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다리를 다친 줄 알고 움찔했는데 자기 상처가 아니었다. 여름의 것이었다.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춰보니 여름의 아랫도리와 이불이 난리였다.아무리 자신이 경험이 없다고 해도 이건 생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런데 지난번 생리 이후로 이제 겨우 20일 정도 지났는데 왜 또 왔지?’순식간에 하준의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지난번 그것이 생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때가 딱 가임기인데.그러면 그때 생리가 아니었던 건가?그러면 그 피는 어디서 난 거지?’하준은 그때 해변 바위에서 미끄러져 생겼던 상처를 생각했다. 한군데가 이상하게 무엇에 찔린 것처럼 깊었던 것이 기억났다.여름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하준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여름은 깨어나서 곧 자기 몸의 이상을 발견했다.생리였다. 날짜를 따져보니 확실히 맞았다.속옷을 버린 것을 하준이 발견하지 못했기를 바랐다.그러나 어쨌거나 오래는 속일 수 없을 터였다.‘뭐라고 말하지?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일찍 왔다고 하나?아, 모르겠다. 일단 씻자.’여름은 일어나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거대한 모습을 발견했다. 우아한 다리를 포기고 해를 등지고 있어 모습이 역광이라 모호하게 보였다.여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몰려왔다.하준이 두 손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모으는 것이 보였다. 또렷한 두 눈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자기 살을 찔러서라도 생리를 가장하고, 또 그걸 덮기 위해 바위에서 굴러떨어지고… 꽤 애썼어.”여름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하준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데 변명해 봐야 소용 없다.“내 사랑을 받으면 마음대로 나에게 사기를 쳐도 되나?”하준이 일어섰다. 싸늘한 모습이 침대 가로 걸어왔다.“생리 중이니까 나는 당신을 전혀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야. 믿어져?”여름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냉랭하게 맞섰다.“생리 기간에 관계를 가지지 않는 걸 무슨 은혜로 생각하지 마. 웃겨, 정말.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생리 기간에 여자랑 관계하지 않아. 피가
“그만.”하준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경고했다. 눈에서는 한기가 흐르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여름의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찢었다.그간 여름이 온순하고 가만히 있어서 드디어 익숙해져서 생각을 바꾸었구나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여름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여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자 어마어마한 공포가 엄습했다.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면 당신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한꺼번에 다 매장시키겠어.”“당신은 미치광이, 악마야!”여름은 저주를 퍼부었다.“언젠가는 주변 사람이 모두 당신을 배신하고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 모두가 다 당신을 증오하고 침을 뱉고, 회사는 망하고 당신은 땡전 한 푼 못 건질 거라고.”“그래, 욕해 봐. 아무리 욕해도 난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하준은 비통함을 꾹 눌러 참았다.“이번에 임신이 안 되면 다음번에, 한 달로 안 되면 두 달을, 당신이 임신할 때까지 계속할 거야. 난 얼마든지 당신이랑 보낼 준비가 되어 있어.”그러더니 하준은 나가버렸다.방문을 나설 때쯤 뒤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속이 쓰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저주밖에 못 받는 신세라니.‘하아, 나도 놓고 싶다. 하지만 양유진과 여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여름의 손을 잡고 지옥으로 뛰어들겠어.’서재에서 하준은 한 잔, 또 한 잔 와인만 들이켰다.전에는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지금은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휴대 전화가 울려 받아 보니 초조한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큰일 났습니다. 랜들에서 오늘 한발 앞서서 자기네 신개발 반도체를 발표했습니다. 그런 그쪽 반도체 데이터가 우리 것과 똑같습니다. 게다가 저희 실험실의 반도체 관련 자료가 모두 사라졌습니다.”“뭐라고?”하준은 벌떡 일어났다. 술잔이 털썩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분노에 소리를 질렀다.“지룡 녀석들에게 가서 실험실을 지키라고 했잖아? 어쩌다가 데이터가 모두 사라져?”“그건 조사
