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차분한 성격의 부모님이 있으니 교육한 아이들도 매우 뛰어날 테지만 육경한은 달랐다. 자기 자신도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 아이를 잘 교육할 리가 없었다.실수로 유진이 육경한의 그런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서웠다. 한번 각인된 기억은 그림자처럼 영원히 평생 따라다니게 된다.소원은 약을 윤혜인이 알려준 기구에 맡기며 어떻게든 아이를 그 처지까지 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돌아가는 길에 소원은 서현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나 외국 나가서 치료받으니까, 걱정하지 마요.]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두 사람은 전에 서로만 아는 암호로 문자를 보낼 때 점을 찍지 않기로 했는데 마지막에 점이 붙었다는 건 서현재가 보낸 문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외국으로 나가 치료받을 생각이라면 전화로 말하거나 만나서 말하지 이렇게 문자만 딸랑 보낼 리가 없었다.소원은 마음이 불안해져 미간을 찌푸리고는 얼른 택시를 불러 서현재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서현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로 나왔다. 유일한 연락처마저 없어졌다는 생각에 소원의 마음이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병원에 도착한 소원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이렇게 물었다.“현재야?”침대에 누워있던 남자가 몸을 돌렸지만 서현재가 아니었다.“누구세요?”상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소원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제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다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죄송해요. 혹시 전에 있던 환자는 언제 나갔는지 알아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오늘 아침에 들어왔거든요.”“아, 그러시구나. 죄송해요. 쉬세요.”소원이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몸을 돌렸다. 아마도 서현재네 가족이 서현재를 빼돌린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것저것 알아보니 확실히 육경한이 말한 것처럼 서씨 가문에는 대를 이을 사람이
비록 걱정되긴 했지만 아줌마가 있으니 그래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신경전을 펼치며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고 소원이 원하는 건 양육권이었기에 절대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이제 한주라는 시간이 흐르면 육경한도 통지를 받을 거라고 생가했는데 소원이 연락했던 변호사가 갑자기 선임 비용을 돌려주며 사건을 수임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서울에서 양육권 다툼에는 제일 좋은 변호사라 선임료가 비쌌지만 소원은 변호사의 능력을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유명한 변호사가 선임했던 사건을 못 하겠다고 다시 내려놓을 줄은 몰랐다.소원이 변호사를 찾아갔지만 변호사는 만나주지 않았다. 너무 억울했지만 변호사가 협박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로펌을 찾아가도 사전에 누가 언질이라도 한 것처럼 사건을 수임하는 사람이 없었고 상대가 육경한이라는 말만 들으면 모두 절레절레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윤혜인을 불러냈다. 카페에서 윤혜인이 소원의 손을 덥석 잡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원아, 너 말랐어.”소원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예전보다 찐 거야.”서현재와 같이 있으면서 쪘던 살이 아이를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생긴 골치 아픈 일로 다 빠지고 말았다.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나도 다 보여.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육경한이 아이를 뺏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윤혜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네.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아이를 뺏어가서는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소원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육경한의 손에는 유전자 감식 결과가 있는 데다 소원의 병원 이력, 소원의 아버지가 연루된 금융 문제, 그리고 소원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던 자료가 있었다. 여기서 하나만 공개되어도 생모인 소원은 양육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바로 육경한의 정신질환이었다. 육경한을 법정에 세울 수만 있다면 법원은 정신질환이 있는 육경환이 아
소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고마워. 혜인아.”윤혜인이 소원의 손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유진이가 그런 사람 밑에서 자라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찾은 변호사가 소원과 연락했다.“소원 씨, 안녕하세요. 저는 주석훈 변호사입니다.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주석훈은 먼저 소원에게 사건에 대한 분석을 들려줬다.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 다른 변호사와는 다르게 주석훈은 전문가 다웠고 핵심을 잘 짚었다.“소원 씨, 어떤 사건인지 잘 알겠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생부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거네요. 이 부분을 빼면 이 소송에서 이길 방법이 거의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소원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아이를 데려오고도 남았을 것이다.“소원 씨, 최근 1년간 육경한 씨가 계속 이 약을 복용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나요?”주석훈이 물었다.“확신합니다.”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육경한 옆에 있으면서 약으로 조증을 억제하고 있는 걸 봤고 이 병을 가진 지도 꽤 오래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그 병이 더 심각해졌을 뿐이다.“그래요. 