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장씨 아주머니도 소원이 다른 주인집 아가씨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마음씨가 고울뿐더러 하인을 대할 때 오만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소원은 장씨 아주머니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알고 이렇게 말했다.“제가 위병을 앓고 있다는 거 아주머니도 아시죠? 과일이라고는 하지만 하루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매일 이렇게 버리는 게 얼마나 아까워요. 싫지 않으시다면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과 나눠 드세요.”육경한의 지시로 매일 신선한 과일을 준비하긴 했지만 병실의 온도는 과일을 놓아두기에 적합한 날씨는 아니었다. 하여 그날 먹어 치우지 못한 과일은 전부 버리기 일쑤였다.장씨 아주머니도 이 말에 동의했다. 매일 버려지는 과일을 볼 때마다 아까웠던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소원이 이렇게 말하는데 한사코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활짝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가씨.”소원은 감사할 필요가 없다며 웃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이튿날 출근한 장씨 아주머니는 아들이 이렇게 맛있는 과일은 처음 먹어봤다고 좋아하던 걸 소원에게 들려줬다.소소한 행복에 만족하고 환하게 웃는 장씨 아주머니가 소원은 너무 부러웠다. 소원이 추구하는 것도 이런 소소한 행복이었다.같은 날, 점심 식사가 끝나고 보디가드가 자리를 비우자 소원이 장씨 아주머니에게 부탁했다.“아주머니, 혹시 밖으로 소식 하나만 전해주면 안 돼요?”장씨 아주머니가 물었다.“누구에게 전하는 소식인데요?”출근 전 위에서 받은 지시는 소원의 행동을 감시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육경한을 따라다니는 소종이 내린 지시라 장씨 아주머니도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번 소원에게 불리한 내용은 제외하고 보고했다.“제 남편에게요.”소원의 말에 장씨 아주머니의 입이 떡 벌어졌다.“남편이 따로 있다면 대표님은...”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억지로 이곳에 끌려왔다고 말했다. 둘 사이에 원한이 있는데 육경한이 일부러 남편과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곳에
소원이 서현재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 건 여기가 서울에서 제일 좋은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를 그 정도로 중시한다면 제일 좋은 병원에서 치료하게 하는 게 맞았다. 게다가 이 병원은 정형외과가 아주 유명했기에 90% 이상은 이 병원에 있을 것이다.장씨 아주머니는 그런 소원이 너무 마음 아팠지만 무조건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 그저 이렇게 말했다.“아가씨, 최선을 다해볼게요.”이 말만 해줘도 소원은 너무 감격스러워 얼른 장씨 아주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고마워요. 아주머니. 정말 너무 고마워요...”그 뒤로도 장씨 아주머니는 평소와 같이 출근했다가 다른 간병인과 교대하고 퇴근하고는 이튿날 다시 출근했다. 육경한은 이번에 매우 신중했고 간병인이 퇴근할 때도 전문적인 인원이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밖에서 동향을 살피다가 다시 병원까지 데려왔다.소원은 이를 지시한 사람이 소종이라고 생각했다. 육경한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에게 두 번이나 당한 것이 분해 소원을 대할 때마다 신중을 기하긴 했지만 육경한이 소원에게 도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 마음이 원망과 사랑 그 어디쯤이라 해석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서로 죽도록 미워하면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소종은 육경한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육경한의 경지는 일반인이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틈을 엿보던 장씨 아주머니는 드디어 기회를 잡고 출퇴근길을 책임진 운전기사에게 직접 만든 밑반찬을 건네줬다. 밖에서 파는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던 운전기사는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장씨 아줌마의 밑반찬에 푹 빠져 장씨 아줌마에 대한 경계를 살짝 풀었다. 장씨 아주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밑반찬을 더 건넸다. 그렇게 차 안에서 장씨 아줌마가 건넨 밑반찬과 배달 음식을 섞어 먹은 보디가드는 배탈이 나고 말았고 장씨 아주머니는 운전기사를 집으로 데려와 잠깐 쉬라고 했다.운전기사는 대표님
장씨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육경한의 잘생김과는 다르게 따듯함이 느껴지는 잘생김이었다. 이렇게 명랑하고 잘생긴 청년이 소원과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다 침울하면 끝까지 이어지기 힘들었다.서현재가 쪽지를 꺼내고는 아래를 힐끔 쳐다봤다. 장씨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자 서현재는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더니 이내 쪽지에 뭔가를 적어 비행기에 달더니 아이에게 줄 초콜릿도 함께 매달았다.장씨 아주머니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에 쪽지를 챙긴 후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도착한 장씨 아주머니는 심장이 파르르 떨렸지만 다행히 운전기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오후, 병원으로 돌아간 장씨 아줌마가 기회를 엿보다 소원에게 쪽지를 건넸다. 쪽지에는 서현재의 깔끔하면서도 정갈한 글자가 씌어있었다.[아직은 연락할 방법이 없어요. 방법을 도모하는 중이에요.]소원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게 유진과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며칠간 아줌마와 유진에게 연락이 닿지 않은 소원은 너무 두려웠다. 아줌마는 항상 소원을 따라다녔기에 소원에게 일이 터졌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소원은 전에 아줌마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면 바로 유진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고 그럴 수 있게 다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쯤 외국으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소원은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유진과 아줌마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육경한이 며칠째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육경한이 다시 나타난 건 10일 뒤였다.