“여름아, 여름아….”하준은 아무 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여름의 입술을 탐할 뿐이었다. 마치 영원히 헤어질 사람과 마지막 키스 나누는 것 같았다.하준의 광기 어린 키스에 여름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거의 질식할 때쯤이 되어서야 하준은 여름에게서 입술을 떼더니 힘껏 품에 안았다.“내가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하준이 잔뜩 가라앉은 소리로 여름의 귀에 속삭였다.여름은 흠칫했지만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싸늘한 말투로 뱉었다.“어, 갈 거면 빨리 가. 매일 매일 그 꼴 보기 싫었거든.”“최대한 빨리 돌아올게.”하준은 여름의 귀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여름의 몸은 감전이라도 된 듯 하준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기다리고 있어.”하준은 여름을 놓아주더니 그윽한 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야 하준은 욕실을 떠났다.여름은 샤워기 아래서 멍하니 서 있었다.‘뭐야, 잠깐 다녀 온다면서 뭘 그렇게 사람 죽을 것처럼 난리야?’----6시간 뒤, 하준의 전용기가 서울에 도착했다.그길로 FTT본사로 차를 달렸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사가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이날 벌어진 일로 FTT는 창사 이래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최대범부터 최란, 최진, 최양하까지 가족도 모두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회의실 문이 열리자 모두 우르르 몰려들었다.“최 회장, 이 일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네. 지금 주식 총액이 얼마나 증발했는지 알아? 심지어 전에 우리와 업무 협약을 맺었던 업체들이 계약을 해지하고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네.”“맞아. FTT에서 전세계 최고의 유일무이한 반도체를 제공하겠다고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랜들에서 동일한 반도체를 출시했잖나? 문제는 랜들에서 우리 제품을 카피한 거라고 고소를 하려고 해도 실험실에 관련 자료가 하나도 남지 않았어?”“이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천문학적인 위약금을 물어내야 할 판이야. 회사가 마비될 거라고. 그동안 사내유보금은 대부분 신제품 연구개발에 퍼
최민이 벌컥 했다.“지금 우리 아버지를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아버지가 지금 저 연세에도 이번 사태를 해결하려고 노심초사하는 거 안 보여요? 게다가 당신들만 다급하고 우리는 뭐 한가해 보이나요?”“이러고 입씨름할 시간 없어요.”최란이 싸늘하게 목청을 높였다.“지금은 대체 누가 내부 스파이인가, 누가 자료를 빼돌렸는가를 찾는 일입니다.”“스파이를 찾으면 뭐 어쩔 거요? 놈을 잡아낸데도 FTT의 무너진 지위는 되돌릴 수 없어요.”어느 이사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내일 아침이면 계약했던 회사 대표가 계약설 들고 찾아올 텐데 배상 안 하고 배길 수 있겠습니까? 배상하지 않으면 바로 고소 들어갈 텐데. 고소 진행하다 보면 회사 명예는 바닥에 떨어질 테고 다시는 어느 회사도 우리와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다 배상하다가는 우리 회사는 어쩝니까? 그냥 이렇게 파산하고 맙니까?”“말씀 끝나셨습니까?”하준이 긴 다리를 뻗어 앞자리로 걸어갔다. 눈부시게 흰 조명이 늘씬한 몸을 비췄다. 서늘한 기운이 오래도록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 특유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했다.“FTT가 파산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료 유출 건은 반드시 끝까지 조사할 겁니다. 회사의 어느 중역이라도 내부 스파이일 수 있습니다. 누군지 찾아내기만 하면 살아있는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겁니다.”이때 황보 이사가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보나 마나 최양하 부회장이지.”최란과 최양하의 안색이 확 변했다. 최란이 분노에 목소리를 높였다.“말이면 다인 줄 아세요? 최양하 부회장은 제 아들입니다. 최 씨라고요. 절대로 우리 FTT에 부끄러울 만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흥, 최씨 성을 쓰고야 있지만 아버지가 추 씨잖습니까?”황보 이사가 씩씩거렸다.“2주 전쯤 우리 와이프가 찻집에 갔다가 우연히 최양하 부회장과 추동현 작가, 추명택, 추성호 대표가 함께 있는 걸 봤다던데요.”최양하는 심장이 뜨끔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마주쳤으리라는
