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지안아.”백윤택이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어제 사고가 나고 나서 최 회장이 여기서 꼼짝도 안 하고 너만 보고 있었다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최 회장도 큰일났을 거라고.”그 말을 듣고 하준이 인상을 썼지만 백지안의 눈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보고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 삼키고 말았다.“정말?”백지안이 기대에 차서 하준을 바라보았다.“준, 정말 날 버리지 않아? 내가 더럽다고 생각…”“그런 소리 마.”하준이 말을 끊었다.“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우리가 도착했으니까.“왜 나한테는 이런 일만 생기는 걸까?”백지안이 절망스러운 얼굴을 했다.“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너무 무서웠어. 흑흑…”백지안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울었다.“아무 생각도 하지 마”하준이 백지안의 손을 잡자 지안은 하준의 품으로 뛰어들어 바들바들 떨리는 얼굴을 하준의 몸에 바짝 붙였다.“준, 왜 날 구했어? 난 이제 너무 지쳐서 그만 살고 싶었는데. 어제 일로 예전에 당했던 일이 생각나서 너무 힘들어. 내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어. 제발 날 떠나지 마.”“…그래. 내가 여기 있을 거야.”하준은 어쩔 수 없이 백지안을 달랬다.백지안은 하준이 품에 한동안 안겨있더니 겨우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백윤택이 갑자기 물었다.“그런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은 왜 널 잡아 간 거야?”“나도 모르겠어. 기분이 안 좋아서 쇼핑이라도 할까 하고 나갔는데 주차장에서 뭔가에 맞고 쓰러졌어. 깨어나 보니까 동굴이었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내 몸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뿌리겠다고….”백지안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나한테 왜 그랬을까?”“정말 너무 하구먼.”백윤택이 벌컥 화를 냈다.“어제 송 대표가 그러는데 그놈이 강여름의 수하라며? 우리 지안이 대신 제대로 복수해 줘.”“가, 강여름이 시킨 짓이야?”백지안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나한테 왜 그러는데? 하준이도 빼앗아 갔으면서 뭐
하준이 병실에서 나가자 백지안은 곧 번쩍 눈을 떴다.“우리 지안이 아주 대단해.”백윤택이 엄지를 치켜올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흐흐흐, 강여름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녀석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는 걸 알면 얼마나 화가 날까?”백지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얼마나 화가 나기는, 흥!’백지안는 그자가 강여름의 보디가드로 강여름이 가족처럼 아끼는 사람이라고 들었다.‘강여름은 정에 휘둘리는 인간이니 가족 같은 녀석의 손가락이 잘렸다고 하면 미칠 듯 길길이 날뛰겠지.그러고 나면 강여름은 준이 죽도록 원망스러울 테니 영원히 준과 강여름이 재결합하기는 어려울 거야.’----지룡 본부.강여름이 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걸어갔다.입구를 지키던 사람이 여름이 나타난 것을 보고 즉시 안쪽에 통보했다.몇 분이 지나자 차윤이 사람을 하나 데리고 나왔다. 여름을 보더니 완전히 깜짝 놀랐다.“사모님….”“사모님은? 애진작부터 난 사모님이 아니에요.”여름이 빙그레 웃으며 차윤을 바라보았다.못 본 사이에 차윤은 피부가 깨나 그을어 있었다. 딱 봐도 그리 좋은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네.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여름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더니 차윤은 괴로운 듯 말했다.“잘 지낸 건 아니지만, 사모님 힘드셨던 것에 비하면 저야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하준이 여름에게 얼마나 매몰차게 대했는지 눈에 담아두었던 차윤은 아랫사람이라 전혀 도움이 되지도 못해 괴로웠던 것이다.“저기, 회장님 안 계실 때 얼른 돌아가세요. 겨우 보디가드 하나 때문에 이러실 것 없습니다.”차윤이 다급히 권했습니다.여름이 쓴웃음을 지었다.“보디가드도 사람이에요. 게다가 민관이는 나에게 그냥 일개 보디가드가 아니라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나에게 충성스러운 그 아이를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지켜주고 싶어.”차윤은 깜짝 놀랐다.“정말 여전하시군요. 하지만…일단 저기 들어가시면 나오지 못하실까 걱정됩니다. 이번에 회장
