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이 다가서자 추성호는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보디가드를 자기 앞에 서게 했다.“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경고하는데, FTT 운은 이제 기울었어. 앞으로는 추신이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 될 거야. FTT는 2위? 3위? 아니, 아주 하잘것없는 기업이 될 수도 있지. 당신이 아직도 무소불위의 1위 대기업 회장인 줄 알아?”추성호가 당당하게 비웃었다.“게다가 사람을 막 잡아가는 건 범죄라고. 범죄자 주제에 어디서 이렇게 당당한 거야?”하준의 눈썹이 꿈틀했다.이때 문이 열리면서 경찰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중 한 명이 실내 상황을 둘러보더니 바로 하준에게로 다가왔다.“양유진 씨와 서경주 씨가 강여름 납치 혐의로 최하준씨를 신고했습니다. 같이 서로 가주시죠.“봤지? 내가 뭐랬어?”추성호가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뭐가 국내 최고의 재벌이야? 이제 그 자리는 내놓아야지.”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추성호를 쳐다보더니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양유진하고 무슨 관계야?”“별 관계는 없는데. 뭐, 공통의 적이 있었달까?”추성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리고 지금 이런 때 와이프를 되찾지 않는다면 바보지.”하준의 날카로운 입술이 굳게 닫혔다. 추성호가 하는 소리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의 배후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최하준 씨, 갑시다.”경찰이 수갑을 채웠다.“그 많은 사람들이 뻔히 보는 가운데 사람을 끌고 가다니, 증인과 물증이 모두 충분합니다. 당장 경찰서로 가서 강여름 씨가 어디 있는지 사실대로 부는 게 좋을 겁니다.”“회장님….”전성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일단 윤형이나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지.”하준은 피로 얼룩진 윤형을 쳐다보았다. 너무 출혈이 커서 의식을 찾는대도 멀쩡할지 걱정이었다.추성호 옆을 지나면서 하준은 냉랭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추동현이 네 배후지? 둘 다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어.”시선에
최진의 눈은 온통 핏발이 섰다. FTT의 신제품 자료가 모두 빠져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분노하고 슬프지는 않았다.“우리 윤형이가 추신이랑 무슨 원수를 졌다고 애를 장애로 만들어? 아들이라고는 이거 하나인데.”그러면서 실성한 듯 통곡했다.“잘한다, 잘해. 윤형이는 지적 장애고, 아버지는 중풍에 하준이는 경찰에 잡혀갔어. 우리 집안은 이제 끝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최진을 바라보는 최란의 눈시울이 고통으로 붉어졌다.‘그래. 내가 너무 어리석어서 온 집안을 다 망쳤어.추동현,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매정하고 독할 수가 있지!대체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최란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추동현을 찾아야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들어봐야 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전성이 초조한 얼굴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단 며칠 만에 FTT가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병원에서 나오자 정화가 바로 달려와 전성의 팔을 잡았다.“이제 어떡하죠?”“회장님이 나오시면 뭔가 말씀이 있으시겠지.”전성이 한숨을 쉬었다.“아니, 내 말은… 이제 FTT가 망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요.”민정화가 뭔가를 상당히 망설이며 말했다“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회장님에게 굽신거리며 살 거예요?”“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는 거지?”전성의 안색아 확 변하면서 경고했다.“난 팩트를 말하는 것뿐이에요. 사람이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룡의 많은 고수들이 그렇게 생각해요.뭐, 한때 FTT의 최씨 집안에서 우리 윗대의 어르신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니 우리도 그 집의 후손을 돌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요. 이제 그 집안은 망해가는데 계속해서 그 사람들에게 굽신거린다는 건 좀 말이 안 되지 않나요?”민정화가 슬슬 구슬렸다.“두고 보세요. 이제 지룡에서 사람들이 계속 탈출할 거라고요. 이제 FTT는 여러 적에게 공격을 받을 텐데 그러면
