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낼 수 있다고?’다음 순간, 박윤우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꼬맹이 박윤우가 아직 잠들지 않고 구석에 숨어 자신과 박민정의 대화를 엿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는 먼저 박민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잠깐만 기다려.”“네.”박민정은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이내 박윤우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아아! 아빠, 진짜 내 친아빠 맞아요? 어떻게 애를 때릴 수 있어요?”박민정은 순간 멍해졌다. 놀랍게도 곧 박윤우의 태도가 바뀌었다.“흑흑흑... 사랑하는 아빠, 방금 농담한 거였어요. 아빠가 최고예요! 애를 때릴 리가 없죠. 다 저를 위한 거라는 거 알아요. 지금 바로 잘게요, 알았죠?”‘이게 무슨 상황이지?’‘어떻게 한 아이가 이렇게 빨리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지?’유남준이 박윤우의 방에서 나온 후 집안은 금세 조용해졌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수아와 진서연이 소곤소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은 핸드폰을 들어 명령했다.“오늘 밤 민수아 씨와 진서연 씨에게 업무를 더 맡기죠.”그제야 집안은 완전히 고요해졌다.박민정은 거실 소파에 앉아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그렇게 시끌벅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조용해졌지?그녀는 지금 민수아와 진서연이 밤샘 근무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옷을 가져다줄게. 씻으러 가.”유남준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했다.‘옷을?’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아,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 옛날 옷은 어디 있죠? 그 위치만 알려주세요.”유남준은 그녀가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고 드레스 룸으로 안내했다.드레스 룸에는 박민정의 옷이 계절별로 꽉 차 있었는데 작은 옷가게를 방불케 했다.“제가 전에 옷이 이렇게 많았어요?”박민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어린 시절 한수민이 옷을 거의 사주지 않았던 기억만 떠올랐다.박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늘 낡은 옷을
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조금 머쓱해졌다.“그건 좀 곤란한데요.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지금 그녀의 감각으로는 유남준에게서 친구 이상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와 예의를 차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박민정 곁을 지나 이불을 들고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괜찮아. 예전에 우리가 싸울 때도 내가 소파에서 잤잖아.”어딘가 억울함이 배어 있는 말투에 박민정은 점점 미안해졌다.“그래도 제가 소파에서 자는 게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여기가 원래 그녀의 집이라지만 지금은 왠지 낯설었다.사실 원래는 동생 박민호가 이 집을 물려받았어야 했지만 조하랑의 말에 따르면 박민호가 이 집을 탕진했고 유남준이 나중에 다시 사들여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하면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빚진 것이 많았다.그런데도 자신이 침대를 차지하고 그를 소파에서 자게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과 소파에서 자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서로 이불을 잡아당기며 실랑이를 벌이던 중 박민정이 중심을 잃고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졌다.유남준은 순간 숨을 멈추고 온몸이 뜨거워졌다.반면 박민정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땅이라도 있으면 파고들고 싶었다. 당황한 그녀는 손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만 실수로 그의 가슴 어디쯤을 스치고 말았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박민정의 얼굴은 지금 붉을 대로 붉어져 있었다.유남준은 목울대를 살짝 움직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이제 그만해. 많이 피곤할 텐데 얼른 자.”그는 그녀가 계속 곁에 있으면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박민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용히 수긍했다.“네.”그녀는 내일 아침 진서연과 민수아를 찾아가 다른 방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어릴 적 기억으로는 박씨 가문의 저택은 스무 명 넘게 살아도 충분히 넉넉했으니 분명 방이 있을 터였다.박민정은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박민정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화장실 좀 다녀오려고요.”“그럼 왜 불은 안 켜?”유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배려해 불을 켰다.은은한 조명 아래 박민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감기 걸린 거 아니야?”사실 박민정은 단순히 참기 힘든 것 외에도 팬티 조각 하나만 달랑 걸친 눈 앞의 남자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녀는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지만 문에 부딪힐 뻔했다.화장실에 들어간 박민정은 소음이 새어나갈까 봐 한층 더 조심스러웠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일은 꼭 객실 준비를 해야겠어.”한편,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지금 그는 박민정을 잠시라도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또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반대로 박민정은 화장실에서 나가기 싫었다. 유남준과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안에 머물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어디 아픈 건 아니야? 화장실에서 오래 있었잖아.”“아니에요. 괜찮아요.”잠을 못 자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박민정은 힘없이 대답했다.“저는 괜찮으니까 남준 씨는 얼른 자요. 신경 쓰지 말고요.”유남준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더욱 걱정스러웠다.“어딘가 불편하면 병원에 가자. 아니면 내가 개인 주치의를 부를게.”“정말 괜찮아요!”박민정은 황급히 부인했다.실은 너무 오래 참다보니 생긴 문제라는 걸 그는 알 리 없었다.침대로 돌아가 누운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려 잠들 수가 없었다.그녀가 또 일어날까 봐 유남준은 불을 끄지 않았고 박민정 역시 불을 끄지 않은 채 어쩔 수 없이 뒤척이며 반쯤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박윤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엄마, 그리고 나쁜 아빠! 일어나서 아침 드세요!”박윤우
