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하랑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하랑이 여기 있나요?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강연우가 대답했다.오자마자 자신의 딸을 찾는 강연우의 모습에 조석천은 또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감히 내 딸을 찾아와? 아까까지는 잊고 있었는데, 설마 네가 우리 딸 납치한 거 아니니? 그런 게 아니고서야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건데? 너 김씨 가문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거야?”그 말을 들은 강연우는 조하랑이 이곳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오늘은 조하랑의 결혼식 날인데, 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걸까?강연우는 더 조석천과 말을 섞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 순간, 조석천이 강연우를 붙잡았다.“잠깐, 여기서 나갈 거면 당장 우리 하랑이 내놓고 나가!”“하랑이가 저한테 있었다면, 제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랑이를 찾아왔겠어요?”강연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뒤늦게 강연우의 말을 이해한 조석천이 그를 놓아주었다.강연우가 떠나는 모습을 보던 조석천은 그가 예전의 힘없고 겁 많던 소년에 비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조석천은 어딘가 모르게 후회되었다.만약 처음부터 그를 조하랑과 사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두 사람의 아이는 지금의 박예찬보다 더 나이가 많을 것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강연우도 예전의 그 촌놈이 아니라 능력 있는 남자 같아 보였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조석천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연우가 아무리 노력해도 김인우는 평생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그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결혼식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김인우의 집에서도 계속 준비 중일 테니 말이다....아침 일찍 조하랑의 집을 찾아갔던 박민정도 조하랑을 만나지 못했다.그녀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만날 수 없었다 해도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급히 안으로 들어선 김인우는 침대 위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조하랑을 발견했다.심장이 철렁한 김인우는 빠른 걸음으로 조하랑에게 다가갔다.“하랑아!”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깨어난 조하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김인우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내가 왜 여기 있지?”말을 마친 조하랑의 머릿속에는 불쾌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온몸을 감싸며 방 한구석으로 자신의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다 꺼져, 꺼져! 아무도 오지 마, 오지 말라고!”그 모습을 보며 김인우는 조하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믿고 싶지 않았다.“하랑아,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김인우는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조하랑은 대답하기 싫다는 듯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나가! 나가라고!”박민정은 놀란 듯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조석천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하랑아, 아빠 여기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빠한테 얼른 얘기해 보렴. 설마 강연우 그 짐승 새끼가 그런 거니?”그는 조하랑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사람이 강연우라고 생각했다.조하랑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고 마음은 더욱 답답했다.그녀는 아무것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나가! 다 나가라고!”김인우는 조하랑의 상태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일단 우리 다 나갑시다. 혼자 진정할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아요.”그 말에 주위 사람들도 모두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리를 뜨면서도 조하랑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고 있었다.조하랑의 상태를 확인한 박민정 역시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민정아, 넌 남아줘.”조하랑이 박민정을 불러세웠다.“알겠어.”박민정은 곧바로 대답했다.그렇게 방 안에는 박민정과 조하랑 두 사람만 남게
조하랑의 두 눈은 텅 비어 공허해 보였다.“난 정말 김씨 가문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할아버님도 그렇게 잘 해주셨는데...”그 말에 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마치 목에 큰 가시라도 걸려 버린 듯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조하랑과 같이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책 중이었다.“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널 그렇게 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조사하는 게 급선무야.”조하랑은 이제 아무런 기대도 하지 못했다.“알겠어.”그리고 문밖에서는 김인우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됐던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있는 상태였다.김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인우야, 어떻게 된 일이냐? 하랑이는 만났어? 하랑이는 도대체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김인우는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려버리는 할아버지의 화법에 짜증이 났지만 더는 할아버지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일이 좀 생겨서요, 결혼식을 미뤄야 할 것 같아요.”말을 마친 김인우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그는 진작 사람들을 보내 조하랑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드디어 방 문이 열렸고 김인우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박민정이 방 문 앞에 서서 김인우에게 말했다.“인우 씨, 하랑이한테 일이 좀 생겼는데,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대요.”“알겠어.”김인우는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고 박민정은 밖으로 나왔다.유남준이 박민정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무슨 일이야?”“아직은 말해줄 수 없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박민정은 급히 정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민기 씨, 어제 오후에 그랜드 호텔까지 찾아가서 조하랑을 데려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조사해주세요.”“알겠습니다.”대답을 마친 정민기는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박민정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대체 누가 조하랑을 노리고 있는 걸까?방 안으로 들어간 김인우는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조하랑이 결혼을
