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은 병이 재발했는데 사모님이 떠나려 한다면서 회장님이 사모님을 와인 창고에 가뒀어요. 말리는 이모님까지 소동 속에서 쓰러지셔 가지고 제가 또 오밤중에 구급차 불러서 이모님 병원으로 모셔드리고…. 이제는 정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눈물을 줄줄 흘리는 지다빈을 보고 송영식은 열이 뻗쳤다.“아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먼, 어디 보자….”“진정해.”이주혁이 송영식을 잡았다.“하준이 꼴을 보라고. 지금 하준이 병세가 더 급해. 내 생각에는 여름 씨가 하준이를 자극해서 병세를 악화시키고는 재산을 가져가려고 노리는 것 같아.”지다빈이 조그맣게 말했다.“제가 아침에 몰래 가서 와인창고 문을 열어놨거든요. 도망가시라고요. 아무래도… 사람을 그렇게 가둬두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서요. 회장님이 또 발병해서 사람 해치고 그러면 어떡해요?”이주혁이 동의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잘했어요. 사람을 가두는 건 안 되지.”“하지만 깨어나셔서 저한테 뭐라고 하시면…”지다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흐렸다.“우리가 풀어줬다고 말해요.”이주혁이 말했다.“고맙습니다.”얼마 안 있어 하준이 깨어났다. 머리를 꽉 잡고 있는 모습이 많이 아픈 듯 보였다.“하준아, 좀 괜찮아?”송영식이 다정하게 물었다.하준이 친구들을 보더니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 강여름은? 밤새 집에 안 왔어?”“……”다들 깜짝 놀랐다. 송영식은 이상한 표정으로 이주혁과 시선을 나누었다.이주혁이 한참 만에 물었다.“하준아, 어젯밤 일이 기억 안 나?”“어젯밤에 뭘 어쨌는데? 잤잖아?”하준이 의아해 했다.“그저께 밤에 강여름이랑 싸웠거든. 어젯밤에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짜증이 났었는데 침대로 와서 어쩌다가 잠들었나 보네.”이주혁이 하준의 어깨를 토닥였다.“솔직하게 말해줄게. 어젯밤에 너 또 여름 씨랑 대판 싸웠대. 지금 집에서 나갔어. 이모님은 네가 밀어서 다치시는 바람에 입원하셨고. 다행히 어젯밤에 이모님께서 다빈이를 불러놨더라고.”하준의
호반빌.강변에 별장이 늘어서 있고 단지 안에는 호수와 구장 등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직원은 여름과 윤서를 데리고 전기차로 단지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위층에 있던 매니저가 여름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서 안색이 확 변하더니 바로 대표에게 알렸다. 대표는 다시 곧 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하준에게 보고했다.“사모님이 집을 사시나 봅니다.”서재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하준은 안색이 확 변했다.“아니 부부싸움 좀 했다고 집을 사다니 무슨 뜻이야? 이제 아주 집에 안 들어오겠다 그런 뜻인가?”“……”상혁은 입을 다물었다.‘그게 어딜 봐서 그냥 부부싸움입니까?’그렇지만 하준을 자극할 수는 없어서 좋은 말로 위로했다.“아마도… 투자 같은 거 아닐까요? 요즘 좀 사는 댁 사모님들은 부동산 투자 같은 걸 잘하시니까요.”하준이 안색이 다시 돌아오더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내 와이프가 투자를 하겠다면 거기 얘기해서 제일 저렴한 가격에 달라고 해. 90% 할인 받아.”“……”상혁의 입가가 떨렸다.“아니, 회장님, 그렇게 90%씩 할인을 받으면 사모님께서 의심하실 텐데요. 그러면 집을 안 사실지도 모릅니다.”하준이 ‘아 진짜 짜증나네’ 표정으로 상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그러면 70% 할인해주라고 해. 더 받지 말고.”“……네.”상혁은 할 말을 잃었다.이렇게 어렵게 고객에게 할인을 해주기는 또 처음이었다.******호반빌 정원.여름과 윤서는 한 번 둘러보고 이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가격이 좀 세다는 것이었다.“해주실 수 있는 최대한 할인된 가격을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돌아가서 좀 생각해 볼게요.”여름이 마지막으로 부탁했다.“네, 그러면 제가 윗분께 좀 여쭤보고 오겠습니다.”직원이 올라가서 잠깐 있더니 매우 놀란 얼굴로 돌아왔다.“좋은 소식입니다. 대표님께서 마침 1000번째 고객이시라 대표님께서 50% 할인을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리
윤서가 와락 여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여름은 아무 말 없었다.‘잘 됐다. 이렇게 자유로운 게 얼마 만이야? 간만에 바에 가서 한 번 진탕 놀아봐야지.’******밤 9시.두 사람은 함께 바에 들어섰다.이런 분위기가 너무 오랜만이라 여름은 결혼 이전으로 돌아간 듯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불량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이 다가왔다.“임윤서, 오랜만이다? 이런 데서 다 만나네?”그 사람은 씩 웃으며 윤서의 얼굴을 만졌다.윤서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손을 탁 쳐냈다.“백윤택 씨, 관심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저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시죠.”여름은 깜짝 놀랐다.‘이 사람이 백지안의 오빠 백윤택이구나.’