PMJ 회사.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회사에 도착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회사의 규모에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의 대표실로 올라갔다.문을 열기도 전에 어디서 본 듯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 남자는 여우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배우 뺨치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연지석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박민정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바로 일어서며 말했다.“민정아.”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지석은 이틀 전 박민정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제야 그녀를 직접 보게 되어 마음이 격해졌다.지난 1년 동안 그는 박민정이 정말 사라진 줄 알았기에 더욱 그러했다.곧 설인하가 다가와 연지석에게 말했다.“사장님, 대표님께서 지금 기억을 잃으셔서 아마 사장님을 못 알아보실 거예요.”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민정에게 다가가 그녀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말했다.“어릴 때 ‘뚱보’ 기억나?”“뚱보?”박민정은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잃지 않은 터라 연지석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어릴 적 통통했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네가 이렇게 컸다고?”그 말에 설인하가 웃음을 터뜨렸다.박민정은 자신의 말이 이상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약간 부끄러워하며 사과했다.“미안. 내가 지금 기억을 많이 잃었거든.”연지석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무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어릴 적 기억은 남아 있잖아?”한편, 유남준은 자신이 공기 취급당하는 기분이었다.박민정이 연지석은 기억하면서도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런데 하필 이때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났다.에리는 화장실에서 나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민정아!”박민정은 밝은 에너지를 가진 에리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결국 설인하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설인하가 그녀에게 설명했다.“이분은 우리
“몸을 저렇게 드러내는 걸 보니 딱 봐도 좋은 남자는 아니야. 앞으로는 그 사람하고 거리 좀 둬.”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녀는 이런 표현이 남자에게도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다시 한번 무대 위의 에리를 바라보던 박민정은 이상하게 몇몇 여자를 떠올리고 말았다.그런 자신이 어색해진 그녀는 시선을 서둘러 돌리며 더는 에리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계속 보면 괜히 쓸데없는 생각만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촬영이 끝난 에리가 서둘러 박민정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유남준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물었다.“민정아, 나 어때?”박민정은 여전히 아까 유남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다소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았어.”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남준이 차갑게 끼어들었다.“뭐가 괜찮다는 거야?”“이 광고 다시 찍어요.”에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대표님도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죠? 혹시 유남준 씨 센스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유남준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내 아내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회사를 맡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회사의 결정권자는 나에요. 다시 찍어요.”이어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싫으면 그만둬도 좋아요.”그 말이 끝나고 그는 박민정을 향해 돌아섰다.“가자, 여보.”박민정을 부를 때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보’라는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에리의 눈에는 차가운 빛이 서렸고 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며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이때 감독이 다가와 물었다.“이 광고 정말 다시 찍을까요?”유남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다시 찍어요!”에리는 유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결정을 흐리지 않는 그의 방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회사 밖으로 나섰고 박민정은 그의 손을 빼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남준 씨, 손 좀 놔줘요.”그러나 유남준은 손을 놓
