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방성원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였다.설인하는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뭐라고?”방씨 집안의 절반 자산이라니, 한때 파산했던 설씨 집안의 가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막대한 금액이었다.방성원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믿기지 않는다면 더는 방법이 없어.”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고 나면 모든 재산은 두 사람의 아이들 이름으로 넘어갈 텐데, 장인 장모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설인하는 여전히 의심스러워했다. “날 속이려는 거지? 난 어린애가 아니야.”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곧바로 변호사에게 서류를 작성하라고 할게.” 방성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서류를 작성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설인하는 그가 더 이상 집요하게 굴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한편, 신부 대기실에는 화려하게 꾸민 민수아가 있었고 박민정과 진서연도 메이크업을 끝낸 상태였다.그리고 들러리 중 한 명은 바로 정민기였다.정민기는 처음엔 들러리가 되는 걸 꺼렸지만 진서연이 들러리를 맡았다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수락했다.서다희는 다부진 체격의 정민기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제 주변엔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없는 거예요?”정민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싫어요?”서다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다만 잠시 후에는 저한테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정민기는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럼 꽃다발은 제 쪽으로 던져요.”그는 그 꽃다발을 진서연에게 주고 싶었다.서다희는 OK 사인을 보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 수아가 알아서 잘 던질 거예요.”결혼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여러 절차가 끝난 후 신부가 부케를 던졌고 정민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을 받아냈다.그가 망설임 없이 진서연에게 꽃다발을 건네자 진서연은 놀란 듯 물었다.“저한테요?”“네.”정민기는 신랑 신부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정수미는 박민정과 접촉할수록 자신이 그녀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는 걸 느꼈다.그러나 박민정은 다소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해요, 가고 싶지 않아요.”정수미는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럼 내일은 어때? 주말이잖아.”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재촉했다. “우리 회사에 잠깐 들를 수 있을까? 너한테 줄 게 있어.”“그게...” 박민정은 망설이며 물었다. “뭔데요?”“오면 알게 될 거야. 꼭 와.”아침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정수미는 참지 못하고 가볍게 기침을 했고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렸다.박민정은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대답했다. “알겠어요.”“그럼 약속한 거야.”“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수미는 박민정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 뒤에야 차에 올랐다.차에 앉은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손수건을 펼쳤다. 그 위에는 선명한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피까지 토하신 거예요?” 비서가 깜짝 놀라 묻자 정수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부터 그랬어. 별일 아니야.”“대표님, 이러시면 안 돼요. 병원에 가야 해요.” 비서가 걱정스레 말했으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 이 몸으로 병원에 간다고 몇 년 더 살 수 있겠어?”비서의 눈에는 연민이 가득했다.“그래도...”“장 변이 유언장을 거의 다 작성했을 거야. 내일, 그걸 가져오라고 해.”비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큰 아가씨에게도 연락할까요?”정수미는 잠시 망설였다.“됐어. 소현이는 너무 이기적이니까 유언장을 알게 되면 난리를 칠 거야. 내가 죽은 후에나 알게 해.”“알겠습니다.”...박민정은 집에 돌아온 후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막상 깨어나면 꿈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이제 민수아가 따로 나가 살게 되면서 집에는 박민정과 설인하, 진서연, 그리고 유남준, 정민기, 박윤우가 함께 지내고 있었다.아침 일찍 박윤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엄마, 오늘
모든 것이 안배되었다.유남준은 박민정과 박윤우를 데리고 직접 차를 몰아 정씨 그룹 지사로 향했다.정수미는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 곁에는 한 눈에 봐도 세련된 중년 여성이 함께 있었다.“언니, 아이를 찾았으면 집으로 데려가 친자 확인을 해야 하지 않아?” 정수미의 동생인 정보주는 묻는다. 그녀는 과거 인터넷에서 윤소현을 도왔던 이모였다.정수미는 차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아직도 모르니? 그때 소현이가 너더러 괴롭히라 했던 사람이 바로 내 친딸이자, 네 조카야.”“뭐라고?” 정보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럼 어쩌지? 나 정말 몰랐어!”“알아. 나도 그땐 몰랐으니까. 그래서 아이에게 상처를 줬고 내 친외손자에게도 그랬지.” 정수미는 씁쓸히 답했다.정보주는 조카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앉아 있기에도, 그렇다고 일어서기에도 불편한 자리였다.“이따가 어떻게 사과하지?”“걱정 마. 민정이는 착한 아이라 말 잘 들을 거야.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많은 걸 기억하지 못하거든.” 정수미가 말했다.“어디가 안 좋은 건데? 병원엔 가봤어? 내가 아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소개해줄까?” 정보주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비서가 다가왔다. “입구 경비가 작은 아가씨께서 오셨답니다.”정수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보주의 손을 잡았다. “가자. 민정이를 맞이하러 가야지.”“그래.”정보주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그녀는 비록 정씨 성을 가졌지만 정수미의 사촌일 뿐 친여동생은 아니었다. 늘 정씨 가문의 후계 문제로 고민해왔던 그녀는 이제 박민정의 존재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둘은 서둘러 내려갔고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바로 윤소현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차가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편애가 심각하군. 나도
