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
“뭐?”추지성이 어이없다는 듯 묻자 온시환은 긴 속눈썹을 떨구었다. 두 손은 컵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지민이 곁에 다른 사람이 생겼냐고?”추지성은 요즘 공지민에 대해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친구를 철저히 갖고 논 여자가 아닌가.“없어. 요즘 조연을 맡으려고 하는 것 같더라. 전에 소속사에서 퇴출당했잖아. 제대로 된 역할을 구할 수 없어서 3회 만에 죽는 조연 역할을 맡는 것 같던데.”“그래?”온시환의 대답은 느릿느릿했고 마치 누군가 그의 성대를 누르고 있는 듯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였다.‘설마 얘가 아직도 공지민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건가?’추지성이 한참 의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온시환이 입을 열었다.“네가 지금 촬영 중인 작품 있잖아. 거기 서브 주연 역할을 지민이한테 줘.”“뭐야 열이있는 것도 아닌데? 설마 진짜 미친 거야?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곧바로 온시환의 이마를 짚어본 추지성은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러자 온시환은 추지성의 손을 탁 쳐내며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컵을 응시했다.“예전에 누가 감히 너를 이렇게 가지고 놀았다면, 너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당하고도 네가 먼저 나서서 자원을 주겠다고? 좀 말이 되는 소리 해.”추지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의 말은 가차 없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너무 비굴해 보였다.온시환은 결코 이런 비굴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냥 좀 줘.”“싫어. 너 새로 준비 중인 작품도 있잖아. 그렇게 달래고 싶으면 아예 걔한테 주연을 맡기면 되잖아.”온시환의 눈가에 순간 씁쓸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내가 주면 지민이가 받지 않을 거야.”이제 그는 대체품조차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길거리의 한낱 행인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불쾌감을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특히 그녀의 첫사랑 사진을 발로 짓밟았던 일을 떠올리면 그녀는 아마 그를 철저히 증오할
또 하루를 그렇게 보낸 뒤 온시환은 이튿날에서야 제원으로 돌아왔다.휴대폰에는 수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은 요즘 왜 밖에 안 나가냐는 질문이었다. 몇몇은 그와 공지민의 관계를 묻기도 했다.공지민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온시환은 마음속에 분노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 메시지를 삭제했다. 공지민이라는 세 글자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깊은 밤 꿈에서 깨어나면 그 억울함은 온전히 그리움으로 변해 있었다.또다시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고통스럽게 딱딱해진 자신의 몸을 보며 휴대폰을 들어 공지민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 메시지는 경찰서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멈춰 있었다.그날 이후 공지민은 단 한 마디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그래. 점이 없어졌으니 이제 더는 첫사랑처럼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까 나를 신경 쓸 리가 없지.’온시환은 몸을 뒤척이며 마음이 쓰라린 것을 느꼈다.‘구은우가 대체 뭐가 좋다고. 고등학생 시절의 나도 엄청 대단했어. 나 역시 학년 1등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짝사랑 대상이었어. 그저 공지민이 그때 나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그랬다면 분명히 나에게 더 빠졌을 거야.’그는 혼자서 고등학생 시절의 구은우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신경 쓸수록 자신이 대체품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분노가 커질수록 그녀가 꿈에 자꾸 나타났다.온시환은 다시 몸을 뒤척이며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다음 날 아침, 그의 휴대폰에는 더 많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왜 요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는 질문들이었다.‘얼마나 오래됐지?’사실 그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시간이 흐릿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렇게 반달이 지나고 추지성이 직접 그를 집에서 찾아냈다.“시환아, 오늘 밤에는 나랑 술이나 한 잔하러 가자. 너 요즘 밖에 전혀 안 나가니까 사람들
차 안은 조용했다. 온시환이 간헐적으로 들이쉬는 숨소리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없었다.추지성은 몰래 차에서 내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서성거렸다.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의 상식을 벗어난 상황이었다.그들 무리에서 온시환은 항상 가장 자유로운 사람으로 통했다. 여자를 잊는 데 있어 누구보다 빠르고 확실한 사람이었다.전날 밤 그의 침대에서 내려온 여자의 얼굴을 다음 날이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게 온시환이었다.그야말로 진정한 바람둥이였다.그런데 지금 차 안에 웅크려 울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추지성은 혼란스러웠다. 여자가 그렇게 강력한 존재인가?이해할 수 없었다.반 시간쯤 흐른 후 온시환은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슬픔뿐만 아니라 후회도 함께 밀려들었다. 추지성에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들킨 것도 모자라 공지민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가다니.온시환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생애 가장 큰 망신을 오늘 모두 겪은 것 같았다.땅에 구멍이라도 생겨 그 안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차에서 10분을 더 버틴 후에야 그는 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추지성은 그의 부은 눈을 보자마자 다가왔다.“시환아, 좀 괜찮아졌어?”“응.”온시환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울어서인지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추지성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시환은 문을 열고 들어가다 말고 잠시 생각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오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추지성은 즉시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걱정 마. 이건 너랑 나랑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야.”온시환은 다시금 눈가가 시큰해지며 무력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시환아, 밥은 안 먹고 그냥 올라가?”추지성이 물었지만 온시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실로 들어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추지성은 함부로 따라 올라갈 수 없었다. 그
온시환은 기가차서 웃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경찰이 도착해 집 안을 둘러본 뒤 공지민에게 물었다.“신고하신 분이 맞으신가요?”“네, 제가 신고했어요. 불법 침입에 제 물건을 훼손했어요.”경찰은 곧 온시환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알아보는 눈치였다.온시환은 연예계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수많은 히트작을 내놓았고 인터뷰에도 자주 얼굴을 비췄으며 뛰어난 외모 덕분에 남자 배우들보다도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경찰은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시환 씨,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온시환은 그 순간 차분해진 표정으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점을 뺐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매정한 거지, 그렇지?”그의 목소리는 허공을 떠도는 듯했고 눈가에는 비웃음이 어렸다.공지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턱을 잡아 좌우로 흔들며 매정하게 말했다.“그래, 이제 정말 하나도 안 닮았네.”그 말은 칼처럼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온시환은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더는 말할 기력조차 없어진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경찰을 따라 걸어 나갔다.몇몇 경찰이 그를 데리고 떠났다. 공지민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의 엉망진창이 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온시환은 경찰차에 타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평생 막장 드라마를 써오면서 언젠가 자신이 그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대체품 취급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공지민, 네가 감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억울함과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추지성은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귀를 의심했다.‘시환이가 경찰서에 잡혀 있다니? 그리고 보석을 해줘야 한다고?’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차를 몰고 경찰서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