김인우는 누군가가 자신과 맞서면서까지 아내에게 감히 손을 댈 줄은 미처 예상도 못 하고 있었다.만약 범인을 찾게 된다면 반드시 죽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을 선사해줄 생각이었다.방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여전히 결혼식을 위해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조하랑을 발견했다.놀란 듯한 박민정의 모습에 조하랑은 김인우가 그대로 진행하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얘기해주었다.그 순간, 박민정 역시 김인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이렇게 보면 김인우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맞았다.하지만 지금, 시즌 호텔 앞은 기자들로 가득했다.기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조하랑을 이상하게 여겼다.“1시간이나 지났는데, 신부는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기자들은 자기들끼리 의견을 주고받았다.생방송 뉴스를 보고 있던 윤소현도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해 질문을 던졌다.“왜 아직도 안 나와?”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던 이지원은 가볍게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웃는 얼굴로 말해주었다.“아마 감히 얼굴을 들고 나오기가 창피해서 그런 거겠죠.”그 말에 호기심이 발동한 윤소현이 물었다.“뭐 아는 거 있죠? 뭔데 그래요? 얼른 얘기해 봐요.”이지원이 사실대로 말해줄 리 없었다.혹시라도 윤소현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알렸다가는 큰일이었다.“별거 아니에요. 조하랑 주제에 김씨 가문을 건드렸으니 오늘 결혼은 이대로 엎어지겠네요.”그 말을 하는 이지원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말에 윤소현 역시 이번 김씨 가문의 결혼식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김인우가 그토록 자랑해대던 여자가 어떤 창피를 당할지 너무 보고 싶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기대하던 그 장면을 볼 수 없었다.방송은 계속되었고 조하랑은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왔다.온몸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그녀의 자태는 보는 이들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김훈은 손자의 결혼식을 위해 자신의 아내인, 그러니까 김인
이지원의 마음속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과거, 김인우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만약 네가 유남준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사이는 절대 이어질 수 없어. 급이 안 맞거든.”그 탓에 이지원은 유남준에게만 모든 마음을 쏟았다.하지만 지금, 이지원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의 모든 한계치를 다 넘고 있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지원은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소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앞으로 확실하지 않은 일은 제발 단언하지 말아 줄래요? 너무 창피하니까.”이지원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네.”이지원은 그제야 자리를 떴다.화장실로 들어온 이지원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일 처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시킨 대로 한 거 맞아?”전화를 받은 부하는 두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저희는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아가씨. 아침 일찍 조하랑을 시즌 호텔에 던져놓기도 했고요.”“그럼 영상은 어떻게 했어? 옆에 있는 티비에 다 틀어놓은 거 맞아?”“당연하죠.”상대의 말투에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저희가 조하랑 옮겨둔 다음에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드렸잖아요. 저희를 못 믿으시겠다면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이런 일 자주 하니까 저희도 무섭네요.”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이지원의 마음은 더욱 답답했다.분명 영상까지 틀어놨다고 했는데, 김인우가 이걸 어떻게 용납할 수 있다는 걸까?여자가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남자인데 말이다.“설마, 김인우가 정말 그 졸부 딸을 사랑한다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던 이지원은 다른 핑계를 하나 더 만들어냈다.김인우가 조하랑을 용서해준 이유는 그녀가 바로 박민정의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가정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이지원의 기분이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하지만
조하랑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 역시 자신의 결혼식에 강연우가 등장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녀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황예지의 말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이미 김인우와 결혼하기로 한 이상,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김인우 역시 조하랑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강연우를 발견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만나고 싶어요?”그는 애써 관대한 척 물었다.조하랑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그럼 차에 타요.”김인우는 그 대답에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졌다.솔직히 말해 그는 조하랑이 어젯밤 겪은 일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강연우를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한쪽은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한 것이지만 다른 한쪽은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니 두 문제의 본질은 완전히 달랐다.