정보주는 말투가 직설적이었다.정수미는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보주야, 그만해. 민정이가 놀랐잖아.”그제야 정신이 든 정보주는 여유를 되찾고 여전히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작은 소년, 박윤우를 바라보았다.그러자 박윤우는 재빠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할머니, 절대 저 안아주지 마세요.”정보주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내가 무슨 할머니냐. 난 네 이모할머니란다.”“저에겐 외할머니 같은 사람 없어요.” 박윤우는 고개를 홱 돌렸다.정보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욱 즐거워하며 몸을 낮췄다. “그래도 난 네 이모할머니야. 네가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단다. 자, 안아보자꾸나.”“싫어요.” 박윤우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정수미는 가족 모두를 놀라게 할까 봐 정보주의 팔을 붙잡았다. “됐어, 그만해. 애가 낯을 가리잖아.”박윤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전 낯가림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전 엄마를 지키러 온 거라고요. 안 그랬으면 애초에 따라오지도 않았어요.’정보주는 비로소 물러섰고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며 말투를 다소 점잖게 바꿨다. “유 대표,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뵙네요.”육남침은 가벼운 인사로 화답했다.“우리 민정이를 잘 부탁드려요. 절대 상처 주지 말아야 해요.” 정보주는 화제를 돌렸다.“물론입니다.” 유남준은 단호히 대답했다.이때 정수미가 나서며 말했다. “자, 이제 올라가서 이야기하자.”이들은 함께 위층으로 향했고 로비에 남은 직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역시 취업 면접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정 대표의 친척들이었다.“아까 아이가 그분을 이모할머니라고 불렀으니, 저 여자가 대표님의 딸인 게 틀림없잖아?”“잃어버린 지 오래된 딸이라는 그 사람? 정말 예쁘고 기품 있어 보인다.”“그러게. 성격은 어떨지 모르겠네.”“윤소현보다는 낫기만 하면 돼. 만약 회사 경영권을 윤소현이 물려받으면 우린 큰일이거든.”직원들은 윤소현의 행동을 탐탁지 않아 했기에 박민정이 회사에 나타난 걸
정수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민정아, 이건 네가 받아야 해.”정보주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래, 넌 언니의 친딸이잖아. 언니가 너한테 안 주면 누구한테 주겠어?”한편, 장 변호사는 감탄했다. 이렇게 막대한 재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면 돈에 별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박민정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제 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게요. 모든 게 꿈같아요.”한수민이 비록 잘해주진 않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엄연히 ‘엄마'였다.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어머니라고 하니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수미가 건네는 막대한 재산은 오히려 큰 부담이었다.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 “박민정, 아직도 엄마를 원망하니? 아니면 내가 소현이에게도 재산을 나눠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박민정이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정수미는 급히 덧붙였다. “소현이는 내가 직접 키운 아이야. 널 사랑하듯 소현이도 사랑한단다.”박민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이때, 유남준이 박민정의 마음속 억울함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정 대표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 재산은 곧 제 아내의 것이니 민정이는 돈이 부족하지 않습니다.”돈을 윤소현에게 나눠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다니.그는 박민정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녀가 이런 걸로 절대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현재 유남준의 자산은 정씨 가문보다 훨씬 많았다.정수미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그럼 무슨 뜻입니까?” 유남준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시려고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민정이는 대표님 재산 따위에 관심 없습니다. 모두 다 윤소현에게 주셔도 상관없어요.”정수미는 이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엉뚱한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민정아,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그녀는 해명하려 했지만 어디
