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26년이든 36년이든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은 오래 함께한 사람이라도 내겐 쓸모없는 사람이야.”소종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은 소종의 주인이었고 소종은 늘 육경한을 하느님처럼 높이 받들며 오랫동안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그 여자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자줏빛으로 물든 소종의 손이 감각을 잃어갈 때쯤 육경한이 차창을 다시 내렸다. 소종의 손은 이제 완전히 감각을 잃었기에 다른 손으로 겨우 옮겨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다음은 없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차에 시동을 걸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소종은 떠나가는 차를 보며 바닥에 털썩 꿇어앉았다.소종은 아직도 자기가 정말 잘못한 게 맞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악독하기 그지없는 소원은 안 그래도 매일 육경한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고 있을 텐데 아이까지 뺏겼으니 더 독하게 의지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소종은 그저 육경한을 위해 미리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육경한은 아직도 소원을 잊지 못해 끙끙 앓고 있었다.방민아는 정말 여러모로 완벽한 선택지였다. 육경한의 사업에 도움이 될뿐더러 일편단심이었다. 방민아에 비하면 소원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였다.소종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육경한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소원이어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소종의 눈빛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소원의 차는 안지철의 차와 충돌하고 전복된 상태였지만 다행히 옆에 있는 진흙탕에 빠지면서 폭신한 진흙이 일부 충격을 흡수했고 에어백도 제대로 터졌고 안전벨트도 제대로 하고 있은 덕분에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그래도 소원은 큰 충격에 잠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척수뼈가 부러졌는지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너무 아파 미간을 찌푸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기어 나오려 했다.차창이 깨지긴 했지만 완전히 깨진 건 아니었기에 맨손으로 깨진 유리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기만 해도 너무 아팠다. 허약한 모습을 봐서는 갈비뼈도 몇 대 부러진 것 같았고 꼼짝달싹할 수 없어 소원에게 구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소원 씨, 살려줘요... 제발 살려줘요...”안지철이 불쌍하게 말했다.소원은 불신에 찬 눈빛으로 안지철을 바라봤다. 안지철이 아까 죽일 듯이 차로 박아왔던 게 생각나 구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안지철의 핸드폰까지 손에 넣었으니 안에서 증거를 찾으면 되지 안지철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소원이 그를 구해줄 생각이 없어보이자 안지철이 마지막으로 발악했다.“소원 씨, 저 쓸모 있어요. 쓸모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핸드폰만 가져가서 되겠어요? 당연히 안 되죠... 내가 증인으로 출석해서 누군가가 샘플을 바꿔치기하라고 했다고 증언할게요. 소원 씨가 원하는 것도 이거 아닌가요?”소원은 이 말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육경한은 어지간히 간사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핸드폰 하나로 무너트리지 못할 수도 있는데 안지철이라는 증인이 생기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안지철은 소원이 주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이렇게 말했다.“제 상태를 좀 봐봐요. 아이고... 이제 더는 소원 씨를 상대할 수 없는 몸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 살려줘도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차에서는 계속 연기가 나고 있어 언제든 폭발 위험성이 있었지만 안지철 혼자서는 절대 안에 낀 손을 빼지 못할 것이다.안지철이 애원했다.“소원 씨, 제발 살려주세요. 집에 두 살짜리 아이가 있어요. 이제 막 말문을 트고 아빠라고 부르는데 내가 어떻게 죽어요. 내가 죽으면 아이는 아빠가 없어지는데...”안지철은 소원이 이러는 게 다 아이를 위해 양육권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는 소원의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사실 안지철은 집에서 잔소리만 하는 아내와 울기만 하는 애새끼를 데리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지철은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어 늘 놀고먹기만 했고 진취심도 없는 사람이 허영심까지 가