꽤나 떨어져 있는 데도 여름은 하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서 잔인한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게 느껴졌다.병원에서 오는 길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백지안이 하준을 도발하는 소리를 했겠구나 싶었다.“회장님, 강 대표님께서 육민관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전성이 말했다.하준의 얇은 입술의 한쪽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육민관을 보고 싶다? 그러던지.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나올 생각은 마.”여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제 진정이 좀 됐을까 싶어서 차분하게 당신이랑 얘기 좀 하려고 왔어. 정말 우리 사이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하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당신이 총으로 날 겨눌 때 내 기분이 어땠는 줄 알아? 지안이에게 그런 미친 짓을 하다니. 정말 지안이를 그렇게까지 바닥까지 끌어내려야 했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악독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나?”여름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시간이 지나 진정된 마음으로 찾아왔던 여름은 하준과 말을 할수록 화가 올라왔다.헛웃음이 나왔다.“민관이를 만나서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고 싶어. 사람을 죽인 살인범도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변호 받을 권리가 있어. 당신이 뭔데 민관이가 내 지시를 받아서 사람을 납치했다고 단정을 지어? 영 나를 못 믿겠다면 이따가 같이 들어가던지.”하준이 싸늘하게 비웃었다.“좋아. 만나게 해 주지. 하지만 당신도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하준은 말은 마치더니 무표정하게 전성에게 명령했다.“보호실로 데리고 가.”“회장님.”차윤이 걱정스러운 듯 일어섰다.“시끄러워. 강여름을 경찰에 넘기지 않는 것만 해도 많이 봐준 거야.”하준은 싸늘하게 여름을 노려봤다.“안에서 반성하고 인간이 되어서 나오도록 해.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생각하고 그 악독한 마음을 잘 수습해서 나중에 지안이를 증오하고 해치려는 마음이 안 들겠구나 싶으면 내보내 줄지 고려해 보겠어.
하준의 몸이 떨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소리야?”“회장님, 누가 내 가족의 손가락을 잘랐다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보십시오.”그러더니 차윤은 괴로운 듯 입을 다물었다. 그저 허리를 숙여 봉투를 집더니 병원으로 향했다.하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밖에는 해가 쨍쨍한데도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아니, 아니야. 놈은 그냥 일개 보디가드라고.그리고 강여름도 고통을 당해 봐야 해. 그래야 지안이의 고통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지.’----지룡 보호실.문이 열리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구석에는 마대자루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육민관이 보였다. 이미 기절한 듯 보였다.사납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온몸은 멍투성이였다.육민관을 살피던 여름의 눈이 마침내 손으로 향하더니 눈이 확 커졌다.“애 손이….”“방금 전 회장님께서 하신 일입니다.”지룡 멤버가 그렇게 말하더니 문을 잠그고 나가버렸다.‘방금 전이라니….’여름의 머리가 윙윙 울렸다.‘내가 기다리는 동안 최하준은 여기서….’떨리던 여름의 손가락이 주먹을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데도 몰랐다.‘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지?’눈물이 떨어졌다. 이제 여름의 눈에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원한만이 가득했다.“민관아… 민관아….”여름은 가볍게 육민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여름에게 민관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른다.겨우 두 살 아래인 민관을 여름은 언제나 동생처럼 여겼다.“누님….”육민관이 힘겹게 눈을 떴다.“왜…왜 누님이 여기 있어요? 최…최하준 그놈이 누님을 가뒀나요? 이… 죽일 놈이….”“괜찮아. 다 나갈 방법이 있어서 들어온 거니까.”여름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얘, 네 손이….”“괜찮아요. 그…그냥 손가락 하나잖아요.”육민관은 통증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육민관의 몸이 심하게 수축되더니 눈꺼풀이 뒤집히는 등 이상한 증상을 보였다.“왜, 왜 그래?”여름이 너무나 놀라서 물었