육경한 씨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입증할 수만 있다면 이 소송에 이길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주석훈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었다. 이선 그룹에 있을 때부터 크고 작은 사건을 맡으면서 불패의 기록을 세워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퇴사하고 외국에 나간 것도 업무에 변화를 주고 더욱 많은 성장을 이룩해 모국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이 말을 들은 소원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법원 수속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모든 절차를 끝내고 나니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소원은 이따금 서현재는 잘 치료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날 주석훈과 식사를 마치고 나와 혼자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육연주였다.소원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는데
소원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육연주는 소원의 매혹적이고 예쁘장한 얼굴만 보면 자꾸 괴롭히고 싶었다.“따라다닐 때는 잘만 따라다니더니 쪽팔리긴 한가 보죠? 삼촌 애인으로 있으면서 몸 팔아서 소씨 가문에 조금이라도 보태겠다고 아등바등 버틴 거잖아요. 그러면 뭐해요. 소씨 가문이 약해 빠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기어오르지 못하는걸.”소원은 이 말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멍청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씨 가문이 누구 때문에 망했는데.’애초에 육경한이 핍박하지만 않았어도 소씨 가문이 그렇게 될 일은 없었다.육연주는 소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자기가 한 말에 소원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줄 알고 내심 통쾌해 앞으로 팔짱을 끼고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 알아요? 부모님이 그 모양이니까 딸도 다른 사람 가정이나 파괴하는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육연주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소원을 모욕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소원이 육연주의 귀싸대기를 날리려 했지만 손이 육연주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차가운 손 하나가 소원의 팔을 으스러지게 잡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소원은 팔목이 부러질 것 같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다가온 사람을 보고 육연주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더니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오빠, 와줘서 고마워. 이 미친 여자가 나 때리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육연주가 표독스럽던 아까와는 달리 애교를 부리자 소원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저기요, 왜 내 여자 친구에게 손을 댄 거죠?”목소리가 살짝 차가웠지만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고개를 들자 햇빛이 너무 강렬해 소원은 눈을 찡그렸다. 이내 상대의 조각 같은 턱과 점잖지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앞에 서 사람은 다름 아닌 서현재였다.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소원은 심장이 미칠 듯이 벌렁거렸다.‘돌아왔다고? 언제 돌아온 거지? 왜 아무 소식도 없이...’소원은 요새 소송 준비하느라 바빴다. 육경한과
육연주가 경멸에 찬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전에 육경한을 따라다니며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제 자기 머리 위로 기어올라 남자 친구까지 넘보려 하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소원은 얼굴이 얼얼했지만 귀싸대기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그제야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서현재의 모습에 소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소원이 음로론을 펼치려는 게 아니라 서현재를 치료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의 기억에까지 손댈 줄은 몰랐다.육연주는 소원에게 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서현재의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오빠, 가요. 예전에도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꼬시려 들더니 이젠 정신이 나갔나 보네.”서현재는 눈시울이 빨개진 소원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지만 소원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었다.육연주는 서현재의 팔을 잡아당기며 얼른 차에 타라고 재촉했고 서현재도 더는 캐묻지 않고 차로 걸어갔다. 소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급하게 쫓아가 서현재의 팔을 잡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흘러나왔다.“현재야, 나 소원이잖아... 나 못 알아보겠어?”소원은 참으로 예쁘게 울었다. 빨간 입술에 까만 머리, 얼굴은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게 가냘프면서도 부드러웠다.서현재는 왠지 모를 익숙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이내 육연주의 고함에 정신을 차렸다.“미쳤어요?”육연주가 소원을 힘껏 밀쳤고 소원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무릎이 찢어질 듯이 아픈 걸 봐서는 까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피가 카키색 바지를 뚫고 흘러나와 너무 처참해 보였다.육연주는 많이 아파 보이는 소원을 보며 잘못 건드렸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화가 한풀 꺾였다. 육경한의 태도를 보면 아직 소원에 대한 흥미가 남은 것 같은데 소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육경한에게 호되게 혼날 수도 있다. 육연주는 얼른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서현재를 당기며 말했다.
