지아는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신장병은 한 번의 수술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신장 기증자와도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시후는 이미 한 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그 효과는 좋지 않았다.그래서 지아라 하더라도 그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오직 루이스만이 한 줄기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후의 눈썹과 눈은 차분히 빛나고 있었는데, 생명에 대한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저 바람일 뿐이지.”“소 선생님, 제가 핸드폰 좀 쓸 수 있을까요?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을 가지고 오지 않았거든요. 우리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요.” 시후는 급히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여기.” “감사합니다.”같은 시각.도윤은 방금 지아가 루이스를 따라간 것을 발견하고는 모든 곳을 통해 루이스의 소식을 찾고 있었다.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한순간 멍해졌다. 화면에 ‘소시후’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원래 평범한 친구였으나, 몇 년 동안 연락한 적이 없었고, 최근에는 그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소시후가 왜 나한테 전화를 한 거지?’“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도윤의 황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지아야, 너야? 너 괜찮아? 루이스가...” [아니, 그분은 내 선생님이셔.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지아는 도윤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가 루이스가 맞서는 것은 더욱 원치 않았다.루이스는 매우 극단적이었으나, 보기 드문 의학 천재였다. 인간 개조 계획을 제쳐둔다면, 그는 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많은 사람들을 치료한 사람이었다. 만약 도윤이 폭력적
전화를 끊은 지아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그녀조차도 자신이 언제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다. 지아가 핸드폰을 시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소 선생님.” 시후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쓸쓸함을 똑똑히 보았다.“지아야, 너...” 무언가를 물으려던 찰나, 루이스의 감격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완벽해! 정말 완벽해!” 그의 손에는 지아에 관한 신체검사 결과지가 두껍게 들려 있었다. “모든 항목의 지표가 최우수에 달했어. 겨우 3년밖에 안 되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 회복했어! 너는 그 약물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약물이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임신 초기에 약을 많이 먹은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하물며 그중 일부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지아도 떠날 때는 상태가 특별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절대다수의 약물에 대해 항체를 만들어냈다. 지아는 이것이 모두 조원주와 약샘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후천적인 요양과 몇 년간의 적응을 거쳐 진정한 약물 실험 대상자로 거듭났다. “민서야. 너는 내가 여태 찾아왔던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야. 나는 이미 우리가 시작할 개조 계획이 너무도 기다려져.” 그녀를 보는 루이스의 눈빛은 마치 하이에나가 사냥감을 보고 흥분한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할까?”루이스는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매우 만족했다.지아는 그의 이런 눈빛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녀는 개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루이스를 자극하면, 그는 말할 수 없이 강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지아는 더욱 떠날 수 없게 될 터였다. “선생님, 개조 계획을 좀 더 늦출 수는 없을까요?” “늦추자고?”루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왜 늦추자는 거지?” 지아가 말했다.“저는 아직 하려던 일을 끝내지 못했거든요. 애초에 저를 해친 사람을 찾지도 못했고요. 만약 선생님께서 저를 개조해 주신다면, 한두 번의
인생은 원래 그런 것, 예로부터 모든 것을 갖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소시후는 기침을 몇 번 했다. “선생님, 제 선생님과 또 무슨 협의를 하신 거예요?”지아는 무거운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시후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연구 기금과 일부 약품 협력의 대리권을 제공했는데, 루이스가 동의했어. 너도 알잖아? 연구란 원래 돈이 많이 드는 일이지. 네 선생님은 연구 머리는 있지만, 상업적인 머리는 없잖아.”“그렇죠.”루이스가 만들어낸 물건들은 독충에게 공급되었고, 명성까지 떨치게 되었다. 만약 그가 스스로 특허를 신청해 시장에 내놓았다면, 꽤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끌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끌어야죠. 선생님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개조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도윤이랑은 화해한 거야? 옛날에는 사이가 꽤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 지아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렇죠, 우린 피할 수 없는 악연이에요.” “사실, 인생은 찰나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것에 불과해. 그러니 본인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 외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니까.” “소 선생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변하셨네요.” “너도 많이 변했어, 지아야. 너와 내가 만난 것도 인연인 것 같은데,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그때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시영이의 몸은 뼈가 되었을 거고, 우린 지금까지도 아무것도 몰랐을 거야.” “그건 그저 손쉬운 일이었을 뿐이에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소 선생님, 여기서 치료받는다는 걸 가족분들은 알고 계시나요?” 그녀는 루이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실험 기지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외부인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이었다. 시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소씨 가문을 떠났을 때보단 몸이 훨씬 좋아졌어.” 지아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루이스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일들은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기에, 금방 감을 찾을 수 있었다. 루이스도 그런 지아에 대해 아주 만족해했다. “너는 하나만 알려줘도 열을 아는구나. 확실히 저 바보들과는 달라.” 지아가 유리 전시대에 놓인 기계 팔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백채원에게 해줬던 것보다 훨씬 정밀했는데, 루이스는 변태적인 완벽주의자라서 손의 질감까지도 사람의 피부와 똑같이,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매끄럽고 섬세하게 만들어냈다. 그녀가 기계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루이스는 매우 기뻐했다.“봐, 그게 내가 새롭게 업그레이드한 버전이야. 겉으로 보기엔 어떤 흠도 없는 것 같고, 인간의 손가락보다 유연해 보이지. 민서야, 안심해. 네 몸에 사용하는 건 최고를 쓸 테니까.” 이 일을 언급하자, 지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단지 시간을 갖고 싶을 뿐이죠. 마음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잖아요.” “네 걱정이 일리가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안심해. 난 2년 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시험해 봤어. 그 사람한테 팔과 다리를 장착한 후에 지금까지 데이터를 관찰 중이지.” “팔과 다리를 장착했다고요?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대범해요?”지아가 물었다.“오늘 밤 약을 받으러 올 그 아이지. 오늘 밤에는 내가 있으니, 그 아이의 기계 유지 보수를 해줄 수 있겠군. 원래 그 아이의 손과 발은 힘줄이 끊겼고, 뼈까지 부서진 상태였어. 그래서 내게 부탁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고, 난 그 아이로 실험을 한 거야.”“덕분에 많은 데이터를 추가해서 여러 번 계량했고, 끝내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거지.” “손과 발의 힘줄이 끊겼다고요?”지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선생님, 몇 시에 약속하셨어요?” “8시.”루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갔다.“민서야, 이 다리 모양 좀 봐. 네 다리가 워낙 예뻐서 여러 버전을 만들었
