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
박민호가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물었다.“누나, 괜찮아?”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박민호는 돈을 뜯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해 그녀를 부축해 줬다.“그럴 필요 없어.”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수민의 묘를 몇 번 더 바라보다가 애써 어지러움을 참고 자리를 떴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이를 본 박민호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누나!”그리고 단번에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빨리 병원에 가요.”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뒤였고 박민정은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어렴풋이 맞춰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느낌은 그녀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이때,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비로소 맨 앞에 서 있는 유남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 괜찮아?”그는 다정하게 물었다.뒤따라온 사람은 박민호였는데 그도 다급히 물었다.“누나,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앞으로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병원부터 가봐. 알겠지?”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제 괜찮아. 아마 저혈당 때문에 쓰러졌을 거야.”검사 결과에서도 별다른 증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가 걱정되었다.“앞으로 어디 갈 때는 꼭 사람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그럴게요.”박민정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박민호는 자기 누나를 걱정하는 유남준을 보고 살짝 안심했다.그러다가 문득 이제부터 유남준을 따라가기만 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배고파? 내가 밥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다 나은 것 같은데 우리 그냥 집에 가서 먹어요.”박민정은 병원에 있는 게 싫었다.유남준은 원래 안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박민정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에는 집에 가기로 했고 박민호는 두 사람을 집까
깊은 밤, 어느 술집 룸.최현아는 주성민의 품에 안겨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러자 남자는 한껏 다정하게 그녀를 위했다.“조금만 참아. 유씨 가문의 재산만 손에 넣으면 우리도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으니까.”“어디 그게 말처럼 쉬워? 남준 씨는 우리가 영원히 넘지 못하는 산처럼 버티고 있잖아. 지금 호산그룹도 손에 쥐고 있고 또 네 명의 아들까지 옆에 끼고 있으니 얼마나 득의양양해 있겠어.”최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지훈이만 앞으로 힘들게 살아갈 것 같아.”순간 주성민의 눈빛이 살벌해지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그 사람들을 한방에 제거할 방법이 없을까?”최현아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무슨 소리야?”“현아야, 옛말에 모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 네가 하기 힘들면 네 남편 시키면 되지.”주성민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예전에 남준 씨한테 한번 당한 뒤로는 겁을 먹고 찍소리도 못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네가 자극해야지.”남자는 낮은 소리로 최현아에게 방법을 알려줬다.최현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그 뜻은 성혁 씨랑 동서를...”“만약 유성혁이 박민정을 진짜로 건드리면 유남준의 성격에 무슨 짓을 못 할까?”남자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렇게 되면 박민정 그 고약한 여자도 한 방에 처리되겠네!”“며칠 뒤면 추석이라 아마 다들 돌아올 거야.”“그러면 일단 그날로 정하자.”둘은 말을 마친 뒤 다시 꼭 끌어안았다....추석 당일.박민정은 미리 박형식과 은정숙에게 제사를 올렸다.또한 한수민의 묘에도 가보았는데 마침 박민호와 윤소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윤소현은 원래 오기 싫었지만 최근에 너무 안 좋은 일만 벌어지는 것 같아 액운이라도 떨쳐내려고 온 것이다.“네가 여기까지 제사 지내러 올 줄은 또 몰랐네.”박민호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윤
이미 집 안까지 들어온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박민정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앉으세요.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최현아가 자리에 앉자 유지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별건 아니고 우리 지훈이가 예찬이랑 윤우랑 놀고 싶다고 해서.”도우미는 빠르게 마실 차를 내왔다.유지훈은 집안을 둘러보다가 박예찬의 방에 들어와 같이 놀자고 했다.그러나 박윤우는 한껏 불편한 티를 내며 물었다.“유지훈, 우리 집엔 왜 왔어?” 유지훈도 사실 내키지 않았지만 최현아와 할아버지가 당부했던 일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그들에게 말했다.“윤우야, 예찬아, 우리 같이 놀자. 집에서 혼자 놀다가 너무 심심해서 왔어.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옛 저택에도 안 오잖아. 현진이랑 현우가 보고 싶지 않아?”유지훈의 입에 발린 말에 박윤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가 어디에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네 집으로 빨리 꺼져.”그의 말에도 유지훈은 애써 화를 참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예찬아, 너도 내가 꺼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 몰라, 난 그냥 여기서 놀 거야.”여태껏 안하무인, 기고만장이던 유지훈이 갑자기 이리도 얌전하고 모든 걸 참아내는 모습에도 박예찬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그래. 그러면 여기서 우리랑 같이 놀자.”“좋아!”그러나 박윤우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박예찬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형, 제 정신이야? 왜 갑자기 저 애랑 놀겠다는 거야?”그러자 박예찬이 은밀하게 눈빛을 보낸 뒤 다시 말했다.“윤우야, 지훈이는 우리 친척인데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박윤우는 단번에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 유지훈, 그러면 여기서 얌전히 놀아. 일부러 사고 칠 생각하지 말고.”방안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한편, 거실에서 최현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동서, 오늘 남준 씨는 집에 없어?”“네, 요즘 회사 일이 바쁜지 계속