안지철이 치른 대가도 작지는 않았다. 끼었던 손은 빼냈지만 손등의 가죽은 그대로 벗겨진 상태라 피가 철철 흘러내렸는데 보기만 해도 너무 아팠다.“아이고, 나 죽이려고 작정했어요?”안지철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호들갑은. 손 안 빼면 어떻게 나와요.”사실 조금 부드럽게 뺄 수도 있었지만 소원은 일부러 힘껏 당겨서 빼냈다. 사실 아직 쓸모가 있어 죽게 놔둘 수는 없었지만 쓴맛은 좀 보게 해야 마음이 후련할 것 같았다. 나쁜 일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아니면 앞으로 또 이런 짓을 저지를 것이다.표정이 일그러진 안지철이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왼손은 지금 거의 감각이 없는 상태라 들 수도 없었다.안지철은 소원이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손을 심하게 다치게 하면 안지철의 공격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안지철은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었지만 소원의 도움을 받아야만 차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소원 씨, 차에서 좀 꺼내줘요. 여긴 너무 위험해요...”안지철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차를 보며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상황이 상황인지라 소원은 몸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며 변형된 차 문을 열어 안지철을 안에서 꺼냈다.그렇게 도로로 나온 안지철은 위험 구역을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치 바닷가에 말려놓은 생선처럼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소원이 안지철의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는데 안지철의 핸드폰은 잠금 해제하지 않으면 긴급통화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일반 핸드폰은 잠금 해제하지 않아도 긴급통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안 된다는 건 안지철의 핸드폰이 특수 제작이라는 의미였다.소원은 바닥에 드러누운 안지철을 힐끔 쳐다봤다. 죽기를 기다리는 생선 같은 안지철을 보며 시름이 조금 놓인 소원이 안지철에게 다가가 물었다.“비밀번호가 뭐예요?”안지철이 힘없이 말했다.“안면 인식으로 풀어도 돼요.”“안면 인식?”소원이 핸드폰을 들어 안지철의 얼굴을 비췄지만 안지철의 얼굴
똑같이 다친 여자를 대처하기엔 넉넉했다.소원은 목이 심하게 졸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까 안지철의 손등 가죽을 벗겨낸 덕분에 안지철에게도 약점이 생겼다. 얼른 팔을 뻗어 안지철의 손을 잡고는 온 힘을 다해 손톱으로 원래도 피투성이인 안지철의 손등을 마구 할퀴었다. 그 모습이 너무 공포스러웠다.“아, X발.”안지철이 너무 아파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게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안지철은 손에 힘이 살짝 풀렸고 소원도 이 틈을 타서 안지철의 상처를 더 힘껏 쥐어뜯자 안지철의 손등은 뼈가 보일 정도로 구멍이 심각하게 났다.“미친X이 이거 안 놔?”안지철은 극심한 고통에 소원을 홱 내팽개쳤다. 소원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힘껏 숨을 들이마셨더니 기력을 조금 차리고는 절뚝거리며 숲으로 걸어갔다.고통이 가신 안지철은 얼른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줍고는 그 뒤를 따라가려다 다시 차로 돌아와 트렁크에서 몽둥이 하나를 꺼내 손에 들고는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빌어먹을 X,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 뼈도 못 찾게 갈기갈기 찢어줄 테니까.”안지철은 성큼성큼 숲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숨어도 소용없어. 내가 너 반드시 찾아낸다.”그렇게 안지철도 숲속으로 사라졌다....육경한은 차에 오르자마자 녹음된 통화 내용을 틀었다. 차가 충돌되었지만 두 사람 다 차를 버려둔 채 사라진 것이다.안지철은 차를 박은 후에도 소종과 통화했기에 육경한은 그 통화에서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내려 했다. 녹음을 틀자 소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간이 꽤 오래 지났는데 잘 처리했어요?”안지철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아직요. 아까 거의 부딪힐 뻔했는데 저 미친X이 갑자기 핸들을 급하게 꺾다가 차가 잔디밭으로 굴러가는 바람에 나도 브레이크를 밟을 타이밍을 놓쳐서 나무에 차를 박았어요.”소종이 멈칫하더니 말했다.“여자라 힘은 밀릴지 모르지만 머리는 당신보다 총명하니까 꼭 조심히 처리해야 해요.”“알아요. 젠장. 저 미친X 오늘 내가 반드시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처에 빗물이 들어가자 너무 아팠고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이 원래도 좋지 않은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힘까지 다 소모해 진흙 범벅인 나무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움츠리며 존재감을 줄이려 했다.