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너희들 많이 놀랐지?”박민정은 손으로 배를 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아이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벌써 어린 나이에 말 잘 듣다니, 너무 착하네.”박민정은 부드럽게 웃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일어나는 소리에 바로 그녀를 부축하러 갔다 배가 점점 불러 오르고 있는 박민정은 가끔 일어나기가 매우 불편했다.“출산예정일이 다음 달이니 회사 일은 부하 직원들에게 맡기고 병원에 같이 가자.”유남준은 엄숙하게 말했다.유남준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 제가 업무처리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유남준은 그녀가 결정한 일이면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알았어. 그러나 꼭 몸조심해. 만약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줘야 해. 알았어?”박민정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그녀는 유남준이 점점 잔소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했다.회사에 갈 때마다 유남준은 그녀를 사무실 안까지 바래다주었다.출근길에서도 유남준은 고의로 박민정에게 말을 건넸다.마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기라도 할까봐 두려운 듯 말이다.”박민정이 겨우 그를 돌려보내자, 설인하 일행이 곁에서 그녀를 조롱했다.“유 대표님, 혹시 대표님을 빼앗기실까 봐 매일 와서 주도권 선전하시는 건가요?”유남준은 회사 전체 직원들에게 밀크티를 사주면서 박민정 남편이 한턱 냈다고 소문내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난하지 마세요. 우리 힘내 일해요.”“그래요.”설인하는 연지석이 그에게 준 프로젝트를 급하게 처리해야 했다. 프로젝트가 순조롭지 못한 탓에 그녀는 골치가 아팠다.분명히 간단한 프로젝트인데,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결단으로 그녀와 계약하지 않으려했다.설인하는 연지석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부사장님.”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왜 그래요?”연지석은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설인하는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없는 원인을 그
유남준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성원아, 내가 건의하는데 네가 이럴수록 인하 씨의 맘이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거야.”방성원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있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인하가 나의 딸아이랑 가출했는데 내가 머리 숙여 사과라도 하란 말이야?”함께 있던 서다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전에 그는 방성원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대표님처럼 똑같이 멍청하기 그지없었다.한쪽에서 축 처진 자세로 앉아서 게임을 하던 김인우가 끼어들어 말했다.“성원아, 내가 생각하기로는 너의 마음이 여전히 약한 것 같아. 나라면 그녀가 어디 가든 상관하지 않고 딸만 빼앗아 올 거야.”자신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김인우는 또 말을 이어갔다.“나한테 길든 조하랑을 보면 몰라? 얼마나 고분고분해졌는데.”그를 향해 두 남자는 눈길을 돌렸다.“허풍 떨지 마!”두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김인우는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근무 중이던 조하랑은 김인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았다.“무슨 일이세요?”조하랑의 말투를 들은 김인우는 바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전에 있었던 일 잊지 마요.”조하랑은 고분고분 말했다.“김 도련님, 무슨 일이 있나요?”“저녁에 이모에게 요리 적게 하라고 해요. 저는 저녁에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요.”‘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다 먹을 수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전화한 거야?’조하랑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또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알겠어요.”김인우가 전화를 끊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방성원이 다가와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유남준도 귀가 솔깃했다.지금의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거야.”김인우는 자기 일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대충은 이런 거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봐.”방성원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좋아, 만약 잘되면 너에게 개인 비
판매원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저들이 돈을 지급하지 않았으니 내가 바로 구매해도 되는거 아니야?”옷을 든 민수아는 기분이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우리가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옷을 다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구매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물건을 구매하는 것도 선후가 있는 거 아닌가요?”박민정은 그녀를 말렸다.“그만해. 수아야, 옷 그들에게 줘. 우리가 다른 매장 가서 사면돼.”곧 아이를 출산할 박민정은 임신 중 지금 이런 사소한 일로 저들이랑 실랑이를 피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군자가 복수를 갚는 데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지금은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민수아는 옷을 판매원에게 돌려주었다.판매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감사합니다.”이때 이지원이 앞으로 다가와 수습하는 척 말했다.“소현 씨, 우리도 구매한 아기 옷 이 많은데 이 옷 중 몇 벌을 그들에게 양보해 줄까요?윤소현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그래. 우리 엄마가 특별히 디자이너를 불러서 아기 옷을 주문했는데, 이런 저가품들은 그냥 그녀들에게 주지.”