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민관이 경찰에 넘겨지자 정상적인 프로토콜에 따라 일단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다. 그리고 치료가 끝나야 심문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육민관이 경찰 손에 들어갔으니 최하준은 사적으로 육민관을 건드릴 방법이 없었다. “나도 신고할 것이 있습니다.”하준이 후다닥 뛰어오더니 여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내 조카를 납치했습니다. 아이를 해칠지도 모르니 당장 구속하고 조사해 주십시오.”“좋습니다. 두 분은 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경찰이 말했다.곧 육민관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여름은 경찰차에 타고 하준은 뒤에서 다른 차를 타고 경찰서로 이동했다.경찰서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최양하가 여울이를 데리고 왔다.“안녕하세요? 경찰 아저씨네?”여울은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발랄하게 인사를 했다.“꼬마 아가씨, 안녕!”경찰이 여울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더니 매우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하준을 돌아보았다.“저기… 조카분이 납치됐다고 하지 않으셨나요?”“……”하준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최양하를 쏘아보았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여울이가 왜 너랑 같이 돌아와? 그 마스크 쓴 남자는?”“양우형 씨 말하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여울이랑 놀아주다가 갔는데.”최양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형님, 왜 여울이가 납치됐다고 그랬습니까?”“너 지금 강여름이랑 짜고 날 가지고 논 거냐?”최하준은 분기탱천해서 최양하의 멱살을 잡았다.“너 같은 놈은 여울이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이모, 팔이 왜 이래요?”갑자기 여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울은 어느새 여름에게 다가가 팔목의 멍을 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잘못해서 어디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여름이 여울이를 안아주려고 팔을 뻗는데 하준이 후다닥 여울을 안아버렸다. “당신은 여울이를 안을 자격이 없어. 비켜!”여울은 이렇게 험악한 하준의 모습을 처음 보아서 놀란 나머지 흠칫했다가 곧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여름이 이모한테 왜 무섭게 말해요. 큰아빠 무서워!
차 안.여울은 여름의 품에서 울먹였다.“엄마, 아파? 난 이제 아빠가 안 좋아. 엄마도 이제 아빠 만나지 말아요.”“엄마는 괜찮아.”여름이 보드라운 여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여울이가 아주 잘해주었어. 미안하다, 엄마가 여울이를 이용해서.”여름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자기 자식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다.“괜찮아요. 민관이 삼촌을 구하려고 그런 거잖아. 그리고 우형이 삼촌이 잘 놀아줬어요.”여울이 속삭였다.“이따가 여울이는 작은삼촌하고 조금 더 놀자. 엄마는 민관이 삼촌을 구할 증거를 조금 더 찾아봐야 하거든.”여름이 여울의 이마에 뽀뽀를 쪽 해주었다.“일 마치면 엄마가 여울이 보러 갈게. 알겠지?”“알았어요. 여울이는 착하니까 기다릴게.”여울이 코를 훌쩍이며 끄덕였다.“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최양하가 물었다.“괜찮아요. 우리 여울이만 잘 돌봐주면 돼요.”여름이 고개를 저었다. 일이 워낙 복잡해서 괜히 최양하가 끼어들었다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내가 너무 쓸모없는 인간이라 미안하네요.”최양하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런 소리 말아요. 양하 씨는 충분히 현명한 사람이라고요. 최소한 형님보다는 낫잖아.”여름이 진심에서 나오는 말을 했다.“뭐, 그러네요. 대체 백지안이 우리 형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니까요.”최양하가 한숨을 쉬었다.최양하와 헤어지고 나서 여름은 바로 양우형에게 연락했다. 여름은 양우형에게 사건이 벌어진 동굴에 가보도록 하고 자신은 육민관이 지내던 아파트로 향했다.그리고 여름은 CCTV를 뒤져 당시 배달원이 육민관에게 식사를 배달했던 당시 영상이 모두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심지어 저녁 8시부터 8시 반 사이의 모든 영상이 싹 다 사라져 있었다.----다음날, FTT그룹.사무실에서 하준은 한껏 무거운 얼굴로 중역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며칠 출근을 하지 않았던 탓에 하준에게 보고할 내용이 많았다.그러나 얼마 안 가서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분노한 최양하가 들어
