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원진은 연승혁과 꽤나 깊은 인연이 있나 보네. 지금 모두가 연씨 가문의 회사를 인수하려고 난리인데, 연승혁과 얽혀 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말이야.’온시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떠보는 듯 물었다.“설마 연승혁을 대신해 복수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상, 연승혁이 확실히 무슨 일을 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원진은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어딘가로 멍한 시선을 보냈다.“그건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한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각오하지. 다만 궁금할 뿐이야. 그 녀석이 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말이야. 연승혁은 항상 신중했던 사람이잖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노렸지만, 단 한 번 기회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어.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온시환은 공지민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답했다.“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겠지...”원진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어쨌든 축하해!”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온시환은 요즘 연씨 가문의 재산을 하나둘씩 인수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공지민 곁에 머물렀다.연정아의 판결은 이미 사형, 즉시 집행으로 확정되어 있었기에 집행일이 다가오자, 온시환은 공지민의 감정 상태를 염려하며 그녀를 웃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그러던 어느 날, 공지민이 뜻밖의 부탁을 했다.“연정아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할 방법이 없을까?”사형 집행은 외부인의 참관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정부 차량을 따라야 하는 만큼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하지만 공지민이 처음으로 부탁한 일이었기에 온시환은 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주혁은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었던 터라 단 10분 만에 공지민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공지민이 차를 타고 떠나
온시환은 공지민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통화 중이던 전화를 내팽개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공지민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고열에 휩싸여 있었다.게다가 의사는 그녀의 체온이 이미 40도를 넘어섰다고 경고했다.“열이 더 내려가지 않으면 뇌에 손상이 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셔야 합니다.”그 말에 온시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손등에 키스를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그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열병 속에 갇혀 있었다.온시환의 마음속은 분노와 절망으로 뒤엉켰다.‘가겠다고 해서 보내줬더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죽어도 상관없다며 그렇게 태연하던 사람이 도대체 왜 이렇게 불쌍한 꼴을 하는 거냐고!’그녀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온시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의사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열을 내리려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공지민은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온시환은 병상 곁에서 하루 종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웃음을 유발하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내려갈 줄 몰랐다.결국 의사는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조언했다.그 말에 온시환은 이성을 잃고 병실의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무슨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고작 열 때문인데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냐고요! 당장 최고로 실력 있는 의사를 불러와요!”분노를 쏟아낸 뒤, 그는 다시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속삭였다.“공지민, 제발 깨어나. 너는 죽으면 안 돼. 제발 일어나 줘.”의사들은 온시환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며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승제는 서주혁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왔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에, 눈은 공
공지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연정아가 총살당하던 순간과, 자신이 연승혁을 총으로 쏘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구은우가 저세상에서 내가 이런 방식으로 복수한 걸 알면, 분명 나를 비웃겠지. 얼마나 비참하냐고.’공지민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눈물로 변하며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계단 위에 앉아 멀리 펼쳐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래전, 그녀는 구은우를 위해 작은 나무를 심었다.그 나무 곁에는 구은우가 그녀에게 건넸던 소중한 물건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그녀는 너무 아파서, 너무 두려워서,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찾지 못했다.그 나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다운 꽃들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오늘은 문득,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그곳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던 그곳의 무덤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었다.그 안에는 썩은 야생개의 사체가 놓여 있었고, 피와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공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나 관 안의 것은 분명히 썩은 야생개의 사체였다.‘이 무덤은 나만 아는 곳인데... 그리고 이곳에 온 적도 거의 없는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그녀는 무덤 위에 놓인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했다.돌로 눌려 있던 쪽지는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며 일부러 남겨둔 것이 분명했다.쪽지를 집어 든 순간, 공지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쪽지에 쓰인 필체는 그녀가 잘 아는 글씨, 바로 연승혁의 글씨였다.[지민아, 선물은 마음에 들어?]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손에 쥔 쪽지를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피가 흘렀다.‘연승혁이... 죽지 않았다고?’공지민은