아직 어린아이인데 일찍 철이 든 박예찬을 보고 박민정은 고마우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바보야. 넌 아직 어려서 엄마 아빠가 지켜주면 돼.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먼저 우리한테 말해줘야 해, 알겠지?”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박민정은 그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해 주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이때, 박윤우가 방안에 들어오면서 박예찬에게 다가왔다.“형은 대체 어떻게 그 나쁜 놈을 잡은 거야?”박윤우가 궁금증을 못 참고 그에게 묻자 박예찬은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대박!”박윤우는 손뼉까지 치며 그를 칭찬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엄마와 저 쓰레기 아빠는 이제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거래?”“몰라. 그런데...”박예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에는 그 범인이 이제 나를 해칠 마음이 없는 것 같아.”오늘 다시 만난 정호철의 눈빛은 예전처럼 살기가 돋쳐있지 않았고 오히려 정수미가 자신을 바라보던 것처럼 따듯함이 느껴졌다.“만약 그 사람이 정수미, 그 늙은 여우 쪽의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윤소현 쪽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박윤우가 세밀하게 분석했다.“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우리도 경계심을 높이고 조심해야 해.”“알겠어.”말하다가 박윤우는 문득 박예찬의 컴퓨터를 보며 물었다.“형, 지금 뭐 해?”박예찬은 그제야 막고 있던 손을 걷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저 지엔 그룹의 지도를 보고 있었어.”박윤우는 컴퓨터 화면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료를 본 순간 머리가 아파졌다.“보고 있으니 벌써 눈이 침침하네. 난 그만 노래나 들으면서 그림이나 그려야겠다.”박윤우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다.박예찬도 별말 없이 계속 자기 일을 해 나가고 있는데 유지훈이 갑자기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박예찬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에는 그의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예찬아, 집에서 뭐 하고 있어?”“무슨 일이야?”박예
박예찬은 최근에 계속 박씨 가문 옛 저택에서 지냈다.그는 경계심도 높고 눈치도 빨랐는데 요즘 따라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미행하는 것 같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하여 이날 박예찬은 돌아오는 길에 정민기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일부러 구석으로 들어갔다가 뒤따라오는 범인을 잡을 속셈이었다.박예찬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뒤 어느 구석에 숨었다.이때, 그의 뒤를 따르던 정호철은 앞에 길도 없고 박예찬도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어디로 갔지?”이때 눈앞에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박예찬도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가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당신이었군요.”그때 자신을 납치했던 사람이다.정호철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정민기는 재빨리 그를 제압했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예찬아, 괜찮아?”박예찬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아저씨, 감사합니다.”말을 마친 뒤 손가락으로 정호철을 가리켰다.“저 사람이 그때 저를 납치했던 범인이에요.”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알겠어. 바로 민정 씨랑 대표님한테 보고할게.”“네.”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정호철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저를 계속 미행했나요? 또 납치하려고요?”정호철은 자기 다리 길이보다도 작은 아이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그만 기가 눌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정수미의 건강 상태가 날로 악화하고 있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동시에 박예찬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몰래 뒤에서 보호해 주고 있었다.그의 말에 박예찬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사과요?”“그래.”정호철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박예찬은 쉽게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그렇게 정민기와 몇 명의 보디가드는 그를 차에 태우고 저택으로 향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집에
“전 괜찮아요.”“정말 다행이다.”정수미는 수화기에 대고 말하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큰 문제가 없대. 그저 저혈당으로 쓰러진 거래.”박민정은 이 말을 왜 지금 자신에게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답해줬다.“네, 그러면 다행이네요.”“내일부터 다시 내가 아침밥 가져다줄게.”“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단번에 거절했다.또다시 자신 때문에 정수미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괜히 윤소현의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뺨 맞는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단호함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전화 끊을게요.”“잠깐만.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너 보러 가도 돼?”정수미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아니요.”