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한 후 주훈의 보고를 기다렸다.30분 후, 주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두 대가 있었지만 차 안이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원 씨의 핸드폰은 차 안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차량에서는 어떤 개인 물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차량의 번호판은 위조된 것으로 차량 소유자의 신원을 당장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이준혁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수색 범위를 넓혀 계속 찾아봐.”그러자 주훈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후, 이준혁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내심 그는 육경한이 소원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육경한과 소원의 관계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육경한이 소원을 향해 품은 감정은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컸다.아무리 얽히고설킨 감정이라도 그는 소원을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때문에 이준혁은 이 일이 단순한 오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하지만 자신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소원을 가장 빠르게 찾는 방법은 바로 육경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망설임 없이 그는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육경한은 마침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로 방민아와 함께 야식을 먹고 있었다.그와 이준혁은 최근 거의 교류가 없었다.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인연을 붙잡고 있는 김성훈이 아니었다면 이미 멀어졌을 관계였다.육경한은 이준혁이 중요한 용건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방민아 앞에서 대놓고 전화를 받았다.“응, 준혁아.”“어디야?”이준혁의 말투는 간결했다.“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지금 밥 먹고 있어.”육경한이 대답에 이준혁은 그가 소원의 실종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확신했다.그러나 분명 육경한 주변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소원이 서울로 돌아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았다.때문에 육경한이나 그의 주변 사람 외에는 의심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소원 씨에게 일이 생겼어
이준혁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윤혜인은 전화가 오자마자 단 한 번의 신호음도 지나기 전에 받았다.“준혁 씨, 어떻게 됐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소원이 무슨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주 비서에게 최고의 인력을 동원해서 수색을 맡겼고 경찰에도 신고했어. 하지만 소원 씨가 실종된 장소에서는 소원 씨를 찾지 못했어. 아직 계속 수색 중이야.”이준혁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윤혜인의 성격상 무언가를 숨기려 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만약 소식이 계속 닿지 않는다면 그녀는 직접 나서서 소원을 찾으러 갈 것이었고 그러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소원이... 정말 위험한 상황인 건가요...”“걱정하지 마. 내가 경한이에게도 연락했거든. 경한이가 있으면 곧 소원 씨를 찾을 수 있을 거야.”이준혁이 차분히 말했다.“뭐라고요?!”그러자 깜짝 놀란 윤혜인이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육경한한테 그걸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그 살인자잖아요! 소원이가 서울에서 무슨 원한을 산 적이 있겠어요? 예전에 소원이네 아버지 회사가 망했을 때도, 빚을 내서 직원들에게 보상금까지 준 사람이에요. 서울에서 소원을 해치려는 사람은 육경한 말고는 없다고요!”“경한이가 아니야.”이준혁은 냉정하게 말했다.“혜인아, 나 믿어봐. 소원 씨는 경한이의 애 엄마야. 절대 소원 씨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 소원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경한이뿐이고.”1분, 아니 1초라도 더 지체하면 위험이 커질 수 있었다.그러나 이 말을 윤혜인에게 직접 전하면 그녀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뻔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이 정말 순수하게 유진이를 자기 아이로만 생각할 것 같아요?”하지만 윤혜인은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육경한은 항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그가 저지른 많은 행동들은 너무나 지나쳤고 윤혜인은 그가 유진이의 엄마라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머리 치켜들고 다니는 거야? 다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든. 부모도 없는 잡종 주제에…”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송소미는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이 감히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한참 뒤, 송소미가 이를 꽉 깨물며 소리를 질렀다.“너, 너 지금 감히 날 때린 거야?!”“당신에게 예의를 가르친 겁니다.”윤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송소미를 보며 대답했다. 윤혜인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그녀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송소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늘 타인의 아부를 받아왔기에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윤혜인이 처음이었다.“이 나쁜 계집애!”송소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윤혜인에게 달려들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윤혜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송소미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었다.윤혜인보다 체구가 작은 송소미는 어떻게든 윤혜인을 때리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모습은 매우 추했다.화가 잔뜩 난 송소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네가 뭐라도 되는것 같아? 넌 단지 우리 준혁 오빠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라고! 넌 몸 파는 여자보다 더 천박해!”송소미는 갈수록 심한 욕을 입 밖에 꺼냈고 모여드는 직원도 점점 많아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낮게 깔린 이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난동을 부리고 있는 송소미를 발견했던 것이다.