이기적이고 가식적인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난 민수아는 상대가 임산부만 아니었어도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싸웠을 것이다.“민정아, 저들이 너무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니야?”윤소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어쩔 건데?”한창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은 그녀들이 오지 않자, 쇼핑몰로 갔다.이 쇼핑몰은 현재 IM 그룹 이것이었다.가게 앞에 도착한 유남준은 윤소현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여기에 모두 저가품이라고 생각되시면 다른 곳에 가서 고가품을 사시죠.”유남준의 목소리를 들은 윤소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돌려보았다.이지원은 회복된 유남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남준 오빠...”이지원이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날줄 몰랐던 유남준은 그가 전에 그녀에게 준 교훈이
“언제 쇼핑몰을 인수한 거예요? 저는 왜 모르고 있었죠?”박민정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차에 탑승한 후 다른 두 여인은 공짜로 된 옷을 무제한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랑 함께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아쉽게도 설인하는 연장 근무 중이라 함께 할 수가 없었다.“전에 호 산 그룹에 있을 때 사적으로 사들인 거야, 나도 잊고 있었어.”유남준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당시에 많은 회사들을 사들인 탓에 잊고 있었다.“옷을 사다 잊어버렸단 소리는 들어봤어도 쇼핑몰 한 채 구매하고 잊어버렸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어요.”민수아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역시 부자라 좋네요.”“앞으로 쇼핑하고 싶으면 서 비서랑 함께 와요.”유남준은 이미 박민정의 친구한테 잘 보이는 법을 배웠다.두 눈이 빛이 난 민수아는 말했다.“진짜예요?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진서연도 감사하다고 말했다.쇼핑몰에서 고급 화장품이며 스킨케어 제품, 옷이랑 신발을 구매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민수아와 진서연은 오늘 종일 쇼핑해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진서연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보스, 얼른 유 대표님이랑 재결합하세요. 전에 제가 조사해 봤는데 출산 신고도 해야 되는데, 혼인 신고 증서가 필요해요.”“그렇게 번거로운 거였어, 그러면 재결합하는게 맞아.”민수아도 맞장구를 쳤다.유남준은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느꼈다.쉽게 포섭된 그녀들을 본 박민정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괜찮아, 없어도 출산할수 있어.”박민정의 말을 듣고 조급해진 그녀들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를 몰랐다.이 상황을 본 유남준은 낮에 김인우가 제안했던 일을 떠올렸다.‘어떻게 하면 그녀가 죄책감을 가질까?’한편, 늦은 시간 퇴근 중이던 설인하는 멀리 있는 차 안에서 누군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같은 시각 퇴근 중이던 연지석은 설인하 뒤에 차량을 발견하고 운전 중이던 차를 그녀 앞에 멈추어 세웠다.“늦었는데, 민정 씨도
다행히 차를 조금 더 앞으로 몰고 갔던 연지석 덕에 부딪히는 사고가 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운전기사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그는 자신의 대표에게 사과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차에서 내린 방성원이 연지석의 차로 다가오고 있었다.설인하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자신을 계속 따라오던 사람이 바로 방성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연지석도 그런 방성원에게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차에서 내렸다.손을 위로 높이 추켜든 방성원이 연지석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던 그때였다.반응속도가 빨랐던 연지석은 재빨리 방성원의 공격을 피했다.깜짝 놀란 설인하가 다급히 차에서 내려 방성원을 가로막았다.“방성원, 너 미쳤어? 이 사람은 내 상사야!”“상사?”방성원은 분노에 찬 헛웃음을 터뜨렸다.“그 어떤 상사가 이 야심한 밤에 여직원을 집까지 데려다주는데?”“네가 이런 식으로 날 미행하고 다녔으니까, 혹시라도 나한테 스토커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그 말에 방성원이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매서운 눈길로 그는 노려보던 설인하는 이내 고개를 돌려 미안한 듯한 눈빛으로 연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부사장님.”부사장님이라고?방성원은 조금 전 차에서 내릴 때 봤던 연지석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설인하가 그를 부사장이라고 부르는 순간, 방성원은 순식간에 그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그쪽이 연지석 씨입니까?”연지석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접니다.”방성원의 눈빛이 한순간에 차가워졌다.“민정 씨한테는 손도 못 대더니, 이제 내 와이프한테 손대려고요? 역시 떠도는 소문이 정확했나 봅니다, 연지석 씨.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유부녀만 좋아하신다면서요?”그 말에 연지석이 천천히 손을 말아 주먹을 꽉 쥐었다. 설인하를 봐서라도 방성원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분노에 찬 설인하의 얼굴은 이미 열을 받아 빨개져 있었다.“방성원, 말조심해. 나랑 부사장님은 아무 사이 아니니까.”연지석과
