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오는 성혜인을 보고선 걱정스럽게 물었다.“회사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성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장 비서님은 당분간 출근하지 말고 병원에서 쉬어요. 전 돌아가서 샤워하고 바로 회사로 나가봐야겠어요.”“알겠습니다. 사장님도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괜찮아요.” 곧이어 성혜인은 병원을 나섰다.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녀는 포레스트로 돌아와 온몸을 뒤덮은 휘발유를 깨끗이 씻었다. 마치 배현우와의 하룻밤을 씻어내는 듯 사정없이 몸을 문질렀고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욕실을 떠나고서야 자기 피부가 빨갛게 물든 걸 발견했다.곧이어 아래층으로 내려온 성혜인은 쓴 커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고선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회사에서는 다음 달 목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고 그녀는 자정까지 서류를 보며 일에 전념했다.건물 밖의 네온사인들이 하나둘씩 켜지자, 그녀는 커피를 들고 창가로 다가가 창밖의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봤다.이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알고 보니 방송국에서 걸려 온 인터뷰 요청 전화였다.완곡하게 거절했으나 휴대전화 너머의 질문 폭격은 멈출 줄 몰랐다.“평생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계획입니까?”그 질문에 성혜인은 순간 얼어붙었다. 한때 인터넷에는 그녀가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심지어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의 스폰서라는 터무니없는 일이 사실인 양 널리 퍼졌다. S.M그룹이 현재 사정이 어려운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에 협력사 입장에서는 섣불리 배팅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이 시점에서 인터뷰한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뿐만 아니라 주가 상승도 가능하다.스스로를 상품으로, 그것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상품으로 홍보한다면 이 모든 게 쉬울지도 모른다.하지만 성혜인은 이런 인터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설사 참여한들 기자들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며 난처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설씨 가문에서
일에 모든 정력과 마음을 쏟게 되면서 성혜인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역시나 계획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은 실검에 오르게 되었다. 예전에 그녀는 장하리에게 마케팅 계정을 운영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느덧 그 계정에는 수백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성혜인이 온수빈을 버리고 반승제에게 고급 승용차와 다이아몬드 시계를 선물하며 애정 공세를 벌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케팅 계정에는 빠르게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반 대표님이 설마 명품 시계가 없겠어?][참 수준 떨어지는 여자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봐? 대표님은 왜 저런 여자를 가만두는 거지?][성혜인 사진 갖고 있는데 공유받고 싶은 분 대댓글 남겨줘요.]곧이어 사진 한 장이 베스트 댓글로 선정되었다.의외인 건 사진 속의 여자는 성혜인 본인이 맞았다.박시한 옷을 입고 있던 탓에 평소보다 훨씬 뚱뚱하게 찍혔는데 뒷모습만 보면 백 킬로가 넘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이런 사진을 찾아낸 네티즌들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이 사진 공개되자마자 순식간에 10만 명의 팔로워가 늘었고 하나같이 그녀를 조롱하려는 사람들이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크업팀을 찾아가 차분한 스타일로 꾸몄다.우선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눈에 띄게 화려해서는 안 됐고, 그룹의 대표라는 포스가 느껴지는 스타일로 단장했다.짙은 메이크업은 아니었지만, 두 시간이 걸렸다. 쌩얼처럼 보이는 꾸안꾸 컨셉이었는데 뭔가 청초해 보이면서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산뜻함이 묻어났다.성혜인은 미리 준비한 하얀색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시상식 현장으로 향했다.주최 측은 그녀를 위해 미리 의자를 준비해 두었고, 같은 시각 밖에 서는 연예인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었다.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성혜인은 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온수빈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성혜인의 이름이 붙어있는 의자를 보고 감격을 금치 못하던 온수빈은 깔끔한 슈트 차림의 그녀를 보고선 더욱이 어쩔 줄 몰라 했다.그는 마치 사랑을 막 배운 애송
업계에서 매우 중요한 시상식인 만큼 S.M그룹을 비롯한 많은 영화와 방송사 관계자들이 생방송으로 시청하고 있었다.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하리마저도 의사에게 TV를 켜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실시간으로 모든 걸 지켜보던 그녀는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혜인의 정성에 혀를 내둘렀다.최근에 많은 파트너와 협력사가 등을 돌렸으니 반드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강력한 임펙트가 있어야만 했다.장하리는 그녀의 희생에 감동받은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라 TV를 바라봤다.카메라가 S.M 소속 연예인을 비추는 순간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회사가 밑바닥일 때부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장하리는 소속 아티스트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회사가 앞으로 더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눈시울을 붉히며 TV를 보던 그녀는 노크 소리를 듣고서도 신경 쓰지 않았고, 간호사가 왔겠거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병실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들어왔다.그의 아우라에 압도된 장하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이불 밑에 감춘 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그녀는 주눅 든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당당한척하며 벽에 기대었으나 그 행동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남자는 그녀의 곁에 앉아 곁눈질로 힐끗 쳐다봤다.