경찰서.끌려들어 가던 하준은 마침 안에서 최양하를 데리고 나오는 추동현을 보게 되었다.세 사람의 대면, 최양하는 최하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벌써 보석으로 풀려날 줄은 몰랐구나.”하준은 너무나 멀쩡한 최양하를 흘끗 쳐다보더니 그럴싸하게 차려입은 추동현을 보고는 웃었다.“이제는 아주 숨길 생각도 없으시군요?”“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추동현이 담담히 말했다. “양하는 내가 데려가마. 이제 그 집안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다. 증거가 있으면 와서 고소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하가 자료를 유출했다는 것은 너희 추측일 뿐이지 증거가 없어서 말이야.”“둘이 아주 부자답군요.”하준이 싸늘하게 양하를 노려보았다.“최양하, 네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 정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을 했나 보군. 네 아버지랑 아주 똑같구나.”최양하가 억울한 얼굴로 막 입을 열려는데 추동현이 큭큭 웃었다.“당연히 나와 한 편이지. 앞으로 성도 추양하로 바꾸게 될 거다. 아들이라고 이 녀석 하나인데 그간 너에게 너무 억울한 취급을 받았어. 그간 그꼴 보고 참느라고 힘들었다.이젠 완전히 달라졌다. 앞으로 우리 양하를 보면 예의를 차려서 대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앞으로 너희 최씨가 우리 양하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험한 꼴 보게 될 거야. 최윤형을 본보기로 삼으면 되겠구나.”하준의 이마에서 시퍼런 심줄이 돋았다.최양하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동현이 다정하게 양하를 바라보았다.“우린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최양하, 내가 그냥 이렇게는 넘어가지 않을 거야.”하준이 싸늘한 시선을 최양하의 등에 꽂았다.최양하는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아는 하준은 그야말로 무슨 짓이든 할 인물이었다.추동현이 덧붙인 말이 아니었다면 형님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증오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최양하는 체념한 채 추동현을 따라 주차장으로 갔다.추동현은 최양하에게 차 키를 던지며 싸늘하게 뱉
최양하가 이어서 외쳤다.“아버지는 우리 어머니를 전혀 사랑하지 않죠. 수십 년 간, 어머니는 그저 도구였어요. 그러니 아들인 내가 기꺼울 리도 없겠죠.”“계속해보거라.”추동현이 담담한 말투로 천천히 뱉었다.그 담담한 모습을 보니 최양하는 더욱 소름이 돋았다.“FTT 안에 스파이가 있는 거겠죠. 그 사람이 신제품 자료를 빼돌렸을 테고요.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형님의 주의력을 돌리고 내가 FTT의 배신자라고 믿게 만든 겁니다. 아니면 저를 최씨 가문에서 철저히 갈라내기 위해서 일 수도 있고요.”“역시 내 아들이구나. 추리가 훌륭해.”추동현이 팔짱을 꼈다.“이번 일로 네게 아주 실망했다. 그러나 내 아들이니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지. 앞으로 우리 추신을 위해서 힘써준다면 네 몫이 섭섭하지는 않을 게다.”“됐습니다. 아버지 말씀이라면 믿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으니까요. 제 아버지지만 저는 평생 아버지처럼 비열한 냉혈한은 본 적이 없습니다.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위해서 그 많은 자금을 출자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상처 주실 수가 있습니까? 전 영원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최양하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추동현을 노려보았다.추동현은 그 말을 듣더니 웃었다.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너 따위의 용서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나? 너무 자아가 비대한 거 아닌가? 내 곁에 서지 않겠다면 마음대로 해라. 어쨌든 내가 아들이 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그러더나 추동현은 차에 올라탔다.시동이 걸리더니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추동현이 얇은 입술을 벌려 싸늘하게 최양하를 쳐다봤다.“안타깝지만 내게서 떨어져 나간다고 최씨 집안에서 널 아껴주지도 않을 거다.”매연 냄새만 남기고 차는 떠났다.최양하는 그저 망연자실해서 서 있었다.하루 사이에 최양하는 FTT의 배신자가 되었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고 아버지는 아끼는 혼외자식을 두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했다.‘하아아….’처량하게 화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쩌다 인
