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엘리베이터에 서서 천천히 줄어드는 층수를 보며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순간 정신을 번쩍 차린 그는 필사적으로 위층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성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애타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베이터는 애석하게도 지하 2층으로 내려갔고 옆에 있던 또 다른 엘리베이터는 위층에 멈춰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족히 1분을 꼬박 기다리다 지친 듯 바로 옆에 있는 계단으로 다가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단숨에 8층으로 올라간 그는 어느새 이마가 땀범벅이 되었다. 답답함에 고민할 틈도 없이 넥타이를 잡아당겼고 단추들이 우수수 떨어졌으나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본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자리에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심장에 비수가 꽂힌 듯 고통스러웠다.그래도 다가가기 전에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정장이 단정한 걸 재차 확인하고서야 다가갔다.“성혜인.”반승제는 그녀의 뒤에 서서 이름을 불렀다.순간 환청이 들린 줄 알고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성혜인은 재빨리 눈물을 닦고 맑은 눈동자로 뒤를 돌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속눈썹마저 눈물에 젖은 모습을 보니 반승제는 가슴이 미어졌고 전보다 야윈 모습에 저도 모르게 반승우를 원망하게 되었다.정말로 그녀를 위한다면 임신 전에 몸 관리할 시간을 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혜인아,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만약 그녀가 솔직하게 터놓는다면 결혼은 물론이고 그녀의 아이마저 키울 생각이었다.반승제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묻는 거나 다름없었다.한때 그는 오매불망 자신을 바라보는 순수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로망이었지만 하필이면 유부녀인 성혜인에게 사로잡혔다.나중에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된다고 기준을 낮췄으나 성혜인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뱃속에는 반승우의 아이까지 있다.하지만 사실대로 진실을 얘기한
장하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오는 성혜인을 보고선 걱정스럽게 물었다.“회사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성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장 비서님은 당분간 출근하지 말고 병원에서 쉬어요. 전 돌아가서 샤워하고 바로 회사로 나가봐야겠어요.”“알겠습니다. 사장님도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괜찮아요.” 곧이어 성혜인은 병원을 나섰다.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녀는 포레스트로 돌아와 온몸을 뒤덮은 휘발유를 깨끗이 씻었다. 마치 배현우와의 하룻밤을 씻어내는 듯 사정없이 몸을 문질렀고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욕실을 떠나고서야 자기 피부가 빨갛게 물든 걸 발견했다.곧이어 아래층으로 내려온 성혜인은 쓴 커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고선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회사에서는 다음 달 목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고 그녀는 자정까지 서류를 보며 일에 전념했다.건물 밖의 네온사인들이 하나둘씩 켜지자, 그녀는 커피를 들고 창가로 다가가 창밖의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봤다.이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알고 보니 방송국에서 걸려 온 인터뷰 요청 전화였다.완곡하게 거절했으나 휴대전화 너머의 질문 폭격은 멈출 줄 몰랐다.“평생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계획입니까?”그 질문에 성혜인은 순간 얼어붙었다. 한때 인터넷에는 그녀가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심지어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의 스폰서라는 터무니없는 일이 사실인 양 널리 퍼졌다. S.M그룹이 현재 사정이 어려운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에 협력사 입장에서는 섣불리 배팅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이 시점에서 인터뷰한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뿐만 아니라 주가 상승도 가능하다.스스로를 상품으로, 그것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상품으로 홍보한다면 이 모든 게 쉬울지도 모른다.하지만 성혜인은 이런 인터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설사 참여한들 기자들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며 난처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설씨 가문에서
일에 모든 정력과 마음을 쏟게 되면서 성혜인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역시나 계획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은 실검에 오르게 되었다. 예전에 그녀는 장하리에게 마케팅 계정을 운영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느덧 그 계정에는 수백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성혜인이 온수빈을 버리고 반승제에게 고급 승용차와 다이아몬드 시계를 선물하며 애정 공세를 벌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케팅 계정에는 빠르게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반 대표님이 설마 명품 시계가 없겠어?][참 수준 떨어지는 여자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봐? 대표님은 왜 저런 여자를 가만두는 거지?][성혜인 사진 갖고 있는데 공유받고 싶은 분 대댓글 남겨줘요.]곧이어 사진 한 장이 베스트 댓글로 선정되었다.의외인 건 사진 속의 여자는 성혜인 본인이 맞았다.박시한 옷을 입고 있던 탓에 평소보다 훨씬 뚱뚱하게 찍혔는데 뒷모습만 보면 백 킬로가 넘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이런 사진을 찾아낸 네티즌들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이 사진 공개되자마자 순식간에 10만 명의 팔로워가 늘었고 하나같이 그녀를 조롱하려는 사람들이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크업팀을 찾아가 차분한 스타일로 꾸몄다.우선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눈에 띄게 화려해서는 안 됐고, 그룹의 대표라는 포스가 느껴지는 스타일로 단장했다.짙은 메이크업은 아니었지만, 두 시간이 걸렸다. 쌩얼처럼 보이는 꾸안꾸 컨셉이었는데 뭔가 청초해 보이면서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산뜻함이 묻어났다.성혜인은 미리 준비한 하얀색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시상식 현장으로 향했다.주최 측은 그녀를 위해 미리 의자를 준비해 두었고, 같은 시각 밖에 서는 연예인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었다.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성혜인은 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온수빈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성혜인의 이름이 붙어있는 의자를 보고 감격을 금치 못하던 온수빈은 깔끔한 슈트 차림의 그녀를 보고선 더욱이 어쩔 줄 몰라 했다.그는 마치 사랑을 막 배운 애송
