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승혁을 구해준 젊은 여의사는 연승혁의 얼굴을 힐끗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여자분, 정말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가슴이 저려요.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르겠네요.”하지만 그녀는 연승혁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비웃었다.‘공지민... 공지민...’그는 그 이름을 당장이라도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여의사는 그의 상처를 다시 점검하며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살아난 건 기적이에요. 총상이 심장을 빗나간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심장이 일반인과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도대체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가요? 정말 원수 같은 관계였던 거예요?”연승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칠간 이어진 고열로 그의 몸은 기운이 빠져있었고, 근육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 무력했다.의사는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바다에서 발견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어요. 이 지역엔 상어가 많기로 유명한데, 상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신기했죠. 잠시만 기다리면 죽 한 그릇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연승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고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여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연승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는 내가 있던 섬이 아니야. 아마 근처 다른 섬일 거야. 내 부하들은 원래 섬에 남아 있겠지? 그런데 공지민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그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빨리 부하들과 연락해서 공지민을 붙잡아야 해. 그녀를 내 손에 넣고 천천히, 철저히 갚아줄 거야.’연승혁은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지민을 짓밟고 복수하는 것이었다.그는 온몸의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
반승제 근처의 아우라는 마치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가지.”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문라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단정한 태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반제승가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성혜인도 따라 멈춰서서는 덤덤하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너 임경헌한테서 얼마나 받았어?”성혜인은 임경헌과 반승제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반씨 일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니 이것도 당연하였다.반승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사장님 말로는 2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이 짓거리를 하는데 사장도 있어?”반승제는 진심으로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문라이트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을 임경헌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또 몰랐다.어찌 됐든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고민하기에는 늦었다.반승제는 다시 몸을 돌려 룸으로 걸어갔고 성혜인도 묵묵히 따라갔다.“임경헌 말로 너희가 부르는 값은 높지만,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했지?”성혜인은 그동안 많은 고객을 만나왔다. 대부분 사람이 다 부자라서 가격만큼은 충분하게 줬지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대답했다.“반승제 씨, 가격에 관해서는 충분히 서비스와 정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서비스와 정비례 한다라...’반승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면?”어색한 반응에 가만히 있을 줄밖에 모르던 성혜인에게는 서비스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수억 원을 주고 살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돈 벌기 참 쉬운 직종이군.’성혜인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제가 최
잠깐 놀란 건 사실이지만 성혜인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명절에도 반태승만 따로 만났기에 반씨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반제승 본인도 자신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 알 턱이 없었다.어두운 표정으로 떠난 반제승을 떠올리며 성혜인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승제 씨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예쁜 여자라면 직업이고 뭐고를 떠나 사족을 못 쓰는 임경헌은 물씬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럴 리가요. 혜인 씨의 디자인은 제가 본 것 중 최고였어요. 저희 사촌 형이 경영을 배우는 동시에 예술도 배웠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보아냈을 거예요. 오늘은 그냥 이혼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양한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반승제 씨가 결혼했다고요?”임경헌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진작에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혼하느라 변호사랑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에요.”임경헌은 성인이 되고 나서 흥청망청 노느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저 반승제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준 아내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결혼 얘기를 처음 들은 양한겸은 궁금한 듯 계속해서 물었다.“저는 네이처 빌리지의 펜션이 신혼집인 줄 알았어요. 만약 신혼집이 아니라면 혼자 사시는 집인가요?”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신혼집이기는 해요. 저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지금의 형수랑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이 집은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면 같이 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아요.”임경헌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혜인에게 주스를 건네줬다.“형이 곧 다시 온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 혜인 씨의 설계도를 보여주자고요. 형도 무조건좋아할 거예요.”성혜인은 주스를 받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제가 후에 꼭 밥 살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당당한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