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탕비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준혁 오빠?”송소미는 평소에도 이준혁을 조금 무서워했다. 이 사촌 오빠는 가차없는 성격이라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이준혁 앞에서는 까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뺨을 맞은 게 생각나자 송소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송소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준혁 오빠, 저 나쁜 계집애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계속 건방을 떨다니. 준혁 오빠, 저 여자 다시 불러와요! 난 오늘 화가 풀릴 때까지 저 여자를 때려야겠어요!”이준혁은 가녀린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적당히 해.”이준혁이 차갑게 대꾸했다.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송소미는 이준혁이 조금 전에도 윤혜인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이준혁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윤혜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다음에는 사람 불러서 저 여자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예요!”“송소미!”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송소미를 쳐다보았고 송소미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네 머릿속에 있는 꿍꿍이를 접어. 저 여자 건드리지 마.”송소미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들끓던 복수심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요…”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송소미를 힐끗 쳐다보다가 탕비실을 떠나면서 곁에 있던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앞으로 연관 없는 외부인은 회사에 들이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송소미는 그의 뒤에서 계속 아부를 떨었다.“준혁 오빠 이렇게 큰 회사에 그런 명확한 규칙은 있어야 돼요.” 하지만 잠시뒤, 주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송소미 씨, 이만 나가주세요.”송소미는 그제야 그녀가 바로 그 연관 없는 외부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단호하게 떠나는 이준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주훈이 부른 경호원에게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송소미가 아무리 발악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경호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한편, 자리로 돌아온 윤혜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아팠다.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회사를 나서려던 윤혜인 앞에
이준혁의 건장한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혜인을 그대로 스쳐갔다.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윤혜인은 이준혁 품에 안겨 있던 여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기사가 났던 임세희였다.윤혜인은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택시에 탄 윤혜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목적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거긴 이제 곧 그녀의 집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한참 고민하던 윤혜인이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청월 아파트로 가주세요.”청월 아파트는 윤혜인이 이준혁과 결혼하고 나서 구매한 집이었다. 그때 당시 그녀는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할부로 산 20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둘이서 살기에는 충분했다.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준혁이 큰 별장을 하나 사주겠다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그녀가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윤혜인은 택시에서 내린 뒤, 바로 올라가지 않고 아파트 공원에 앉아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잠시 바람을 쐬었다.지난 2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달콤했던 순간도 있었고 서럽고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2년, 700일이 넘는 낮과 밤들, 그 마음이 아무리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 시간이면 충분히 녹았을 텐데, 지금 그녀의 귓가에는 비웃음 소리만 들렸다.그 소리들은 그녀에게 이 모든 게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비웃고 있었다.어둠이 깃들고 나서야 윤혜인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문 앞에 기대고 서있는 이준혁을 발견했다.옷소매를 거둔 이준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서, 기다란 목과 섹시한 쇄골을 보일 듯 말 듯하게 드러냈다. 윤혜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쯤 병원에서 임세희와 함께 하고
이준혁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윤혜인은 전화가 오자마자 단 한 번의 신호음도 지나기 전에 받았다.“준혁 씨, 어떻게 됐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소원이 무슨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주 비서에게 최고의 인력을 동원해서 수색을 맡겼고 경찰에도 신고했어. 하지만 소원 씨가 실종된 장소에서는 소원 씨를 찾지 못했어. 아직 계속 수색 중이야.”이준혁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윤혜인의 성격상 무언가를 숨기려 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만약 소식이 계속 닿지 않는다면 그녀는 직접 나서서 소원을 찾으러 갈 것이었고 그러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소원이... 정말 위험한 상황인 건가요...”“걱정하지 마. 내가 경한이에게도 연락했거든. 경한이가 있으면 곧 소원 씨를 찾을 수 있을 거야.”이준혁이 차분히 말했다.“뭐라고요?!”그러자 깜짝 놀란 윤혜인이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육경한한테 그걸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그 살인자잖아요! 소원이가 서울에서 무슨 원한을 산 적이 있겠어요? 예전에 소원이네 아버지 회사가 망했을 때도, 빚을 내서 직원들에게 보상금까지 준 사람이에요. 서울에서 소원을 해치려는 사람은 육경한 말고는 없다고요!”“경한이가 아니야.”이준혁은 냉정하게 말했다.“혜인아, 나 믿어봐. 소원 씨는 경한이의 애 엄마야. 절대 소원 씨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 소원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경한이뿐이고.”1분, 아니 1초라도 더 지체하면 위험이 커질 수 있었다.그러나 이 말을 윤혜인에게 직접 전하면 그녀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뻔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이 정말 순수하게 유진이를 자기 아이로만 생각할 것 같아요?”하지만 윤혜인은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육경한은 항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그가 저지른 많은 행동들은 너무나 지나쳤고 윤혜인은 그가 유진이의 엄마라