행인이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아가씨, 왜 그래요?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 수는 있는데 핸드폰으로 녹화하면서 가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이런 걸로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서...”그도 그럴 것이 소원이 너무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미녀는 울 때도 예쁘다고 소원이 마음 아팠던 행인은 이렇게 두고 가는 게 걱정되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괜... 괜찮아요.”소원이 찢어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행인은 점점 창백해지는 소원의 얼굴을 보며 시름이 놓이지 않아 한마디 더 물었다.“진자 괜찮은 거 맞아요? 아가씨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네. 정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소원은 행인의 따듯한 손길에 찬물을 끼얹기 싫어 이렇게 말했다. 곧 소송이 시작될 텐데 문제가 생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서현재 일로 크게 충격받았다 해도 딱히 추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더 큰 싸움이었다.소원은 두 팔로 바닥을 짚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소원이 벤치에서 미끄러지더니 이내 정신을 잃었다.“아가씨. 아가씨. 여기 119 좀 불러주세요...”그렇게 소원은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의사가 소원에게 수액을 놓아주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소원의 가족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행인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걸리지 않은 건 아닌지 의심하는 데 강압적이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당신은 누구죠?”목소리가 너무 차갑고 무거워 행인은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끼고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핸드폰 주인을 병원에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여자분이 더 피스 레스토랑 문 앞에서 쓰러졌는데 지금 제일 병원에 있습니다...”뚜, 뚜, 뚜.행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연결음이 들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행인은 상대가 병원비를 책임질까 봐 잽싸게 끊은 거라고
“넘어졌다고요?”육경한이 고작 한마디 했는데 이상준이 다시 속사포 랩을 늘어놓았다.“맞아요. 어떤 여자가 밀어서 넘어졌어요. 그 여자의 남자 친구랑 아는 사이인지 아가씨가 다가가서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 여자가 밀쳐내면서 욕까지 퍼붓더라고요.”다만 그 욕이 듣기 불편할 정도로 거북해 이상준도 다시 들려주지는 않았다. 운전기사가 조금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세히 듣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다 아가씨가 바닥에 앉아서 서럽게 울길래 다가가서 물어봤죠.”이상준이 보고를 끝내자 육경한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이상준이 말한 남자와 여자가 누군지 대략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됐어요. 이제 가봐도 좋아요.”육경한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이상준은 덤덤하던 육경한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말을 잘못한 줄 알고 후회했다.‘이 입이 문제야. 왜 항상 입을 잘못 놀려서 이런 상황을 만드는 건지.’“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이상준이 더 말할 엄두를 못 내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육경한의 비서가 뒤따라 나와 명함 한 장을 건네줬다.“이상준 씨, 입찰 자료는 황 매니저 주면 됩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이 명함을 가지고 황 매니저 찾아가면 됩니다.”어둡던 이상준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얼른 명함을 받으며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 황금 동아줄이라도 잡은 기분이었다. 비서의 말대로라면 입찰 서류만 문제없으면 낙찰인데 그럴 경우 억 단위의 성과급을 받을 수 있다.정말 대박, 아니, 초대박이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이상준은 너무 기쁜 나머지 비서에게 무릎 꿇고 인사하고 싶었다.“별말씀을요. 오늘 일은 수고 많았어요.”비서가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상준은 그제야 좋은 일을 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구한 사람이 육경한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 같았다. 또한 앞으로 매일 좋은 일 하나씩 하며 덕을 쌓아 오늘처럼 좋은 일이 생기게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병실.소원은 잠에 들었는지 쌔근쌔근한 숨소리가 들렸다. 육경한은 소
이 말에 소원의 표정이 변했다. 그제야 여기가 병원이고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전부 기억났다.‘현재를 만났는데...’슬픈 듯 아닌 듯한 표정이 소원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육경한은 그런 표정이 너무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아직도 꿈꾸지 말아야 할 걸 꿈꾸는 거야?”육경한이 경멸에 찬 말투로 말했다. 서현재가 돌아왔다는 사실과 이제 더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서현재의 기억을 조작하는데 육경한도 힘을 보냈을 것이다.아니,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거대한 슬픔이 소원의 마음을 덮쳤다.소원과 서현재는 마치 실험용 생쥐처럼 육경한과 서씨 가문에게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들이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는 빈껍데기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말은 똑같았다.마음이 복잡해진 소원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나가.”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정말 한시라도 소원을 불쌍하게 여기면 안 될 것 같았다. 밤새 옆에서 소원이 꿈을 꾸며 불안해하는 걸 지켜본 육경한은 마음이 살짝 약해졌고 유진을 만나게 해주는 것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육경한도 소원이 유진을 만나는 순간 다시 이런저런 꿍꿍이를 생각해 내며 그가 잠깐 한눈판 사이 아이를 데리고 멀리 훨훨 떠나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아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소원이 연이라면 아이는 연을 묶은 실과도 같아 실만 잘 지켜도 연은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미동도 없자 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링거 바늘을 뽑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소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소원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뭐 하는 거야?”소원이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너랑 한 지붕 아래에 있는 게 역겨워서 그런다. 네가 안 가면 나라도 가야지.”육경한도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나랑 있는 게 역겨우면 누구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