“무슨 얘기?”반승제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앞으로 네 마음대로 이상한 여자 소개해 주지 마.”자신의 사촌 동생이 고객 중 한 명이라니, 반승제는 도저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런 것을 더 즐기는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금욕적인 생활을하는 반승제는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경헌이 밖에서 이상한 것을 배워왔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만간 잔소리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형, 진짜 안 올 거예요? 제가 형이랑 맞는 사람을 찾느라 한참 헤맸단 말이에요.”인테리어가 필요한 집이라면 임경헌에게도 몇 채 있었기에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형이 싫으면 제가 냉큼 데려갈 거예요. 저는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반승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 이제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BH그룹으로 와서 인턴부터 시작해. 네 어머니가 이미 나한테 다 얘기했어. 그러니 넌 내일부터 출근해,”반승제는 임경헌에게 반발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임경헌은 난감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성혜인은 바로 자신이 거절당했음을 알아차리고 위로했다.“괜찮아요. 반승제 씨가 따로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가 있나 보죠.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펜션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임경헌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그럴 리가 없는데... 저는 아직도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고 들었거든요.”성혜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거래도 인연을 따져요. 저랑 반승제 씨는 인연이 아닌가 보죠.”“제가 후에라도 다시 물어볼게요. 만약 형이 싫다고 하면 제집을 디자인해 줘요. 저는 혜인 씨의 스타일이 엄청 마음에 들었거든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임경헌은 또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제가 낼게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줄 수 있어요? 저희는 다음 날에 다시 만나요.”성혜인은 주저 없이 자신의 번
연승혁을 구해준 젊은 여의사는 연승혁의 얼굴을 힐끗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여자분, 정말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가슴이 저려요.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르겠네요.”하지만 그녀는 연승혁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비웃었다.‘공지민... 공지민...’그는 그 이름을 당장이라도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여의사는 그의 상처를 다시 점검하며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살아난 건 기적이에요. 총상이 심장을 빗나간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심장이 일반인과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도대체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가요? 정말 원수 같은 관계였던 거예요?”연승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칠간 이어진 고열로 그의 몸은 기운이 빠져있었고, 근육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 무력했다.의사는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바다에서 발견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어요. 이 지역엔 상어가 많기로 유명한데, 상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신기했죠. 잠시만 기다리면 죽 한 그릇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연승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고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여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연승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는 내가 있던 섬이 아니야. 아마 근처 다른 섬일 거야. 내 부하들은 원래 섬에 남아 있겠지? 그런데 공지민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그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빨리 부하들과 연락해서 공지민을 붙잡아야 해. 그녀를 내 손에 넣고 천천히, 철저히 갚아줄 거야.’연승혁은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지민을 짓밟고 복수하는 것이었다.그는 온몸의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한편, 공지민의 손목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연승혁의 손목에 수갑으로 묶여 연결되어 있었다.그녀의 팔에서 추적기를 제거한 상처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예전 같았다면, 연승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슴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아프지?”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고의로 손을 들어 그녀의 상처 부위를 세게 눌렀다.공지민의 이마에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그녀의 부어오른 뺨에는 뚜렷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승혁은 두 차례나 그녀의 얼굴을 전력으로 때렸고, 그의 힘은 보통 남성보다 훨씬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민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연승혁은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공지민은 억지로 몇 걸음 더 걸어야 했고 때로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연승혁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갔다. 그는 그녀를 철저히 짓밟고 싶어 했다.그녀의 뼈 하나하나를 부수고, 가슴속을 도려내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검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었다.그들은 숨겨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바위를 밀어 통로를 열었다.바위 아래에는 깊숙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공지민은 통로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발로 땅에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연승혁은 재빠르게 눈치채고 그녀를 세게 끌어안으며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그는 차갑게 속삭였다.“공지민, 지금 나를 더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잘 알 텐데? 너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도 몰라.”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죽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널 철저히 망가뜨릴 방법은 많아.”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네가 목숨 따윈 잃어도 상관없다며? 좋아. 그렇다면 내가 구은
수천 명의 경찰이 산림을 완전히 포위하고 며칠째 수색을 이어갔지만, 연승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가 이미 이 지역에 지하통로를 준비해 두고 몰래 출국하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왔다.하지만 이 넓은 산림에서 지하통로를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반승제와 서주혁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수색에 참여한 경찰들에게 온시환의 위치를 물었고, 가까스로 그를 찾아갔을 때 온시환은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그의 신발은 진흙으로 뒤덮여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고, 온몸은 진창에 범벅이 되어 처참한 모습이었다.“시환아.”반승제가 그를 불렀지만, 온시환은 마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반응하지 않았다.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고, 또렷한 발소리가 들리고서야 반승제와 서주혁이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다.서주혁은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모습은 그들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이런 모습의 온시환을 본 적이 있었다.반승제는 깊은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 못 찾았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온시환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조급하지 않을 수 있나. 