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양유진은 손을 내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살 집에 대해서만큼은 까다로운 편이라 대충 하고 싶지 않다. 강여경 씨는 만난 적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말이지. 최신 자재나 최첨단 가전제품 등에 너무 무지해. 내 집을 망치게 둘 순 없어.”자신의 약혼녀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난처했다.“하지만 지난번 문화센터 디자인은 잘했잖아요….”“말은 똑바로 하자. 그 입찰 건은 내가 말 넣어줘서 성사된 거지.”그 일을 언급하자 양유진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성 회장하고 너 그거 따냈다고 너무 신난 것 같은데 자중해줬으면 좋겠다. 혹여라도 너랑 나 연루된 거 알려지면 골치 아프니까.” 한선우는 풀이 죽었다.“알았어요, 싫으시면 할 수 없죠. 그런데 손에 그건 설계도예요? 어디에 디자인 맡겼어요? 그냥 궁금해서요.”“도하건축디자인. 전에 홍콩에서 알게 된 친구가 이번에 동성에 지사를 냈거든.”양유진은 도면을 건넸다.“그 회사 디자이너가 설계한 거다. 와서 30분도 안 돼서 천 평짜리 초안을 뚝딱 그려오더구나.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원하는 걸 완벽히 파악했더라고. 무척 마음에 든다.”“강여름?”한선우는 우측 하단의 서명을 보고 놀라 얼어붙었다. 아까 입구에서 여름을 마주친 게 생각났다. ‘여기 디자인을 하러 온 거였군.’“그래, 맞아.”“걘 안 돼요. “복잡 미묘한 말투였다.“걔가 제가 지난 번 말씀드렸던 TH 딸이에요, 전에 제 여친이었던. 지금 걔 이상해졌어요. 다른 사람더러 자기 작품 표절했다고 우기더니 자기 부모님까지 모함하는 애예요.”양유진은 살짝 놀랐다. 어쩐지 많이 들어본 이름이더라니.방금 만났던 여인은 무척 대범하고 고고했다.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그 사람이 누구 걸 표절하고 그럴 수준은 아니던데? 사업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다. 재능도 천부적이고 인성에도 전혀 문제없어 보였어. 오히려 네가 그 사람에게 편견이 있는 것 같구나.”“외삼촌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굳이 숨기는 거지? 내가 자기 재산을 탐내기라도 할까 봐? 아니면 강여경에게 디자인 맡기려고?전자의 경우는 차라리 괜찮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TH에서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강여경과 어떤 원한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뭐, 있어도 상관없어요. 저더러 인테리어 디자인 맡기라고 강요하진 않을 거니까요.”여름은 반 농담조로 말했다.“내가 없다면 없는 겁니다.”최하준은 딱 잘라 대답했다.여름은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화제를 바꿨다.“그럼 혹시… 무슨 행사 갈 일 없어요? 동행할 파트너가 필요하다던지?”“없습니다.”동성의 수준 낮은 사람들과 굳이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뭐, 알았어요, 그런데, 나는 있거든요.”최하준은 젓가락을 놓고 인상을 쓰며 여름을 쳐다보았다.“대체 또 무슨 꿍꿍입니까?”“월말에 할머니 팔순 잔치가 있거든요. 그날 한선우랑 강여경 약혼식도 같이 한대요. 할머니께서 절 어릴 때부터 많이 아껴주셔서 안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나랑 같이 안 갈래요?”여름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뭇 간절한 얼굴로 최하준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최하준은 금세 여름의 집에서 그러는 속셈을 알아차렸다. “혼인신고 전에 분명 말했을 텐데요. 당신 식구들과는 만나지 않는다고.”“하지만 쭌도 어차피 참석해야 하잖아요.”무의식중에 말이 나와버렸다.“내가 왜 참석해야 합니까?”최하준은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사람들과는 일면식도 없는데 말이다.여름은 하마터면 “외삼촌이잖아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분명 자신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어… 그날 동성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다 올 거거든요. 그러니까 쭌도….”“미안하지만, 그런 동네 잔치엔 참석하지 않습니다.”“…….” 동네 잔치?‘수준이 낮아서 조카 약혼식에 참석을 안 한다고?’‘흥, 당신은 얼마나 하이레벨이시길래? 요즘 외국