“전 아닙니다.”최양하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둘러보았지만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노와 원망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저는 FTT를 배반하는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최양하가 재차 강조했다.“아니라고요. 아버지가 찾아온 적은 있지만 거절했습니다.”최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네 아버지가 자료를 넘겨달라고 했다는 말이니?”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최란의 시선을 마주하며 할 수 없이 최양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버지가 추신의 최대 주주라면서 추신이 제 것이 될 거라며 미끼를 던졌지만 저는 물지 않았습니다.”최란이 휘청했다.추동현이 자신에게 점점 냉담해지고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 베개를 베는 사람이 이렇게나 무시무시한 사람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3년 전 추신에 엄청난 자금을 유통해주고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최란은 추동현을 상당히 원망했었다. 수십 년 간 추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도 자기 남편이 그 정도로 야심가라는 사실도 몰랐다. 물론 야심이야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양심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건 있기 마련이다.‘대체 내가 어떤 인간을 사랑했던 거지?예전의 그 품위 있고 재주 있는 추동현이 가짜였나? 대체 뭘 얼마나 숨기고 있는 거야?’“형부가 그런 사람이었어?”최민이 울컥해서 소리쳤다.“그런 사람을 위해서 한병우랑 이혼까지 했는데, 이제 보니 여우를 피해서 아주 호랑이 굴에 들어갔네. 언니 손으로 추신을 일으켜 주더니 아주 형부 아들이 우리 회사에서 정보까지 빼내 갔잖아.”최란은 이제 얼굴이 창백해져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한때는 FTT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자기 손으로 FTT를 망치게 된 것이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지. 너무 어리석었어. 이렇게 못된 인간에게 마음을 온통 내주다니.내가 눈이 멀었어.’“고모,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아니라고요.”최양하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네가 아니라고?”최민이 최양하를 노려보았다.
최양하는 화가 나서 소리치면서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최대범, 최민, 최하준, 최란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어머니, 어머니도 안 믿어 주시는 거예요?”최양하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저도 최 씨 핏줄이에요. 제가 어떻게 가족에게 그런 인면수심의 짓을 하겠어요?”“양하야….”최란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완전히 사람을 잘못 봤어. 동현 씨는 무고하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아 버렸네.’“경찰에 넘기도록 하지.”하준이 갑자기 낮은 소리로 뒤에 있던 전성에게 명령을 하달했다.“최양하, 이번 사건은 끝까지 추적하겠다. 네가 한 짓이라는 게 밝혀지면 아주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최양하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전성과 지룡 멤버들이 양쪽에서 양하를 잡고 나가면서 이번 사태에 마침표를 찍었다.다들 얼굴이 어두웠다.최하준이 좌중을 돌아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다들 돌아가 좀 쉬시죠.”황보 이사가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잠이나 오겠나?”하준이 입술을 축였다.“FTT는 지금까지 온갖 풍파를 겪어왔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언제나 신용을 지켰습니다. FTT에서 계약을 어기게 되었으니 파트너에게 한 푼도 빠짐없이 보상하겠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나 최하준이 메우겠습니다. FTT가 정말 버티지 못하게 될 사정이 되면 제가 책임을 지고 사임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하준은 역광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그러나 회사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 길로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러나 자리에 앉자마자 상혁이 다급히 들어왔다.“회장님, 어르신께서 회의실에서 쓰러지셨습니다.”하준의 눈이 무거워졌다. 벌떡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니 의사가 응급처치를 마치고 돌아서는 참이었다. 최대범이 충격으로 뇌경색이 와 앞으로 마비가 올 수 있다고 했다.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최민은 화가 난 나머지 최란에게 따지고 들었