오가다 여러 번 만났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하리는 그를 볼 때마다 지레 겁을 먹더니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그렇게 한동안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어쩌다가 다친 거예요?”장하리는 남자가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상상이라도 되는 듯 흠칫 놀라더니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누군가 사장님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걸 막다가 한방 찔렸어요.”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흥미로운지 살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현실은 칼이 조금만 빗겨나갔다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심각했다.“충성심이 넘치네요.”장하리는 제원의 모든 사람이 성혜인을 멀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
반승제는 화면 속의 성혜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뺨이 따끔하게 아파졌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메시지였다.[성혜인 임신했지?]그 말은 순식간에 반승제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홧김에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으나 핸드폰 너머로는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반승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어디야?”상대방의 비웃는 소리와 함께 통화는 마무리되었다.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고, 곧바로 전화해 부하들에게 배현우의 위치를 알아내라고 명령했다.반승제는 짜증스럽게 목에 감은 넥타이를 풀고선 의자에 앉았다.그 후 생방송이 끝나자, 외투를 들고 BH 그룹을 나섰다.운전해서 스카이웨어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그곳에서 진세운을 마주쳤다.진세운은 워낙 바쁘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를 만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서주혁과 온시환이 없으니, 오늘은 진세운이 그의 술친구가 되어줬다.그렇게 서로 잔을 주고받다가 진세운이 물었다.“너 혜인 씨랑은 완전히 정리한 거야? 인아 씨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반승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의자에 기댔고 볼에 찍힌 손자국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맞아.”“어쩌다가?”그는 손을 들어 볼을 어루만지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빨리 취했다.“뭘 그런 걸 물어. 그냥 안 좋아해서 헤어진 거지.”“너 혜인 씨 안 좋아해?”진세운은 성혜인이 그를 좋아한다는 걸 확신했기에 자연스레 원인은 반승제에게 있다고 생각했다.“그럴 리가 없잖아.”“너 도박한 거 터졌을 때 혜인 씨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리고 혜인 씨가 너 때문에 애까지 잃었다며?”잔을 들려던 반승제의 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그 아이는... 내 잘못이 맞아. 내가 지키지 못했거든.”반승제는 잇달아 술을 마셨고 어느새 눈빛이 흐리멍덩하게 변했다.“단언컨대 혜인 씨는 너한테 진심이야. 너는 왜 혜인 씨가 널 좋아하지 않는
서주혁은 살아생전 이렇게 수치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반승제에게 이건 조각상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설명했지만, 그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그는 조각상과 함께 네이처 빌리지에 도착했고, 심지어 밤새 조각상을 품에 끌어안고 잠을 잤다.서주혁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그를 돌보고 싶지 않았고 진세운 또한 밤새 시달려 진이 빠졌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심인우에게 그를 부탁한 후 곧바로 자리를 떴다.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반승제는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듯 몸이 뻐근하고 불편했다.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딱딱한 돌덩이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내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는 조각상을 옆으로 던지더니 누군가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밤새 숨 막힐 정도로 짓눌렸으니, 암살이 아니면 뭐겠는가?반승제는 온몸이 쑤시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심 비서.”문을 지키고 있던 심인우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안으로 달려왔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이 조각상은 뭐죠?”“대표님이 어제 스카이웨어에서 만취한 후 이 조각상을 안은 채 돌아오셨습니다.”심인우는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 조각상을 성혜인으로 착각해 밤새 안고 잤다는 건 언급하지 않았다.반승제는 자신이 어젯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술주정을 부린 건가 싶었지만 그는 주사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어깨를 주물렀고 그곳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 그는 조각상을 향해 소리치던 어젯밤의 장면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칫솔을 쥐고 있던 손이 서서히 굳어졌고 수치심이 밀려와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심 비서, 저 조각상은 사람 시켜서 돌려보내요.”심인우는 마침 전화 한 통을 받았다.“스카이웨어 쪽에서 이미 새 걸 주문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시면 남겨두셔도 됩니다.”반승제는 버럭 화를 냈다.“안 좋아한다고!”부랴부랴 전화를 끊은