“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침대에서 내 기술 보고 나면 아주 날 잊지 못하게 될걸.”백윤택이 가식적인 웃음을 웃으며 계속 윤서를 만지려고 들었다.“우리 집안에 들어오면 영광으로 여기게 될 거라니까.”“계속 이러시면 경찰을 부르던지 동생에게 연락하겠어요.”여름이 윤서를 뒤로 보냈다.“아이코, 이게 뭐야? 아유, 무서워라.”백윤택이 여름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웃었다.“어, 이제 보니까 최하준이 마누라잖아? 누가 이렇게 건방진가 했네.”여름은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윤서가 여름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우리 여름이는 FTT의 사모님이라고요, 내 절친이기도 하고.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줄 알아요.”백윤택은 그 말을 듣더니 껄껄 웃었다.“최하준 본인이 여기 와 있으면 모를까, 겨우 최하준 마누라 따위. 그리고 솔직히 내가 최하준 마누라를 어쩐다고 해도 몇 대 맞으면 끝날걸.”여름은 백윤택의 건방진 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웠다.‘백윤택이 하는 말은 사실인지도 몰라.백지안의 오빠니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대도 최하준이라면 함부로 어쩌지 못하겠지.’백윤택의 시선이 거침없이 여름을 위아래로 훑었다.“쯧쯧쯧쯧, 내 동생 미모 반도 안 되겠네. 대체 무슨 운이 그렇
“입 다물어. 너 같은 인간쓰레기 손에 들어갔다가는 영하도 곧 끝장이야.”백소영이 백윤택의 어깨를 확 잡아 돌리더니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바닥에 처박았다.여름과 윤서는 깜짝 놀랐다. 윤서가 제일 먼저 박수를 쳤다.“좀 하시네요! 너무 근사해요.”백윤택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야, 두고 보자고. 내가 널 가만두나 봐라.”그러더니 비틀비틀 일어서서 가슴을 부여잡고 바 문을 나섰다.“고마워요.”여름이 와인 두 잔을 따라 하나를 백소영에게 건넸다.이전까지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은 완전히 백소영에게 감탄하고 말았다.“천만에요. 마침 이쪽을 지나가다가 바에서 그 인간이 일 벌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서 와 본 것뿐이에요.”백소영은 와인을 꿀꺽 단번에 다 마셔버렸다.“너무 멋있어요.”윤서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내가 남자였으면 따라다녔을 것 같아요.”“별말씀을. 멋있어서 뭐에 쓰게요.”백소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제가 사과를 드려야 할 판인데….”“친오빠도 아닌데 사과는요, 무슨.”여름이 의자를 끌고 왔다.“잠깐 같이 앉아요.”백소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망설였다.“됐어요. 우리는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만약 최 회장이 알았다가는….”“이미 최하준 씨와는 헤어졌어요.”여름이 말을 끊었다.“이제 더는 바보짓 안 하려고 그 집에서 나왔거든요.”백소영이 흠칫했다. 강여름이 이렇게 시원스럽게 박차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그래도 돼요?”“잠깐 세게 아픈 게 가늘고 길게 아픈 것보다야 낫죠.”여름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사실 백지안의 존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죽은 사람을 두고 신경 쓰는 것도 우습고 했는데 대체할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건 뭐 게임이 안 되는 거잖아요?”“그렇네요. 세상에 하고많은 남자 두고 굳이 죽은 사람에게 집착하는 사람한테 목맬 이유도 없고요.”윤서가 동의했다.“최하준이 돈이 많다지만, 뭐 돈 없는 사람 있나요? 가서 벌면 되는 거.”“말
최하준이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지다빈이 우유를 들고 서 있었다.“머리 말려드릴까요?”살짝 손이 닿았을 뿐인데 하준은 홱 몸을 움츠렸다.“됐습니다.”하준은 우유를 마시더니 건조하게 말했다.“내려가 봐요. 일 있으면 부를 테니까.”“하지만….”차마 그러기 싫다는 눈으로 지다빈이 말했다.“지금 상태로는 혼자 계시면 위험한데, 제가 간이침대라도 놓고 곁에서….”“아니, 됐습니다”하준이 확 인상을 쓰더니 직설적으로 말했다.“여기는 나와 내 와이프의 공간이에요. 다른 여자가 오래 머무르는 거 불편합니다.”“죄송합니다. 제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지다빈은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에서 나오면서 지다빈은 입술을 깨물었다.‘내 얼굴이 이렇게 백지안이랑 닮았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뭐, 어쨌든 목표의 반은 달성했으니까.’지다빈이 빈 우유컵을 보더니 싸늘하게 씩 웃었다.지다빈이 나가고 나서 하준은 침대에서 여름과의 톡을 열어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메시지는 없었다. 스토리도 텅 비어 있었다.‘이 사람이 말이야, 그까짓 거 부부싸움 좀 했다고 집을 나가서 소식도 없고 말이야.평생을 같이하겠다더니 나만 집에 남겨 놓고, 어?’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인터넷을 열었다가 메인 화면에 뜬 를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졌다. 