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안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이어 격렬한 야유가 터져 나왔다.“강하린, 아무리 동정심을 얻고 싶어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각막이라니, 정말 눈이 멀었어도 그건 네가 치러야 할 대가야.”“이런, 소설을 너무 많이 봤네.”주변의 조롱이 끊이지 않았지만 강하린은 못 들은 척 주민재만 올곧게 바라보았다.사랑은 무슨, 개나 줘버리라지.그녀는 그저 눈을 치료하고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는 증거를 찾은 뒤 조용히 정착할 곳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주민재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지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고함을 질렀다.“전부 닥쳐.”그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나가.”짤막한 한 마디에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덜덜 떨며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둘러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신현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끌려 나갔다.룸 안은 금세 비워졌고 주민재는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강하린의 병원 기록을 확인하라고 시킨 뒤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강하린,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강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병원 기록이 다 있으니 거짓말인지 아닌지 보면 알겠지.그녀의 눈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빼앗아 온다고 해도 주민재가 알아챈 뒤 중간에 다시 뺏어갈 수도 있었다.강하린은 그녀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주민재가 그래도 부부였던 정을 생각해 각막을 돌려주기를 바랄 뿐이었다.주민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약 10분 후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전화를 받은 주민재는 몇 초 후 평온하던 얼굴이 폭풍우가 몰아칠 듯 위험하게 일그러지더니 홱 시선을 돌려 강하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강하린, 거짓말하는 게 재밌어?”그의 짙은 눈매가 눈앞에 바싹 다가오며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남자가 목을 움켜쥔 뒤였다.숨 막히는 느낌이 덮쳐오며 원래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점점 흐릿해졌고 강하린이 반항하기 전에 주민재가 문득 힘을 푼 채 잡고 있
주민재는 강하린을 클럽에 버려두고 곧장 전화를 받은 뒤 회사로 가서 서류 몇 개를 처리했다.집에 돌아왔을 때 평소처럼 소파에서 기다리던 강하린이 보이지 않자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었다.반성도 없이 오히려 유나의 상황을 알고 같은 수작으로 그를 속이려 했으면서 되레 제 쪽에서 심술을 부리다니.주민재는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당기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강하린이 이번 기회로 그를 협박해 유나를 상대하려는 건 헛된 생각이다. 이건 전부 강씨 가문이 유나에게 빚진 것이기에 그녀는 소란을 피울 자격이 없었다.이런 생각에 주민재는 강하린의 행방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금세 잠이 들었다.하지만 다음 날 눈을 떠도 여전히 강하린이 보이지 않자 또다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도우미에게 물어보자 강하린이 어젯밤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 표정은 먹물처럼 잔뜩 어둡게 변했다. 그래, 이젠 외박까지 하시겠다.도우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찾아볼까요?”“됐어요.”주민재가 거절했다.“계속 소란 피우게 놔둬요.”하지만...사흘이 될 때까지 강하린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주민재의 억눌린 분노는 완전히 최고조로 치솟았다.그래, 좋아. 이젠 가출까지 한다는 거지....“하린아, 오랫동안 보러 오지도 않고 이 할아버지를 잊은 게야?”전화기 너머 주상철의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강하린은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에요, 할아버지. 요즘 좀 바빴어요.”주상철은 콧방귀를 뀌었다.“무정한 놈, 내가 볼 땐 넌 보러 올 생각도 없는 것 같구나.”강하린은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럴 리가요. 시간 나면 뵈러 갈게요. 알겠죠?”눈병이 잦아진 뒤로 할아버지가 혹시라도 이상 징후를 발견하면 걱정할까 봐 저택에 가는 횟수도 줄였다.“정말 내가 보고 싶으면 다른 날 말고 오늘, 지금 와. 안 그러면 이 늙은이를 싫어한다고 생각할 거야.”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생떼를 쓰는 건지.강하린은 어이가 없었지만 저택에 다녀온 지 오래되었기에 결국 동의할
한유나는 강하린의 마음을 아프게 난도질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강하린도 각막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각막을 빼앗아 가고 일부러 앞에서 자랑하며 주민재의 애정을 독차지한다는 걸 과시했다.피곤함이 해일처럼 그녀를 휩쓸었다.강하린은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사랑 하나로 얽힌 이 삼각관계에서 그녀는 아무런 명분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그런데 굳이 애쓸 필요가 있을까?“상관없어요.”이미 익숙한 일인데 무슨 신경이 쓰이겠나.“잘 놀아요. 난 굳이 분위기 망치지 않을게요.”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후 강하린은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매번 주상철이 그녀와 주민재가 단둘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줄 때마다 주민재는 한유나를 불렀고, 그 끝엔 매번 한유나의 여우 같은 발언에 발끈한 그녀가 주민재와 얼굴을 붉히곤 했다.