공지민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며 피 묻은 입술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연승혁, 너는 구은우의 발바닥만큼의 가치도 없는 존재야.”“닥쳐!”연승혁은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공지민의 양쪽 뺨은 이미 부어올라 흉측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로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침을 뱉었더니, 침에서도 피 맛이 느껴졌다.연승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를 몰았다.공지민은 수갑에 묶인 채로 타오르는 뺨의 고통에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대체 왜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지?’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통해 그녀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연승혁이 이미 제원에 잠깐 돌아가 연씨 가문을 조사하러 온 정부 관계자 몇 명을 살해한 뒤 모든 현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식이었다.지금 그는 해외로 도피하면 다시는 국내로 돌아올 수 없겠지만, 그만큼의 재산이면 해외에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씨 가문의 후계자가 이제 뉴스에 나오는 도망자가 됐네? 참 불쌍하게 됐네. 전국 경찰들이 널 찾고 있겠지. 네가 사형 선고를 받지 않으면 국민들이 실망할 거야.”연승혁은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조롱이 그의 눈빛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결국 달리던 차는 어느 한적한 곳에 멈췄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승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연승혁은 공지민을 이들에게 넘기고 헬리콥터로 옮겼다.헬리콥터가 날아오르자, 연승혁은 안전벨트를 풀고 공지민을 출입문 쪽으로 밀쳤다.문이 열리며 찬바람과 함께 숨이 막힐 듯한 추위가 몰아쳤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무서워?”연승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비웃듯 웃었다.‘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그는 그녀를 다
연승혁은 옆에 놓여 있던 칼을 들어 별다른 경고도 없이 공지민의 팔에 있는 추적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칼날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추적기를 도려내는 과정은 잔인하고 서툴렀다.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고, 피는 그녀의 팔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비명을 삼켰다.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며칠 전 고열에 시달렸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겨우 버틸 뿐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대충 지혈제를 뿌리고, 그녀를 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그리고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제원에 있던 온시환은 추적기의 신호가 갑자기 끊긴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이미 연승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 관계자를 살해하고, 연씨 가문의 자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문도 그의 귀에 들어와 있었다.‘공지민이 연승혁에게 끌려갔나?’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연승혁이 그녀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공지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을 테니까.’온시환은 곧바로 추적기가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깊은 산림 지대로 향했다.경찰도 이미 그 지역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연승혁은 1급 지명수배자로, 그의 출국을 막기 위해 전국이 비상 상태였다.깊은 산속, 경찰은 헬리콥터와 1,000명이 넘는 인력을 투입해 그 지역을 수색하고 있었다.온시환도 경찰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 하늘과 땅 사이에 그물을 치고 연승혁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는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제발, 제발 연승혁을 자극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자식은 이미 미쳤으니까. 정부 관계자도 죽였는데, 공지민을 해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산속의 수색은 3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온시환은 흙투성이가 된 바지와 신발, 피로에 절은 몸으로 움직였다. 그는
수천 명의 경찰이 산림을 완전히 포위하고 며칠째 수색을 이어갔지만, 연승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가 이미 이 지역에 지하통로를 준비해 두고 몰래 출국하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왔다.하지만 이 넓은 산림에서 지하통로를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반승제와 서주혁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수색에 참여한 경찰들에게 온시환의 위치를 물었고, 가까스로 그를 찾아갔을 때 온시환은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그의 신발은 진흙으로 뒤덮여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고, 온몸은 진창에 범벅이 되어 처참한 모습이었다.“시환아.”반승제가 그를 불렀지만, 온시환은 마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반응하지 않았다.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고, 또렷한 발소리가 들리고서야 반승제와 서주혁이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다.서주혁은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모습은 그들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이런 모습의 온시환을 본 적이 있었다.반승제는 깊은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 못 찾았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온시환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조급하지 않을 수 있나. 연승혁 같은 인간이 공지민을 그냥 놔둘 리가 없잖아.’그의 머릿속은 최악의 상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이 이미 어딘가에 묻혔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지금 어딘가에서 내가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그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애썼다.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조차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그제야 그는 반승제가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사랑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한 거야. 한 사람이 내리치고, 또 한 사람이 기꺼이 그걸 받아들여야만 이어지는 관계니까.’고개를 숙이자, 눈이 시큰해졌지만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몸은 불편했고, 세상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한편, 공지민의 손목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연승혁의 손목에 수갑으로 묶여 연결되어 있었다.그녀의 팔에서 추적기를 제거한 상처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예전 같았다면, 연승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슴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아프지?”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고의로 손을 들어 그녀의 상처 부위를 세게 눌렀다.공지민의 이마에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그녀의 부어오른 뺨에는 뚜렷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승혁은 두 차례나 그녀의 얼굴을 전력으로 때렸고, 그의 힘은 보통 남성보다 훨씬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민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연승혁은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공지민은 억지로 몇 걸음 더 걸어야 했고 때로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연승혁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갔다. 그는 그녀를 철저히 짓밟고 싶어 했다.그녀의 뼈 하나하나를 부수고, 가슴속을 도려내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검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었다.그들은 숨겨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바위를 밀어 통로를 열었다.바위 아래에는 깊숙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공지민은 통로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발로 땅에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연승혁은 재빠르게 눈치채고 그녀를 세게 끌어안으며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그는 차갑게 속삭였다.“공지민, 지금 나를 더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잘 알 텐데? 너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도 몰라.”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죽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널 철저히 망가뜨릴 방법은 많아.”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네가 목숨 따윈 잃어도 상관없다며? 좋아. 그렇다면 내가 구은
