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모든 자료를 내려놓은 후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것처럼 잘 포개어 놓았다.반승제 본인마저도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스스로 굴욕을 자초하는지 몰랐다.도대체 성혜인과 반승우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란 말인가? 왜 성혜인은 또 반승제의 곁으로 온 것일까? 그리고 반승우를 왜 배현우라며 거짓말을 했을까?반승제는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 대답들을 들을 용기가 있을지는 몰랐다.결국 그는 성혜인에게 있어서 형의 대체자일 뿐이었다.그 생각에 반승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전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반승우보다 못하다며 비난했을 때도 그는 반박하지 않고는 입대해버렸다. 사실 그는 반승우와 싸워서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도 형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계속 무시를 당하니 그도 형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반승제는 점점 이런 원망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반승우가 죽은 후에도 반씨 가문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는 물론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더 큰 이유였다.반승제는 모든 자료를 정연하게 잘 정리했다.이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에 성혜인이 반씨 가문에 시집오기로 약속한 건 성씨 가문을 도우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성혜인은 진작 반씨 가문에 시집오려는 생각이 있었던 듯했다. 다만 그녀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상대는 그가 아닌 반승우였다. 그리고 반승우가 죽은 뒤로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반승제를 반승우의 대체자로, 세컨드로 뒀을 뿐이다.성혜인은 유일하게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여자였는데, 그는 고작 성혜인의 세컨드였다니. 사랑이 아닌 오직 복수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의 곁에 나타난 것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반승제는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성혜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그때 귀국하고서 제멋대로 성혜인과 잠자리를 하는 게 아니라 이혼했어야 했는데. 아니면 내가 지금
반승제는 전화를 끊은 후 회사 일을 처리하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성혜인의 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유경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사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아서요. 조금 걱정이 되네요.”그 말을 들은 반승제는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었다.유경아든 S.M그룹의 직원이든 성혜인의 실종이 그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유경아는 회장님이 돌아가신 것만 알았지, 회장님의 죽음이 성혜인 때문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으니 반승제가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그는 이런 일로 둘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성혜인을 미워하는 건 맞지만 차마 유경아 앞에서 그녀의 약점을 들추어낼 수는 없었다.“출장을 갔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그 말을 남긴 후 반승제는 전화를 끊고 계속 서류를 살펴봤다.하지만 유경아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대표님, 겨울이와 흰둥이가 매우 무기력해 보입니다. 특히 겨울이 말이에요. 사모님이 한동안 사라지면 먹지도 않고 가만히 있어요. 겨울이가 워낙 대표님을 좋아하잖아요, 겨울이를 네이처 빌리지에 데려가는 건 어떠세요?”반승제는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지 못했다.가슴이 답답하고 입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해 피를 토하지 않으려면 숨을 꾹 참아야 했다.분노의 여파로 그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고, 심지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어디 편찮으세요?”반승제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전에 제가 귀국하기 전에는 어떻게 키웠는데요?”“그때는 사모님이 바쁘더라도 잠깐씩 시간을 내서 자주 돌아왔었죠. 전에 겨울이가 하마터면 무지개다리를 건널 뻔했잖아요. 그 뒤로 겨울이는 사람 손을 더 탔어요.”겨울이는 반승우가 남겨둔 강아지였다. 성혜인이 그렇게 겨울이를 예뻐하는 것도 다 그 남자 때문이었다니...그 생각에 반승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겨울이는 곧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말을 마친 후 그
신예준은 강민지가 오늘 밤 아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침대에서 일어났다.“지금 바로 갈게.”“오빠, 강민지라는 그 여자와 연애하고 있지?”강민지는 병원에 여러 번 나타났다. 게다가 그녀에게 워낙 친절했기에 그녀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강민지는 너그럽게 그녀의 앙탈을 받아들였다.조희서는 신예준 옆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신예준의 약혼녀는 그녀였으니까. 다만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신예준이 그동안 열심히 일해 돈을 번 것도 모두 그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아니야, 민지랑은 그냥 친한 사이야. 희서야, 지금 바로 갈 테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넌 아직 병원에서 잘 치료해야 한다고.”조희서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더니 말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알아, 오빠는 내게 최고야.”신예준은 침대에서 일어난 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마침 집을 나서려던 그때, 강민지가 돌아왔다.강민지는 귀티 나는 얼굴에 세련된 분위기를 자랑했다. 거친 포장 마대를 입고 있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일 것이다.강민지는 열쇠를 까먹고 챙기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려고 하던 찰나에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는 신예준을 보며 잠깐 멈칫했다.‘이 늦은 새벽에 어디로 가려는 거지?’“예준 씨, 어디 가?”신예준은 미간을 구기더니 강민지를 품에 꼭 안았다.“희서가 또 불안하대. 한 번 가보려고.”조희서의 수술비는 모두 강민지가 마련했다. 외국에서 전문가를 모신 것도 모자라 지금 요양하는 것까지 이미 수십억 원을 썼다. 물론 이 모든 것도 조희서가 신예준의 사촌 여동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하지만 조희서는 불평을 늘어놓을 뿐 전혀 호의를 받은 사람처럼 살갑게 굴지 않았다.그래도 강민지는 꾹 참았다. 신예준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희서도 잘 챙겨야 하는 생각이었다.게다가 조희서의 부모님은 신예준의 아버지와 같은 차를 타고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조희서는 그 뒤로 돌봐줄 사람이 없어 계속 신예준을 따라다녔