이젠 더 이상 소란을 피우는 것도 지쳐 자리를 비켜주며 그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그런데 한 발짝도 못 가 손목이 잡혔고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섰다.주민재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강하린, 할아버지 말대로 너 데리고 놀러 나왔는데 또 왜 소란을 피우는 거야?”“내가 무슨 소란을 피운다고 그래요?”강하린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일부러 한유나 씨까지 불렀으니까 두 사람 시간 보낼 수 있게 자리 비켜주겠다는데 내가 뭐 잘못했어요?”한유나가 다급하게 해명했다.“강하린 씨, 오해에요. 나랑 오빠는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오빠는 단지 내가 영원히 앞을 못 볼 수도 있으니까 불쌍해서 그러는 거예요. 오빠, 나 그냥 갈게요. 나 때문에 강하린 씨랑 싸우지 마요.”“어딜 가.”주민재가 그녀를 잡으며 지켜주려는 듯 뒤로 보냈다.“강하린, 내가 네 속셈 모를 것 같아? 외박해서 내 관심 끌고 할아버지가 나보고 널 데리고 나오라고 했는데 도중에 가버려서 할아버지 이용해 유나 건드리려는 거잖아. 강하린, 넌 참 한결같이 독하다.”강하린은 그의 생각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연약하고 창백한 얼굴이 겁에 질려 있고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는 것처럼 주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주민재는 서둘러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바로 병원에 데려다줄게.”말하며 그는 돌아서 곧장 한유나를 안아 들었고 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사람들 사이로 돌아봤지만 여전히 강하린은 보이지 않았다.방금 유나가 나가는 걸 봤다고 했으니 알아서 먼저 떠났겠지.품에 안긴 한유나의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다급하게 들리자 더욱 인내심이 바닥난 주민재는 다른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한유나를 품에 안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에야 강하린은 밀치고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힘겹게 일어났다.조금 전 관람차에 사고가 났을 때 기다리던 사람들이 뿔뿔이 도망치자 어수선한 와중에 이리저리 떠밀려 강하린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쪽으로 밀려들자 다행히 옆에 보이던 판넬로 몸을 막았다.그렇지 않았다면 몰려온 사람들에게 짓밟혀 죽지 않으면 심하게 다쳤을 거다.발에 밟혀 아픈 곳을 문지르며 땅에서 일어나 주민재와 한유나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텅 빈 관람차만 보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 순간 강하린은 끝없는 심연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위험한 상황에서 주민재는 한유나를 데리고 떠나느라 그녀를 잊어버린 거다.강하린은 마치 자신이 그들 사이에 있는 광대가 된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채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하린, 그만하자.무려 5년이다. 5년 동안 노력해서도 얻지 못한 마음인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나.그냥 놓자.그 남자도, 자신도....놀이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강하린은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주민재의 회사로 택배를 보냈다.이번에는 정말로 그를 놓아줄 준비가 되었다.주민재는 다음 날 오후 강하린으로부터 이혼 서류를 받았다.막 병원에서 한유나 곁을 지키다가 업무가 밀려 어쩔 수 없이 회사로 온 그는 비서가 가져온 걸 받았을 때 표
주상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에서 두 번이나 돌다가 마침내 주민재 앞에 섰다.“됐다. 결국엔 다 내 탓이다.”주상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너한테 결혼하라고 강요해서 네가 원망하는 거 다 안다. 생각해 보면 너한테 하린이가 아까운 것도 맞지. 네가 한유나 그 아이를 좋아한다면 하린이와 이혼해라. 마침 나도 너같이 한심한 손자는 필요 없으니 이혼하고 일찌감치 나랑 인연도 끊고 주씨 가문에서 나가. 앞으로 하린이는 내 손녀고 나는 다정하고 아껴주는 사위를 찾아줄 거다.”“...”‘친할아버지가 맞나?’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어림도 없어요!”강하린과 이혼하는 걸 말하는 건지, 주상철과 관계를 끊는다는 걸 말하는 건지.설마 강하린에게 새 남편을 찾아주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겠지?이에 대해 강하린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물어볼 생각도 없이 각막 기증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느라 바빴다.눈의 발작은 점점 더 잦아지고 실명하는 시간은 더 길어지고 있다.강하린은 더 이상 지체하면 기증자를 기다리더라도 수술을 받을 기회가 없을까 봐 정말 두려웠다.다행히 세상에 돈 없이 안 되는 일은 없었고 거금을 들여 그는 마침내 각막 기증자가 9살 남아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의 어머니는 웨이트리스로 저녁에 파티에서 일할 예정이었다.강하린은 파티에 가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 왜 말을 바꿨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고 그녀에게 각막을 기증하도록 설득해 볼 참이었다.가능성이 희박하긴 해도 강하린은 시도하고 싶었다.저녁 8시, 강하린은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파티장에 나타났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찾기도 전에 남자아이의 어머니는 한유나와 임지혜를 먼저 만났다.임지혜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로 과거 강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에는 늘 강하린과 비교 대상이 됐던 인물이다.하지만 외모나 교양, 재능, 상식 뭐로 보나 강하린에게 뒤처졌고 이로 인해 강하린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임지혜는 만날 때마다 그녀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강씨 가문이 몰락한 후 강하린은