이준혁은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한 후 주훈의 보고를 기다렸다.30분 후, 주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두 대가 있었지만 차 안이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원 씨의 핸드폰은 차 안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차량에서는 어떤 개인 물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차량의 번호판은 위조된 것으로 차량 소유자의 신원을 당장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이준혁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수색 범위를 넓혀 계속 찾아봐.”그러자 주훈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후, 이준혁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내심 그는 육경한이 소원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육경한과 소원의 관계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육경한이 소원을 향해 품은 감정은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컸다.아무리 얽히고설킨 감정이라도 그는 소원을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때문에 이준혁은 이 일이 단순한 오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하지만 자신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소원을 가장 빠르게 찾는 방법은 바로 육경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망설임 없이 그는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육경한은 마침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로 방민아와 함께 야식을 먹고 있었다.그와 이준혁은 최근 거의 교류가 없었다.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인연을 붙잡고 있는 김성훈이 아니었다면 이미 멀어졌을 관계였다.육경한은 이준혁이 중요한 용건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방민아 앞에서 대놓고 전화를 받았다.“응, 준혁아.”“어디야?”이준혁의 말투는 간결했다.“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지금 밥 먹고 있어.”육경한이 대답에 이준혁은 그가 소원의 실종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확신했다.그러나 분명 육경한 주변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소원이 서울로 돌아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았다.때문에 육경한이나 그의 주변 사람 외에는 의심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소원 씨에게 일이 생겼어
“말해봐, 서두르지 말고. 괜찮으니까 일단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내가 바로 갈게.”윤혜인은 애타는 목소리로 소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러자 소원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 사람이 잘 지내면 난 그걸로 충분히 행복해.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이 일로 죄책감 느끼지 않았으면 해...”이 말은 서현재에게 꼭 전하고 싶은 소원의 진심이었다.그녀는 서현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면 그는 자신을 원망하며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서현재가 하는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오히려 기억이 없기에 그는 복잡한 감정 없이 순조롭게 서진태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서진태 또한 그를 어렵게 만들지 않았다.소원은 유진을 되찾으려면 육경한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 싸움에 서현재가 엮이지 않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수월했다.무엇보다 소원은 서현재가 이 모든 일로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바랐다.그때 차에 간신히 시동이 걸렸고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통화가 끊어졌다.하지만 소원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오늘만 살아남으면 안지철의 무모한 행동만으로도 주석훈이 충분히 증거를 모아 재조사를 신청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윤혜인은 다급한 마음에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 제발 좀 도와줘요! 소원이 지금 위험해요! 누군가 소원이를 죽이려고 해요...육경한이에요. 틀림없어요. 그 나쁜 놈이 소원이를 죽이려고 하는 거라고요!”긴장한 나머지 윤혜인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진정해. 심호흡 한 번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말해봐.”이준혁은 태평양 건너편의 지사에서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윤혜인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은 그는 손짓으로 회의를 멈추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소원 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그러자 윤혜인은 눈물이 맺힌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 소
