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몸 앞의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그 행동에 육경한은 비웃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뭘 감추는 거야? 내가 못 본 데라도 있나?”그의 말투는 낮게 깔리면서도 약간 장난스러워 듣는 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수건을 꽉 붙들며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당신더러 들어오라 했어?”육경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섞어 말했다.“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그의 말이 얄밉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소원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나가줘. 옷 입어야 하니까.”그러자 육경한은 침대 위에 놓인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고는 대충 소원에게 던졌다.“그냥 이거 입어. 어차피 내가 못 본 것도 없잖아.”“...”더 이상 말다툼을 할 기운도 없었는지라 소원은 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욕실에서 옷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그가 던진 것은 옷이 아니라 얇고 거의 투명한 속옷 같은 옷이었다. 꼭 가릴 곳만 어렴풋이 가려진 도저히 입고 나갈 수 없는 옷이었다.과거에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이 인간이 정말...!’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은 소리쳤다.“육경한! 이게 뭐야!”그 순간, 욕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육경한이 문턱에 느긋하게 기댔다.“나 불렀어?”소원은 수건을 꼭 붙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부른 거 아니야, 나가!”육경한은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분명 내 이름을 불렀잖아?”소원은 그의 태도에 답답함과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그건 당신더러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야!”그러나 육경한의 깊은 눈빛이 소원을 강하게 응시하자 그녀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그와 결혼을 결정했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그렇다고 완전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선
게다가 남자는 온갖 수를 다 써서 소원을 자극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외쳤다.‘대체 이런 것들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그의 과감한 행동과 적재적소에서의 신경 자극은 소원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이건 육경한의 평소 이미지와 너무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아.’그는 그녀의 입술 대신 다른 곳에 입맞춤을 했다.그 덕분에 상황이 더 격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육경한은 손목을 고정하던 손을 천천히 놓고는 소원의 목을 지그시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다른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수건 아래로 들어갔다.소원이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는 소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에는 그녀가 불편하게 여기는 생생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라 눈을 질끈 감았다.‘이 모든 게 거짓이야. 단지 각자 필요한 걸 얻기 위해 몸을 거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소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지만 육경한은 결코 그녀에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행동했다.그는 그녀의 방어선과 수치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듯 무릎을 굽히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혼란 속에서 수건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소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유리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곧게 펴졌다.‘이 사람이 미쳤나? 어떻게 이런 일을...’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욕실 벽면의 반사된 모습을 향했고 흐릿한 증기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실루엣이 뚜렷하게 보였다.그는 마치 새로운 경험을 주는 듯 그녀의 모든 감각을 흔들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분노를 터뜨렸다.“육경한, 진짜 정신 나갔어?”하지만 그는 소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그리고 소원의 입술을 강하게 붙잡고 깊은
소원은 밤새 이어진 피곤함에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보니 침대에 남아 있어야 할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몸 아래 깔린 침대 시트도 전날의 짙은 색에서 은은한 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소원은 희미하게 기억났다.‘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던 건... 너무 젖어서 못 잘 지경이었으니까.’이런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남자의 지나친 무절제함에 화가 치밀었다.‘도대체 이 거래는 누구한테 유리한 거야? 완전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처럼 굴었잖아.’처음의 분위기조차 그저 식전 음식 같은 것에 불과했다니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소원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방 문이 살며시 두드려졌다.“사모님, 깨어나셨습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소원은 곧 대답했다.“네, 깼어요.”“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침묵했다.‘우리가 어제 얼마나 늦게까지 했는지 다들 아는 걸까...’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굳이 내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10분 뒤에 가져와 주세요.”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녀는 한쪽 다리가 휘청이며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속으로 육경한을 욕한 뒤 이를 악물며 욕실로 가 재빠르게 씻었다.방으로 올라온 아침 식사를 보니 준비된 음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정갈했다.죽, 깔끔한 반찬, 그리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보양식 위주의 메뉴였다.소원은 생각보다 배가 고팠는지라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그녀의 속이 가벼워진 건 단순히 음식을 먹어서만이 아니었다.유진이와 아주머니의 상황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음속 큰 짐이 내려간 덕이었다.‘아주머니는 그동안 유진이를 위해 거의 모든 걸 바치셨어. 내가 아주머니를 포기할 순 없어. 반드시 좋은 치료를 받게 해야 해.’그녀는 어제 전문가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아주머니의 몸 상태가 70% 정도는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특히 소원