최양하는 주먹을 꽉 쥐더니 영 내키지 않는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어쨌든 지금은 아무 데도 못 갑니다. 여울이는 너무 어려요. 이 임무는 다른 사람에게….”“여울이를 돌볼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넌 그 악독한 강여름과 너무 가까이 지낸다고. 그런 녀석에게 여울이를 맡길 수는 없어. 다시는 여울이가 인질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어린애야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너는 애비가 되서 다른 사람이 날 협박하도록 애를 내주다니?강여름이 진심으로 나와서 여울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거냐?”하준은 최양하를 노려보았다.“가장으로서 난 너희들을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어.”“형님은 정말 너무나 오만하고 멋대로라고요.”최양하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대체 왜 여름 씨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단정 짓습니까? 어쩌다가 그 순진한 사람이 형님 같은 사람에게 사랑받게 되었는지 정말 너무 안 됐어.”“사랑이라고?”하준이 싸늘하게 웃었다.“그런 인간은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전에는 내가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그랬지만 이제 더는 절대 여울이가 강여름을 만나는 꼴은 못 봐.”“난 어쨌든 Y국에는 절대 못 갑니다.”최양하가 강경하게 나왔다. 여울이를 혼자 본가에 두다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여름에게 반드시 여울이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두 모녀를 종종 만나게 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가기 싫다면 부회장 자리 내놓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하준이 싸늘하게 뱉었다.“해보자 이겁니까?”울컥 치솟는 원한과 치욕을 안고 최양하는 사무실에서 나갔다.입구까지 걸어가서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나는 강여름을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지만 무조건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형님은 밤낮으로 잠자리를 함께한 사이면서도 내 반도 믿어주지 않죠.심지어 경찰이 정상적인 육민관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는데도 형님만이 눈곱만큼도 강여름이 결백을 밝힐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정말 너무합니다. 조만간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말을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직접 법정에 나설 테니”하준이 가라앉은 소리로 답했다.“잘됐다. 세상에 우리 준만큼 확실한 변호사는 없으니까.”백지안이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밤이 내린 최하준의 본가.모처럼 만에 돌아온 하준을 보고 장춘자는 못마땅한 듯했다.“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네가 집을 다 오고. 손에 든 건 뭐니?”“신상 인형요.”하준은 인형을 들고 여울에게 다가갔다.“여울아, 큰아빠가 선물 사 왔다.”하준은 평생 꼬맹이의 기분이나 살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제 여울의 말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왜 최양하의 딸에게 이렇게 자신이 쩔쩔매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싫어요.”여울이 고개를 돌리더니 장춘자의 뒤로 숨었다.장춘자가 못마땅한 눈으로 하준을 노려보았다.“여울이 애비를 평사원으로 강등시켰다며? 애 꼴을 그렇게 우습게 만들어 놓고도 뻔뻔하게 여울이를 보러 오다니?”“양하가 벌써 여울이에게 그런 소리를 다 했습니까?”하준이 얼굴이 무거워졌다.“아니거든요.”여울이가 고개를 들었다. 한껏 겁먹은 눈이었지만 그래도 큰 소리로 외쳤다.“작은할아버지랑 작은할머니가 그러는데 우리 아빠가 뭘 잘못해서 큰아빠가 혼내줬다고 그랬어요.”하준은 말문이 막혔다. 도무지 어린애에게 마땅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정말로 지안이 이모 말처럼 큰아빠는 다른 아빠에게서 태어나서 우리 아빠를 미워하는구나.”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여울이 말했다.“백지안이 그런 소리를 하디?”장춘자의 얼굴이 확 변했다.“어떻게 된 물건이 어린애에게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다니? 정말 너무하구나.”“할머니….”최하준은 매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장춘자가 호통을 쳤다.“요즘 날마다 병원에 들락거리며 백지안이를 돌보고 있다며? 어디 여자가 없어서 널 두고 바람이 난 애에게 그러고 목을 맨다니? 온 나라가 그 물건 천박한 것을 두고 난리가 났는데 너만 모르는구나.”하준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이때 최대범이