그 당시, 지아가 사고를 당했을 때, 도윤은 지아를 위해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친여동생의 손발을 직접 부러뜨렸고, 평생 여동생을 속박하려 했다. 사지를 잃은 사람이 어찌 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도윤은 예린의 결심을 얕본 듯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어서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강했기에, 단지 손발이 사라진 것만으로 포기할 리가 없었다. 도윤과 그의 어머니는 예린을 개과천선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린은 끈기 있기 힘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도윤은 너무 바빴고 예린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숨겨졌다고 하더라도 도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예린을 본 순간,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손목을 만졌다. 당시에 예린에게 당한 손목의 상처가 아릿하게 아파져 왔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았고, 흉터도 사라졌지만 말이다. 지아는 그 총알이 손목이 아닌 마음에 박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쪽은...”예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다. 지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저는 루이스 선생님의 보조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착각인 것일까. 예린은 눈앞에 흰 가운을 입은 채 가면을 쓴 여자의 몸매가 조금 익숙하다고 느꼈다. 사실, 사랑뿐만 아니라 증오 역시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을 단번에 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예린은 이내 이 생각을 뒤로했다.‘하긴, 소지아 같은 여자가 어떻게 루이스랑 엮일 수 있겠어?’ ‘걔는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수고가 많으시네요.”예린은 조용히 지아의 뒤를 따랐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알 리가 없었다. 과거의 일들이 지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도윤의 냉정한 눈빛, 소씨 가문의 파산, 소계훈의 교통사고, 조율의 죽음, 자신이 납치당했던 일, 하루가 옥상에서 떨어져 눈앞에서 죽었던 일까지.지아는 이
예린은 시후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해당화.”밤바람을 타고 세 글자가 속삭이듯 날아들었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왔어? 너 누구랑 있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예린은 곧장 전화를 끊고 재빨리 달려갔다. 그녀는 기계 다리를 이식받아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반면, 시후는 몸이 좋지 않아서 몇 걸음 뒤쫓다가 숨이 차서 그대로 화단 옆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그는 예린이 다시 돌아와 자신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줄은 몰랐다.“괜찮으세요?” 그녀는 화단 옆에 기대어 앉은 시후를 보고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것이었다. 시후가 예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잡았다, 해당화.”해당화는 천웅에서 사용하는 그녀의 가명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하며 부드러웠는데, 예린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녀가 인생에서 단 한 번 얻은 구원이 소시후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 탈출한 예린이 시후와 마주친 것은 운명이었다. 그는 그녀를 천웅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고, 재활을 도와주었으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이후, 그녀는 독충을 따라 천웅을 떠났으나, 단 한번도 시후를 잊은 적이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새 사람을 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예요?” 시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얘기 좀 할까?” 예린은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시후는 화단을 짚고 일어서며 꽉 잡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내 예린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예린은 가로등 빛을 빌어 두 사람이 맞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소 선생님의 손이라니!’ 그녀가 시후와 손을 맞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방은 그의 성격처럼 단정하고 밝
시후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난 아직도 네가 처음 나한테 왔을 때가 기억나. 아주 말랐고, 아주 아담했었지...” “그만하세요, 소 선생님.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말하고 싶지 않다고요.”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말할 수 없는 거야? 해당화, 네 뒤에 누군가 있지, 그렇지? 나한테 말해봐, 그 사람이 누구길래, 네 오빠의 행복까지도 저버리고 한 가족을 갈라놓으려 하는 거지?” 예린은 시후의 압박을 받고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의 두 눈은 그녀 마음속의 가장 깊은 곳을 보려는 듯했다. 예린은 시후를 밀쳐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소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할 수 없어요.” 시후는 그녀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그 온화하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한 예린이 다시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초조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너랑 얘기했던 남자는 누구야?]“루이스의 보조야.”예린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보조?]“그게 아니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데? 참, 나한테 부탁할 건 또 뭐야?”[소지아가 루이스 곁에 있는지 좀 알아봐 줘. 만약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여자를 제거해 줘!] 예린이 나지막이 되뇌었다.“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래! 지금이 최고의 기회야.] 바로 이때, 멀리서 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해당화 씨, 얼마나 더 걸리나요?” 예린은 곧장 전화를 끊고 지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아는 고독하게 어두운 밤 속에 서 있었고, 조명이 그녀의 마스크를 비췄지만, 그녀의 표정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린은 지아가 지금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손에 서류철을 든 채 여우처럼 우아하게 서 있었다. 예린이 지아를 스쳐 지나가며 한 마디를 던졌다.“많이 변했네.” 지아는 확실히 많이 변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고,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