두 달 전 유해은은 해외로 파견되어 할리우드에서 비공개 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고 이번에 촬영을 마치고 극비리에 귀국했다.동시에 병원에 누워있던 백현문도 깨어났으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그는 유해은이 정말 죽었다는 생각에 약간의 무기력함도 느꼈다.그날 밤, 백현문은 술집으로 향했다.저녁 열한 시, 유해은과 혼혈 남자 연예인의 파격적인 사진이 연예계를 뜨겁게 달궜다.그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반응 좋은 스타이자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는 인기 아이돌이다.그의 팬덤 역시 악랄하기로 유명하다. 전에 다른 여자와 열애설이 불거졌을 때, 그들은 온갖 악플을 퍼부으며 괴롭히더니 끝내 여자 연예인이 우울증을 호소하며 연예계를 은퇴하고서야 사건이 일단락됐다.뛰어난 재능으로 칭찬을 받는 그의 이름은 허민환이다.해당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그의 팬들은 눈이 뒤집혀 미친 듯이 유해은을 몰아세웠다.하필 이런 상황에 유해은은 SNS에 본인 인정 마크를 달았다. 심지어 프로필에는 이번에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의 이름이 버젓이 적혀있다.[유해은, ‘판타스틱 어드벤처 2’ 동양인 인어공주역]이 영화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데다가 모든 촬영을 극비리로 진행할 만큼 비밀 유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SNS에 이걸 밝히다니? 허민환과의 잠자리로 배역을 따냈다는 걸 티를 내고 싶었던 걸까?사고를 쳐버린 유해은 때문에 성혜인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로그아웃을 반복하며 재차 확인했으나 사진 속 인물은 빼박 유해은이다.다음 날 아침 일찍 그녀는 사무실에서 유해은을 만났다.오늘의 유해은은 두 달 전 혼비백산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굳건한 눈빛에는 일말의 고통이 느껴졌으나 지금은 마치 모든 걸 놓아버린 듯 한결 가벼워 보였다.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성혜인은 말문이 막혔다.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뒤, 유해은 자진해서 자백했다.“논란으로 유명해진 것도 성공한 거
유해은의 행보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사람들의 검색량이 급증하면서 이제 톱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사래를 쳤다.“해외에서 촬영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이틀 동안은 푹 쉬어요. 매니저님한테 괜찮은 대본 있는지 알아보라고 할게요.”유해은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공손히 물러갔다.그녀가 떠난 후, 성혜인은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바로 이때 며칠 전 퇴원한 장하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칼에 찔린 상처에는 이미 흉터가 생겼다.“사장님, 오늘밤 전 감독님과의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감독님이 투자자의 신원을 밝히기 어렵다고 하여 오늘밤이 되어야 그분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투자자 쪽에도 저희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이번에 준비한 영화는 블록버스터급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회사와 계약한다고 했으나 주영훈의 명성에 힘입어 성혜인은 투자자의 자리를 따냈다.너무 좋은 대본이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다른 투자자와 함께 600억을 반반 부담하기로 했다.어쩌면 다른 투자자는 그녀의 업무 방식에 상당한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것도 모자라 수익이 반 토막 되게 생겼는데 솔직히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인맥이 전부인 연예계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지난 보름 동안 성혜인은 필사적으로 회사를 발전시켰고, 그 덕분에 등 돌렸던 파트너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회사는 안정을 되찾았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녁 7시에 만나 는거로 하죠.”장하리는 그녀가 유해은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유해은은 유명세를 얻고싶어 스스로 논란이 될 만한 사진을 퍼뜨릴 만큼 간절했다.비록 그녀가 선택한 길이지만 이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모두가 알고 있다. 매일 사람들의 욕설에 직면하다 보면 자칫 우울증에 걸려 목숨을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허민환의 전 여친이 바로 그 케이스다. 사실 그 여자는 일찌감
반승제는 성혜인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을 사이 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1.5 미터 정도였다.설인아는 반승제의 곁에 앉아있었다. 아침에 성혜인과 마주쳤을 때부터 기분이 상한 듯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입을 삐죽였다.요즘 설인아와 반승제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제원에 온다고 했던 아버지의 계획은 설인아의 건강이 호전되면서 잠시 보류되었다.큰오빠 설기웅은 두 사람의 혼사를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열애 사실을 얼른 업계에 알리고 싶었으나 반승제는 이를 거부했다.설인아는 반승제의 곁에 바짝 달라붙어 성혜인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그와 반대로 성혜인은 태연하고 차분했다. 그녀는 설인아를 아랑곳 하지 않고 이어서 전 감독과 대본에 관해 이야기했다.이때 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내왔다. 이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로는 소고기미역국과 술게장이었는데 술게장으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게라고 했다.전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던 성혜인은 잠시 틈이 생기자 젓가락을 들고 술게장을 집으려 했다. 그런데 젓가락을 막 뻗자마자 반승제의 젓가락과 부딪혔다.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술게장을 집어 설인아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이에 설인아의 안색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설인아는 성혜인을 비웃듯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여보, 고마워. 이 가게 술게장이 유명하다고 들어서 너무너무 먹고 싶었는데.”일에 대해 상의하러 나온 자리에서 말다툼 하기가 싫었던 성혜인은 다른 게장을 집으려 했다. 그런데 반승제가 그 게장마저 집어 본인 접시에 가져갔다.순식간에 기분이 불쾌해진 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이곳의 음식 접시는 매우 작았고 한 접시에 오직 두 마리의 게장만 있었다. 다른 접시의 게장을 먹으려면 자리에서 일어나 전 감독 쪽의 것을 집어야 했다. 그러나 일에 대해 상의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이런 행동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우리의 주목적은 일이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니까.반승제의 테이블 쪽에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술게장이 그대로 있다. 본인의 것을 그대로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