“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얼굴이 정말 밝아 보이네요.”“대표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아마 방민아 씨와 관련된 일이겠죠.”“방민아 씨랑 늘 사이가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꼭 방민아 씨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그럼 누구 때문인데요?”직원들이 소곤소곤 수군거리는 소리에 갑자기 낮고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다들 그렇게 한가해요?”직원들이 고개를 돌리자 소종이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소 비서님...”소종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일 안 하고 대표님 뒷얘기나 하다니. 다음번에 근무 시간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월간 개근 수당 전부 삭감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요.”직원들은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흩어졌지만 모퉁이를 돌아가면서도 계속 속삭였다.“소 비서님, 왜 이렇게 분노하신 거예요? 뭔가 이상한 냄새 나는데.”“대표님 기분은 좋아 보이던데 소 비서님은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죠?”“그만해요. 또 걸리면 진짜 큰일 나요. 빨리 일이나 하자고요...”소종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는 방금 홍보 부서에서 나온 직후였기 때문이다.30분 전, 육경한은 그에게 방씨 가문과의 결혼 취소에 대한 공식 발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 발표는 회사 안팎으로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단순히 대표의 개인사가 아니라 방씨 가문과 여전히 협력 관계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터진 폭탄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만약 방민아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추락할 수밖에 없겠지.’소종은 속으로 기도했다.‘제발 방민아가 입 다물고 조용히 넘어가 줬으면.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그러나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그는 방민아를 조금은 비웃고 있었다.‘사모님 자리를 꿰찰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패배하다니. 쓸모없네.’그렇게 소종은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육경한은 책상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프로젝트 제안서를 수정하고 있었
“소원, 우리 혼인신고 했어.”육경한이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소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미친 거 아니야? 혼인신고를 했다고?’한참 후, 소종은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말 속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형님,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 여자가 형님을 해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두시겠다고요?”소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됐다.육경한의 머리를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서 뇌 CT라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그저 황당하고 답답할 뿐이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나마 소종은 평생을 함께하며 고난을 헤쳐온 동료였기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자체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형님...”소종은 어렵게 입을 뗐다.그가 육경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솔직한 진심을 말할 때뿐이었다.그 호칭은 그들이 한때 얼마나 험난한 늪에서 기어 나왔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이름이었다.지금의 안정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그런데 왜 굳이 육경한이 스스로 곁에 시한폭탄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그것도 머리맡에까지 두는지 소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만.”육경한이 그의 말을 끊었다.“이제부터 소원은 내 아내야. 미우 그룹의 모든 자원은 소원을 위해 조건 없이 제공될 거다. 그리고 누구든 내 아내를 괴롭히는 걸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소종은 말문이 막혔다.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차갑고 무정한 여자가 대체 뭐가 좋아서 대표님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이 한 말은 지켜야 했다.지켜야 하는 동시에 그의 안전도 보장해야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알겠습니다.”소종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육경한이 말했다.사무실에서 나간 뒤에도 소종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그는 바로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들을 닭 잡듯이 몰아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아빠가 투신했던 일이 사실이 아니라니... 뭔가 숨겨진 진실이라도 있다는 건가?’“우리 아빠가... 대체 뭘 아신 거죠?”마음이 급해진 탓에 소원은 말이 꼬였다.강민혜는 진정시키려는 듯 말했다.“소원 씨,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저도 단지 의심이 들어서 소원 씨한테 확인하려고 왔을 뿐입니다.”강민혜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소진용의 투신 사건 당시에는 그녀도 아직 학생이었다.그때 그녀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고아가 되었고 빚쟁이들이 집안의 물건을 모두 빼앗아 가는 처지에 놓였다.그런 상황에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그녀는 다행히도 성적이 우수했고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소씨 가문이 설립한 희망 프로젝트에서 지원받게 되었다.