강하린은 아이의 강하린을 찾다가 우연히 이곳까지 왔고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공교롭게도 괴롭힘을 당한 종업원이 자신이 찾던 기증자의 어머니, 박연화였다.주민재가 여기서 그토록 여리고 착하며 부드럽다고 생각하는 후배의 본성이 어떤지 봤어야 하는데.웨이트리스는 상대에게 밀려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지만 한유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하이힐을 신은 채 당당히 걸어가는 공작새처럼 그 여종업원을 밟고 지나갔다.종업원은 굴욕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이 떨렸지만 주먹을 꽉 쥔 채 참으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강하린이 다가가 위로하며 이 틈에 접근하려는데 갑자기 눈에서 통증이 밀려와 눈앞이 캄캄해져 쓰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위급한 순간에 벽을 붙잡고 버텨냈다.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이 복도는 정원으로 이어지는 통로였고 강하린은 그녀가 정원 구석으로 가서 추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눈이 따끔거리는 것을 참으며 서둘러 정원으로 쫓아갔지만 거기에 찾는 사람은 없었고 삼삼오오 한가한 사람들이 모여 술잔을 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강하린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까 봤던 종업원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꽃밭으로 가려는데 수영장을 지날 때 다시 한번 눈에 통증이 거세지며 눈앞이 캄캄해지자 그녀는 어둠이 완전히 덮치기 전에 옆의 가로등 기둥을 잡고 증상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대한 힘이 강하린을 밀치며 앞으로 떠밀렸고 수영장에 빠지기 전 그녀는 강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바로 조금 전에도 맡았던 임지혜 냄새였다.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덮쳐오자 강하린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쳤다.“도, 도와줘요... 나, 나 수영 못해요...”눈이 아프고 눈앞이 캄캄한 와중에 두 손으로 무언가를 잡으려 할수록 더더욱 깊게 빠져들었다.절망이 늪처럼 그녀를 조금씩 삼켜가고 있었다.정말 오늘 여기서 죽는 걸까?강하린이 죽는다고 단정 지을 때 귓가에 철썩이는 소리가 들렸다.누군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였다.곧바로 강한
조용한 복도에 ‘쿵'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강하린은 부딪힌 부위를 문지르며 아파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렸다.뒤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는 걸 보아 주도현은 이미 간 것 같다.그녀는 더듬거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열었고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린은 주도현이 아파트 건물 앞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커다란 쓰레기통에 부딪힌 그녀의 모습을 본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강하린 눈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당장 알아봐.”저렇게 거대한 장애물은 눈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부딪히지 않는데 강하린은 아무것도 몰랐다.집에 돌아온 그녀는 서둘러 약을 한 알 더 먹었고 눈의 따끔거리는 통증은 점차 사라졌다.강하린은 축축한 옷을 벗고 들어가 샤워를 한 뒤 깔끔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오늘 파티에서 박연화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내일은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말이 방문이지 그동안 그녀는 줄곧 병원에 머물고 있었다.각막을 기증한 소년이 희소병을 앓고 있어 2년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강하린은 병원에 가서 어느 병동에 있는지 알아보고 곧장 찾아갔지만 병실 앞에서 상황을 살펴본 그녀는 굳어버렸다.여자가 중환자실에서 돌보는 사람이 아이일 줄 알았는데 온몸에 호스를 꽂고 산소 호흡기를 쓴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은 중년 남성이었다.강하린이 찾아갔을 때 여자는 그의 손을 닦아주는 중이었고 모습을 보아하니 남편인 것 같았다.순간 강하린은 그들이 왜 마음을 바꿨는지 알 것 같았다. 주민재의 돈을 받은 거다.말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박연화가 이미 그녀를 발견했다.“누구 찾으세요?”여기까지 왔으니 강하린은 그래도 노력은 해보고 싶었다.돈 때문이라면 그녀도 줄 수 있으니까.“안녕하세요. 저는 강하린이라고 하는데요. 원래 아이 각막을 기증받으려던 사람이에요.”강하린의 이름을 듣는 순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병실에 있던 두 사람이 생각에 잠겨 있는 틈을 타 강하린은 조용히 침대 끝에 은행 카드를 놓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아이의 각막이 아니면 또 어디 가서 적합한 눈을 찾을 수 있을까.아니면 그녀의 눈은 결국 여기까지인 걸까.병동에서 나온 강하린은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마주 오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야 정신을 차렸다.고개를 드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주도현, 여긴 어떻게...”주도현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으로 강하린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애써 참았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잠긴 그의 목소리엔 무거운 감정이 담겨 있었고 당황한 강하린은 미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뭐라고?”“네 눈...” 주도현은 말하다가 멈추고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강하린은 그의 눈에서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을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며 고개를 저었다.“됐어, 내 눈 때문에 살 기회를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아.”“그게 무슨 말이야?”