“미안해. 내가 네 기분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아. 이제 희서랑 얘기해 볼게. 걔가 확실히 나한테 너무 의지하고 있긴 한 것 같아.”바로 사과하는 그를 보니 강민지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의 일로 애쓰며 동분서주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강민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까치발을 하고 신예준의 입술에 살며시 뽀뽀했다.“알겠어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말을 마친 강민지는 옆에 있던 키를 챙기고 얼른 자리를 떴다.강민지의 뒷모습이 점차 시야에서 사라지자 신예준의 얼굴에서 다정하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그는 음험하게 입술을 몇 번 닦아냈다.그러나 조금 전의 감촉을 생각하면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하고 호흡마저 흐트러질 것 같았다.그저 심심해서 시작했던 연극에 감독인 자신이 점차 몰입되고 있었다.단지 게임일 뿐이야.신예준은 세뇌하듯 끊임없이 이 말을 반복했다.그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자리를 떴다....강민지는 우선 BH 그룹으로 왔다. 반승제가 혹시라도 일에 미쳐서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그러나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물으니 반승제가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강민지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차를 몰고 이번에는 네이처 빌리지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 임경헌과 맞닥뜨리게 되었다.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므로 강민지는 망설임 없이 차창을 내리고 인사했다.“안녕하세요.”임경헌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다. 강민지의 제이엔 쥬얼리는 전국의 독점산업이고 업계에서는 5위 안에 들었다.임경헌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민지 씨, 오랜만이에요! 요새 서클에서 통 못 보고 있네요?”강민지는 이 몇 달간 연애하느라 서클은 뒷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녀가 이제야 철이 들어 자기 계발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강민지는 클럽의 단골손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저 사실 성혜인에 관한 일 좀 알고 싶어서요. 알지 모르겠지만 혜인이는 제 가장 친한 친구거든요.”
강민지는 조금 놀라면서도 성혜인이 더 걱정되었다.“반승제 씨, 당신이 외국에 있는 3년간 혜인이의 안부 한번 안 물어봤어도 혜인이는 매일 어르신이 어떻게 좋다, 어떻게 잘 대해준다 자랑하기 바빴어요. 혜인이는 어르신을 거의 친할아버지로 여기고 대했다고요. 이런 것도 믿지 않으면서 좋아하기는 무슨.”“혜인이는 당신과의 일을 좀처럼 저에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처음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제가 오히려 혜인이를 말렸죠.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으니 관계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요. 혜인이도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럴 일 없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보니 승제 씨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라고요? 당신이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속을 썩여도.”혜인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강민지는 급기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이게 다 반승제 씨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바로 포기해요? 남자들은 다 이렇게 좋아하는 감정마저 술 몇 번 마시면 싹 다 잊는 거예요? 그럼 더 이상 역겹게 혜인이랑 애틋한 척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우리 가문 세력으로 찾아볼 거니까!”화가 나서 자리를 뜨려던 강민지를 임경헌이 막았다.“민지 씨, 이 일 사실 좀 복잡해요.”임경헌이 그날의 구체적인 일을 다시 설명했다. 반승제가 성혜인의 상자에서 나온 독사에게 물렸다는 사실까지 빠짐없이 말이다.자초지종을 들은 강민지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혜인이를 더 걱정했다.“혜인이가 반승제 씨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더더욱 해칠 리가 없잖아요! 당연히 누군가에게 협박당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럼 더 빨리 혜인이를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반승제 씨, 자신이 없어서 혜인이 못 믿는 거 알겠는데요. 그동안 혜인이가 반승제 씨 바라볼 때, 그리고 반승제 씨와 이야기할 때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사랑이라는 것은 난로 옆에 앉아 불을 쬐는 것과도 같아서 사랑이 있기만 하면 반드시 느낄 수 있는 것
