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던 부하가 미처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총알 하나가 ‘퍽'하고 그의 가슴팍에 꽂혔다.하구천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가슴을 부여잡고 땅바닥에 고꾸라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저격수!”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모두 항도 하 씨 가문 정예 부대이며 하구천의 호위병이었다.누구보다 신속하고 용맹하게 대응했던 그가 숨을 거두자 하구천은 화를 낼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벽 쪽으로 굴러갔다.“펑!”방금 숨은 거둔 부하가 쓰러진 자리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조금만 더 천천히 움직였더라면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하 소주를 보호해야 한다!”나머지 항도 하 씨 가문 정예들은 안색이 급변했고 모두 하구천을 에워싸기 시작했다.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지만 하구천은 죽을 수 없다.“푹!”또 다른 총알이 날아와 이번에는 최전방을 막고 서 있던 정예의 머리에 박혔다.순식간에 하늘에 선명한 피가 튀었다.항도 하 씨 가문 정예들은 하나같이 비분강개했다.비록 쏟아지는 탄알에 얼굴이 창백해지긴 했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죽음의 위험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하구천을 끝까지 보호했다.하구천은 얼굴 가득 분노가 치솟았지만 침착하게 행동하며 계속 몸을 피했고 결국 한쪽 도랑으로 몸을 숨겼다.악취가 진동했지만 총알이 두어 번 날아왔을 때도 하구천은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그러나 항도 하 씨 가문 정예 두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하구천은 분노에 휩싸여 이를 갈았다.이들은 모두 그의 측근들이고 정예 부대에서 책임자급들이었는데 오늘 이들을 잃고 만 것이다.큰 손실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하구천 일행이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이 사실이 하구천을 미치게 만들었다.자신을 겨냥한 암살은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낭패스럽고 위험한 순
하구천은 자신이 태어나서 이 자리에 앉기까지 처음으로 죽음의 압박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똑똑히 느꼈다.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그를 보호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5분 동안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탕탕탕!”하구천이 도랑을 타고 기어 나올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을 때 총소리가 울렸다.곧이어 원래도 견고하지 않았던 시멘트 판이 진동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하구천의 안색은 더욱 흙빛이 되었고 한껏 움츠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가 지금처럼 진흙탕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이것은 하구천의 일생일대 가장 큰 수치였다.이를 악물며 눈썹을 찡그리던 하구천은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이 저격수는 왜 이런 쓸모없는 저격을 할까?그가 지금 숨어 있는 곳은 절대적인 사각지대였다.상대방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만 단기간에 그를 어찌할 수는 없다.일반적으로 그의 옆에 있는 시멘트 벽은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단단한 생명의 부적이었다.그러나 순간 하구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상대방의 사격에 시멘트 벽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렸다.“제기랄!”순간 시멘트 벽이 흔들리며 떨어졌고 하구천을 향해 덮치려 하고 있었다.“개자식!”하구천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왔다.무너지는 시멘트 벽을 피해 밖으로 나온 하구천을 맞이한 것은 오싹한 죽음의 공포였다.죽음의 그림자가 그에게 다가와 끊임없이 위험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탕탕탕!”총알이 빗발쳤다.하구천은 그 자리에서 굴렀다.위험한 상황에서 그는 극적으로 총알 세 발을 피했다.지하실에서의 폭격과 빗발치는 총알 속에 하구천의 전투력은 이미 반쯤은 상실한 상태였다.원래의 그였다면 이 포탄 속에서도 어떻게든 역추격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고 무슨 생각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는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
항성 마리아 병원.급히 달려온 하백진은 수술 중인 하구천을 기다리며 이를 갈았다.“개자식! 그 혼혈 여자가 감히 우리 구천이를 함정에 몰아넣다니!”“죽여 버릴 거야!”“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거야!”하백진은 하구천이 넷째 공주의 계략에 말려들어 이걸윤마저 목숨을 잃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서로에게 유리해 보이는 단 한 번의 동맹도 결국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죽음의 함정이 될 수 있다.하구천의 측근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구천도 거의 죽을 뻔했다.오매도관 사람들이 제일 먼저 현장에 오지 않았더라면 하구천은 수년간 공들이기만 하다가 하루아침에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것이다.상대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 지금 하백진에겐 분노가 더 앞섰다.“하현 이 개자식! 하수진 이 나쁜 년! 그들이 다른 사람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면 넷째 공주도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함부로 움직이진 않았을 거야!”“개 같은 연놈들! 다 죽여 버릴 거야!”“이봐, 중병들을 소집해! 하현 그 개자식에게 피맺힌 원한을 꼭 되갚아 주어야겠어!”하백진이 이를 갈며 병력을 동원하고 있을 때였다.드디어 수술실 문이 ‘찰칵'하고 열렸다.“고모, 흥분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휠체어에 앉은 하구천을 몇몇 측근들이 밀고 나왔다.그는 다소 초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우린 하현과 하수진에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그 두 연놈이 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게 문제죠.”“잊으시면 안 돼요. 지금 하현은 문주의 가장 귀한 손님이고 하수진은 항도 재단 집행총재라는 걸 말이에요.”“둘 다 항도 하 씨 가문의 핵심 권력에 들어 있는 인물이죠.”“아무런 확실한 증거도 없이 사람을 잡으려고 하면 결국 하구봉처럼 자기 등골만 부러지게 될 거예요.”방금 죽을 고비를 넘긴 그였다.비록 수술 때문에 방금 마취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오히려 지금 그의 머릿속
