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사장님?”하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는 사람들 뒤에서 걸어 나오는 중년 남자를 실눈으로 차갑게 쳐다보았다.“고명원 사장님! 어서 이놈을 죽여 버려요!”하현의 말에 이국흥과 우민은은 동시에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냉소를 흘렸다.이 쓰레기 같은 놈은 정말로 두려움도 없는 무지렁이인가?!설마 고명원 같은 거물이 아무렇게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란 걸 모르는 건가?고명원이 하현을 죽이고 싶지 않았더라도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죽으려고 덤비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군중 뒤편에서 손에 염주 팔찌를 차고 무도복을 입은 고명원은 당당한 기품을 드러내다 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나머지 오줌을 지릴 뻔했다.하현의 목소리를 그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있는가?이때 그는 허둥거리며 달려왔다.그리고 하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순간 고명원은 자신의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고 사장님, 바로 이 개자식입니다! 꼭 좀 죽여 주십시오!”이국흥은 이 상황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사장님, 저놈을 죽여 버려요!”순간 우민은도 맞장구를 쳤다.“저놈을 죽여만 죽다면 내 한 몸 사장님한테 바치겠어요!”고명원은 이 말을 듣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그는 덜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일그러진 고명원의 표정을 보고 이국흥은 그가 화가 난 나머지 흥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고 하현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다.“퍽퍽퍽퍽!”고명원은 곧장 이국흥에게 다가와 두 사람을 향해 사정없이 손바닥을 휘둘렀다.고명원의 갑작스러운 따귀세례에 두 사람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지금 날 놀리는 거야?!”“날 죽이려는 셈이냐고?!”고명원은 두 사람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그리고 나서 온몸을 덜덜 떨면서 하현의 앞으로 걸어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하현,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아직도 사람들을 괴롭히는 못된 버릇 못 고쳤나 봐요, 네?”하현은 또 그의 뺨을 때렸다.얼굴이 벌게진 고명원은 손사래를 치며 싹싹 빌었다.“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하현,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퍽!”하현은 다시 손바닥을 휘둘렀다.“다음에 당신이 또 이런 짓을 하는 게 내 눈에 띈다면 그땐 정말 목숨 부지하기 어려울 겁니다!”고명원은 순간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싶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하현은 그제야 오른손을 거둬들여 물티슈로 손가락을 닦으며 냉담하게 말했다.“똑똑히 기억하세요. 다음엔 절대 봐주지 않을 겁니다.”이시운은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넋이 나간 듯 얼어붙었다.우민은과 이국흥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눈앞에서 싹싹 빌고 있는 사람은 장청 캐피털 사장 고명원이었다!그런데 어떻게 하현 앞에서 저렇게 나약하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수가 있는가?그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알겠습니다.”“꼭 기억하겠습니다!”고명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자신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겨우 걷히는 것 같았다.“나머지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하현은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돌아서서 설은아를 포르쉐 차량에 태웠다.“개자식! 자기가 뭔데 하라 마라야!”떠나는 하현의 당당한 뒷모습에 이국흥은 지팡이를 짚고 원망과 독기가 가득 서린 눈빛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포르쉐를 쳐다보았다.“믿을 수가 없어! 내가 금정에서 산 세월이 얼마인데 저따위 데릴사위 한 놈 처리하지 못한 거지?!”“두고 봐!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내 이 다리가 다 나으면 바로 육 씨 가문에 찾아가서 뛰어난 고수들을 빌려서라도 저놈을 죽여 버릴 거야!”“무학의 성지에서 날뛰는 사람이 있다니! 흥!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지!”“그리고 저
설은아는 회사 대출 문제가 해결된 뒤 화사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바빠서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설유아는 또 다른 연극을 제안받고 신이 나서 대구로 달려가 촬영했다.이영산 부부조차 연거푸 뺨을 얻어맞는 바람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북적거렸던 설 씨 집안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하현은 서둘러 가게를 찾지 않고 며칠 쉬었다가 다시 재개할 생각이었다.당장 급한 일이 있기도 했다.특히 그가 풍수지리사로 이름을 알리게 된 이유는 장생전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그래서 그는 간민효 쪽에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때 잘 이야기해 볼 계획이었다.다만 간민효가 요 며칠 동안 적극적으로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아서 하현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하현이 이틀을 푹 쉰 다음 날 오후, 엄도훈이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걸어왔다.“형님, 잘 쉬고 계십니까?”“잠깐 얘기 나눌 시간 있으세요?”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고 어서 말해 봐.”엄도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형님, 저도 서남 천문채에 반쯤은 발을 걸치고 있다는 거 아시죠.”“그래서 형님이 마동수 일행을 고명원에게 넘긴 후 제가 사람들을 보내서 좀 알아봤습니다.”“어쨌든 마동수 일행은 고성양 모자를 포함해 이제부터는 형님한테 폐를 끼치진 않을 겁니다.”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엄도훈은 하현의 대답을 듣고 계속 말을 이었다.“또한 마동수 일행이 떠나기 전에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들어보니 그들이 이번에 금정에 와서 형님과 고명원에 맞선 건 더 큰 거물을 겨냥한 전초전이었던 거예요.”