박민정은 어떻게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걱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괜찮아요. 다들 저한테 정말 잘해주고 있어요.”그녀는 지금 발코니에 서서 뒤를 돌아보며 진서연과 친구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그래,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혹시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말해.”유남우의 말에 박민정은 휴대폰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저한테 솔직히 말해줘요. 제가 기억을 잃고 있던 이 1년 동안, 대체 무슨 약을 먹였어요? 그리고 어떤 치료를 했는지 다 말해줘요.”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의사를 찾아갔을 때 김인우가 말했다.현재 박민정의 상태로는 회복이 어렵다고.약물이 신경을 망가뜨린 탓이라는 이야기에 박민정은 유남우가 자신을 정말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유남우는 잠시 침묵했다.박민정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조금 있다가 1년 동안 네게 했던 치료 기록들을 보내줄게.”“좋아요.”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려다 멈췄다.생각해보니 굳이 고마워할 필요가 없었다.전화를 끊자 곧 유남우가 보낸 여러 치료 기록들이 휴대폰 화면에 나타났다.그 순간, 뒤에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혼자서 밖에 서 있으면 춥지 않나?”박민정은 깜짝 놀라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사실 그녀는 유남준을 믿고 싶었지만 유남우가 남긴 상처 때문인지 여전히 타인을 쉽게 신뢰할 수 없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바람 쐬고 있었어요.”박민정은 담담히 대답했다.유남준은 그녀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저녁 준비 다 됐어. 이제 네가 오기만 하면 돼.”“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모두와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박민정은 오랜만에 따뜻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식사 중에 진서연이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내일도 회사에 오실 건가요?”박민정이
정수미는 윤소현의 말에 크게 놀랐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혜는 네 친딸이잖아!”사람마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정수미는 친딸을 찾기 위해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그런데 양딸은 자신의 친딸을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정수미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고 윤소현을 정신 차리게 하고 싶은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여전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게 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 때문이에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숨이 막혀 잠시 호흡조차 가다듬기 힘들었다.“소현아, 그렇게 싫었으면 애초에 다혜를 낳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낳았다면 책임져야 한다는 걸 모르니?”그러나 윤소현은 요지부동이었다.“엄마,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제가 만약 다혜를 데리고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요? 앞으로 제가 재혼이라도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이유가 이거라니... 이렇게 이기적인 양딸을 둔 게 놀라울 정도였다.“어떻게 됐든 분명히 말해두지만 아이를 버리는 일은 절대 안 돼. 만약 네가 다혜를 버린다면 나도 너와의 인연을 끊을 거야.”정수미의 말은 단호했다.자신의 친딸조차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자신에게 잘해줄 거라는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윤소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외쳤다.“엄마, 저를 협박하시는 거예요?”정수미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만 가서 잘 생각해봐. 더 이상 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하지만 윤소현은 비웃으며 말했다.“알아요. 이제 엄마에겐 친딸이 생겼으니 저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죠. 차라리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왜 저를 입양하셨어요? 저를 입양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녀는 똑같은 논리로 정수미에게 반박한 뒤 화난 얼굴로 방을 나섰다.문 밖에서 비서가 이 모든 대화를 똑똑히 들었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아가씨 정말 너무하시네요.”윤소현이 자신의 친딸을 버리겠다는 것과 정수미가 그녀와 인연을 끊겠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어떻게 책임을 회피하는 걸
‘또 박민정을 보러 간다고?’윤소현의 눈에 질투가 가득했다.계속 이렇게 되다 보면 박민정이 결국 자신을 대신하게 될 거라는 불안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정씨 가문의 어마어마한 재산이 전부 박민정에게 돌아간다고?그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칠 전 이지원을 만나고도 마땅한 해결책을 얻지 못한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어떻게 해야 하지?”박씨 집안 본가에서 모두 식사를 마치고 각자 휴식을 취하며 수다를 떨거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배가 불러 산책을 나가 소화를 시키고 있었고 그 뒤를 박윤우가 따라가고 있었다.“엄마, 천천히 걸어요.”박윤우는 혹시라도 박민정이 넘어질까 봐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으로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 걱정을 받아본 박민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박민정의 말투가 부드럽긴 했지만 어딘가 거리가 느껴져 박윤우의 마음은 서글퍼졌다.“엄마, 정말 제가 기억 안 나요?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박윤우는 큰 눈으로 박민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친 박민정은 미안함에 가슴이 무거워졌다.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박윤우는 더더욱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꿈에서라도 저랑 형아를 본 적 없어요?”꿈이라는 단어에 박민정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본 적 있어. 그때는 왜 그런 꿈을 꿨는지 이상했어.”박민정의 대답에 박윤우는 비로소 조금 기뻐하며 그녀의 다리에 꼭 매달렸다.“휴우, 난 엄마가 우리를 완전히 잊은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엄마는 마음속으로 우리를 생각하고 있었네요!”박민정은 아직 자신에게 이렇게 큰 아들이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의 서운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 몸을 숙여 그를 안아주었다.“미안해, 엄마가 너희를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박민정은 지금 당장 모든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에게 더는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박윤우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포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