강하린은 가족에게 수술해 줄 전문가가 필요하단 얘기를 하며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내가 아직 강씨 가문 아가씨였으면 그래도 인맥으로 비벼볼 만했을 텐데 지금은... 됐어.”“마이클 의료팀에 관해 얘기하는 거라면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저녁 6시,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유나가 도시락을 들고 주민재의 사무실 앞에 나타났다.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고 비서는 안에서 주민재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대표님, 방금 기증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한유나 씨에게 각막을 기증하지 않겠다고 다시 번복했습니다.”기증자가 말을 바꿨다는 소식에 한유나는 무례하게 곧장 안으로 들어가 다그쳐 물었다.“왜요?”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날카롭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주먹을 꽉 쥐며 이내 여리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이미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말을 바꾼 거예요? 이제 와서
“됐어.”주민재는 거절하고 나가 버렸다.한유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방금 집사가 주민재에게 전화해서 사모님을 병원에 모셔 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사모님이라면 강하린 말고 누가 있겠는가?지금 저렇게 서둘러 병원에 가는 걸 보니 강하린 그 몹쓸 년을 보러 가는 게 분명했다.한유나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택시를 타고 몰래 주민재의 차를 뒤쫓았다.주민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강하린은 이미 모든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이곳은 유명인이나 부자들만 이용하는 고급 개인 병원이었다.집사와 도우미는 마치 경호원처럼 강하린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의사는 강하린의 검사 결과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한 달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영구 실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강하린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지금 당장 적합한 각막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그가 물었다.의사는 고개를 저었다.“각막은 항상 부족합니다. 돈이 있다고 해도 운이 따라야 하죠.”주민재는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최대한 알아봐 주세요.”진료실에서 나오자 강하린이 말했다.“화장실 좀.”각막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주민재는 그녀의 말에 도우미에게 말했다.“모셔다드려.”도우미는 강하린을 부축해 화장실 앞까지 데려갔다. 강하린이 말했다.“나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도우미가 대답했다.강하린은 일을 보고 지팡이로 길을 찾으며 세면대까지 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금방 손을 다 씻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도우미인 줄 알고 말했다. “부축해 줘요.”“부축해 달라고?”한유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지팡이를 발로 차 버렸다.강하린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방금 목소리가 낯익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한유나 씨?”“눈은 멀었는데 귀는 참 밝네요.”한유나는 강하린의 앞
주민재는 강하린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고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강하린의 귀에 가져다 댔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네 친구한테 안전하다고, 네가 여기 있는 게 자의라고 말해.”강하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곧 전화가 연결되었고 고지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하린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괜찮아? 주민재가 널 어떻게 하진 않았지?”강하린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나 괜찮아, 지안아, 나 지금 잘 있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하진 않았어. 그러니 너 돌아가. 나 좀 다쳐서 사람 만나기 힘들어. 그리고 나 다시 여기서 살기로 했어. 미안해.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니까 이제 신경 안 써도 돼.”“거짓말!”고지안은 강하린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민재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을 아이라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놈이 협박했지? 걱정 마, 말해. 내가 구해 줄게!”“아니야.”강하린은 다급하게 말했다.“정말 아니야. 함부로 행동하지 마! 나 지금 앞이 안 보여서 네 집에 계속 있으면 폐가 될까 봐 다시 돌아온 거야. 여기 있으면 돌봐주는 사람이 있잖아. 걱정하지 마. 나 정말 괜찮아. 민재 씨가 새 각막을 찾아서 내 눈을 고쳐 주겠다고 했어.”고지안: “그 사람 말을 믿어? 널 속이는 거 아니야? 전에 네 각막도 빼앗아 갔잖아!”“아니야, 이번에는 날 속이지 않을 거야.”강하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지안은 잠시 침묵했다.“알았어. 네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난 네 선택을 존중할게. 하지만 나중에 힘든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응.”고지안은 전화를 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주도현이 물었다.“어떻게 됐어요?”“별로 안 좋아요.”고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하린이는 분명 주민재 그 자식한테 협박당했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저런 말 할 리가 없는데. 평소랑 너무 달라요. 게다가 그 자식이 하린이 눈을 고쳐 주겠다고 했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