“뭐하러 말입니까?최하준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졌다.“술 마시러 갑니까, 아니면 또 집에 갑니까? 아, 선배랑 데이트하러 갑니까? 지오 산책시키는 건 잊지 않기 바랍니다.”“…….”여름은 뚜껑이 열리려 하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윤서랑 쇼핑할 거예요. 요즘 추워졌는데 입을 옷이 없거든요. 옷 좀 보러 가려구요.”최하준은 여름을 쓰윽 훑어보더니 다시 저격했다. “사야겠군요. 좀 두꺼운 걸로 사십시오. 만날 내 앞에서 그렇게 시원하게 입고 다니지 말고.” “…….”‘아 진짜! 겨울이 다 됐는데 이런 얇은 옷을 왜 입고 있겠어? 관심 좀 가져라, 어? 얼마나 당신 안구에 축복이냐!’“마침 나도 옷이 부족하니 몇 벌 좀 사다 주십시오. 지난번 준 카드 쓰면 됩니다.”최하준이 만사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헉! 사실 나가서 윤서와 야식 사 먹을 생각이었는데....'결혼 후 외식을 별로 못 했는데 지금 마침 한창 꽃게가 살이 오를 때였다.“직접 사면 되잖아요. 내가 진짜 와이프도 아니고.”원망이 섞인 말투였다.최하준은 웃는 건지 마는 건지 미묘한 표정으로 미간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또 돌려까기 시전입니까?”“…….”여름이 또 완전히 졌다. 그저 순수하게 팩트를 얘기했을 뿐인데.“아, 알았어요, 사다 주면 될 거 아녜요? 사이즈 몇 입어요?”“내 사이즈도 모르면서 이런 자세로 어떻게 아내가 되겠다는 겁니까?”최하준은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런 건가?“잘못했어요, 제가 많이 부족하네요.”여름이 의기소침하게 말했다.“가격대는 어느 정도로요?”“좋을 대로”옷 가격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늘 세계 정상급 디자이너들이 직접 맞춤 제작한 옷만 입었으니까.10분 후, 윤서가 1층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여름은 기운 없이 차에 올랐다.“쇼핑몰 가자. 최하준 씨가 옷 사다 달래.”“꽃게찜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나 저녁밥도 안 먹었는데.”윤서는 무
“그 사람 아마 침대에서 날 발로 밀어낼걸.”“술 먹여. 꽐라됐을 때 그냥…. 임신이라도 하면 퍼펙트고. 그러면 더 힘 안 들이고도 여왕에 등극! 아 참, 배란기 계산해야겠네.”여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직 연애도 성공 못 했는데 임신이라니.“하지만 그 사람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이런 식의 가족은 아이한테…….”“혼인신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서 이런 마음의 준비도 안 했어?”윤서가 말을 가로막았다.“복수한다며? 하준 씨 부인이 돼서 그 인간들 바들바들 떨게 해주라고. 성공만 하면 얼마나 사이다냐? 걔들 네가 윗사람이 되면 욕도 못 하는 거야!”“하긴…. 그런데, 그건 그렇고 넌 뭘 또 그렇게 자세하게 아는 거야? 너 상원 오빠랑…….”“어딜, 어딜! 우린 그냥 뽀뽀에서 진도가 안 나가.”“부럽다.”‘나는 하준 씨랑 뽀뽀도 못 해봤는데, 인생 뭘까.’******30분 후, 두 사람은 동성에서 가장 큰 백화점을 거닐고 있었다.여름은 계속 투덜대는 중이었다.“여기 옷 너무 비싸. 왜 여기로 온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짠돌인데. 차도 그냥 평범한 중형차 몰고 평상시 입는 옷도 품질은 좋지만 다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더라구.”“사장님이 후줄근하게 입으면 되겠어? 봐봐, 저 집 옷 어때?”윤서는 여름을 떨쳐내고 옆에 있던 명품브랜드 샵으로 들어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예쁘긴 한데, 마네킹 핏이 하준 씨만 못하네.”“으이구 그래 네 남편 몸짱이다 이거지? 좋겠다.”몸짱?여름은 그 표현이 최하준에게 딱이라 생각했다. 최하준은 여름이 본 남자 중에 몸매가 제일 좋았다. 옷을 벗었을 때도…….“너 무슨 깜찍한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져?”윤서가 놀렸다.“크흡, 됐고, 가자. 여긴 너무 비싸.”여름은 민망해하며 윤서를 끌고 나가려 했다.그때 매장 점원이 나와 웃으며 말했다.“올 시즌 신상이에요. 전국에 딱 두 벌 들어온 리미티드 에디션이랍니다.”“헐, 그런 거 보여줄 필요 없어. 저런 거 살 능력 없는 애야.”