업계에서 매우 중요한 시상식인 만큼 S.M그룹을 비롯한 많은 영화와 방송사 관계자들이 생방송으로 시청하고 있었다.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하리마저도 의사에게 TV를 켜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실시간으로 모든 걸 지켜보던 그녀는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혜인의 정성에 혀를 내둘렀다.최근에 많은 파트너와 협력사가 등을 돌렸으니 반드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강력한 임펙트가 있어야만 했다.장하리는 그녀의 희생에 감동받은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라 TV를 바라봤다.카메라가 S.M 소속 연예인을 비추는 순간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회사가 밑바닥일 때부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장하리는 소속 아티스트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회사가 앞으로 더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눈시울을 붉히며 TV를 보던 그녀는 노크 소리를 듣고서도 신경 쓰지 않았고, 간호사가 왔겠거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병실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들어왔다.그의 아우라에 압도된 장하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이불 밑에 감춘 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그녀는 주눅 든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당당한척하며 벽에 기대었으나 그 행동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남자는 그녀의 곁에 앉아 곁눈질로 힐끗 쳐다봤다.오가다 여러 번 만났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하리는 그를 볼 때마다 지레 겁을 먹더니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그렇게 한동안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어쩌다가 다친 거예요?”장하리는 남자가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상상이라도 되는 듯 흠칫 놀라더니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누군가 사장님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걸 막다가 한방 찔렸어요.”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흥미로운지 살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현실은 칼이 조금만 빗겨나갔다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심각했다.“충성심이 넘치네요.”장하리는 제원의 모든 사람이 성혜인을 멀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
반승제는 화면 속의 성혜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뺨이 따끔하게 아파졌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메시지였다.[성혜인 임신했지?]그 말은 순식간에 반승제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홧김에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으나 핸드폰 너머로는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반승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어디야?”상대방의 비웃는 소리와 함께 통화는 마무리되었다.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고, 곧바로 전화해 부하들에게 배현우의 위치를 알아내라고 명령했다.반승제는 짜증스럽게 목에 감은 넥타이를 풀고선 의자에 앉았다.그 후 생방송이 끝나자, 외투를 들고 BH 그룹을 나섰다.운전해서 스카이웨어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그곳에서 진세운을 마주쳤다.진세운은 워낙 바쁘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를 만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서주혁과 온시환이 없으니, 오늘은 진세운이 그의 술친구가 되어줬다.그렇게 서로 잔을 주고받다가 진세운이 물었다.“너 혜인 씨랑은 완전히 정리한 거야? 인아 씨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반승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의자에 기댔고 볼에 찍힌 손자국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맞아.”“어쩌다가?”그는 손을 들어 볼을 어루만지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빨리 취했다.“뭘 그런 걸 물어. 그냥 안 좋아해서 헤어진 거지.”“너 혜인 씨 안 좋아해?”진세운은 성혜인이 그를 좋아한다는 걸 확신했기에 자연스레 원인은 반승제에게 있다고 생각했다.“그럴 리가 없잖아.”“너 도박한 거 터졌을 때 혜인 씨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리고 혜인 씨가 너 때문에 애까지 잃었다며?”잔을 들려던 반승제의 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그 아이는... 내 잘못이 맞아. 내가 지키지 못했거든.”반승제는 잇달아 술을 마셨고 어느새 눈빛이 흐리멍덩하게 변했다.“단언컨대 혜인 씨는 너한테 진심이야. 너는 왜 혜인 씨가 널 좋아하지 않는
