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최현아는 계속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이렇게 보면 또 남자가 너무 잘생기고 능력이 좋아도 파리들이 많이 꼬여서 마냥 기쁜일만은 아닌것 같네. 그러니까 동서도 조심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어린애도 아닌데 아무리 감시하고 조심한다고 되겠어요? 그냥 신경끄고 자기 삶을 사는게 낫을 것 같네요.”최현아는 박민정이 이렇게 쿨하게 나올줄은 생각지도 못해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이따가 텐트도 쳐야 할 텐데 혹시나 도울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사람 보낼 테니까.”말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네, 고마워요.”최현아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남준이 박민정의 곁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유남준의 곁에서 맴돌던 학부모들의 안색이 저마다 어둡더니 더 이상 그와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저 사람들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유남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박민정의 관심에 일부러 입을 삐쭉거리며 답했다.“맞춰봐.”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도발에 순간 흥미가 뚝 떨어졌다.“됐어요. 그럼 전 텐트 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뜨는 박민정을 보고 유남준도 냉큼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별일 아니고 IM 그룹이랑 협력하고 싶다고.”“그렇군요.”갑자기 냉담해진 박민정의 태도에 유남준은 그녀의 생각을 더욱 알기 힘들었다.“민정아, 화났어?”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아니요? 제가 왜 화 나요?”유남준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거짓말하는 건 같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수다를 떨어도 너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텐트를 들고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유남준이 화났다는 걸 눈치챘다.유남준이 혼자서 말없이 텐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박예찬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순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박민정은 장연수란 사실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연수 씨, 무슨 일이에요?”장연수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민정 씨, 제가 오늘 오면서 돗자리를 못 챙겼는데 혹시 같이 밥 먹어도 될까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어차피 갖고 온 돗자리 사이즈가 커서 비좁지는 않았다.장연수는 그녀의 허락에 활짝 웃더니 지원이만 남기고 먹거리 가지러 달려갔다.그러나 유남준은 그런 장연수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박민정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내가 다른 돗자리 사 오라고 할게.”“지금 사러 가도 이미 늦었어요. 아쉬운 대로 그냥 먹어요.”“그래.”이때 장연수는 어느새 음식을 한 보따리 가져와서 돗자리에 올려놨다.“제가 직접 한 음식들인데 괜찮으면 같이 먹어요.”“감사합니다.”그러다가 그녀느 문득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유 대표님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고 저희 남편도 자주 언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어느 연회에서 대화도 나눴다던데요?”“그래서 제가 오늘 대표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저희 남편이 듣더니 대표님 명함 하나만 부탁하던데 혹시 받아볼 수 있을까요?”박민정은 그제야 장연수가 오늘 그들에게 접근한 의도를 알아챘다.그러나 남편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유남준도 그녀가 그저 학부모라고 생각하고는 선뜻 자기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장연수는 밥 먹을 때도 유남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어렴풋이 자기 남편과 같이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그러나 유남준은 그저 예의상 몇 마디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식사 자리가 끝난 뒤 장연수는 박민정이 뒷정리하는 걸 가로막으며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고 박민정도 진작에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쉽세 물러서지 않았다.“지원이 엄마, 제가 하면 돼요.”“아니요. 이건 제가 정리할게요. 민정 씨는 아이들이랑 놀아
최현아는 유남준이 계속 따라오는 게 불편했다. 그가 옆에 있으면 박민정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에게 굳이 부탁할 필요 없이 저만 따라가는 게 왠지 더 안심될 것 같네요.”유남준의 말에 최현아는 더욱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이때 학부모들은 박민정 곁에 서 있는 유남준에게 눈길을 몇 번 더 주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남편이 있는 걸 보면 예찬이 엄마는 참 복도 많아.”“그러게요. 그러니까 태어난 아들도 똑똑한가 보죠. 지난번 수학 경시대회에서도 1등 했다던데요?”“우리 딸이 나중에 예찬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네요.”“꿈 깨요.”그들은 말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유남준 외에도 많은 아이의 부모님들이 야외 캠핑을 즐기기 위해 참석하게 되었다.그리고 각자의 차에 올라탄 뒤 함께 출발했다.박예찬은 차에 올라타서도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요즘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박민정이 웃으며 답했다.“많이 좋아졌어. 기억들도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고.”