소원은 병원에서 육경한의 한 별장으로 옮겨졌다. 다시 나타난 육경한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차갑기만 하던 육경한에게 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활기찬 분위기에 소원은 불길함을 느꼈다.소원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육경한이 먼저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이번에도 소원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했다.육경한이 그쪽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더니 남자아이의 어깨를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아, 엄마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봤다. 꿈에서도 그리던 이름이 이제 현실이 되었고 아빠,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생겼다.소원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유진이 놀랄까 봐 그저 온몸을 미친 듯이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엄마...”유진이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불렀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소원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울먹이더니 이내 통곡하기 시작했다.“흑... 아...”유진이 가까이 다가와 그런 소원을 꼭 끌어안더니 놀랐는지 따라서 울었다.“엄마...”그렇게 한참 동안 울기만 하던 소원이 눈물을 닦아내더니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나가서 아줌마랑 놀고 있어. 이따가 찾으러 갈게.”유진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줌마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줌마는 그런 소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옆에 있는 육경한을 보고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유진을 데리고 나갔다.두 사람이 떠나자 소원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반격의 여지 없이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육경한...”절망한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웠다.“말해. 원하는 게 뭐야? 도대체 뭐 하고 싶은 건데?”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보며 비꼬기 시작했다.“소원아, 일단 저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부터 말해줘.”여러 사람을 통해 조사한 끝에 드디어 단서를 찾아냈지만 믿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아이를 찾기 전까지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정원에서 유진을 만나고 나니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친자감정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래도 소원에게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친자감정을 의뢰했고 결과도 예상을 비껴가지는 않았다.유진은 다름 아닌
“그 애는 너 같은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유진은 육경한의 냉혹하고 왜곡된 교육 방식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원은 만약 자신이 고생 끝에 낳은 아이가 육경한의 가르침을 받아 똑같이 냉정하고 무자비하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된다면 차라리 아이를 처음부터 낳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 생각했다.“그 애를 놔줘, 제발 보내줘...”소원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원, 이 아이를 낳은 목적이 뭐야? 날 망가뜨리고 복수하려는 거였어?”소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아이를 낳아놓고도 얌전히 있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육경한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왜 내 아이가 다른 남자를 아빠라 부르게 하냐고. 죽고 싶어?”남자는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소원의 옷깃을 거칠게 붙잡았고 그녀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죽고 싶어. 정말 죽고 싶다고! 내 가족들은 다 죽었어. 나도 살아선 안 되는 사람이야!”울다 웃기를 반복하는 소원의 모습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걔는 살아남았어. 너무 강하게 버텼어. 내 병투성이인 몸에서조차. 그 강인함이 나를 두렵게 만들 정도로.”소원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유진이였다.태어나던 과정이 극도로 위험했지만 이 아이는 살아남을 운명을 타고났다. 세상에 나올 운명이었던 것이다.“육경한, 난 너를 증오해.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왜 안 죽었어? 네가 죽으면 얼마나 좋아!”“이제 연기 그만둔 거야?”육경한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안타깝게도 난 살아 있어. 아주 잘 살아 있다고. 그리고 만약 죽더라도 널 데리고 갈 거야.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니까.”마지막 말을 뱉고 나서 육경한 스스로조차 어리둥절해졌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기 시작했다.“하하하하, 소원. 내가 널 사랑한다? 정말 웃기는군, 하하하...”188cm가 넘는 남자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눈물