집사는 황급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도련님!”주민재가 나가자 도우미는 겁먹은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강하린의 상처를 소독하라고 지시했다.고지안은 어디에서도 강하린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주도현에게 전화해서 함께 찾아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강하린의 그 친구는 뭔가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그가 도와주면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하지만 둘이 아무리 찾아도 강하린은 없었다. 병원 CCTV 영상도 일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삭제한 게 분명했다.고지안이 절망하며 경찰에 신고하려는 찰나, 주민재의 전화를 받았다.“하린이 나한테 있어요.”주민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찾았어요.”강하린은 코웃음 쳤다.“찾았다고? 웃기시네. 분명 당신이 데려간 거잖아.”주민재는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하린이는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지낼 겁니다.”“무슨 소리야?”고지안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하린이한테 무슨 짓을 했어? 걔 지금 어디 있어? 전화 바꿔 줘!”“지금 통화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난 하린의 남편이니 하린이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앞으론 신경 끄세요.”말을 마치자 주민재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뭐라는 거야? 말 똑바로 해! 주민재!”고지안은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뚜뚜 소리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뭐래요?”주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고지안은 욕설을 퍼부었다.“그 자식이 사람을 시켜 하린이를 납치했어요! 그러고는 지금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앞으로 신경 끄라잖아요! 대체 뭘 하려는 건지!”주도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 사람이 직접 데려간 건 아닌 것 같아요.”“혹시 짚이는 거라도 있어요?”고지안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주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목소리가 좀 익숙했어요. 근데 누군지 바로 생각이 안 나네요. 아마 그 사람이 하린이를 데려갔다가 주민재에게 걸린 것 같아요.”“어쨌든 지금 하린이는 지
“꺼져!”강하린은 차갑게 말했다.주민재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애써 눌렀다.지금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예민해진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주민재는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고작 그 정도 죄책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처음부터 그녀가 함정을 파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건데. 그리고 그때 자신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에 그녀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것이다.참으로 은혜를 모르는 여자였다.주민재는 벌떡 일어서서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좋아, 약 바르기 싫으면 관둬. 어차피 아픈 건 너니까!”그는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손으로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사모님, 무슨 일로 침대에서 내려오셨어요?”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부축하며 방 안으로 데려갔다.“앉으세요. 약 발라 드릴게요.”“싫어요!”강하린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도우미의 손을 뿌리쳤다.“약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주민재가 내 허락도 없이 여기에 데려왔단 말이에요. 난 이미 이혼하자고 했어요! 날 여기서 나가게 해줄 수 있어요?”도우미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잃었다가 대답했다.“사모님, 저는 약 발라 드리는 일밖에 해드릴 게 없어요. 다른 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집사를 불러줘요!”강하린은 화를 내며 말했다.“집사를 데려오라고!”“잠시만 기다리세요!”도우미는 서둘러 나갔다.강하린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눈을 꾹 감자 괴로움이 밀려왔다.방금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거지? 분명 그 도우미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녀는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 한 자신이 한심했다.눈이 멀게 된 후 그녀는 스스로의 성격이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음을 느꼈다. 아마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집사가 곧장 올라왔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그녀가 시력을 잃은 데에는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녀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그는 이것을 책임감이라고 불렀다.아직 이혼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부부였으므로 그가 그녀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차는 곧 별장 앞에 도착했다. 강하린이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었다.주민재는 차에서 내려 그녀 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풀어 그녀를 안아 내렸다.강하린은 발버둥 치며 두 다리를 허공에 휘둘렀다.“놓으라고!”