“그리고 이 사건은 백지안과 반드시.. 관련이 있어요.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백지안의 배후에 있는 인물입니다.”육민관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놈은 이미… 우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여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그 얘기를 최하준에게도 다 했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더군요.”육민관이 피식 웃었다.“누님 남자 보는 눈은 왜 그렇게 후졌어요? 내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내가 너에게 정말 면목이 없다. 어떻게, 조금 더 버틸 수 있겠어?”여름이 걱정스럽게 민관을 바라보았다.“약 기운 때문에 힘들어서 그렇지….”민관이 헐떡거렸다.“하지만… 통증이 정신을 깨어있게 해줘요. 오히려 그래서 버틸 수 있네요. 그리고 누님, 제가 죽으면 죽는 거죠. 어쨌거나… 제 목숨은 어차피 누님께 빚졌던 것인걸요.”“그런 소리 마. 어쨌든 내가 널 데리고 나갈 거니까.”여름이 새빨갛게 부은 눈을 하고 민관의 손을 잡으며 맹세했다.이때 철문이 열리더니 하준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하준의 눈이 번뜩했다.“손가락뿐 아니라 손까지도 잃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지?”하준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여름을 확 잡아챘다.“그만 해!”여름은 결국 주먹을 날렸다.생각지 못한 일격에 전혀 방비가 없던 하준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다른 남자 때문에 내게 주먹질을 하다니.”하준은 폭주하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여름을 노려보았다.“이렇게 감싸고 도는 꼴을 보니 살려둘 수가 없군그래.”“민관이에게 앞으로 손가락 하나라도 까닥해 봐. 당신 눈앞에서 내가 죽어버리겠어.”여름이 협박했다.“이놈을 사랑하나?”하준이 눈이 악마처럼 번득였다.“이 아이는 내 가족이야.”여름이 붉어진 눈으로 하준을 노려보았다.“나랑 윤서가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지내는 동안 민관이가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애진작에 죽었을 거야. 내가 민
최하준의 안색이 확 변했다. 여름을 죽어라 노려봤다.여름의 눈은 물결치지 않는 호수처럼 평온했다.“민관이 말이 맞아. 우리가 사귀었던 거라면 이제 정식으로 헤어지자고 말할게. 최하준, 우리 헤어져. 다시는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아. 영원히. 그러니까 이제 당신이 날 용서하든 말든 난 아무 상관이 없어.”결연하면서도 평온한 여름의 얼굴을 보면서 하준은 심장이 바들바들 떨렸다.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온몸을 덮친 것만 같았다.여름이 코앞에 있는 데도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하준은 여름과 헤어질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송영식이 무릎을 꿇으며 지안과 결혼해 달라고 애원할 때도, 여름이 백지안을 납치하라고 명령했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하준은 죄는 일단 육민관에게 뒤집어씌우고 여름은 반성하는 기미만 있으면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어떻게 당신이….”하준은 한동안 입이 굳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애 손가락을 자르는 짓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지.”여름의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민관이는 내 동생이야. 가족의 손가락이 잘렸을 때 기분이 어떤지 알아? 뼈가 부러지면 다시 접합하면 되고, 피부가 찢어졌으면 치료하면 되지.하지만 손가락을 자르는 건 얘기가 달라. 잘린 손가락은 다시 자라지 않는다고! 당신은 악마야! 당신 같은 인간은 백지안과 어울리니, 가, 가서 둘이 천년만년 잘살아 보라고!”“시끄러워!”하준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내가 백지안과 결혼을 하더라도 당신은 내 곁에 붙어 있어! 내가 죽을 때까지 못 놓아줘!”“그럼 죽어! 당신처럼 후안무치한 인간은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안 되니까.”이제 여름은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당신 같은 인간이야말로 정신병원에서 평생토록 나오지 말았어야 해!”“……”보호실은 갑자기 죽음과도 같은 적막에 싸였다.하준은 핏발 가득한 눈으로 여름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여울이 어디 있는지 전화 한 번 해보지 그래?”여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암시를 주었다.하준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급히 여울의 키즈폰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대체 여울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하준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곧 여름을 잡아먹을 기세였다.