그럼에도 오랜만에 자신의 딸을 만난 방성원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가 마침 베이비시터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그때, 딸이 입을 열어 방성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연지석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방성원은 재빨리 표정을 굳힌 채 연지석에게 불편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자신이 있는 이곳이 박민정의 집이었던 탓에 더 말을 얹을 수는 없었다.설인하는 곧장 방성원에게 다가가 말했다.“이제 다 봤지? 그럼 돌아가. 더는 내 딸 찾아와서 방해하지 마.”방성원은 방은정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네 딸이라고 했어? 애는 너 혼자 낳니?”설인하의 말문이 다시 막혀버렸다.“말 들어. 애 데리고 나랑 돌아가자, 이제.”방성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로서도 설인하에게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자유를 주었다.하지만 설인하는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내가 말했지? 너랑은 더 이상 같이 못 산다고. 이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이혼 서류나 준비해.”또 이혼 얘기였다.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자 유남준이 다가와 말했다.“성원아.”방성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남의 집에서 싸우는 것은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방은정을 다시 설인하에게 돌려주었다.“며칠 뒤에 또 올 거야.”그 말만 남긴 채,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밖으로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방성원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수십 번이고 후회했다.연지석과 설인하의 모습으로 미루어봤을 때, 자신이 괜한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원래대로였다면 그 역시 김인우의 조언대로 설인하를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계획은 이런 식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늦은 시간에 퇴근한 연지석과 설인하는 미처 못한 식사를 한 레스토랑 안에서 함께 하기로 했다.박윤우 역시 연지석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만나려고 일부러 자리에 함께했다.“지석 아저씨, 왜 이렇게 늦게 퇴근하세요? 다음부터는 일찍 퇴근해서 식사도 일찍 하는 게
“감히 정씨 가문에서 거짓말을 해요? 그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는 그래요?”윤소현이 순간적으로 욱하며 화를 냈다.하지만 이지원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저도 더는 방법이 없어요. 김인우는 저를 죽지 못해 살아가게 만들었고, 유남준은 저를 완전히 헌신짝 버리듯 버렸죠. 저에게도 피난처가 필요해요.”이지원은 윤소현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친자확인결과 조작만 해주시면 제가 소현 씨의 노예가 되어드릴게요. 뭘 시키든지 다 해낼 수 있어요.”“박민정의 목숨은 물론이고, 그 여자 아이까지 없애 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이지원은 진심을 다해 윤소현에게 맹세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었던 윤소현도 이지원의 말을 듣는 순간 깊은 생각이 잠겼다.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 동했다.일전, 함미현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녀는 함미현을 제대로 이용하려 했다.하지만 함미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고, 이제 윤소현에게는 자신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그리고 그런 사람이 타이밍 좋게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게다가 그 사람 역시 자신처럼 박민정을 죽도록 증오하고 있었다.“예전에 저는 같은 이유로 함미현을 도왔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걔는 결국 제 목숨을 노렸죠. 지원 씨는 안 그런다고 하겠지만,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윤소현이 일부러 시험하듯 물었다.그녀의 말에 이지원이 손을 들어 맹세했다.“제가 소현 씨를 배신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은 윤소현에 이지원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저는 함미현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정수미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준다면, 소현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저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굳이 배신할 이유가 없죠.”윤소현은 이지원의 말에 더 의심을 품지 않았다.“좋아요. 그 말 잊지
이지원이 친자 확인 검사 결과를 받은 그 날, 정수미는 곧장 그녀를 병원으로 보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정수미는 이지원의 몸에 남겨진 수많은 상처들과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을 보며 물었다“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정수미의 눈에는 안타까움만 잔뜩 묻어 있었다.이지원은 다정한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을걸요. 다 제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사람들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던 탓이에요.”이지원은 함미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미안하구나, 널 더 일찍 찾지 못했던 내 탓이야.”왜인지는 몰라도 이지원을 마주한 정수미의 마음이 아려왔다. 상처 많은 딸이 안타깝긴 했지만 함미현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아마 이미 한 번 데인 탓에 트라우마가 남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엄마, 그런 말씀 하세요. 제가 보육원에 보내진 건 절대 엄마 탓이 아니에요. 언니한테서 들었는데, 엄마는 저를 찾는 걸 포기한 적 없다고 그랬거든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 받고 치유 받았어요.”이지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정수미는 이지원에게서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에 띄게 멍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일단 쉬고 있어. 곧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난 잠깐 나갔다가 올게.”“네.”정수미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비서가 말을 걸었다.“대표님, 잠깐 쉬시는 게 어때요?”그 말에 정수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분명 내 친딸을 찾았는데도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아마도 함미현 때문일 겁니다. 그 여자가 너무도 뻔뻔하게 대표님을 속여왔으니까요.”정수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그럴지도 모르지. 가자, 그 애 보러 가야지.”“네.”함미현의 병실은 일반 병실이었다.정수미와 그녀의 비서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