그러나 소원이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문을 나서면 그녀가 유진이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그 후로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혈연관계 99.99%라는 보고서를 바라보며 비참하게 웃었다.‘정말 아이를 원해서 이러는 걸까? 아니, 내 생각대로라면 육경한은 유진이를 날 조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로 보는 거야.’공허한 눈빛으로 곧 소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육경한, 날 죽이려는 거지? 그렇지?”이 말에 육경한의 심장이 날카롭게 관통당하는 듯했다.가슴이 파이고 허물어지고 썩어가는 기분이었다.육경한이 소원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고 증오도 진짜였다.하지만 소원은 왜 언제나 독을 품은 위험물처럼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직성이 풀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너희 엄마 만나고 싶어?”죽어 있던 소원의 마음이 조금씩 되살아났다.그녀는 꼭두각시처럼 고개를 돌려 육경한을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지금...뭐라고 했어?”“너희 엄마 살아 있어.”육경한이 말했다.이 한마디에 소원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었다.마음속에 있던 충동심과 저항심 모두 사라졌다.아들, 그리고 그녀의 엄마까지, 육경한은 이제 모든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결국 소원은 마치 생명 없는 인형처럼 남자의 무릎에 안겼다.턱이 소원의 머리카락 위에 닿자 육경한은 그녀의 향기를 탐닉하듯 들이마셨다.“소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고집부리지 마, 응?”육경한은 꼭두각시 같은 소원이라도 자신의 품 안에 있으면 차갑고 단단했던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거칠게 입을 맞추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항복하길 바라는 거라면 항복할게. 그러니까 더는 도망치지 마. 앞으로도 절대 도망가지 마.”이것은 육경한의 첫 번째 항복이었다.비록 두 개의 강력한 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그는 이 여자에게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을
“엄마...”소원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주체할 수 없이 전미영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엄마... 엄마...”소원은 흐느끼며 전미영을 부르고 또 불렀다.하지만 전미영은 마치 유리창 속에 전시된 마네킹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한참 울고 나서야 소원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전미영의 어깨를 흔들며 다급하게 물었다.“엄마, 엄마 왜 이래요? 저 기억 안 나세요? 저예요, 소원이요. 엄마 딸이잖아요. 저 소원이라고요.”마침내 전미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던 상태에서 입으로 희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아... 아...”몇 차례 이상한 소리가 나오더니 그녀의 입가에서는 침까지 흘렀다.소원은 더 이상 전미영을 건드릴 수 없었고 그저 눈물범벅을 한 채 육경한을 돌아볼 뿐이었다.“우리 엄마 왜 이러시는 거야?”평소 강인했던 그녀, 특히 육경한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는 전사 같았던 그녀가 이렇게 산산조각난 것은 드문 일이었다.가슴이 찔리는 듯한 통증에 육경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잠시나마 소원을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결국 손을 뻗지 않았고 냉정하게 설명했다.“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야...”짧은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전미영이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때문에 그녀가 정상인처럼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했다.몇 년 전, 전미영은 계속 누워만 있었고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그 후 육경한은 최고의 의사를 찾아 전미영을 최고급 요양원으로 보냈고 끊임없는 노력 끝에 그녀는 손발을 조금 움직이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지금 TV를 보는 것도 요양원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는데 뇌를 자극하기 위한 방법이었다.하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전미영은 여전히 거의 아무 반응이 없었으니 말이다.엄마의 익숙한 얼굴을 보자 소원의 머릿속에는 과거에 봉인해 두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불이 켜진 부엌, 김이 모
다음 날, 소원은 피투성이가 된 소진용의 몸을 보았다.머리는 크게 함몰되어 있었고 한쪽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한때 소씨 가문의 영광을 상징했던 황금빛 응접실 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아빠가 사라지자 그녀의 세상도 무너져 내렸다.소원은 엄마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지금 나타난 전미영의 존재는 그녀에게 족쇄나 다름없었다.그리고 이 족쇄는 소원을 완전히 속박했다.곧 육경한은 손을 뻗어 소원은 어깨를 다독였다.“아아아!!!”소원이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그녀의 눈에 비친 육경한의 손은 피투성이였는데 그 피는 모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의 피였다.이러한 반응에 육경한은 공중에 손을 멈추며 표정이 어두워졌다.소원의 안에 깊이 새겨진 거부감과 혐오감이 선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그녀는 육경한을 증오하고 싫어했다.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가 자신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지.“날 이렇게 두려워하면 곤란하지. 우린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텐데, 안 그래?”사악한 미소를 짓는 육경한의 눈빛에는 살벌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같이 살다니!”소원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원수끼리 같이 사는 거 본 적 있어? 육경한, 너 진짜 미쳤구나.”그러자 육경한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동안 내가 미치지 않은 것도 기적인 거야.”하지만 육경한은 이미 내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소원이 떠난 이후, 그는 밤마다 뒤척이며 분노와 공포 속에 휩싸였다.그녀가 자신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상상하면 외로움의 수렁에 빠져들었다.그 수렁은 끝도 없이 깊었고 육경한은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머리가 곧 폭발할 것 같은 느낌과 더불어 소원은 언제든지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너무 비열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넌 우리 엄마를 숨겼고 유진이를 찾아낸 것도 결국 날 협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거잖아.”“비열하다고?”육경한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건 다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