최진은 너무나 깜짝 놀랐다.“윤형이가 왜?”고연경이 울며불며 상황을 설명했다.“어젯밤에 술집에 가서 놀다가 추성의 와이프를 만난 모양이야. 그런데 애가 취해서 집적거리려다가 추성의 일행에게 끌려갔대.최진이 비틀거렸다. 최윤형은 유일한 아들이다.최민이 날카롭게 비난의 말을 던졌다.“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어쩌다가 우리 집안에서 이런 애가 나와?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술집에서 남의 마누라를 집접거릴 생각을 해?”최진은 멍한 채로 말을 이었다.“그럴 리가 없어. 예전에는 윤형이가 어리석은 짓을 좀 저질렀는지 몰라도 3년 전 동성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얼마나 달라졌다고. 요즘은 제대로 여자친구도 사귀고 있었는데.”“추신 놈들….”고연경이 울먹였다.“십중팔구 그 집 식구들이 덫을 놓은 거야.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딱 맞게 추성의의 와이프를 술집에서 만나?”그 말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추성의는 추성호의 사촌 동생이었다.“추신 놈들이 대체 나랑 무슨 원수를 져서 이래?”최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우리 FTT의 신제품 데이터를 훔쳐 간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아들까지 건드리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짐승 같은 놈들.”“지금 그러고 욕해봐야 소용없어. 윤형이부터 구해야지”고연경은 이제 꺽꺽거리느라 목소리도 못 알아들을 지경이었다.“애가 너무 맞아서 출혈이 크다는데, 오래는 못 버틸 거야. 하준아, 제발 지룡을 불러서 윤형이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좀 알아봐 줘.”“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보낼게요.”너무 골치가 아팠다. 회사 일도 해결이 안 되는데 이제 할아버지가 쓰러지시더니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오는 참인데 윤형이까지 일이 생겨 버렸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온 FTT를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하준은 너무 피곤했지만 지금 이런 때 FTT와 집안을 지탱할 것은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았다.지룡은 곧 최윤형이 추성의의 별장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하준은 직접 지룡을 끌고 갔다. 별장에 도착해 보니
하준이 다가서자 추성호는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보디가드를 자기 앞에 서게 했다.“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경고하는데, FTT 운은 이제 기울었어. 앞으로는 추신이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 될 거야. FTT는 2위? 3위? 아니, 아주 하잘것없는 기업이 될 수도 있지. 당신이 아직도 무소불위의 1위 대기업 회장인 줄 알아?”추성호가 당당하게 비웃었다.“게다가 사람을 막 잡아가는 건 범죄라고. 범죄자 주제에 어디서 이렇게 당당한 거야?”하준의 눈썹이 꿈틀했다.이때 문이 열리면서 경찰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중 한 명이 실내 상황을 둘러보더니 바로 하준에게로 다가왔다.“양유진 씨와 서경주 씨가 강여름 납치 혐의로 최하준씨를 신고했습니다. 같이 서로 가주시죠.“봤지? 내가 뭐랬어?”추성호가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뭐가 국내 최고의 재벌이야? 이제 그 자리는 내놓아야지.”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추성호를 쳐다보더니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양유진하고 무슨 관계야?”“별 관계는 없는데. 뭐, 공통의 적이 있었달까?”추성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리고 지금 이런 때 와이프를 되찾지 않는다면 바보지.”하준의 날카로운 입술이 굳게 닫혔다. 추성호가 하는 소리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의 배후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최하준 씨, 갑시다.”경찰이 수갑을 채웠다.“그 많은 사람들이 뻔히 보는 가운데 사람을 끌고 가다니, 증인과 물증이 모두 충분합니다. 당장 경찰서로 가서 강여름 씨가 어디 있는지 사실대로 부는 게 좋을 겁니다.”“회장님….”전성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일단 윤형이나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지.”하준은 피로 얼룩진 윤형을 쳐다보았다. 너무 출혈이 커서 의식을 찾는대도 멀쩡할지 걱정이었다.추성호 옆을 지나면서 하준은 냉랭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추동현이 네 배후지? 둘 다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어.”시선에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