연승혁을 구해준 젊은 여의사는 연승혁의 얼굴을 힐끗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여자분, 정말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가슴이 저려요.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르겠네요.”하지만 그녀는 연승혁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비웃었다.‘공지민... 공지민...’그는 그 이름을 당장이라도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여의사는 그의 상처를 다시 점검하며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살아난 건 기적이에요. 총상이 심장을 빗나간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심장이 일반인과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도대체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가요? 정말 원수 같은 관계였던 거예요?”연승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칠간 이어진 고열로 그의 몸은 기운이 빠져있었고, 근육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 무력했다.의사는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바다에서 발견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어요. 이 지역엔 상어가 많기로 유명한데, 상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신기했죠. 잠시만 기다리면 죽 한 그릇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연승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고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여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연승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는 내가 있던 섬이 아니야. 아마 근처 다른 섬일 거야. 내 부하들은 원래 섬에 남아 있겠지? 그런데 공지민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그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빨리 부하들과 연락해서 공지민을 붙잡아야 해. 그녀를 내 손에 넣고 천천히, 철저히 갚아줄 거야.’연승혁은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지민을 짓밟고 복수하는 것이었다.그는 온몸의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연승혁을 구해준 젊은 여의사는 연승혁의 얼굴을 힐끗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여자분, 정말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가슴이 저려요.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르겠네요.”하지만 그녀는 연승혁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비웃었다.‘공지민... 공지민...’그는 그 이름을 당장이라도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여의사는 그의 상처를 다시 점검하며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살아난 건 기적이에요. 총상이 심장을 빗나간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심장이 일반인과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도대체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가요? 정말 원수 같은 관계였던 거예요?”연승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칠간 이어진 고열로 그의 몸은 기운이 빠져있었고, 근육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 무력했다.의사는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바다에서 발견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어요. 이 지역엔 상어가 많기로 유명한데, 상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신기했죠. 잠시만 기다리면 죽 한 그릇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연승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고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여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연승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는 내가 있던 섬이 아니야. 아마 근처 다른 섬일 거야. 내 부하들은 원래 섬에 남아 있겠지? 그런데 공지민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그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빨리 부하들과 연락해서 공지민을 붙잡아야 해. 그녀를 내 손에 넣고 천천히, 철저히 갚아줄 거야.’연승혁은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지민을 짓밟고 복수하는 것이었다.그는 온몸의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한편, 공지민의 손목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연승혁의 손목에 수갑으로 묶여 연결되어 있었다.그녀의 팔에서 추적기를 제거한 상처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예전 같았다면, 연승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슴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아프지?”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고의로 손을 들어 그녀의 상처 부위를 세게 눌렀다.공지민의 이마에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그녀의 부어오른 뺨에는 뚜렷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승혁은 두 차례나 그녀의 얼굴을 전력으로 때렸고, 그의 힘은 보통 남성보다 훨씬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민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연승혁은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공지민은 억지로 몇 걸음 더 걸어야 했고 때로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연승혁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갔다. 그는 그녀를 철저히 짓밟고 싶어 했다.그녀의 뼈 하나하나를 부수고, 가슴속을 도려내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검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었다.그들은 숨겨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바위를 밀어 통로를 열었다.바위 아래에는 깊숙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공지민은 통로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발로 땅에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연승혁은 재빠르게 눈치채고 그녀를 세게 끌어안으며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그는 차갑게 속삭였다.“공지민, 지금 나를 더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잘 알 텐데? 너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도 몰라.”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죽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널 철저히 망가뜨릴 방법은 많아.”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네가 목숨 따윈 잃어도 상관없다며? 좋아. 그렇다면 내가 구은