“그들이 정말로 상대하려는 사람은 간민효입니다.”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왜?”“간민효는 금정 간 씨 가문 딸이고 오래된 문벌 사람이야. 그들이 그녀를 귀찮게 하면 보복이 만만찮을 텐데 무섭지도 않은가 보지?”“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해골파는 분명 형님이 마동수 일행을 처리한 것을 모를 겁니다.”“그러니 해골파의 일은 형님과 무관합니다.”“그들은 기껏해야 고명원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겠죠.”엄도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고명원은 지난번 사고 이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단정한 양복 차림에 강인한 사람들이어서 공격하기 어려울 거예요.”하현은 고명원의 얘기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해골파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아?”“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어?”엄도훈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경악하며 말했다.“형님, 그들을 죽일 작정이세요?”하현은 침착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해골파 사람들이 간민효를 상대하려는 이유가 아마 장생전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다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려는 것이다.만약 이 일이 장생전과 관련이 있다면 그는 해골파 모두를 전멸시킬 생각이다.한 번 고생으로 영원히 편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이다.“형님, 해골파가 이렇게 오랜 세월 여기저기 소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무맹이 약했던 것도 있지만 그들의 실력이 월등히 우월했기 때문이에요.”“특히 그들의 두목인 사람은 전신에 가까운 실력을 자랑합니다. 아주 끔찍스러울 정도라고 해요!”엄도훈은 하현에게 재빨리 충고의 말을 늘어놓았다.“게다가 그 두목은 원래 강호의 규칙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이기기 위해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요.”“형님이 먼저 그들을 괴롭힌다면 아마 죽일 듯이 덤빌 겁니다! 절대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어려워요!”“제가 형님의 능력을 못 믿는 게 아닙니다!”“도자기 같은 우리가 왜 항아리같이 거친 사람들에 맞서야 합니까?”“편하게 앉아서 저들이 하는 짓거리나 구경하면 됩니다.”“해골파가 간민효를 상대하려는 것은 죽음을 택
이 말을 들은 하현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감히 내가 어떻게 간 씨 가문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할 수 있겠어? 당신 추종자들이 들으면 날 죽이려고 들 거야!”하현의 말을 들은 간민효는 살짝 질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듣자 하니 형나운 같은 여자애들 따라다니느라 바쁘다던데. 바로 다음 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줬다는 둥 뭐라는 둥...”원망 섞인 말투에 하현은 뒷골이 당겨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지금 어디 있어?”“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나한테?”“나 마침 자금산을 지나가고 있어.”간민효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구시가지에 다녀왔는데 풍수관을 열기 괜찮은 곳을 발견했어. 어깨가 딱 벌어진 늠름한 곳이야.”“운이 아주 좋았어. 내가 적당한 곳을 찾았으니 우리 내일 같이 가 보자.”“당신만 괜찮다면 이쪽으로 정했으면 해.”“인테리어는 따로 할 필요없어. 형나운한테 가서 골동품 몇 개 받아서 갖다 놓으면 이제 하 대사가 데뷔하는 거지!”여기까지 말하고 난 뒤 간민효는 기분 좋게 웃었다.일이 아주 잘 풀려서 흡족한 것 같았다.간민효의 종잡을 수 없는 모습에 하현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 당분간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방금 들은 바에 의하면 해골파 사람들이 당신을 상대하러 왔대. 그들 뒤에는 아마도 우리가 상대할 그 조직이 있는 게 틀림없어.”“그래서 당신은 각별히 조심해야 해.”“나의 첫 전우가 이대로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아.”간민효가 약간 의아해하며 말했다.“해골파가 나를?”“그들은 당신과 고명원을 찾아 헤매지 않았어?”“게다가 해골파가 어떻게 그 조직과 연을 맺었지?”“그건 모르겠지만 당신이 전에 비행기에서 공격받았던 적도 있고 하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조심해서 한 번에 몰아붙여야지.”“도둑이 두렵지는 않지만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돼.”하현이 한마디 당부했다.비행기 사건을 다시 떠올린 간민효는
계속해서 하현은 몇 대의 차량을 막아섰다.하지만 자금산으로 가자는 말에 택시들은 하나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치듯 달렸다.하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는 공유 스쿠터라도 타 볼까 해서 살펴보았다.“하현,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이때 BMW 한 대가 멈춰 섰고 차창이 스르륵 내렸다.뜻밖에도 나박하가 웃은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그는 우연히 그 길을 지나가던 중이었다.하현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다가 바로 조수석에 올라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금산, 빨리!”자금산이라는 세 글자에 나박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분명 두려움에 사로잡힌 눈빛이었다.하지만 그는 곧 이를 악물고 말했다.“벨트 단단히 매세요.”말을 마치자마자 나박하는 액셀을 세게 밟았다.분명 이 지역 쓰레기 분리업자 나박하도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그가 고성양에게 뺨을 맞던 날 하현이 대신 나서 준 것에 줄곧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자금산은 많은 금정인들에게는 금기시되는 곳이었지만 지금 나박하는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차는 줄곧 나는 듯이 달려서 여러 개의 빨간 신호를 빠르게 무시하며 불과 10분 만에 자금산 산기슭에 도착했다.하현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다가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옛길을 가리켰다.그쪽에서 총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곧 차는 깎아지른 절벽 끝에 이르렀다.더 이상 길이 없어 나아갈 수도 없었다.하지만 하현은 얼른 차 문을 열고 벼랑 끝으로 돌진했다.벼랑 끝에 엎드려 내려다보니 아래에서 총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공기 중에 총탄 냄새도 났다.그곳에서 간민효 일행이 습격당한 것이 틀림없었다.다만 그곳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약 20미터는 아래에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하현, 무슨 일이에요?”나박하가 다가왔다.하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밑으로 가는 길이 없을까요?