차에 올라탄 후, 조하랑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신부 측 하객으로 온 사람들은 조하랑이 탄 차의 뒤차에 타 함께 김인우의 집으로 향했다.김인우의 집에 도착한 후,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김훈과 조석천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결혼식이 끝난 후, 조하랑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방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런 그녀의 곁을 박민정이 지켜주었다.어떤 말로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랐던 박민정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연우였다.“저예요.“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강연우 씨? 연우 씨가 여린 왜 온 거예요? 오늘 하랑이 결혼식인 거 알죠? 굳이 민폐 끼치지 말고 얼른 돌아가세요.”조하랑도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의 뒤로 다가갔다.“연우야, 우리 더 할 얘기 없잖아. 다 끝난 사이에.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다 알았고,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다 보상해줄게.”보상
전화를 받은 강연우의 눈빛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무슨 일인데요?”“일단 빨리 와, 와 보면 알게 돼.”강연우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는 조하랑을 슬쩍 쳐다보더니 말했다.“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볼게.”“그래.”조하랑은 그렇게 강연우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두 사람의 대화는 지나가던 김인우의 눈에까지 들어왔다.김인우는 최대한 평소의 성질을 억누르며 순간적인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안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몰래 만난 거예요?”조하랑이 설명하려던 순간, 박민정에 방에서 나왔다.“인우 씨, 오해하지 마요. 몰래 만난 게 아니라 나도 여기 같이 있었으니까.”조하랑은 박민정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박민정이 방 안에 같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김인우는 뒤늦게 나타난 박민정의 존재에 마음이 풀렸다.“미안해요, 방금은 오해했네요.”김인우는 곧장 사과를 건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잘못이 명확해지는 순간 바로 사과부터 하는 성격이었다.조하랑도 화를 내지 않았다.“괜찮아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나는 김인우의 와이프고, 우리 둘이 함께 살아가는 거잖아요. 나는 절대 인우 씨한테 미안할 행동 하지 않을 거예요.”김인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 마요, 나도 하랑 씨가 하는 대로 따를 테니까.”그 말인즉슨 네가 먼저 나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도 너에게 미안할 짓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박민정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 둘이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결혼식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박민정과 유남준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내가 봤을 인우 씨랑 하랑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 말에 유남준도 거들었다.“걱정 마, 인우는 분
운전기사는 함미현이 있는 정신병원으로 핸들을 틀었다.이번에 다시 가면서 박민정은 예전보다 경비가 더 삼엄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도 유남준 덕분에 두 사람은 쉽게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박민정이 함미현이 있는 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 보니 함미현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인기척에 놀란 그녀는 곧장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렸다.“제발 때리지 마세요.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요,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그 말을 하는 함미현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그녀의 모습을 미루어 보았을 때, 함미현은 분명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게 분명했다.박민정은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미현 씨, 저예요. 박민정.”함미현은 박민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희망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정 씨, 저 구하러 오신 거예요? 이젠 제 말을 믿으실 거죠? 제발 저 좀 구해주세요... 아니 제 아들 좀 구해주세요. 그 어린애한테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그런 함미현을 보는 박민정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여기까지 오는 길에 동하 찾아달라고 사람 보내놨어요.”그 말을 듣자 무겁기만 하던 함미현의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저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뭐든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선에서 다 얘기해드릴게요.”박민정은 그녀에게서 정수미가 딸을 잃어버린 다음부터 염혜란과 함께 보육원을 찾았던 일을 들었다.그 내용은 전과 똑같았고, 이것을 통해 그녀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박민정은 옅게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정말 그랬던 거구나, 정말로...”그녀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나갔다.유남준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무슨 일이야, 민정아?”박민정은 붉어진 눈시울로 유남준을 꼭 끌어안았다.“남준 씨, 나 친엄마를 찾은 것 같아요. 정수미가 내 친엄마였어요.”그 말에 유남준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기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에리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하늘 아래에 널린 게 남잔데 왜 하필 정민기 씨에요?”그도 정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보고는 분명 평범한 보디가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에리 씨는 아마 모를 거예요. 저 같은 여자가 그런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건 하늘에 별 따기라는 사실을요.”