그렇게 어렵게 이어진 학업 덕분에 강민혜는 사회에 나가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온 뒤에야 그녀는 소씨 가문이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소진용이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당시의 소문들을 강민혜는 믿기 힘들었다.어떤 이는 소진용이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투신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그가 겉으로는 선한 척했지만 사실은 악행을 덮으려 했던 경제 범죄자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강민혜는 이런 말들을 믿지 않았다.어릴 적 소진용이 지방으로 내려와 희망 프로젝트 사업을 점검하던 때, 강민혜는 그를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둥근 얼굴, 통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격, 그리고 미소 지을 때 자신의 아버지처럼 넉넉하고 믿음직스러운 인상.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소진용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다행히도 이후 미우 그룹이 나서서 소씨 가문과 관련된 계약서 위조 사건이 일부 직원들의 음모였음을 밝혔고 진범도 처벌받았다.그렇다면 소진용이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투신했다는 말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무엇이 두려웠단 말인가?그래서 강민혜는 일을 시작한 후
감시를 피하려고 일부러 CCTV를 피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분명 무언가 의도가 불순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어쩌면 처음부터 나쁜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다만 이 사람은 나중에 당황해서 사무실을 나간 뒤 모퉁이에 있는 CCTV를 깜빡 잊고 지나친 후에야 다시 감시를 피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강민혜가 설명했다.“이 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모든 경로를 확인했지만 이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솔직히 말해 흐릿한 모습 하나만으로는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게다가 옷차림을 보니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당시 사무실 건물 안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람이 대부분이다.소원은 영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아보기가 정말 어려웠으니 말이다.강민혜는 다시 영상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같은 건물 내 다른 CCTV 기록을 검색해보니 2층 모퉁이에서 비교적 뚜렷한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2층 창문을 통해 아래 플랫폼으로 뛰어내리며 CCTV를 피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이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수상쩍었다.CCTV를 피하려고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라니 너무 황당한 행동이었다.이런 짓을 할 사람은 오직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기술적인 분석 결과 이 인물은 소진용 씨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이 맞습니다. 소원 씨, 이 사람을 보시고 혹시 아는 사람인지 확인해주시겠어요?”강민혜가 물었다.시간이 오래 지나 CCTV 화질은 이미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흐릿하게나마 이마와 눈썹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이 보였다.영상 속 남성은 정면에서 카메라를 발견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모호한 얼굴을 보자 소원은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그리고 문득 외쳤다.“그 사람이네요!”놀란 강민혜가 물었다.“이 사람을 아세요?”그녀는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CCTV를 분석하고 이 사람의 흔적을 한 프레임씩 추적한 끝에 이 장면을 찾아냈다.물론 영상이 흐릿해
안상철은 번 돈으로 집을 한 채 산 것을 제외하면 거의 다 딸의 치료비로 사용했다.소진용이 안상철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려 했지만 그는 고집이 세서 자신이 번 돈 외에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자신이 버는 돈이면 딸 치료비로 충분하다며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그런 사이였기에 안상철이 소진용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오지 않은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평범한 직원들조차 자발적으로 조문을 왔는데 소진용에게 깊은 은혜를 입은 안상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소씨 가문이 몰락한 이후로는 안상철을 본 적이 없었던 것도 이상했다.하지만 당시 소원은 소진용을 잃은 슬픔에 빠져 이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소원은 강민혜에게 말했다.“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살던 집 주소는 기억나요.”강민혜는 곧바로 대답했다.“주소를 알려주세요. 퇴근 후에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물론 주소나 활동 내역은 공식적으로 조회할 수 있었지만 절차를 거쳐야 했고 특히 오래된 사건이라 신청 과정이 매우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그래서 강민혜는 소원에게 직접 주소를 물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훨씬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또한 퇴근 시간에 가는 것이니 직무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소원은 주소를 알려준 뒤 물었다.“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그녀 역시 소진용의 투신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안상철은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스쳤다.‘혹시 아빠는... 자살이 아니었던 걸까?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강민혜는 망설이며 말했다.“다른 건 괜찮지만 혹시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됩니다.”“괜찮아요.”소원은 단호하고도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정말 다 민혜 씨 말만 들을게요. 절대 방해되지 않겠습니다.”잠시 고민했지만 강민혜는 소원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했다.“좋아요. 하지만 꼭 제 지시에 따라주세요. 소원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