진가은이 끌끌 혀를 차며 채시아에게 말했다.“너 쟤네랑 잘 끝낸 거야. 저런 진상을 친구라고 뒀어 봐. 언젠간 네 발목을 잡았지.”“그러게 말야. 살 능력도 안 되면서 친구 돈은 왜 빌리고 그럴까.”참을성 많은 여름도 이 둘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누가 돈이 없대? 그까짓 리미티드 에디션.”여름은 최하준의 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저 두 벌 리미티드 에디션이랬죠? 둘 다 살게요. 내 남자가 다른 사람이랑 똑같은 옷 입는 건 참을 수 없죠.”점원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황급히 대답했다.“아 네, 두 벌 6천만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여름의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자신의 입을 마구 때려주고 싶었다. ‘아우 입방정! 으흑, 카드 한도가 그만큼 안 되면 어쩌지?’옆에서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지켜보는 진가은과 시아를 보며 여름은 기도했다. ‘돼라. 제발 결제돼라.’“아, 이건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환불이 안 되는데 괜찮으십니까?”점원이 말했다.여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안 그래도 조금 후에 와서 환불 할 생각이었다.채시아가 입을 가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혹시 다시 와서 환불하려던 거 아니지?”“그럴 리가!”여름은 웃기지도 않다는 듯 ‘흥!’하고는 덧붙였다.“그런 수준 낮은 짓 할 사람으로 보이니? 그리고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말아 줄래? 역겹거든.”그리고 점원을 재촉했다.“빨리 포장해 주시겠어요? 여기 너무 시끄럽네요.”“야!”채시아의 얼굴이 벌게졌다.진가은이 그런 채시아를 잡아당겼다.“관둬. 사라고 내버려 둬. 우린 옆에 명품 매장이나 구경 가자. 사실 여기 옷은 너무 저렴해서 우리 오빠는 싫어할 거야.”“하긴.”채시아는 눈치 빠르게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잠시 뒤 여름이 카드에 돈이 없어 망신 당할 걸 생각하니 신이 났다.여름은 그들을 흘겨보고는 짐짓 태연한 척했다.결제가 끝나고 점원은 포장된 옷을 건넸다.“감사합니다. 영수증과 옷 포장해 드렸습니다.
윤서와 오랜만에 꽃게찜을 먹고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니 거실에 누군가 있었다. 여름은 차마 전등을 켜지 못했다.“참 일찍도 오십니다.” 침실 입구에 크고 다부진 몸매의 최하준이 불쑥 나타났다. 비꼬는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여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늘 저지른 짓 때문에 제발 저리는 중이었다. ‘설마 육천만 원의 행방을 추궁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건 아니겠지?’ “쇼핑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최하준이 거실 전등을 켜고 여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여름 숨을 쉴 수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최하준의 그림자가 여름을 감싸니 숨도 쉴 수 없었다. 최하준의 뜨거운 검지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 설마 나한테?’ 최하준은 갑자기 놀리는 듯한 눈빛으로 검지를 다시 여름의 얼굴 앞으로 뻗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최하준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다. 저 손가락이 나에게 닿으면…? 눈을 깜박이며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여름은 ‘이건가?’싶어 최하준의 손가락을 앙 깨물었다. 최하준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강렬하고 낯선 전류가 순식간에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최하준이 눈을 크게 뜨고 여름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겁니까?”“깨물어 달라는 거 아니었어요?“여름이 입을 벌려 최하준의 손가락을 놓더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아니 입술에 손끝을 대더니만 손가락을….”최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당최 여름의 뇌구조가 파악이 안 됐다.“강여름 씨, 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여기 손끝에 기름 묻은 거 안 보입니까? 뭐 먹다 묻혀 놓고 제대로 닦지도 않고 말입니다.”여름은 귀까지 새빨개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남자 손가락이 뭐 그렇게 예쁘게 생겼어요? 눈 앞에 있으니 확 깨