“나도 다 알아요.”여울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여기서는 큰아빠랑, 큰아빠 집에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할아버지가 날 좋아해요. 그런데 친할아버지랑 고모할머니랑 우리 아빠네 집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는 다 날 안 좋아해.” 하준은 깜짝 놀랐다. 한참 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친할아버지라는 게 네 아빠의 아빠를 말하는 거지? 그쪽 삼촌이랑 이모들도 다 널 안 예뻐한다고?”“응. 아빠랑 친할아버지네 가면 아무도 안 놀아줘요. 그리고 거기 나 괴롭히는 오빠도 있거든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친할아버지가 만날 나더러 사과하래.”여울이 입을 비죽거렸다.“왜 날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왜인지 모르지만 하준은 심장이 욱신하니 너무나 아팠다. “앞으로는 친할아버지네 가지 마. 심심하면 언제든 큰아빠가 놀아줄게.”“싫어요. 난 지안이 이모랑은 놀기 싫은걸. 지안이 이모도 날 안 좋아한단 말이야.”여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더니 손을 흔들었다.“큰아빠, 안녕~”그러더니 여울은 깡총깡총 뛰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하준은 여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갑자기 휴대 전화를 꺼내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다.“최양하를 계속 부회장 자리에 두도록 해.”인사팀 팀장은 황당했다“그러면 Y국 공장 건설 현장에는 파견하지 않습니까?”“됐어. 다른 사람으로 보내도록 하지.”하준은 한숨을 쉬었다.‘하필 양하 녀석이 저런 깜찍하고 귀여운 딸을 둬가지고. 양하가 일반 사원이 되어 버리면 여울이까지 같이 무시당할 거 아냐? 우리 여울이가 남들에게 무시당하면 안 되지.아니 그런데, 추동현이 여울이를 예뻐하지 않다니 좀 의외군 여울이는 친손녀인데, 손녀를 귀여워 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있단 말이야? 하여간 추신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하다니까.’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이진숙이 웃으며 맞아주었다.“회장님, 사모님은 언제 돌아오세요?”“……”하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진숙은 미처 안색이 바뀌는 것은 보지 못하고 웃으며 물었
하준은 움찔했다.요 몇 년 법정에 서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백지안에게 변호를 맡겠다고 약속만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직접 법정에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결국 백윤택 때문에 하준과 여름의 관계가 끝까지 몰린 것은 사실이었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뇌와 분노가 일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름이 여울을 내세워 자신을 협박했을 때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여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준이 마음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다 생각이 있어. 자네는 가봐.”상혁은 문을 닫고 나와서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하준이 여름과 잘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두 사람이 다시 결혼하게 되면 쌍둥이에 관해 애야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던 중이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럴 필요 없겠구나. 회장님은 영원히 백지안 편만 드시니, 강 대표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저러시네. 회장님은 뼛속까지 백지안을 보호할 생각밖에 없으셔. 그냥 이렇게 회장님이 백지안에게 상처받으시는 게 낫겠다. 그러면 강 대표님은 상처받지 않으시겠지. 이젠 나도 더는 봐드릴 수가 없어.’----성운빌.며칠 동안 여름은 집에 틀어박혀 블랙박스 기록과 CCTV 기록을 샅샅이 살피느라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윤서가 도와주긴 했지만 두 사람은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오후가 되자 엄 실장이 육민관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왔다.“다음 수요일에 공판입니다. 상대 쪽 변호사는 최하준이라고 합니다.”“최하준이라고요?”윤서는 화가 나서 노트북을 엎을 뻔했다.“너랑 진짜 한 판 뜰 생각인가 본데? 최하준이 무패의 변호사라는 건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 아니냐? 아무리 증거가 확실해도 최하준 말이면 팥으로 메주 쓰는 세상이잖아? 그런 최하준이 백지안의 변호를 맡는다면 승산이 없네.”엄 실장이 입을 꾹 다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엄 실장 생각도 윤서와 같았다.여름은 눈을 내리깔았다. 검은 속눈썹이 여름의 눈에서 빛나는 어두운 빛을