하구천의 얼굴에 원망의 빛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그는 설마 이대로 끝나길 원하는 걸까?절대!그는 절대로 이대로 끝나길 원하지 않는다!하지만 문제는 그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증거도 없이 움직이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역습을 당할 수가 있다.다들 신중한 여우들이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도 많다.하백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녀의 마음은 깊은 원망과 독기로 가득 들어찼고 절대로 이대로 화를 삼키며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하구천의 말처럼 지금 섣불리 하현과 넷째 공주를 찾아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오히려 괜한 문제를 일으키는 꼴이 될 수도 있다.이런 일은 단순히 이치로만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까딱하다가는 상대방에게 역습을 맞아 곤혹을 치를 수도 있는 것이다.닭 한 마리 훔치려다가 손에 있는 쌀 한 줌마저 잃을 수도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백진은 가슴속에 들끓었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고 서서히 냉정을 찾아갔다.“설마 이 일을 정말 이대로 넘어갈 거야?”“넌 죽을 뻔했다구!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하구천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모, 이 일이 전부 쓸모없는 일이 된 건 아니에요. 지금 병원 안팎은 모두 우리 사람들이잖아요.”“난 지금 병원에 누워 무고한 피해자인 척해야 해요.”“그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고 외세를 현혹시킬 수 있죠.”“또 한편으로는 동정을 얻어 불쌍한 피해자의 탈을 쓸 수 있는 거예요. 우린 그 카드를 아주 잘 쓰면 되는 거구요.”“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이런 거 아닌가요?”“하루에 세 번 위독하다는 소식을 노부인에게 알린다면 노부인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우리가 일을 저질러 큰 손실을 입고 남에게 빌미를 주긴 했지만 그 일로 노부인은 노발대발하시며 우리 쪽에 동정을 일으키지 않을까요?”“우리는 그 여세를 몰아 기세를 잡는 거예요.”“대구 엔터테인먼트
”참, 고모. 나 대신 후한 선물을 골라 오매도관에 좀 보내주세요.”하구천의 눈빛이 뜨거워졌다.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이는 것 같았다.“이번 일 외에도 그동안 오매도관의 몇 가지 일들을 틀어쥐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툭툭 털고 신세도 좀 갚으려고요.”“오매도관께 나 하구천이 목숨을 구해 주신 성녀의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좀 전해주세요.”“오매도관은 강남 지역의 영원한 무학 성지예요.”“누구도 그들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어요!”하백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한눈에 하구천의 마음을 알아챈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구천아, 걱정하지 마.”“오매도관은 늘 너의 든든한 후원자 중 하나였어.”“설령 얼굴을 숙이고 찾아가더라도 난 오매도관이 계속해서 너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되도록 할 수 있어.”하백진은 온화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하구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을 솟구쳤다.“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현실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해.”“오매도관의 다른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괜찮아.”“하지만 성녀 사비선한테는 절대 관심을 가지지 마.”“그녀는 오매도관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사람이야. 오매도관 관장도 항상 관심을 쏟는 사람이라고.”“그녀는 훗날 후계자가 될 사람이니까.”“그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오매도관의 뿌리를 흔들려는 것과도 같아.”“오매도관 관장이 알면 널 죽이려고 들 거야.”“그렇게 되면 너의 가장 큰 후원자와 끈끈한 동맹을 잃게 되는 거야. 큰 적이 하나 더 생기는 거라고.”하백진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녀는 마음이 아팠지만 하구천이 불가능한 마음을 접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하구천은 한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하신 점은 잘 알아들을게요.”“난 그저 성녀에게 존경의 마음만 있을 뿐 다른 뜻은 없어요...”“성녀는 너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는 사람이야. 후원자이기도 하고 널