졸음이 쏟아져 잠깐 눈을 붙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불규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야심한 밤에 이런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안지철밖에 없을 것이다. 비까지 내리고 있어 소원의 발자국이 다 지워졌기에 누가 와서 구해줄 거라는 희망은 버려야 했다.큰비는 수색에 어려움을 더했고 윤혜인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는다 해도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소원은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꼭 안았다. 그래도 혹시나 안지철에게 들킬까 봐 미약한 숨소리마저 꾹 참았다.아무리 다쳤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힘을 이겨내긴 어려울뿐더러 소원은 환자였기에 안지철에게 위치를 들키면 그냥 죽기를 납작 없이 기다려야 했다.아니나 다를까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몽둥이로 숲을 가르는 소리까지 들렸다.“이제 그만 나오지?”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안지철의 목소리가 비 내리는 숲속에서 더 섬뜩하게 들렸다.“여기 뱀도 있고 들짐승도 많은데 동물에게 뜯겨 죽는 것보다는 얌전하게 나오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내가 한 번에 깔끔하게 보내줄게. 헤헤.”안지철이 휘파람을 불며 이렇게 말했다. 웃는 소리도 어쩜 저렇게 섬뜩한지 의문이었다.소원은 점점 가까워지는 안지철의 목소리에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안지철은 랜턴까지 들고 있었기에 옆으로 지나가면 무조건 그녀를 발견할 것이다.끼고 있던 팔찌가 달랑거려 소리가 나지 못하게 잡고 있던 소원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에 끼고 있던 팔찌를 돌과 함께 먼곳으로 뿌려 소리가 나게 했다.가까이 다가오려던 안지철이 그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자, 이제 곧 찾아갑니다.”소원은 안지철의 걸음 소리가 돌을 던진 방향으로 가는 걸 들었다. 이 팔찌는 유진을 보
소원이 절망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하하하. 드디어 찾았네.”안지철도 금방 따라서 나왔다. 사방이 뻥 뚫려있어 피할 수가 없었던 소원은 경사를 따라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빨리 걷지는 못했고 그렇게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안지철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젠장.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거야?”안지철이 소원을 힘껏 바닥에 패대기쳤다.우두둑.소원은 무릎뼈가 부서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빌어먹을 X이, 아까 일부러 내 손 찢어놓은 거지. 맞아, 아니야?”안지철은 어디서 천 쪼가리를 찾아 손에 칭칭 감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그 손을 제대로 쓰지는 못했다.소원은 어이가 없었다.“구해준 은혜를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그러다 천벌 받아.”“천벌? 나쁜 짓을 얼마나 했는데 받을 거였으면 진작에 받았지. 아직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잖아?”말이 끝나기 바쁘게 하늘이 번쩍했다. 놀란 안지철이 입을 꾹 닫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번개였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먼 곳에 떨어졌다.“하하하하.”안지철의 웃음이 점점 더 방자해졌다.“봤지? 봤지? 나한테는 절대 안 떨어져.”소원이 한마디 덧붙였다.“아직 좋아하긴 이르지. 때가 안 됐을 뿐이야.”안지철이 몽둥이로 소원의 무릎을 꾹 눌렀다.“아아.”소원이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안지철은 매서운 표정으로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그 입만 살아서.”그때 번개가 다시 하늘을 갈랐다. 하얀 섬광이 빗물에 젖은 소원의 얼굴과 비춤과 동시에 흠뻑 젖은 옷 아래로 드러난 굴곡진 몸매도 비췄다.이에 사악한 마음을 품은 안지철이 생각을 바꾸고 몽둥이로 소원의 옷을 이리저리 헤쳤다.“몸매가 죽여주는데.”안지철이 변태 같은 눈빛으로 소원을 쳐다봤다. 그저 때는 몰랐는데 빗물에 젖으니 소원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너무 섹시했다. 뽀얗고 말한 속살은 유시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했고 매혹적인 얼굴까지 더해지자 요