여름은 두 눈을 감더니 이 사이로 한 마디만 뱉었다.“가만두지 않을 거야.”이후로 며칠 동안 여름과 앙우형은 매일 증거를 수집하느라 동분서주했다.----눈깜짝할 사이에 화요일이 되었다. 양유진이 여름을 보러 왔을 때 여름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하고 얼굴이 매우 야위어 있었다. 양유진은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을 몰랐다.“내일 법정에 서야 하는데 증거는 좀 찾았습니까?”“네.”여름은 피곤한 두 눈을 비볐다.“찾았어요. 가능성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요.”“오호…”양유진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그게 뭐죠? 나도 궁금해지는데?”“일단은 비밀이에요. 내일이면 아시게 될 거예요.”여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승산이 높지는 않아요. 어쨌든… 한 번도 패소한 적이 없는 전설적인 최하준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내일은 판사에게 민관이의 무죄를 어필하기보다는 최하준을 설득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민관이가 모함을 당했다는 사실만 이해시킬 수 있다면 이길 수 있을 거예요.”“그건 모르죠.”양유진이 “민관이가 모함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변호사 일생에 첫 패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지도 모릅니다.”여름은 흠칫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최하준 같은 인간은 바닥을 알 수가 없으니까.”“하지만… 여름 씨가 이길 겁니다.”양유진이 두 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와락 잡았다.“그동안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닌 거 압니다. 하지만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요. 백지안을 납치했던 차 안에서는 민관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그게 정말인가요?”여름이 벌떡 일어섰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네.”양유진이 문서를 여름의 손에 들려주었다.“전문가를 불러서 그 차를 싹 검사해 보았습니다. 차 트렁크에서만 육민관의 지문이 발견되었어요.”“정말 잘 됐군요.”여름은 파일을 받아 한 번 훑어보더니 매우 기뻐했다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요.”양유진이 웃었다.“내 마음속에 당신이 있는 것과 같은 거죠. 당신이 날 받아주지 않는데도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과는 선을 긋게 되더라고요. 진정한 사랑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맞아요. 나도 이제는 어떤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았어요.”여름도 양유진의 손을 잡았다.“계속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너무 좋네요.”양유진의 점잖은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너무 좋은 나머지 여름을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겠죠? 나중에 다시 날 버리고 최하준에게로 가는 건 아니죠?”“아니에요. 하지만 백지안 남매는 그냥 둘 수 없어요. 소영이를 위해서 꼭 복수할 거예요.”여름이 이를 갈며 말했다.“좋아요. 앞으로는 내가 함께할게요.”양유진이 힘차게 여름을 끌어안았다.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쁨이 가득했다.----다음날 아침 8시.고급 세단이 법원 앞에 섰다.차가 멈추자 최하준이 내려서 문을 열더니 백지안의 손을 잡았다. 이어서 백윤택이 차에서 나왔다.법원에 있던 기다 하나가 즉시 그 장면을 포착했다.“백지안 씨와 재결합하시는 겁니까? 얼마 전 강여름 씨와 여주산으로 여행을 가지 않았습니까? 지금 혹시 양다리…?”“찍지 말아요….”백지안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놀라서 최하준의 뒤로 가 숨었다.최하준이 그 기자에게 눈을 부라렸다.“그만 찍으시지.”그 기자는 갑자기 일전에 최하준과 백지안의 재결합설을 보도했던 매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던 일을 떠올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황급히 카메라를 거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준, 오늘 법정은 비공개지?”백지안이 두려운 듯 물었다.“난 납치됐던 일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비공개야. 걱정하지 마. 절대 관련 소식이 알려질 일은 없을 거야.” 이때 스포츠카 한 대가 들어오더니 하준의 차 옆에 섰다. 이어서 강여름과 임윤서, 양우형이 함께 차에서 나왔다.백지안은 여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