이때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추동현이 즉시 다정한 얼굴을 하고 돌아보았다.최란도 고개가 돌아갔다. 젊은 여자가 일고여덟 살 된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남자아이가 추동현에게 와락 안겼다.“아빠!”최란은 머릿속에서 콰르릉하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여자와 아이를 쳐다보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은 하진 그룹의 딸 하정현이었다. 백지안과도 매우 친했던 하정현은 예전에 파티장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안녕하세요?”하정현이 최란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죄송해요. 동현 씨랑은 오래됐네요. 얘가 우리 아들이에요.”최란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하정현의 말이 망치처럼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추동현, 이 나쁜 자식!”최란이 손을 들어 추동현의 낯짝에 분노의 따귀를 올려붙였다.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추동현의 손에 밀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최란,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추동현이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최란을 노려보았다.“당신의 그 큰언니 기세, ‘무조건 내 말 들어’의 태도, 내가 FTT의 힘을 빌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수십 년을 그렇게 참았을 것 같아?”“처음부터 날 이용할 생각으로 접근했군. 날 사랑한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었어!”최란의 두 눈에서 절망의 눈물이 흘러내렸다.“당연하지! 다른 놈의 애까지 딸렸었는데!”추동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칼날처럼 예리했다.“이제 FTT는 망했어.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이혼 협의서는 사람 시켜서 보내도록 하지. 즉시 사인해서 돌려보내는 게 좋을 거야.”“이 쓰레기 같은 놈.”최란은 울분이 치솟았다. 눈에서 남편의 일탈에 대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우리 집안과 FTT를 다 빨아먹고 나니 나는 이제 차내버리겠다, 이건가? 꿈 깨시지. 당신의 그 악랄한 진면모를 다 공개해 버리겠어.”“할 테면 해봐. 우리 추신에서 랜들의 반도체 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누구라도 우리와 협력하려고 할
경찰서, 새벽 6시.이주혁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왔다가 로비에서 서경주와 양유진을 만났다.이주혁을 보더니 서경주는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최하준을 보석하러 왔겠지. 하지만 그렇게 쉽게 데리고 나갈 수는 없을 걸세. 여름이가 어디에 있는지 한시라도 빨리 부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해주게.”“최선을 다하겠습니다.”이주혁이 미간을 문지르며 곁눈질로 양유진을 흘끗 보았다.두 사람은 평소 안면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최근 몇 년간 진영그룹은 맹렬한 속도로 성장해 의약 업계의 선두 주자 역을 하고 있으며 그게 모두 양유진의 노력 덕분이라는 내용이었다.인터뷰에서는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번에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품격있는 모습에 차가운 시선이 더해지면서 카리스마까지 더해진 듯했다.양유진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이주혁은 곧 시선을 거두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5분 뒤 하준이 심문실로 나와 이주혁과 대면했다.하준의 상기된 뺨을 보고 이주혁은 한숨을 쉬었다.“하준아, 내가 네 얼굴 한 번 보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추신 쪽에서 압력을 넣었던가?”하준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이제는 추신의 위세가 대단해서 나도 함부로 덤비지 못하겠더라. 이번에는 영식이네 부탁해서 이리저리 줄 대서 간신히 보러 온 거야.”이주혁이 사뭇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나한테 맞춰주지 않으면 나도 널 보석으로 꺼낼 방법이 없어.”“여름이가 어디 있는지 대라는 거지?”하준이 힘없이 큭큭 웃었다.“다들 보는 데서 대놓고 사람을 데려갔잖아. 지금 양유진, 아버님, 화신 중역들도 여름 씨랑 연락이 안 된다고 난리야.”이주혁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네가 한 짓은 완전히 납치라고. 전에는 네가 두려워서 신고를 안 했는지 몰라도 요즘 FTT에 내유외환이닥치니 양유진이 아버님과 손을 잡았어. 더 이상은 널 겁내지도 않는다고.”하준은 입술을 핥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섬에 들어갈 때