소원은 뒤에 있는 안지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그동안의 조사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안지철은 잔머리를 잘 굴리고 이익을 좇는 성격이긴 하지만 대단한 악행을 저지를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다.심지어 소원이 안지철의 이익을 건드렸다고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목숨을 노릴 이유는 없었다.결국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쫓아오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지시 때문일 것이다.‘설마...육경한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나한테 해를 끼치려는 걸까?’이때, 차 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보니 윤혜인이었다.소원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실수로 받기 버튼을 눌러버렸다.수화기 너머로 윤혜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아, 너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육경한 그 쓰레기가 너랑 아이를 뺏으려고 한다는 걸 말이야!”윤혜인은 오늘 주석훈을 찾아가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려다가 우연히 육경한의 소송장을 발견했다.주석훈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소송 내용을 본 윤혜인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육경한이 소원과 아이를 두고 싸움을 벌이려 한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주석훈에게 따지지 않았다.소원이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숨겼을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윤혜인은 육경한의 뻔뻔함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쓰레기 같은 놈, 내가 가서 그 자식한테 한마디 해야겠어! 정말 너무 화나!”분노에 가득 찬 그녀는 소원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흥분해서 말했다.소원은 간신히 차분하게 대답했다.“난 괜찮아. 그 사람 찾아가봤자 아무 소용 없어. 네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거야. 괜히 속만 상할 뿐이지.”“그래도 가서 욕이라도 해야겠어! 안 그러면 나 속 터질 것 같아. 요즘 이렇게 나쁜 사람 처음 봤다니까!”윤혜인은 단단히 결심한 듯 보였다.그리고 소원은 그녀의 말에 약간 안심했다.오랫동안 이렇게 악랄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이준혁에게서 잘 보호받고 있다는 뜻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안지철은 코피가 터져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병약한 여자 하나도 처리 못 해?”소종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운전 실력이 꽤 좋아 보였습니다. 저보다 나은 것 같아요. 저도 사람을 들이받은 적이 없어서... 감을 못 잡겠어요.”“빨리 끝내.”상대방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안지철은 몸을 떨며 말했다.“저 그만두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저는 오늘 밤이라도 바로 떠나겠습니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게요. 안 될까요?”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안지철은 그저 몰래 도망치고 싶었다.다른 방식이면 몰라도 사람을 죽이라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처음에 그는 소종에게 돈을 받고 유시연을 통해 혈액 샘플을 빼돌리게 했다.그러고는 일이 끝나면 바로 해외로 떠나겠다고 약속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하지만 유시연과 이전부터 내연 관계였던 그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다가 일이 지체되고 만 것이다.사실 안지철은 이미 내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정식 경로가 아니라도 은밀히 빠져나갈 방법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그런데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혼란스러워진 안지철은 소종에게 연락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소종은 그녀를 차로 들이받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라고요?”안지철은 살인을 저지를 용기가 전혀 없었다.그러자 소종은 말했다.“그래, 안 해도 돼.”안지철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안심하세요. 저 절대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겁니다...”“하지만 받은 돈은 전부 돌려줘야 할 거야. 잔금도 지급하지 않을 거고.”여전히 싸늘한 소종의 목소리에 안지철은 당황하며 외쳤다.“그건 안 됩니다!”“일은 제가 다 했잖아요. 약속을 어기시면 저도 입을 다물지 못할 겁니다!”안지철이 소종을 협박했다.“그럼 지금 당장 떠들어봐. 어차피 그 여자 오늘 죽지 않으면 당신 정체도 전부 탄로 날
하지만 만약 안지철을 뒤쫓는다면 그는 절박해져서 소원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은 주석훈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대신 상황을 문자로 알렸다.의외로 주석훈은 자고 있지 않았는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제가 이 사람에 대해 알아볼게요.]소원은 차로 돌아와 유시연의 집으로 다시 가 잠복할 준비를 했다.유시연을 돌파구로 삼아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었다.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는 육경한의 감정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했다.확실한 증거, 예를 들어 자백 같은 것이 필요했다.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육경한은 항상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고 매수한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혹적인 조건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또한 협박을 통해 입을 다물게 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가 매수한 사람들은 보통 쉽게 입장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었다.하여 소원은 증거를 더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특히 두 사람이 사적으로 교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를 증거로 활용할 수 있었다.이를 잘 이용하면 여론을 조성하거나 감정소를 압박해 육경한에 대한 재검사를 요구할 수 있었다.그렇게 차를 출발시켜 코너를 돌았을 때, 소원은 갑자기 정면에서 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차량은 눈부신 상향등을 켜고 있었고 그 빛 때문에 소원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눈을 깜빡인 찰나, 차량은 순식간에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그 속도는 마치 질주하듯 위협적이었다.이내 소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 차... 분명 나를 겨냥하는 거야!’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소원은 핸들을 급히 틀어 옆으로 차를 돌렸다.겨우 목숨을 건진 그녀는 차량이 은색 승용차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바로 조금 전 급히 떠났던 안지철의 차량이었다.소원은 곧바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급히 기어를 넣고 출발하려 했지만 차는 하도 낡아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시동이 꺼졌다.고요한