술집에서 나온 성혜인은 또다시 이 작은 방에 갇혔다.배현우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통화 내용을 엿들어보니 앞으로 두 시간이면 비행기가 뜰 것이라고 했다. 배현우는 아마 곧 자신을 데리고 공항으로 갈 것이다.도중에 다른 부득이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약효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혜인은 온몸이 나른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여전히 술집에 갔을 때의 분장 차림이었고 이 역시 공항으로 가는 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네 배 위에 그거 인공피부로 만든 거야. 베개 집어넣는 거보단 훨씬 낫지?”배현우가 인공피부를 톡톡 쳤다. 얼굴에는 흉악한 미소를 띠었다.“자기야, 가자.”그의 부름에 성혜인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직도 그녀는 배현우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들을 벌이는 건지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차에 태워지고 성혜인은 창가에 힘없이 기댔다.앞에는 누군가 운전하고 있었고 배현우는 한 손으로 성혜인이 떨어지지 않게 끌어당겼다.몇 개의 정거장을 거듭 지날수록 톨게이트에서 단속하는 경찰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배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사람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죠?”“강씨가문에서 사람을 찾고 있답니다.”이 말에 성혜인의 눈이 반짝였다.강민지다!강씨가문의 세력은 제원에서 상위 5위 안에 들었다. 강민지가 이번에 경찰까지 대동하며 일을 크게 키운 건 분명 아버지를 설득해서 도움을 청했기 때문일 것이다.성혜인은 코끝이 찡했고 눈물이 찔끔 났다.그녀가 온 힘을 다해 차창을 향해 부딪쳤지만 그저 둔탁한 소리만 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애쓰는 그녀를 보고 배현우가 험상궂은 얼굴로 덥석 끌어당겼다.“말 들으랬지?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지 마.”성혜인은 초조함에 온몸에 땀까지 났다. 강씨가문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지금이 도망칠 절호의 기회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이후, 자동차가 단속하는 경찰들에 의해 멈췄고 곧이어 경찰이 다가왔다.배현우가
강민지는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나중에 성혜인을 찾게 되면 반승제에 대한 좋은 말을 꼭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아저씨, 추적합시다.”현장에 있는 몇 대의 승용차들이 그 차를 뒤따라갔다. 그중에는 예외 없이 반승제가 탄 차도 포함되어 있다. 강민지 역시 그 차에 탑승했다.“승제 씨, 저 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반승제는 대답이 없다.그는 조금 전 멀리서 그저 한 남자의 반쪽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기억하는 누군가의 얼굴과 너무나 흡사했다.그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가속 페달을 자비 없이 밟아버렸다.멀리서 백미러로 뒤따라오는 차량을 확인한 배현우가 혀를 찼다.“쯧, 걸렸네. 오늘은 비행기 못 탈 것 같으니까 따돌리고 우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봐.”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액셀을 밟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말에 희망을 본 성혜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이때, 성혜인을 바라보던 배현우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뒤에 따라오는 차 중에 아마 반승제도 있겠지? 그런데 걔가 설마 네가 걱정돼서 왔겠어? 널 데려가 구속하러 온 거겠지. 설인아랑도 약혼할거라던데. 네가 어르신께서 돌아가시는데 일조했으니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성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얄밉게 말하는 병풍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승용차는 이어서 고속도로를 달렸고 배현우는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지 운전자에게 명령했다.“아무 차나 들이박아.”운전자는 낮게 응답하고는 바로 차 하나를 들이박고 유유히 지나갔다. 그들의 차 뒤로 순식간에 차들이 연쇄추돌 하며 큰 규모의 교통사고가 났다.무고하게 큰 충격을 받은 차량이 전복된 채로 몇 미터나 미끄러져 나갔다.성혜인이 충격과 당황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차가 한데 뒤엉켜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부축을 받고 있었다.배현우는 그야말로 악마다.이렇게 끔찍한 상황에도 배현우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어 보였다.특히나 놀
이곳은 고속도로 옆 갓길이었고, 차는 이미 교외 지역에 도착한 상태였으며 아래로는 녹지대가 펼쳐져 있었다.성혜인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단지 앞쪽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급하게 소리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대표님!”“끼익.”차가 다급하게 멈췄고 성혜인은 반동에 의해 앞좌석에 머리를 부딪쳤다.운전자는 바로 차에서 내려 배현우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그리고 이 기회를 틈타 성혜인은 천천히 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약 때문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차에서 내려가면서도 한번 무릎을 땅에 찧었다.퉁퉁 부은 몸은 비대해져 움직이기 불편했고 성혜인은 겨우 몇 미터 기어갈 뿐이었다.날카로운 돌멩이가 손바닥을 찔러 피가 흘렀고 고속도로변에 세운 차는 이미 다른 차에 치여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성혜인은 땅을 진동하는 거센 폭발음을 들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조금 전 배현우의 표정뿐이었다.마치 아주 오래전의 배현우가 돌아온 느낌이었다.성혜인은 가슴이 아파왔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배현우는 병에 걸린 것이다. 아주 심각한 병.그는 자기 몸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의학계에서는 정신 분열이라고 부르는 병이 있지.배현우 선배는 여전히 그때의 다정한 선배이고 단지 그 몸속의 다른 한 사람이 미치광이일 뿐이다.성혜인은 착한 배현우가 그 미치광이 때문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본인을 희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살갗을 마구 찌르고 긁는 돌멩이로 인한 통증에 정신이 든 성혜인은 도롯가의 펜스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지금 이 고속도로는 앞 차의 사고로 또 정체되고 있었다.백여 대의 차가 막혔고 도처는 차에서 내려 욕설을 퍼붓는 운전자들로 가득했다.성혜인은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기에 찾아내기에 어려웠다.성혜인은 오직 본능에 의지한 채 무거운 두 다리를 이끌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도움 필요하시죠?”한 여학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성혜인이 고운 얼굴을 들어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성혜인이 고개를 끄덕였지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