“너무 비싼 걸 질러서 쭌이 당연히 화낼 줄 알았어요. 평소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수수해 보여서요. 아하하, 오해하지 말아요. 나쁘다는 뜻은 아니니까. 튀지 않고 검소한 모습. 난 쭌의 이런 점이 특히 좋아요.”여름은 실수하지 않았나 조심스러워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존심을 건드린 건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최하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름은 최하준이 싸구려를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최하준은 잠시 혼란스러웠다.“명문가 출신인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모르는군요?”‘뭐가 ‘테일러메이드 수제 양복’인지도 모르는 바보야, 난 원래 세상에 한 벌 뿐인 옷만 입는다고.’여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죠.”안됐다는 듯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여름은 혼란스러웠다. ‘내 얼굴은 왜 꼬집고 머리는 또 왜 만지는 거야? 이런 건 애인한테나 하는 행동 아닌가?’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다음 날, 브라운색 싱글 수트를 입은 최하준을 보고 여름은 기절할 뻔했다. 그동안 최하준이 정장을 입은 모습은 많이 봐 왔지만, 자신이 직접 사다 준 옷을 입은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더 친밀하고, 더 짜릿하고 더 황홀한 느낌이었다.지금 이 순간 만큼은 최하준이 진짜 남편처럼 느껴졌다.최하준이 힐끗 여름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름의 얼굴 표정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기성복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저렇게 좋아하니 가끔 입어줘야겠군.’현관문을 나서면서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최하준이 물었다.“어제 강여름 씨 옷은 안 샀습니까?”“안 샀어요. 사랑하는 남편 옷 사려고 나간 거라서.” 여름은 ‘사랑하는 남자의 옷을 직접 구매한 여자’의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야식 먹으러 나갔던 거 아닙니까?” 최하준이 피식 웃으며 뼈 때리는 말을 날렸다.“아잉~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오~”여름은 궁색함을 감추기 위해 잔뜩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최하
‘나만 취하고 쭌은 안 취하면?’혼란스러운 머리를 쥐 뜯고 있을 때 최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어딥니까?”“회사예요.”“주소 보내 봐요. 20분 후에 사무실 1층으로 데리러 갈게요. 생일 파티에 같이 가줘야겠습니다.”기회가 왔다.여름의 눈이 반짝였다. 다만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우리 할머니 팔순 잔치에는 안 가겠다고 하면서 나는 왜 가야 하는데요?”“싫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어디 다른 사람을….”최하준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여름이 얼른 꼬리를 내렸다.“가요, 간다고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나 자기한테 완전히 졌어요!”말을 마치고 텀블러에 든 따뜻한 차 한 모금을 홀짝였다. 좀 직설적이긴 했지만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나 이런 거 너무 잘한단 말이야?’짧은 침묵 후 핸드폰 저쪽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최하준의 음성이 들렸다.“내 핸드폰 지금 차에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 들립니다. 옆에 이지훈 씨 앉아 있어요.”“풉!”당황한 나머지 입에 머금었던 차를 컴퓨터 모니터에 모두 뿜었다. 이어서 이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제수씨, 쫌 하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 원래 이렇게 도발적이었구나. 어쩐지 우리 하준이가….”“바로 갑니다.”전화가 갑자기 뚝 끊겼다.여름은 창피해서 책상에 힘없이 엎어졌다. 비척비척 물건을 챙겨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번엔 윤서의 전화다. “어떻게 됐어? 어젯밤에 남편하고 역사적인 밤을 만드셨나?”“아니. 오늘 저녁에 누구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재. 오늘이 기회인 거 같은데 방법이 없네. 쭌은 저녁 약속이 있어도 한 번도 취한 걸 본 적이 없어.”여름이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 너무 이성적이야.’“생일 파티?”윤서가 얼떨떨해서 되물었다.“지훈 씨 할아버지께서 팔순 잔치 가는 거 아냐? 나도 거기 가거든.”“쭌이 지훈 씨와 엄청 친한가 보네.”“차라리 잘 됐어. 오늘 밤에 하준 씨를 꽐라 만들자.”“…….”“꺄! 외숙모 프로젝트를 위해서 내가 오늘 기어코 그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