하백진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하구천이 입을 열었다.“고모, 당분간은 그런 먼 훗날 얘기는 하지 마세요.”“우선 눈앞의 골칫거리부터 해결하자고요.”“제대로 상석을 차지하지 않으면 항도 하 씨 가문 문주가 될 수 없어요.”“부마 자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자, 우선 우리가 퍼뜨려야 할 소문들을 하나씩 내보내죠...”하백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하구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이해한 눈치였다.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여세를 몰아 노부인의 생신날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이다.노부인을 화나게 하든 마음을 아프게 하든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뭐든 다 상관없었다....하백진과 하구천이 여생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짜는 데 고심하던 그 시각, 하현은 최문성에게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대장님, 넷째 공주가 하구천을 건드린 모양입니다.”“또한 항성과 도성에 비밀요원들을 풀어 많은 일들을 폭로했습니다.”“누나가 이미 사람을 보내 그쪽을 조사하고 있습니다.”“곧 항성과 도성에서 노국과 내통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최문성이 그동안의 일들을 보고했다.총교관은 비록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말 그대로 앉아서 모든 판세를 뒤집은 것이다.영상 하나와 사진 몇 장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런셀의 무리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어 자발적으로 수면 위로 나오게 했다.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항성과 도성에서 넷째 공주로 대표되는 노국의 세력은 하구천과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다.하구천도 큰 타격을 입었다.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위신도, 역량도, 지위도 모든 면에서 연쇄 타격을 입은 것이다.간단히 말해서 하현은 간단한 계략으로 천군만마보다 더한 것을 얻었다.“아쉽게도 하구천은 죽지 않았어.”하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하지만 그 역시 전신급의 역량을 가진 사람이야. 어쨌든 전장을 누빈 사람이니까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정말 하구천도 보통 사람은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하현은 희미한 눈빛으로 눈꼬리를 가늘게 할 뿐 얼굴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잠시 후 그는 웃으며 말했다.“항도 하 씨 가문의 노부인은 젊었을 때 무자비한 분이라고 들었어.”“당시 항성과 도성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모두 그녀에 의해 제압당했어. 들판에 시체가 널리고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다고 했어...”“그런 일이 있긴 했었죠”최문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해묵은 옛날 일입니다. 그때의 일은 항도 하 씨 가문 문주가 오래전에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지금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저 전설로 전해질 뿐이죠.”“하지만 항도 하 씨 가문은 어마어마한 집안입니다.”“하구천이 고육지책으로 노부인을 등장시킨다면 아마 하수진 아가씨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겁니다.”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뭐가 두려워? 노부인의 생신을 망치려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야. 우린 선량한 시민이야.”“잊었어? 동리아가 나한테 시민 표창을 하나 빚지고 있다는 걸!”“하지만 노부인이 나선다면 우리도 넷째 공주를 도와야 하지 않겠어?”“만약 넷째 공주가 노부인을 이길 수 없다면 우린 골치 아프게 될 거야...”여기까지 말한 하현은 말머리를 돌려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우리 금의환향한 이 소주는 어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어?”“난 그가 등판해서 넷째 공주를 도와 변방을 일구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말이야.”최문성은 하현의 말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분부하신 대로 에어컨이 켜져 있는 방에 48시간 가둬두었습니다.”“사향 커피를 한 시간마다 갈아주는 것 외에 찬물로 두 시간에 한 번씩 잠을 깨우고 있습니다.”“에어컨은 최대 풍속으로 틀어 놓았습니다.”“거칠고 포악했던 전신이 지금 이렇게 사람 같지 않은 몰골로 초췌해졌다는 게 믿기 어려울 뿐입니다...”“얼마 안 걸릴 것 같습니다. 이 전신이 곧 바지에 오줌을 싸는 일도요...”“좋아.”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
”찰깍.”에어컨실 문이 발에 걷어차여 힘없이 열렸다.하현은 따뜻한 후드티를 입고 보이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하현은 식탁에 아무렇게나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에 있는 이걸윤을 바라보았다.하현이 나타난 것을 본 순간 이걸윤의 눈가에 원망과 독기가 가득 번뜩였다.하지만 곧 원망과 독기는 사라졌고 전신의 눈에는 전의가 사라졌다.요 며칠 동안 그는 계속 한숨도 못 자고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처음에는 강한 의지력과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텼다.하지만 가벼운 최면과 심리적 암시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전신급의 정신력도 오래가지 못했다.이걸윤의 지금 모습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만약 그가 최면을 반복해서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하 씨, 원하는 게 뭐야?”그의 의지는 무너져 내렸지만 그는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숨결과도 같았다.하현은 담담하게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소주, 잘 지냈어? 하루 못 본 것이 마치 3년 같군그래!”“당신 말이야. 왜 이런 고생을 하고 그래, 응?”“그때 바로 하구천의 이마에 총을 쏴 버렸으면 좋았잖아.”“당신이 해외로 망명했다고 해서 이 지경이 될 필요는 없는 거 아냐? 응?”하현은 앞으로 천천히 나와 오른손으로 이걸윤의 얼굴을 두드리며 그의 얼굴에 찻물을 부었다.찻물에 흠칫 놀란 그는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메마른 그의 입술은 촉촉한 찻물에 반응했다.그는 필사적으로 혀를 내밀어 핥으려 했다.그러나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현이 웃는 듯 마는 듯 야릇한 표정을 짓자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어졌다.지금 자신이 보인 행동 때문에 이미 하현 앞에서 자신의 모든 존엄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한동안 굳어 있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현,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