서주혁은 살아생전 이렇게 수치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반승제에게 이건 조각상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설명했지만, 그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그는 조각상과 함께 네이처 빌리지에 도착했고, 심지어 밤새 조각상을 품에 끌어안고 잠을 잤다.서주혁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그를 돌보고 싶지 않았고 진세운 또한 밤새 시달려 진이 빠졌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심인우에게 그를 부탁한 후 곧바로 자리를 떴다.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반승제는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듯 몸이 뻐근하고 불편했다.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딱딱한 돌덩이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내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는 조각상을 옆으로 던지더니 누군가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밤새 숨 막힐 정도로 짓눌렸으니, 암살이 아니면 뭐겠는가?반승제는 온몸이 쑤시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심 비서.”문을 지키고 있던 심인우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안으로 달려왔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이 조각상은 뭐죠?”“대표님이 어제 스카이웨어에서 만취한 후 이 조각상을 안은 채 돌아오셨습니다.”심인우는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 조각상을 성혜인으로 착각해 밤새 안고 잤다는 건 언급하지 않았다.반승제는 자신이 어젯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술주정을 부린 건가 싶었지만 그는 주사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어깨를 주물렀고 그곳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 그는 조각상을 향해 소리치던 어젯밤의 장면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칫솔을 쥐고 있던 손이 서서히 굳어졌고 수치심이 밀려와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심 비서, 저 조각상은 사람 시켜서 돌려보내요.”심인우는 마침 전화 한 통을 받았다.“스카이웨어 쪽에서 이미 새 걸 주문했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시면 남겨두셔도 됩니다.”반승제는 버럭 화를 냈다.“안 좋아한다고!”부랴부랴 전화를 끊은
두 달 전 유해은은 해외로 파견되어 할리우드에서 비공개 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고 이번에 촬영을 마치고 극비리에 귀국했다.동시에 병원에 누워있던 백현문도 깨어났으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그는 유해은이 정말 죽었다는 생각에 약간의 무기력함도 느꼈다.그날 밤, 백현문은 술집으로 향했다.저녁 열한 시, 유해은과 혼혈 남자 연예인의 파격적인 사진이 연예계를 뜨겁게 달궜다.그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반응 좋은 스타이자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는 인기 아이돌이다.그의 팬덤 역시 악랄하기로 유명하다. 전에 다른 여자와 열애설이 불거졌을 때, 그들은 온갖 악플을 퍼부으며 괴롭히더니 끝내 여자 연예인이 우울증을 호소하며 연예계를 은퇴하고서야 사건이 일단락됐다.뛰어난 재능으로 칭찬을 받는 그의 이름은 허민환이다.해당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그의 팬들은 눈이 뒤집혀 미친 듯이 유해은을 몰아세웠다.하필 이런 상황에 유해은은 SNS에 본인 인정 마크를 달았다. 심지어 프로필에는 이번에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의 이름이 버젓이 적혀있다.[유해은, ‘판타스틱 어드벤처 2’ 동양인 인어공주역]이 영화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데다가 모든 촬영을 극비리로 진행할 만큼 비밀 유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SNS에 이걸 밝히다니? 허민환과의 잠자리로 배역을 따냈다는 걸 티를 내고 싶었던 걸까?사고를 쳐버린 유해은 때문에 성혜인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로그아웃을 반복하며 재차 확인했으나 사진 속 인물은 빼박 유해은이다.다음 날 아침 일찍 그녀는 사무실에서 유해은을 만났다.오늘의 유해은은 두 달 전 혼비백산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굳건한 눈빛에는 일말의 고통이 느껴졌으나 지금은 마치 모든 걸 놓아버린 듯 한결 가벼워 보였다.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성혜인은 말문이 막혔다.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뒤, 유해은 자진해서 자백했다.“논란으로 유명해진 것도 성공한 거
유해은의 행보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사람들의 검색량이 급증하면서 이제 톱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사래를 쳤다.“해외에서 촬영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이틀 동안은 푹 쉬어요. 매니저님한테 괜찮은 대본 있는지 알아보라고 할게요.”유해은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공손히 물러갔다.그녀가 떠난 후, 성혜인은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바로 이때 며칠 전 퇴원한 장하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칼에 찔린 상처에는 이미 흉터가 생겼다.“사장님, 오늘밤 전 감독님과의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감독님이 투자자의 신원을 밝히기 어렵다고 하여 오늘밤이 되어야 그분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투자자 쪽에도 저희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이번에 준비한 영화는 블록버스터급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회사와 계약한다고 했으나 주영훈의 명성에 힘입어 성혜인은 투자자의 자리를 따냈다.너무 좋은 대본이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다른 투자자와 함께 600억을 반반 부담하기로 했다.어쩌면 다른 투자자는 그녀의 업무 방식에 상당한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것도 모자라 수익이 반 토막 되게 생겼는데 솔직히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인맥이 전부인 연예계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지난 보름 동안 성혜인은 필사적으로 회사를 발전시켰고, 그 덕분에 등 돌렸던 파트너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회사는 안정을 되찾았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녁 7시에 만나 는거로 하죠.”장하리는 그녀가 유해은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유해은은 유명세를 얻고싶어 스스로 논란이 될 만한 사진을 퍼뜨릴 만큼 간절했다.비록 그녀가 선택한 길이지만 이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모두가 알고 있다. 매일 사람들의 욕설에 직면하다 보면 자칫 우울증에 걸려 목숨을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허민환의 전 여친이 바로 그 케이스다. 사실 그 여자는 일찌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