수천 명의 경찰이 산림을 완전히 포위하고 며칠째 수색을 이어갔지만, 연승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가 이미 이 지역에 지하통로를 준비해 두고 몰래 출국하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왔다.하지만 이 넓은 산림에서 지하통로를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반승제와 서주혁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수색에 참여한 경찰들에게 온시환의 위치를 물었고, 가까스로 그를 찾아갔을 때 온시환은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그의 신발은 진흙으로 뒤덮여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고, 온몸은 진창에 범벅이 되어 처참한 모습이었다.“시환아.”반승제가 그를 불렀지만, 온시환은 마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반응하지 않았다.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고, 또렷한 발소리가 들리고서야 반승제와 서주혁이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다.서주혁은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모습은 그들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이런 모습의 온시환을 본 적이 있었다.반승제는 깊은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 못 찾았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온시환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조급하지 않을 수 있나. 연승혁 같은 인간이 공지민을 그냥 놔둘 리가 없잖아.’그의 머릿속은 최악의 상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이 이미 어딘가에 묻혔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지금 어딘가에서 내가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그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애썼다.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조차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그제야 그는 반승제가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사랑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한 거야. 한 사람이 내리치고, 또 한 사람이 기꺼이 그걸 받아들여야만 이어지는 관계니까.’고개를 숙이자, 눈이 시큰해졌지만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몸은 불편했고, 세상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연승혁은 옆에 놓여 있던 칼을 들어 별다른 경고도 없이 공지민의 팔에 있는 추적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칼날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추적기를 도려내는 과정은 잔인하고 서툴렀다.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고, 피는 그녀의 팔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비명을 삼켰다.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며칠 전 고열에 시달렸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겨우 버틸 뿐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대충 지혈제를 뿌리고, 그녀를 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그리고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제원에 있던 온시환은 추적기의 신호가 갑자기 끊긴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이미 연승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 관계자를 살해하고, 연씨 가문의 자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문도 그의 귀에 들어와 있었다.‘공지민이 연승혁에게 끌려갔나?’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연승혁이 그녀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공지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을 테니까.’온시환은 곧바로 추적기가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깊은 산림 지대로 향했다.경찰도 이미 그 지역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연승혁은 1급 지명수배자로, 그의 출국을 막기 위해 전국이 비상 상태였다.깊은 산속, 경찰은 헬리콥터와 1,000명이 넘는 인력을 투입해 그 지역을 수색하고 있었다.온시환도 경찰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 하늘과 땅 사이에 그물을 치고 연승혁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는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제발, 제발 연승혁을 자극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자식은 이미 미쳤으니까. 정부 관계자도 죽였는데, 공지민을 해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산속의 수색은 3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온시환은 흙투성이가 된 바지와 신발, 피로에 절은 몸으로 움직였다. 그는
공지민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며 피 묻은 입술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연승혁, 너는 구은우의 발바닥만큼의 가치도 없는 존재야.”“닥쳐!”연승혁은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공지민의 양쪽 뺨은 이미 부어올라 흉측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로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침을 뱉었더니, 침에서도 피 맛이 느껴졌다.연승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를 몰았다.공지민은 수갑에 묶인 채로 타오르는 뺨의 고통에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대체 왜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지?’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통해 그녀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연승혁이 이미 제원에 잠깐 돌아가 연씨 가문을 조사하러 온 정부 관계자 몇 명을 살해한 뒤 모든 현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식이었다.지금 그는 해외로 도피하면 다시는 국내로 돌아올 수 없겠지만, 그만큼의 재산이면 해외에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씨 가문의 후계자가 이제 뉴스에 나오는 도망자가 됐네? 참 불쌍하게 됐네. 전국 경찰들이 널 찾고 있겠지. 네가 사형 선고를 받지 않으면 국민들이 실망할 거야.”연승혁은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조롱이 그의 눈빛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결국 달리던 차는 어느 한적한 곳에 멈췄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승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연승혁은 공지민을 이들에게 넘기고 헬리콥터로 옮겼다.헬리콥터가 날아오르자, 연승혁은 안전벨트를 풀고 공지민을 출입문 쪽으로 밀쳤다.문이 열리며 찬바람과 함께 숨이 막힐 듯한 추위가 몰아쳤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무서워?”연승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비웃듯 웃었다.‘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그는 그녀를 다
공지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연정아가 총살당하던 순간과, 자신이 연승혁을 총으로 쏘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구은우가 저세상에서 내가 이런 방식으로 복수한 걸 알면, 분명 나를 비웃겠지. 얼마나 비참하냐고.’공지민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눈물로 변하며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계단 위에 앉아 멀리 펼쳐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래전, 그녀는 구은우를 위해 작은 나무를 심었다.그 나무 곁에는 구은우가 그녀에게 건넸던 소중한 물건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그녀는 너무 아파서, 너무 두려워서,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찾지 못했다.그 나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다운 꽃들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오늘은 문득,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그곳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던 그곳의 무덤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었다.그 안에는 썩은 야생개의 사체가 놓여 있었고, 피와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공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나 관 안의 것은 분명히 썩은 야생개의 사체였다.‘이 무덤은 나만 아는 곳인데... 그리고 이곳에 온 적도 거의 없는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그녀는 무덤 위에 놓인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했다.돌로 눌려 있던 쪽지는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며 일부러 남겨둔 것이 분명했다.쪽지를 집어 든 순간, 공지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쪽지에 쓰인 필체는 그녀가 잘 아는 글씨, 바로 연승혁의 글씨였다.[지민아, 선물은 마음에 들어?]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손에 쥔 쪽지를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피가 흘렀다.‘연승혁이... 죽지 않았다고?’공지민은