하지만 주민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마중 나온 집사는 주민재가 강하린을 안고 있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황급히 다가왔다.“도련님, 사모님께서는...”“눈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주민재가 말했다.집사는 놀라 말했다.“사모님께서 앞을 못 보신다고요?”“사모님 시중들 사람을 배치해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이게 무슨 뜻이야?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난 이런 싸구려 보상 필요 없어!”강하린은 목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당신 때문에 내가 눈을 잃었잖아! 내 각막 돌려줘!”집사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주민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혔다.강하린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하마터면 주민재의 얼굴을 때릴 뻔했지만 그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가 화난 건 알아.”주민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마. 네 각막 가져간 대가, 반드시 갚아줄 테니까.”강하린은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비웃었다.“갚아주면 다야? 난 당신을 절대 용서 못 해! 당신은 양심에 찔려서 이제 와서 보상해 주겠다는 거잖아? 늦었어! 난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날 내보내 줘!”주민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부터 여기서 눈 나을 때까지 어디도 가지 마.”말을
신현수가 손을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니 주민재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민재 형?”신현수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고 일어섰다.“형이 어떻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주민재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현수 도련님!”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신현수는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참 만에야 그는 경호원들에게 부축받아 간신히 일어섰다.주민재는 이미 코트를 벗어 강하린에게 덮어주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신현수는 속으로 뜨끔했다.“민... 민재 형...”“누가 얘를 여기 데려오라고 했어? 현수 너 정말 잘났다. 배울 게 없어서 여자 괴롭히는 것만 배웠어?”주민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주민재? 강하린은 덮어준 외투를 꽉 쥐었다. 결국에는 주민재가 자신을 구하러 올 줄은 몰랐다.“민재 형,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네 다리를 분질러 버릴 줄 알아!”주민재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고는 강하린을 안아 들고 나가 버렸다.신현수는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었다.“빌어먹을!”주민재가 강하린에게 정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대체 저 둘은 무슨 사이인 거지?강하린은 주민재에게 안겨 나가면서 계속 저항했다.“놓으라고! 내려놔! 가식 떨지 말고!”“가식?”주민재는 차갑게 말했다. “내가 제때 안 왔으면 넌 어떻게 당했을지도 몰라.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가식이라니?”“신현수가 날 납치한 게 당신 허락 없이 가능했을 것 같아?”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글썽였다. “내 꼴이 이런데도 왜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 도대체 뭘 더 하려는 건데?!”“내가 허락했다고? 내가 언제 현수에게 널 잡아 오라고 시켰다는 거야? 정말 그랬다면 내가 널 구하러 오느라 이렇게 고생했겠어?”주민재는 은혜를 모르는 그녀가 한심했다.강하린은 차갑게 말했다.“당신이 평소에 그 자식이 날 괴롭히는 걸 눈감아 줬으니까 그런 거잖아! 이게 다 당신 때문
신현수는 휴대폰을 찾아내 버튼을 눌렀다. 아직 고장 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줄게. 널 납치하기 전에 민재 형한테 이미 말했어. 형은 너한테 조금도 관심 없었어.”그에게 말했다고?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고보니 주민재가 묵인한 거였다. 어쩐지 신현수가 저렇게 대담하더라니.전에는 아무리 그녀가 미워도 주민재의 눈치는 봤는데 이젠 그와 이혼하려고 하니 배경이 없어졌다고 이렇게 안하무인인 모양이었다.신현수는 강하린의 얼굴인식으로 휴대폰 잠금을 풀고 연락처를 뒤졌다.“어젯밤에 그 자식 이름이 뭐였더라?”강하린은 주도현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말했다.“나한테 앙심 있으면 나한테 풀어. 너랑 나 사이의 일에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오호, 네 상간남을 이렇게 감싸는 거야?”신현수는 비웃었다.“너 하나로는 내 화가 안 풀려. 감히 날 때린 놈은 댓가를 치러야지!”옆에 있던 사람이 귀띔했다.“도련님, 주도현이라고 합니다.”“아, 주도현.”신현수는 코웃음 치며 주도현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내놔!”강하린은 갑자기 달려들어 휴대폰을 빼앗으려 들었다.비록 빼앗지는 못했지만 신현수는 깜짝 놀라 화가 나서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망할 년, 놀랐잖아!”하지만 힘 조절을 못 한 탓에 강하린은 벽에 세게 부딪히며 머리가 터졌다.옆에 있던 자가 조심스레 말했다.“도련님,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 치료해 줄까요? 아무래도 저 여자는 아직...”“필요없어!”신현수는 차갑게 말했다.“민재 형이 이년한테 마음도 없는데,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강하린은 벽에 기대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쏟았다.‘그래, 민재 씨는 날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쓰겠지.’전화가 연결되었다.“하린아, 무슨 일이야?”주도현의 목소리를 듣자 강하린의 심장이 떨렸다.신현수는 비웃으며 말했다.“하린이? 다정하게 부르네. 이 천한 계집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지?”“당신 누구야? 하린이는 어디 있어?”