박민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정수미는 한참이나 이미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나에 대해 생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비서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오늘 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린 일을 그녀에게 말해줬다.“뭐?”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되물었다.“그런데 왜 안 말렸어?”“말릴 새도 없이 큰 아가씨가 먼저 손을 댔습니다.”비서는 한껏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정수미는 이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별장에 돌아갔다.윤소현은 한창 친구들을 불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정수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그녀만 밖으로 불러냈다.“엄마, 왜 벌써 퇴원하셨어요?”윤소현이 걱정하는 척 묻자 정수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누가 너한테 민정이를 때려도 된다고 했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분명 박민정이 그새 고자질했다고 생각했다.“엄마, 저는 단지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간 거예요. 혹시 민정이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걱정되는 것보다 자기가 맞은 게 더 억울했나 보네요.”윤소현의 말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정수미는 윤소현더러 그녀를 잡으라고 했지만 윤소현은 그러기 싫었다.“엄마, 너무 편애가 심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매일 일찍 일어나 민정이네 회사 사람한테도 아침밥 해서 가져다주니까 쓰러지죠. 전 싫어요.”“소현아, 넌 모르겠지만 방금 민정이가 아니었으면 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을 꺼야.”정수미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 자기 몸 아래에 박민정이 깔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또한 그녀가 기꺼이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도 알고 있다.하여 이 일을 윤소현에게 말해줬지만 그녀는 이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친딸인데 당연히 그랬어야죠. 만약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저도 엄마한테 달려갔을 거예요.”정수미는 윤소현의 단호한 말에도 이상하게 믿고 싶지 않았다.“너도 그만 가봐. 혼자 좀 쉬어야겠다.”윤소현도 마침 병원에 있기 싫었던 참에 그녀는 냉큼 답했다.“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윤소현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신신당부했다.“사람 보내서 민정이는 괜찮은지 알아봐. 몸도 성치 않은데 괜히 나 때문에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네.”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참아왔던 말을 토해냈다.“정 대표님, 전 그래도 둘째 아가씨가 좋아요. 큰 아가씨는 그저 빈말만 하시는 것 같거든요.”박민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정수미를 구해줬지만 윤소현은 그저 말만 하다가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갔다.정수미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한껏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나도 알아. 민정이는 모든 면에서 소현이보다 뛰어나지만 소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내 손에서 자랐잖아. 그 애가 지금 이렇게 변한 건 내 책임도 커.”...박민정은 병실에서 나온 뒤 의사를 찾아가 간단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진서연은 그녀를 보자 마자 냉큼 달려와 물었다.“보스, 괜찮아요?”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이
그러자 비서가 달려와 그녀를 말렸다.“큰 아가씨, 정 대표님께서 먼저 둘째 아가씨한테 직접 요리해 주고 싶다고 했어요. 둘째 아가씨만 탓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그럼 누구를 탓해야 하는데? 거절할 줄도 몰라? 엄마는 원래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잖아!”윤소현은 일부러 더 크게 화를 냈다.“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엄마한테 저런 일을 시켜본 적이 없어.”비서도 그녀가 정수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더는 말릴 수 없었다.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이 맞은 이유를 알고 윤소현의 손을 놨다.“저도 말렸는데 정 대표님께서 계속 오셨어요. 그리고 방금 제가 맞은 건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번에는 참지 않을 겁니다.”윤소현은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겁을 먹었다.하여 더 때리는 건 무리인 것 같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엄마, 제발 일어나요. 이대로 가면 저는 어떡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정수미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그리고 며칠 전에 윤소현은 이미 유언장에도 손을 댔기에 정수미가 죽고 장 변호사까지 처리하기만 하면 장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다 그녀의 것으로 된다.그러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한 시간 뒤, 수술실의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걸어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의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그러다가 의사가 겨우 입을 뗐다.“지금은 맥박이 돌아왔지만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혹시 예전에 큰 병을 앓았었나요?”의사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다행히 모두가 지금 정수미한테에 집중되어 있어 그녀의 표정 변화는 보지 못했다.박민정은 정수미가 살았다는 소식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이는 것 같았다.비서는 의사에게 정수미가 지금까지 앓던 병을 모두 알려줬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미는 수술실에서 밀려 나왔는데 문 어구에서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