”풉!”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처참하기 짝이 없이 땅에 내리꽂혔고 여기저기 피가 뿜어져 나와 만신창이가 되었다.주위에는 먼지가 뿌옇게 일었고 도요타 엘파에서 나온 남자들은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었다.땅에 쓰러진 남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그는 하현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그는 해골파의 수장이었다.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였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병왕이라는 것이었다.어디든 거칠 것 없이 행동했던 그가 오늘 대열을 이끌고 임무를 수행하러 왔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이다.그는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일어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하현은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난 이렇고 싶지 않았어!겁도 없이 뛰쳐나오는데 난들 어떻게 해?당신들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하현은 중년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고마워. 늙은이.”“뭐? 늙은이...”하현의 말을 들은 해골파 부두목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하현은 신경 쓰기도 귀찮은 듯 힐끔 사내들을 쳐다본 뒤 또 한 발을 내디뎌 땅에 착지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현장 곳곳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주변엔 격전이 벌어진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음이 틀림없었다.습격을 당한 차량들은 네댓 대였는데 앞뒤 차량 안은 모두 핏빛이 되었고 차체는 총탄 자국으로 가득했다.가운데 도요타 차량의 보닛에는 회색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반쯤 무릎을 꿇은 채 부러진 칼자루를 들고 있었다.그는 아직 온몸에 팽팽한 긴장이 가득했지만 이미 기력을 많이 상실할 듯 보였고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의 곁에는 회색 옷을 입은 노인 몇 명이 누워 있었는데 하나같이 숨을 헐떡거리며 곧 숨을 거둘 것 같았다.도요타의 엘파 차량 뒤편에서 차체에 기대
“이렇게 쉽게 정신을 잃다니! 쯧!”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발밑에 깔린 사람을 보았다.옷차림을 보아하니 모두 해골파에서는 거물급인 듯했다!그런데 결과는?그냥 슬쩍 밟았을 뿐인데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이게 정말 엄도훈이 그토록 열변을 토하며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 해골파인가?설마 엄도훈이 일부러 자신한테 겁을 주려고 한 건 아니겠지?하현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주위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비분강개하며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들개처럼 달려들었다.그들은 손에 총, 칼, 활, 쇠방망이 등을 쥐고 있었고 사슴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렸다.그들의 노기가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이때 간민효는 차량 뒤에서 뛰쳐나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조심해!”말을 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검은 사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은 나가지 않았고 ‘차칵’하는 소리만 황망하게 들렸다.“부두목!”그리고 이때 정신을 잃었던 부두목을 본 검은 옷의 사내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포효했다!“이 개자식! 감히 우리 부두목을 저렇게 만들다니!”“죽여 버리겠어!”얼굴에 해골을 새긴 한 남자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형제들아! 이 개자식을 죽이지 않고 부두목의 복수를 되갚아 주지 않는다면 두목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어서 죽여!”사내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고 하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고 느낀 것이다.순간 그는 발밑에 힘을 꽉 주었고 발밑의 자갈들이 회오리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촤촤촤촥!”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몸 위로 자갈이 날아들었고 그들은 순식간에 모두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러 비명을 지르며 땅에 주저앉았다.활과 쇠방망이들은 갈 곳을 잃고 여기저기 내동댕이쳐졌다.곧이어 하현이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앞에 다가와 손바닥을 휘갈겼다.해골파들은 안색이 급변하며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의 손놀림이 너무나 빨랐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
”해결되었으면 됐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세상 일에 대해 그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어떤 일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사소한 일들은 소꿉놀이 같아서 정말로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다른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지.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간민효는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듯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현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우리 금장 간 씨 가문의 다른 하찮은 일보다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어차피 우린 연대한 사이잖아?”“참, 당신의 풍수관이 생기면 내가 첫 고객이 되고 싶어...”