방관자는 오히려 더 잘 보게 되기 마련이다. 그녀들은 모두 여인으로서 정씨 가문에서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왔다.정보주는 윤소현을 키운 적이 없었기에 보다 이성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었다.“정말로 그런 일이라면 난 절대 소현이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정수미의 목이 마치 무언가에 찔린 듯 아릿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이 격렬하게 기침을 쏟아냈다. “콜록, 콜록...”“언니, 괜찮아?” 정보주가 걱정스레 묻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젠 익숙해.”그녀는 마음속의 불편함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넌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정보주는 원래 박민정을 보고 난 후 바로 돌아가려 했었다. 저쪽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정수미의 모습을 보니 며칠 더 머물기로 결심했다.“나 요즘 특별히 급한 일도 없으니까, 진주시에서 언니랑 좀 더 시간을 보내려고.”“그래, 잘 됐네. 다음번엔 우리 같이 민정이를 찾아가서 확실히 이야기해 보자.”“응, 그러자.”...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차에 올라 돌아가는 길에서 차창 너머로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그때, 박윤우가 조그마한 손을 뻗어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박민정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왜 그러니?”“엄마, 속상해요?” 박윤우는 박민정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꼈다.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거짓말했다. “아니야, 윤우야. 왜 그렇게 생각해?”박윤우가 한숨을 쉬었다. “엄마, 무슨 일이든 꼭 말해야 해요. 혼자 마음속에 담아두면 안 돼요. 알겠죠? 저랑 아빠는 엄마를 사랑해요. 오직 엄마만 사랑해요.”‘오직 엄마만.’그 다섯 글자가 박민정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박윤우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 볼 줄은 몰랐다.박민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 엄마가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건데. 사실 좀 속상하긴 했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박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영란은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두 아이가 이렇게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는데, 너희가 데려가겠다고? 안 돼, 난 절대 보낼 수 없어!” 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어 더욱 정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렇게 하자, 너희 둘이 함께 이곳으로 이사 오는 게 어때? 그러면 우리 모두 한집에서 지낼 수 있잖니.” 고영란이 제안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이곳으로 이사 오는 것을 원치 않으리란 걸 알기에 단호히 거절했다.“안 돼요. 지금 민정이는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해서 이곳에 오는 게 적절하지 않아요.”“왜? 넌 꼭 아이들을 데려가야만 속이 시원하겠니? 이 엄마가 속상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고영란은 얼굴 가득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두 아이를 잘 보살피지 못했어?”유남준은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거기엔 박민정이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조금만 더 기다리죠. 민정이가 기억을 되찾고 아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데려가야 합니다.” 유남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결혼하고 나더니 엄마는 뒷전이네. 예전에야 두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다시 데려가겠다고?”박민정은 저 멀리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아이들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 아이는 그녀의 팔을 꼭 안고 서로 더 많이 놀아달라고 보채며 장난을 쳤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후 여섯 시가 되니 유남우가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는 단번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아이들 틈에서 활짝 웃는 그녀를 보며 유남우는 순간 멍해졌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박민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형은 어디 있어?” 그는 하인을 향해 물었다.“큰 도련님께서는 어르신 댁에 가셨습니다.” 하인의 대답에 유남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박민정 쪽으로 걸어
박민정은 두 아이가 졸린 기색을 보이자 즉시 보모를 불러 아이들을 재웠다.그녀는 박윤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윤우야, 우리 아빠가 돌아왔는지 보러 가볼까?”“좋아요!”드디어 유남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박윤우는 기뻐하며 대답했다.박민정과 아이가 자신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유남우의 표정은 복잡했고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이때 고영란이 2층에서 내려와 둘째 아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남우야, 어쩐 일이니? 다혜에 대한 소식은 들었니? 아이가 아직 중환자실에 있어. 시간 되면 한 번 가보렴.”고영란은 다혜가 자신의 친손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함께한 정이 있어 너무 매정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유남우는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어머니, 이제부터 저희는 윤소현과 그 아이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저는 가볼 생각이 없습니다.”고영란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어머니,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셨습니까? 예전 같으면 저보고 사생아를 보러 가라고 하셨을 리 없잖아요?”‘사생아’라는 단어가 고영란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그렇다. 젊었을 때의 그녀라면 이런 일을 알게 되자마자 윤소현을 집에서 내쫓고 그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고 그녀의 시선과 마음도 달라졌다.“됐어. 네가 가기 싫다면 그만두렴. 그런데 오늘 여기에 온 이유가 뭐니?”“별일 아닙니다. 그냥 밥 한 끼 먹으러 왔어요. 어머니, 설마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실 건가요?” 유남우의 날이 선 말에 고영란은 심정이 착잡했다. 언제부터 착하고 순했던 둘째 아들이 이렇게 변한 걸까?예전에는 유남준이 반항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유남우가 훨씬 더 반항적이었다.“무슨 소리니, 네가 밥 먹으러 온 걸 내가 왜 반기지 않겠니?”고영란은 웃으며 다가가 말했다.“이리 와서 엄마한테 안겨 보렴.”그러나 유남우는 한 발짝 물러섰다. “어머니, 전 이제 다 컸어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