진서연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정민기는 마치 드라마 속의 여느 멋진 남주처럼 느껴지면서 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에리는 반지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아니에요. 이건 제가 드리는 위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에리는 항상 씀씀이가 컸고 더구나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그로서는 반지를 다시 돌려받는다고 해도 줄 사람이 없었다.진서연은 원래 기뻐해야 할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싫어요. 이런 반지는 나중에 진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한테서 받을래요.”에리는 난생처음으로 여자에게 준 선물을 거절당했는데 순간 자신이 저따위 보디가드보다 매력이 없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지금 헤어진 마당에 그냥 제 가짜 여자 친구가 되는 건 어때요? 당연히 이에 따르는 보상도 있고요.”에리는 잠깐 뭔가를 고민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아직 그 사람이 신경 쓰이잖아요. 그러면 정민기 씨도 서연 씨가 신경 쓰이게 저를 이용해서 한번 자극해 보는 건 어때요?”“정민기 씨는 자기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저 같은 대스타랑 연애한다고 생각하면 분명 배 아파할 겁니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잖아요? 많은 여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남자들한테 자신이 매우 인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잖아요.”진서연은 어느새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 그에게 물었다.“그래도 될까요?”“어차피 헤어졌는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그렇게 두 바보는 이상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민수아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어 박민정의 사무실로 돌
박민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그러자 진서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저도 모르겠어요.”어제 집에 돌아간 뒤, 진서연이 막 자려고 누웠는데 정민기가 갑자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하여 진서연은 두 사람 사이에 드디어 진전이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건 정민기의 이별 선고였다.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멍한 상태였다.낮에는 별말이 없었다가 왜 저녁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이유가 뭔지 물어봤어?”“우리 두 사람은 안 어울린대요.”진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져서는 겨우 말을 이었다.“그러면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안 어울린다고 할까요? 설마 밖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겠죠?”“설마.”박민정은 정민기가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왜 그럴까요? 갑자기 저한테 흥미가 떨어졌을까요?”진서연은 박민정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못 생겨서 질렸나?”진서연은 진심으로 정민기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명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해. 일단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기회를 봐서 민기 씨한테 물어볼게.”“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걱정스레 말했다.“혹시 물어보실 때 절대 제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가볍게 원인만 물어봐 주시면 돼요. 네?”비록 헤어졌지만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고 정민기한테 집착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먼저 진서연을 회사로 보낸 뒤 곧바로 씻으러 갔다.“민정아, 왜 날 피해?”유남준이 언제부터 화장실 문 어구에 서 있었는지 박민정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양치하던 물을 삼킬 뻔했다.“설마요. 제가 왜 남준 씨를 피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고?”그가 들어오면서 순간 화장실이 좁아졌는데 박민정은 숨을 한번 깊게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진서연은 볼록해진 배와 트림까지 하더니 대뜸 감탄하기 시작했다.“에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랐을 텐데 너무 행복했겠어요.”“서연 씨는 식성이 좋아서 뭐든 다 맛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그녀의 말대로 에리는 어렸을 때부터 산해진미를 먹고 자라서 오늘 요리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그게 복인 줄도 모르고.”진서연은 투덜거리다가 아까 받았던 돈봉투를 에리에게 돌려줬다.“자, 이건 돌려줄게요.”어차피 가짜 여자 친구인데 밥 한 끼 정도는 먹어줄 수 있어도 이 돈은 받을 수 없었다.그러자 에리가 덤덤하게 답했다.“하루 일당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맛있는 밥도 얻어먹었는데 돈은 당연히 돌려줘야죠.”“제가 그 돈이 아쉬운 사람처럼 보여요?”에리의 물음에 진서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한테는 이깟 돈이 아무것도 아니다.“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고마워요.”비록 봉투 안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께를 만져보니 적지 않은 돈인 것 같은데 문득 출근하는 것보다 수입이 짭짤하다고 생각되었다.“별말씀을요. 저희는 친구잖아요.”에리는 그길로 진서연을 박씨 가문 옛 저택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저택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져 있었다.진서연은 차에서 내린 뒤 에리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누군가가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서연은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역시나 5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었다.이때 갑자기 봉투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는데 줍고 나서야 그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대박, 너무 예뻐!”진서연은 그들이 여기에 다이아몬드까지 넣어줄 줄은 몰랐다.이렇게 큰 사이즈면 분명 몇천만 원도 넘을 것이다.첫 만남에 5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다이아몬드는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하여 진서연은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가자마자 에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