벨트를 한쪽에 버린 안지철이 허겁지겁 소원 위로 올라탔다. 소원이 힘껏 저항하며 안지철의 아랫배를 걷어차려 했지만 안지철이 소원의 행동을 간파하고는 옆으로 피하더니 소원의 귀싸대기를 힘껏 후려갈겼다.풉.힘이 어찌나 세게 들어갔는지 소원은 귀싸대기를 맞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피를 한 모금 왈칵 토해냈다. 원래도 몸이 허약했는데 귀싸대기까지 맞자 반항할 능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안지철이 더러운 손으로 옷을 벗기려 하자 너무 역겨워 토할 것 같았지만 먹은 게 없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당신 곱게 죽지는 못할 거야.”소원이 매서운 눈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안지철이 코웃음을 치더니 막무가내로 위에 올라탔다. 소원이 살기 어린 눈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안지철의 귀를 힘껏 깨물었다.“아악. 미친X이 이거 안 놔?”안지철이 귀를 억지로 빼내려는데 소원의 입은 마치 볼트를 꽉 끼워서 맞춘 것처럼 단단했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사이 안지철의 귀가 일부 뜯겨 나갔고 너덜너덜해진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우스웠다.“젠장. 이런 젠장.”안지철이 귀를 부여잡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극심한 고통에 안지철은 다시 소원의 목을 조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뱉어. 안 뱉어?”소원이 물어뜯은 건 연골이었기에 제때 붙이면 흉터는 남겠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소원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더니 물어뜯었던 살점을 경사 아래로 뱉어냈다.안지철은 그렇게 잘려 나간 귀가 강에 빠져 사라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철썩. 철썩.안지철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원의 볼을 마구 내리쳤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 안지철은 소원의 목을 힘껏 조르더니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고아댔다.“미친X이, 지금 당장 죽여줄게.”소원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숨소리도 점점 미약해졌다. 그렇게 숨이 꺼져가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 올라탔던 안지철이 그대로 경사를 구르며
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옷을 걸치지 않으면 돌아가서 또 세게 아플 것이다.육경한은 유진에게 감정이 없었기에 소원까지 죽으면 육경한의 오락가락하는 성격에 힘든 건 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소원은 방민아가 법원 앞에서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사랑에 미쳐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거나 범죄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에 소원은 그 옷이 육경한의 옷인 걸 알면서도 추위를 이겨내고파 얼른 챙겨 입었다.육경한은 곁눈질로 그런 소원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당기더니 아래로 내려가 진흙을 뒤집어쓴 안지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육경한의 눈빛에 안지철은 심장이 철렁했다. 몸집이 크고 체격이 빼어난 육경한은 승냥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으로 안지철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안지철은 평소 거의 일반인들과만 소통했고 이런 거물은 거의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눈빛이 닿기만 해도 온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돋는 느낌이 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감히 내게 발길질을 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당장 사람 불러서 너 죽인다.”안지철이 으름장을 놓으며 용기를 북돋으려 했다. 주로 연락하는 소종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육경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안지철은 소원이 큰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소원을 도와주러 온 사람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아우라가 남다를 뿐 종이호랑이일지 모른다고, 그러니 상대가 행동을 취하기 전에 지레 겁을 먹지 말자고 다짐했다.오늘 이 여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따 베일에 싸인 그 사람에게 연락해 처리해달라고 하면 된다. 이 일이 새어나가면 그 사람에게도 해가 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모든 죄를 안지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면 안지철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안지철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나를 죽여?”육경한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고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독수리와도 같은 부리부리한 눈은 모든 걸 뚫어버릴 것처럼 매서웠는데 비바람이 몰아치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