“나는 여울이와 영상통화를 할 방법이 있지. 그렇지만 일단은 내 휴대폰을 돌려주셔야겠어.”여름이 하준에게 손을 뻗었다.하준은 바로 사람을 보내 여름의 휴대 전화를 가져오도록 했다. 여름은 양우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화면 건너편에 마스크를 쓴 사내가 나타났다.“찾으셨습니까?”“꼬맹이 좀 보여줘.”여름이 명령했다.양우혁은 곧 여울을 바꿔 주었다.“큰아빠!”여울이 방글방글 웃었다.하준은 서둘러 배경을 살펴보았다. 성운빌이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곳인데 장소를 특정할 수가 없었다.“여울아, 오늘은 유치원에 안 갔어?”하준이 다급히 물었다.“여름이 이모가 오늘 같이 놀러 가자고 이 삼촌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큰아빠, 여름이 이모한테 언제 오는지 물어봐 주세요.”여울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나 이제 심심한데.”“여울아, 거기가 어딘지 알겠어?”“몰라요. 처음 온 데인데….”“이제 그만 휴대폰은 삼촌에게 줘.”양우형이 전화기를 빼앗아 가더니 카메라를 보고 웃어 보였다.“빨리 좀 와주십시오. 저는 애를 본 적이 없어서 이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려고 합니다”그러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준이 여름의 팔을 와락 잡았다.“이봐! 당신을 온전히 믿는 어린애에게까지 손을 대다니 이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내가 미쳤지, 이런 사람을 사랑하다니….”팔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는 통에 여름은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얼마나 세게 잡혔는지 피가 안 통했다.“내가 인간도 아니라고? 그래, 10분 내로 우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인간 같지도 않은 내가 꼬맹이를 어떻게 하라고 했을 것 같아?”여름은 침착하게 협박을 이어 나갔다.“날 협박
육민관이 경찰에 넘겨지자 정상적인 프로토콜에 따라 일단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다. 그리고 치료가 끝나야 심문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육민관이 경찰 손에 들어갔으니 최하준은 사적으로 육민관을 건드릴 방법이 없었다. “나도 신고할 것이 있습니다.”하준이 후다닥 뛰어오더니 여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내 조카를 납치했습니다. 아이를 해칠지도 모르니 당장 구속하고 조사해 주십시오.”“좋습니다. 두 분은 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경찰이 말했다.곧 육민관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여름은 경찰차에 타고 하준은 뒤에서 다른 차를 타고 경찰서로 이동했다.경찰서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최양하가 여울이를 데리고 왔다.“안녕하세요? 경찰 아저씨네?”여울은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발랄하게 인사를 했다.“꼬마 아가씨, 안녕!”경찰이 여울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더니 매우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하준을 돌아보았다.“저기… 조카분이 납치됐다고 하지 않으셨나요?”“……”하준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최양하를 쏘아보았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여울이가 왜 너랑 같이 돌아와? 그 마스크 쓴 남자는?”“양우형 씨 말하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여울이랑 놀아주다가 갔는데.”최양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형님, 왜 여울이가 납치됐다고 그랬습니까?”“너 지금 강여름이랑 짜고 날 가지고 논 거냐?”최하준은 분기탱천해서 최양하의 멱살을 잡았다.“너 같은 놈은 여울이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이모, 팔이 왜 이래요?”갑자기 여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울은 어느새 여름에게 다가가 팔목의 멍을 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잘못해서 어디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여름이 여울이를 안아주려고 팔을 뻗는데 하준이 후다닥 여울을 안아버렸다. “당신은 여울이를 안을 자격이 없어. 비켜!”여울은 이렇게 험악한 하준의 모습을 처음 보아서 놀란 나머지 흠칫했다가 곧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여름이 이모한테 왜 무섭게 말해요. 큰아빠 무서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