하현은 웃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내가 뭘 얼마나 잘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해?”간민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연, 인연이야...”“이 일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 같은데...”하현은 간민효의 말을 듣고 눈꺼풀을 펄쩍거리며 얼굴빛이 붉어졌다.“자, 장난치지 말고 당신이 선택한 곳부터 둘러보자고.”하현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고 이 모습을 본 간민효는 빙긋 웃으며 하현의 팔짱을 끼고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차에 타고 있던 나박하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 당연히 설은아에게 바로 고자질해야 했다.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미 하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주인 격인 그를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나박하가 고민에 빠진 그 시각 하현 일행은 이미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집복당 안 넓은 부지 앞쪽에는 큰 홀이 있고 한쪽에는 서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는 각종 풍수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뒤편에는 사랑채 몇 개와 커다란 마당이 있었다.다만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했지만 내부는 꽤나 낡아 보였고 바닥의 청석도 파손된 곳이 적지 않았다.종이로 칠한 창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아서 괴기스러운 영화를 찍거나 스릴러물을 촬영하기 딱이라는 생각마저
설은아의 말을 들은 하현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김탁우가 감쪽같은 위장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설은아는 그의 과거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하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뭐, 어쨌든 우린 재혼할 거니까.”“남자들을 많이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왜? 다른 뛰어난 사람을 보면 내가 홀딱 빠져 버릴까 봐 걱정되어서 그래?”설은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간민효랑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난 다른 남자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일이 이렇게 흘러 버렸는데 자신이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설은아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는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자자, 질투하지 마.”“내가 한 번 본 남자한테 사랑에 빠질 여자로 보여?”“김탁우는 오늘 밤 나한테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온 것뿐이라고.”“그러니 당신도 다른 여자들과는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렇지 않았다가 내가 알기라도 하면 당신 곤란해질 거야.”“어쨌든 우린 아직 이혼한 사이니까!”말을 마친 설은아는 하현을 향해 말로 주먹을 한 방 날리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하현은 이 광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지금 누구도 두려운 사람이 없었다.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한 여자 앞에서는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게다가 이 여자는 지금 이 기회를 빌려 자신과 다른 여자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에 경고장까지 날리며 그를 압박했다.이런 생각이 들자 하현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이튿날 아침 하현은 일어나서 설은아와 얘기라도 좀 나눠 보려고 했다.하지만 설은아는 어제 일은 다 잊은 듯 씨익 웃으며 일이 있다고 말한 뒤 홀연히 집을 나섰
소란은 여기서 끝났다.하현은 임수범과 이산들을 더 이상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그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의 기세를 제압하는 것이었다.자신의 앞에 놓인 곤궁한 처지를 헤치고 운명을 바꿔 나가는 일은 오로지 나박하가 감당할 몫이었다.소란스러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던 왕인걸은 등줄기에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현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 순간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가 있다.소란이 끝난 후 왕인걸은 임수범 일행을 내쫓고 하현과 나박하의 테이블에 반찬 몇 가지를 더 제공해 준 뒤 나박하의 멤버십 기간을 1년 연장해 주었다.오늘 밤 그는 완벽하게 하현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고 할 수 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인걸의 어깨를 툭 건드릴 뿐이었다.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왕인걸의 마음은 충분히 흡족했다.식사가 끝나자 하현은 나박하에게 자신을 설 씨 집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다음 날 다시 와서 적당한 가게를 찾는 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설은아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설은아의 성격상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다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마세라티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설은아의 차 문을 멋스럽게 열어주며 에스코트했다.이 과정에서 그는 설은아와 어떤 신체 접촉도 없었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걸었다.하현의 시선을 눈치챈 듯 남자는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돌아섰다.하현의 눈동자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때 갑자기 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항성에서 원가령과 약혼을 하려다가 자신에게 뺨을 얻어맞은 김탁우였던 것이다!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마도 성형을 한 뒤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