연승혁 같은 인간이 공지민을 그냥 놔둘 리가 없잖아.’그의 머릿속은 최악의 상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이 이미 어딘가에 묻혔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지금 어딘가에서 내가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그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애썼다.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조차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그제야 그는 반승제가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사랑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한 거야. 한 사람이 내리치고, 또 한 사람이 기꺼이 그걸 받아들여야만 이어지는 관계니까.’고개를 숙이자, 눈이 시큰해졌지만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몸은 불편했고, 세상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연승혁은 옆에 놓여 있던 칼을 들어 별다른 경고도 없이 공지민의 팔에 있는 추적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칼날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추적기를 도려내는 과정은 잔인하고 서툴렀다.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고, 피는 그녀의 팔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비명을 삼켰다.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며칠 전 고열에 시달렸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겨우 버틸 뿐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대충 지혈제를 뿌리고, 그녀를 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그리고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제원에 있던 온시환은 추적기의 신호가 갑자기 끊긴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이미 연승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 관계자를 살해하고, 연씨 가문의 자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문도 그의 귀에 들어와 있었다.‘공지민이 연승혁에게 끌려갔나?’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연승혁이 그녀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공지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을 테니까.’온시환은 곧바로 추적기가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깊은 산림 지대로 향했다.경찰도 이미 그 지역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연승혁은 1급 지명수배자로, 그의 출국을 막기 위해 전국이 비상 상태였다.깊은 산속, 경찰은 헬리콥터와 1,000명이 넘는 인력을 투입해 그 지역을 수색하고 있었다.온시환도 경찰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 하늘과 땅 사이에 그물을 치고 연승혁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는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제발, 제발 연승혁을 자극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자식은 이미 미쳤으니까. 정부 관계자도 죽였는데, 공지민을 해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산속의 수색은 3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온시환은 흙투성이가 된 바지와 신발, 피로에 절은 몸으로 움직였다. 그는
공지민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며 피 묻은 입술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연승혁, 너는 구은우의 발바닥만큼의 가치도 없는 존재야.”“닥쳐!”연승혁은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공지민의 양쪽 뺨은 이미 부어올라 흉측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로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침을 뱉었더니, 침에서도 피 맛이 느껴졌다.연승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를 몰았다.공지민은 수갑에 묶인 채로 타오르는 뺨의 고통에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대체 왜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지?’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통해 그녀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연승혁이 이미 제원에 잠깐 돌아가 연씨 가문을 조사하러 온 정부 관계자 몇 명을 살해한 뒤 모든 현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식이었다.지금 그는 해외로 도피하면 다시는 국내로 돌아올 수 없겠지만, 그만큼의 재산이면 해외에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씨 가문의 후계자가 이제 뉴스에 나오는 도망자가 됐네? 참 불쌍하게 됐네. 전국 경찰들이 널 찾고 있겠지. 네가 사형 선고를 받지 않으면 국민들이 실망할 거야.”연승혁은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조롱이 그의 눈빛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공지민은 그의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결국 달리던 차는 어느 한적한 곳에 멈췄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승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연승혁은 공지민을 이들에게 넘기고 헬리콥터로 옮겼다.헬리콥터가 날아오르자, 연승혁은 안전벨트를 풀고 공지민을 출입문 쪽으로 밀쳤다.문이 열리며 찬바람과 함께 숨이 막힐 듯한 추위가 몰아쳤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무서워?”연승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비웃듯 웃었다.‘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그는 그녀를 다
공지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연정아가 총살당하던 순간과, 자신이 연승혁을 총으로 쏘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구은우가 저세상에서 내가 이런 방식으로 복수한 걸 알면, 분명 나를 비웃겠지. 얼마나 비참하냐고.’공지민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눈물로 변하며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계단 위에 앉아 멀리 펼쳐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래전, 그녀는 구은우를 위해 작은 나무를 심었다.그 나무 곁에는 구은우가 그녀에게 건넸던 소중한 물건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그녀는 너무 아파서, 너무 두려워서,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찾지 못했다.그 나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다운 꽃들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오늘은 문득,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그곳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던 그곳의 무덤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었다.그 안에는 썩은 야생개의 사체가 놓여 있었고, 피와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공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나 관 안의 것은 분명히 썩은 야생개의 사체였다.‘이 무덤은 나만 아는 곳인데... 그리고 이곳에 온 적도 거의 없는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그녀는 무덤 위에 놓인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했다.돌로 눌려 있던 쪽지는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며 일부러 남겨둔 것이 분명했다.쪽지를 집어 든 순간, 공지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쪽지에 쓰인 필체는 그녀가 잘 아는 글씨, 바로 연승혁의 글씨였다.[지민아, 선물은 마음에 들어?]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손에 쥔 쪽지를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피가 흘렀다.‘연승혁이... 죽지 않았다고?’공지민은