순간, 박예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뭐가 기억났는데?”“너랑 윤우에 관한 기억인 것 같은데 너무 흐릿했어.”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당장에라도 박민정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엄마, 건강도 챙기고 밥도 많이 먹어야 해.”말을 마친 뒤 그는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아직 추우니까 손에 쥐고 있어.”이건 같은 반에 여자아이가 박예찬에게 준 물건이었다.박민정은 손에 든 핫팩을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자기 아들이 말은 투박해도 참 따뜻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순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우리 아들, 고마워.”그러다가 자기 아들을 꽉 안아줬는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예찬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그러나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남준은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아침에 그녀를 위해
유남준은 쉽사리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박민정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약점이었다.최현아는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여러분, 선생님과 상의한 끝에 봄도 왔겠다 싶어 아이들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려고 합니다. 좋은 날씨를 놓치지 말고 모든 학부모님께서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그녀의 제안은 순식간에 대다수 부모들의 찬성을 얻었다.박민정도 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모든 학부모가 참여한다니 혼자 거절하기도 애매해 결국 그녀도 동행하기로 했다.최현아는 박민정의 답변을 확인하고 살짝 안도했다. 곧바로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주의 사항을 보냈다.[동서, 이모님께 들으니 동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더라. 예찬이를 데리고 가려면 조심해야 할 거야. 여기 필요한 물품 리스트가 있어. 소풍뿐만 아니라 캠핑도 할 거니까 모기 기피제나 감기약 같은 것도 꼭 챙겨가도록 해.]박민정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그 무렵,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지원이 엄마였다.[예전엔 이런 소풍이나 캠핑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어쩐 일로 최현아가 나서서 추진하는 걸까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이제 완전히 박민정의 편이 된 지원이 엄마였다.박민정도 신중한 태도로 답장을 보냈다.[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지켜봐요.][네, 알겠어요.]박민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유남준에게 박예찬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이 말에 유남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너 혼자?”박민정은 가볍게 끄덕였다.“네, 학교에서 부모 한 명만 동행하면 된다고 했어요.”유남준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돼. 나도 같이 갈 거야.”그녀와 박예찬을 단둘이 외부에 내보내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망설였다.“근데 남준 씨는 회사에 나가야 하잖아요?”“일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소풍은 1년에 몇 번 있지도 않아. 그런데 날짜는 언제야?”“모레예요.”“좋아. 내
정호철은 박예찬이 다니는 유치원을 알아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그 앞에서 기다렸다.멀리서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단순히 잘생긴 것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도 비상해 아이들 무리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한편, 박예찬도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최근 들어 유지훈은 박예찬이 곤경에 빠지길 기다렸다. 자신의 부모가 다시금 세력을 되찾기를 기대하며 버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예찬아.”그가 서둘러 박예찬의 곁으로 다가가자 박예찬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무슨 일이야?”“우리 다시 친해지자.”“친해지자고?”박예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너, 얼마 전에 나랑 안 놀겠다고 하지 않았어? 앞으로 난 네 졸개고 넌 유씨 가문의 후계자라고도 했지?”유지훈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그건... 그냥 농담이었어!”“아, 농담이었어?”하지만 박예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최근 그는 김훈에게 부탁해 자신의 주변 경호를 한층 더 강화했다. 혹시라도 유지훈의 부모가 또 무슨 수를 쓸지 몰랐기 때문이다.“예찬아, 나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우리 친구로 지내자, 응?”“난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박예찬은 그의 손을 툭 뿌리치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가 버렸고 유지훈은 제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표정에는 깊은 상실감이 묻어났다.“너도 거절당했구나?”그때 조동민이 다가왔다.“유지훈, 너 예찬이한테 퇴짜 맞았구나? 하하하!”유지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뭐가 그렇게 웃기냐? 조씨 가문의 자식이라고 나를 비웃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위협했다.“원장님한테 한 마디만 하면 널 유치원에서 내쫓는 건 일도 아니야.”조동민은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쪼잔하기는.”조동민이 떠난 뒤 유지훈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