다시는 그 귀찮은 남자의 품에서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니 여름은 하루를 편안히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뒤척거리기만 할 뿐 잠을 이룰 수 없었다.마음이 불안한 것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어제 하준이 떠날 때 보여준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그렇게 다급히 떠난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하준의 지위로 생각해 봤을 때 누구도 하준에게 위협이 되겠는가?아침 8시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쉐프는 맛있는 식사를 잔뜩 준비해 주었지만 영 입맛이 돌지를 않았다.아침 식사를 끝내고 산책을 나갔다. 점심때가 되니 멀리서 헬기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하준이 돌아오는 줄 알았다.‘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이야.’그러나 착륙한 헬기에서 튀어나온 것은 양유진이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머리를 휘날렸다. 검은 두 눈이 여름의 몸에 떨어질 때는 매우 복잡한 심경이 스치는가 싶었지만 곧 기쁨으로 가득 찼다.“여름 씨! 마침내 찾았군요.”양유진이 여름을 향해 달려왔다.여름은 멍하니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닌가 싶었다.이곳에 처음 끌려왔을 때부터 양유진이 자신을 찾으러 오는 꿈을 꾸고는 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름은 그런 희망을 버리고 있었는데 정말 양유진이 온 것이다.그러나 양유진이 다가서기도 전에 집사가 여름의 앞을 막아섰다.“거기 서. 이분은 우리 사모님이시다. 관계자 외에는 접근할 수 없다.”집사가 매서운 눈으로 양유진을 노려보았다.“사모님?”그 말을 들은 양유진은 주먹을 꽉 쥐더니 냉소를 지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요. 당장 비키는 게 좋을 거야. 당신들 고용주인 최하준은 이미 잡혀갔어.”집사는 흠칫했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유진이 데려온 사람들이 달려들어 제압해 버렸다.“너무 보고 싶었어요.”양유진이 여름에게 뛰어오더니 다정하게 여름이 뺨을 어루만졌다.꼬박 한 달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아픈 심장을 달랠 방법은 술로 마비시키는 것뿐이었다.그러나 여름은
“그런 게 아니에요.”여름은 양유진의 싸늘한 눈빛에 흠칫했다. 그런 눈빛의 양유진은 처음이었다.“미안해요, 놀랐나 보네요.”양유진은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다시 여름을 안았다. 말투에 괴로움이 묻어 있었다.“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한 달 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몰라요. 최하준이 당신을 데려가는 걸 보고만 있었던 내 무능함이 너무 싫었어요.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최하준과 사랑에 빠져나와 이혼하겠다는 건 아닐까 두려웠어요.”양유진의 말을 들을수록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아팠다.“아니에요, 내가 미안하죠. 난….”최하준과 보낸 한 달을 되돌이켜 보니 여름은 양유진을 볼 면목이 없었다. 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특히나 두 사람의 신혼 첫날 밤마저도 최하준과 보내지 않았던가?생각할수록 여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우리 일단 여기를 떠납시다. 아버님이 무척 걱정하셨어요.”양유진은 여름을 감싸 안고 헬기에 올랐다.헬기가 이륙했는데도 여름은 아직 이게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잘 안됐다.결국 진짜로 양유진에게 구출되기는 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 다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아갈 수는 없었다.“아, 유진 씨.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없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그리고 난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여름은 멍하니 물었다.“태평양의 어느 섬입니다. 최하준이 해외에 사두었던 섬이라고 해요. 차명으로 사두었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경찰에 최하준이 내 아내를 납치했다고 신고를 해서 찾을 수 있었던 겁니다.”양유진은 참을성 있게 여름에게 설명해 주었다.“애진작부터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최하준이 당신을 데려갈 때 경찰에 신고하면 가족을 풍비박산 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나 하나 살자고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여름은 헉하고 숨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