온시환은 공지민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통화 중이던 전화를 내팽개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공지민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고열에 휩싸여 있었다.게다가 의사는 그녀의 체온이 이미 40도를 넘어섰다고 경고했다.“열이 더 내려가지 않으면 뇌에 손상이 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셔야 합니다.”그 말에 온시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손등에 키스를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그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열병 속에 갇혀 있었다.온시환의 마음속은 분노와 절망으로 뒤엉켰다.‘가겠다고 해서 보내줬더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죽어도 상관없다며 그렇게 태연하던 사람이 도대체 왜 이렇게 불쌍한 꼴을 하는 거냐고!’그녀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온시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의사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열을 내리려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공지민은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온시환은 병상 곁에서 하루 종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웃음을 유발하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내려갈 줄 몰랐다.결국 의사는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조언했다.그 말에 온시환은 이성을 잃고 병실의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무슨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고작 열 때문인데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냐고요! 당장 최고로 실력 있는 의사를 불러와요!”분노를 쏟아낸 뒤, 그는 다시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속삭였다.“공지민, 제발 깨어나. 너는 죽으면 안 돼. 제발 일어나 줘.”의사들은 온시환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며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승제는 서주혁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왔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에, 눈은 공
온시환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원진은 연승혁과 꽤나 깊은 인연이 있나 보네. 지금 모두가 연씨 가문의 회사를 인수하려고 난리인데, 연승혁과 얽혀 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말이야.’온시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떠보는 듯 물었다.“설마 연승혁을 대신해 복수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상, 연승혁이 확실히 무슨 일을 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원진은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어딘가로 멍한 시선을 보냈다.“그건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한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각오하지. 다만 궁금할 뿐이야. 그 녀석이 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말이야. 연승혁은 항상 신중했던 사람이잖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노렸지만, 단 한 번 기회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어.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온시환은 공지민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답했다.“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겠지...”원진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어쨌든 축하해!”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온시환은 요즘 연씨 가문의 재산을 하나둘씩 인수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공지민 곁에 머물렀다.연정아의 판결은 이미 사형, 즉시 집행으로 확정되어 있었기에 집행일이 다가오자, 온시환은 공지민의 감정 상태를 염려하며 그녀를 웃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그러던 어느 날, 공지민이 뜻밖의 부탁을 했다.“연정아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할 방법이 없을까?”사형 집행은 외부인의 참관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정부 차량을 따라야 하는 만큼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하지만 공지민이 처음으로 부탁한 일이었기에 온시환은 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주혁은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었던 터라 단 10분 만에 공지민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공지민이 차를 타고 떠나
안정숙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공지민의 이야기는 마치 그녀의 경험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지민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란 말이야?’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공지민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저도 그 소녀의 인생이 여기서 끝났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끔찍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죠.”공지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소녀의 고등학교 동창이 그녀를 찾아왔거든요. 동창은 소녀가 사실 재벌가의 숨겨진 핏줄, 유산 상속이 가능한 재벌가 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였죠.”공지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소녀는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동창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죠. 동창은 그녀에게 4억 원을 건네며 제원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리고 한 집에 머물게 했죠. 소녀는 자신이 정말로 대가문의 숨겨진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 가문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죠.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어요. 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었어요.”안정숙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공지민은 고개를 살짝 들며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그녀의 동생이 나쁜 여자에게 속아 제원으로 끌려왔어요. 그리고 교통사고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죠. 차에 치인 채로 몇 킬로미터나 끌려가 시신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어요.”안정숙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은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말을 계속했다.“소녀는 그 동창에게 이렇게 말했죠. 자신과 동생은 둘 다 피해자일 뿐이라고요. 그녀는 한때 동생을 미워했어요. 동생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진흙탕처럼 망가졌고 원하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낳아야 했으며 평생을 작은 마을에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동생이 죽자,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슬픔을 느꼈어요.”공지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안정숙을 바라보았다.“처음 떠오른 기억은 바로 자신이 힘들어 울고 있을 때, 부모님은 외면했지만 그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