온시환은 공지민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통화 중이던 전화를 내팽개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공지민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고열에 휩싸여 있었다.게다가 의사는 그녀의 체온이 이미 40도를 넘어섰다고 경고했다.“열이 더 내려가지 않으면 뇌에 손상이 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셔야 합니다.”그 말에 온시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손등에 키스를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그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열병 속에 갇혀 있었다.온시환의 마음속은 분노와 절망으로 뒤엉켰다.‘가겠다고 해서 보내줬더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죽어도 상관없다며 그렇게 태연하던 사람이 도대체 왜 이렇게 불쌍한 꼴을 하는 거냐고!’그녀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온시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의사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열을 내리려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공지민은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온시환은 병상 곁에서 하루 종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웃음을 유발하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내려갈 줄 몰랐다.결국 의사는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조언했다.그 말에 온시환은 이성을 잃고 병실의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무슨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고작 열 때문인데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냐고요! 당장 최고로 실력 있는 의사를 불러와요!”분노를 쏟아낸 뒤, 그는 다시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속삭였다.“공지민, 제발 깨어나. 너는 죽으면 안 돼. 제발 일어나 줘.”의사들은 온시환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며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승제는 서주혁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왔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에, 눈은 공
온시환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원진은 연승혁과 꽤나 깊은 인연이 있나 보네. 지금 모두가 연씨 가문의 회사를 인수하려고 난리인데, 연승혁과 얽혀 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말이야.’온시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떠보는 듯 물었다.“설마 연승혁을 대신해 복수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상, 연승혁이 확실히 무슨 일을 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원진은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어딘가로 멍한 시선을 보냈다.“그건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한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각오하지. 다만 궁금할 뿐이야. 그 녀석이 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말이야. 연승혁은 항상 신중했던 사람이잖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노렸지만, 단 한 번 기회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어.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온시환은 공지민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답했다.“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겠지...”원진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어쨌든 축하해!”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온시환은 요즘 연씨 가문의 재산을 하나둘씩 인수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공지민 곁에 머물렀다.연정아의 판결은 이미 사형, 즉시 집행으로 확정되어 있었기에 집행일이 다가오자, 온시환은 공지민의 감정 상태를 염려하며 그녀를 웃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그러던 어느 날, 공지민이 뜻밖의 부탁을 했다.“연정아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할 방법이 없을까?”사형 집행은 외부인의 참관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정부 차량을 따라야 하는 만큼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하지만 공지민이 처음으로 부탁한 일이었기에 온시환은 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주혁은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었던 터라 단 10분 만에 공지민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공지민이 차를 타고 떠나
안정숙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공지민의 이야기는 마치 그녀의 경험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지민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란 말이야?’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공지민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저도 그 소녀의 인생이 여기서 끝났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끔찍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죠.”공지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소녀의 고등학교 동창이 그녀를 찾아왔거든요. 동창은 소녀가 사실 재벌가의 숨겨진 핏줄, 유산 상속이 가능한 재벌가 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였죠.”공지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소녀는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동창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죠. 동창은 그녀에게 4억 원을 건네며 제원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리고 한 집에 머물게 했죠. 소녀는 자신이 정말로 대가문의 숨겨진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 가문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죠.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어요. 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었어요.”안정숙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공지민은 고개를 살짝 들며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그녀의 동생이 나쁜 여자에게 속아 제원으로 끌려왔어요. 그리고 교통사고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죠. 차에 치인 채로 몇 킬로미터나 끌려가 시신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어요.”안정숙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은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말을 계속했다.“소녀는 그 동창에게 이렇게 말했죠. 자신과 동생은 둘 다 피해자일 뿐이라고요. 그녀는 한때 동생을 미워했어요. 동생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진흙탕처럼 망가졌고 원하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낳아야 했으며 평생을 작은 마을에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동생이 죽자,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슬픔을 느꼈어요.”공지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안정숙을 바라보았다.“처음 떠오른 기억은 바로 자신이 힘들어 울고 있을 때, 부모님은 외면했지만 그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