소원은 차에서 내려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그리고 그의 이름을 바로 불렀다.“안지철 씨.”남자는 깜짝 놀랐다. 이미 감정소를 퇴직한 그는 소원을 알 리 없었다.“누구세요?”그러자 소원이 가까이 다가서며 담담히 말했다.“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묻고 싶은 건, 이달 13일에 감정소의 혈액 샘플에 손을 댄 적이 있냐는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소원을 쳐다보더니 입을 움직였다.“무슨 헛소리 하는 거예요?! 난 벌써 퇴직했는데 감정소에 어떻게 손을 대겠어요?”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소원은 그의 표정에서 이미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다.하여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퇴직한 것 맞죠. 하지만 유시연 씨는 퇴직한 게 아니잖아요?”이 말에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유시연 씨랑 난 아무 상관 없어요.”남자는 소원이 이미 며칠 동안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또한 그녀가 자신과 유시연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입조심해요. 헛소리 계속하면 입 찢어버릴 거니까!”남자는 으름장을 놓았다.지금은 한밤중이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남자는 소원이 여자라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기회 삼아 위협하려 한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자신을 해치며 이 기회에 그를 경찰에 넘겨 조사하게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하며 말이다.“아까 안지철 씨랑 유시연 씨가 이 식당에서 차례로 나왔잖아요. 이 안에 그런 곳이 있나 봐요? 지금 제가 경찰에 신고하면 안지철 씨는 조사받게 될 텐데... 어떡할래요?”그러자 남자는 잠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당... 당신 나 따라다녔던 거예요?”“물론이죠. 안지철 씨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유시연 씨는 남편이 있잖아요. 그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소원은
“그건 절대 안 됩니다.”소원이 아무리 설득하고 애원해도 강백호는 단호했다.감정소에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고 강백호는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도무지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던 소원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벽에 적힌 ‘자원봉사자 모집’ 문구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소장님, 제가 자원봉사자로 일하면 안 될까요?”그러자 강백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고 소원은 급히 손을 들어 보이며 약속했다.“걱정 마세요. 감정소의 물건을 훔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제 인품이 어떤지는 주석훈 변호사님께 물어보셔도 됩니다.”하지만 강백호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다.“그래도 이렇게 하시면 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소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소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퇴직과 관련된 상황을 직접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작은 희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이렇게 솔직한 태도에 강백호는 오히려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게다가 그는 소원이 조사한다고 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녀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오히려 감정소에 대한 그의 신뢰는 더욱 확고해질 터였다.“자원봉사자 모집은 담당 직원에게 문의해야 합니다.”강백호는 말했다.“면접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 제가 관여하지는 않을 겁니다.”소원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감사합니다, 소장님.”곧바로 소원은 자원봉사자 모집 담당자를 찾아가 절차를 밟았고 비교적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자원봉사자로 합격했다.주 2회 근무 조건으로 그녀는 매번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성실한 태도로 인해 감정소 직원들에게도 호감을 얻었고 일을 하며 틈틈이 정보를 수집해 최근 반년 동안 퇴직 의사를 밝혔던 직원들을 파악했다.소원은 단 한 명의 정보도 놓치지 않으려 범위를 넓혀 조사를 이어갔다.육경한처럼 신중한 사람이 무언가를 꾸미려 했다면 반드시 정밀하게 준비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그 결과, 최근
“감사합니다, 주 변호사님.”소원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를 얻기가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너무나 성의껏 도와주자 소원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다음에 제가 수고비 추가로 드릴게요.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요.”“그럴 필요 없습니다.”그러자 주석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처음에 합의한 금액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저는 사건 단위로 일을 처리하지 시간을 기준으로 하진 않아요.”“예전에 이선 그룹 이준혁 대표님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이번 일도 이선 그룹 사모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거라 사건을 맡은 이상 전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소원 씨,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저와 상의하세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그렇게 주석훈과 헤어진 후, 소원은 주소에 적힌 감정 기관으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도착해서 본 기관은 규모도 크고 분위기가 엄숙했다.벽에는 여러 신고 관련 홍보 문구가 붙어 있었다.홍보 문구에는 ‘의사나 조수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익명 신고 시 거액의 포상이 지급된다’고 쓰여 있었다.이런 점을 보면 이 기관이 사법 당국에서 전문 기관으로 지정된 것은 인맥이 아닌 철저한 절차와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소원은 육경한이 어떻게 이런 철저한 검사를 피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주석훈이 소개해 준 동창, 강백호를 찾아가 감정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강백호는 말했다.“저희는 각 과정마다 최소 다섯 번 이상 검증을 거칩니다. 이렇게 철저히 검증하는 이유는 어떤 작은 오류나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초반 두 번의 검사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후반 세 번의 검사는 다른 기관으로 혼합 샘플을 보내 재검사하기 때문에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 재검사 기관들은 모두 비공개로 운영되며 샘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작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