“언제 없어진 거예요? 왜 나한테 빨리 말 안 했어요?”주민재는 말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한유나는 그가 나가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따라갔다.“주 대표님, 이따 다른 회의가...”“회의 취소해. 지금 급한 일이 생겼어!”주민재는 급하게 말하고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한유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무슨 뜻이에요? 하린이를 데려간 게 당신이 아니라고요?”고지안은 어리둥절했다.주민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내가 사람을 보내서 찾아볼 테니까 당신 쪽에서도 무슨 소식 있으면 곧바로 연락 주세요.”전화를 끊자마자 주민재는 곧 전화를 걸어 경호원들에게 강하린을 찾으라고 지시했다.경호원들은 즉시 병원으로 출동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에는 모자를 쓴 여자가 강하린을 데리고 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여자는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강하린이 길가로 끌려 나온 후, 차 한 대가 멈춰 섰고 차에서 내린 누군가가 그녀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경호원은 이 장면을 캡처해서 주민재에게 보냈다. 주민재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악!”한 통의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 강하린의 온몸을 적셨다.쿵!물통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물에 흠뻑 젖은 옷이 차갑게 몸에 달라붙었다.신현수는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꼴인 그녀를 보며 경멸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너 같은 건 진작에 죽었어야 했어. 네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풍비박산 났는지 알기나 해? 너도 똑같은 죄인이야. 내가 너라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낯짝도 없었을 거다!”강하린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그런 모습에 신현수는 더욱 화가 났다.“말해!”턱에 격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은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신현수의 숨
강하린은 의아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하지만 고지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얼마나 걸었을까, 강하린은 점점 시끌벅적한 곳에서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세 층을 내려오고 나서야 자신이 원래 3층에 있었으니, 지금 1층에 도착한 셈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의아한 듯 물었다.“지안이가 왜 1층에 있는 거죠?”간호사는 대충 둘러댔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1층에서 볼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간호사는 계속해서 강하린을 데리고 갔다. 이때 강하린은 확성기 소리, 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 각종 소음이 들려오는 걸 깨달았다.그제야 자신이 이미 길가에 나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고지안이 병원 안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지 않았나? 그런데 왜 병원을 벗어난 거지?!강하린은 경계하며 간호사의 손을 확 뿌리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당신, 지안이가 보낸 사람 아니지! 도대체 누구야?!”“어라? 생각보다 눈치 빠른데?”귀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강하린의 머리칼이 쭈뼛 섰다. 신현수였다.그녀는 발소리를 들었다. 신현수가 다가온 것이다.강하린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뭐가 그렇게 무서워?”신현수는 그녀를 냉랭하게 노려보더니 초점 없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눈이 안 보이는 거냐? 진짜 장님이 됐다고? 꼴좋다! 어젯밤에 네 덕분에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그러니까 이제 나랑 가자고. 내 화가 풀릴 때까지 절대 안 놔줄 거야!”강하린의 손에 있던 지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신현수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놔줘! 제발!”신현수는 그녀를 거칠게 차 안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도 올라타 문을 세게 닫았다.“가자!”...고지안은 3호실 환자와 씨름하며 30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겨우 달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