급히 클릭해 보았다.화려한 조명 속에서 여름이 윤서, 백소영과 함께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셔츠를 허리에 묶어서 춤을 추면 배와 허리가 다 드러나는 것이 사뭇 매혹적이었다.하준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아니,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얌전히 있는 줄 알았더니 춤을 추고 다녀 가지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게 만들어?집에다 가만히 앉혀 놓고 못 나가게 했어야 하는 건데.’하준은 여름에게 바로 톡으로 그 영상 링크를 보냈다. 잠시 후 채팅창에 ‘1’은 사라졌는데 여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전화도 걸리지 않았다. 차단을 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이런 젠장.’화가 나서
하준이 입술을 핥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었다.둘은 곧 바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백윤택이 곧 다친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다가왔다.“왔어? 다들 아직 안에서 춤추고 있는데.”그런데 말 끝나기가 무섭게 안에서 셋이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 나왔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걸음도 똑바로 못 걸어서 비틀거렸다.“아직 들 마셔써! 더 마셔야쥐. 내가, 낵아, 나는 지금 3차까지 갈 수 이따 이거야!”윤서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오늘 우리 머꼬 죽자!!!!”“난 그럼 먼저 치맥부터 먹고 싶어.”백소영이 끄덕였다.여름이 덧붙였다.“그러고 나서 내 집으로 가서 밤새 마시자!”“와, 쵝오야 증짜! 남자는 다 꺼지라 그래!”“남자들 다 꺼져!”최하준의 얼굴이 까맣게 되었다.‘아주 잘하는구먼, 날더러 꺼지라는 건가, 지금?’하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여름을 홱 낚아챘다.“집에 갑시다.”여름을 다치게 할까 봐 한동안 떨어져 있으려고 했는데 이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여름을 곁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눅우야? 이거 왜 이러세요?”여름이 몽롱한 눈을 들어 상대를 쳐다봤다. 하준이라는 것을 알자 머릿속에 지다빈이 하준의 몸에 올라타 있던 장면이 번개처럼 확 꽂혔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여름은 ‘우웩!’하더니 저녁에 마신 술을 하준에게 다 게워냈다.“강여름 씨!”하준이 이를 갈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불렀다.“회장님!”지다빈이 급히 다가와 하준의 몸에 묻은 오물을 닦아 냈다.윤서는 그 장면을 보니 울컥했다.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지다빈의 등짝을 내리쳤다.“넌 전생에 남자가 없어서 죽었냐? 왜 가는 데마다 남의 남편한테 붙어 있어? 이게 진짜 뻔뻔하네?”졸지의 일격에 당한 지다빈은 ‘아야야…’하고 소리 질렀다.여름은 속으로 통쾌했지만 말리는 척했다.“아우, 윤서야. 그러면 안 되지….”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서에게 다가가면서 발을 헛디딘 척 지다빈에게 툭 부딪혀 지다빈이
“수준이 낮아? 그 수준이 대체 뭔데?”이때 여름의 눈에 하준 뒤에 선 백윤택이 보였다.“저런 사람은 달고 와서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저 사람 대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정곡을 찔리자 백윤택이 소리 질렀다.“이봐요, 진짜로 백소영 같은 인간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니까요. 쟤는 목적이 있어서 접근하는 거라고요.”“아까는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굴더니 갑자기 존댓말은 또 뭐지? 아까 대충하고 넘어가 준 게 후회되네, 진짜.”백소영이 백윤택을 노려봤다.백윤택은 놀라서 다시 바로 하준의 몸 뒤로 숨었다.“저거 봐. 쟤가 저런다니까.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사람 막 협박하고….”“내가 그동안 너무 자비로웠나 보군.”하준이 싸늘하게 뱉었다.“잘 들어. 한 번만 더 내 와이프 주변에서 얼씬거렸다가는 영하 대표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될 줄 알아.”백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입술을 깨물었다. 여름이 백소영의 손을 꼭 잡더니 하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백소영 씨는 내 주변에 얼씬거릴 필요 없어요. 오늘부터 내가 백소영 씨 주변에 얼씬거릴 거거든요. 소영 씨는 내가 서울 와서 처음 사귄 친구예요.”하준은 폭발했다.“내가 저 사람이 얼마나 위험하고 악랄한 속을 잘 감추는 사람인지 그렇게 말을 했는데, 아직도 붙어 다닙니까? 생각이라는 걸 안 해요?”“네, 내가 머리에 생각이라는 걸 안 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했었나 봐요.” 여름이 냉소를 띠었다.“대체 누가 위험하고 악랄한 속을 잘 숨기는 사람인지 모르겠네. 백소영 씨는 나한테 아무것도 거짓말한 거 없어요. 하지만 내 남편이라는 사람은 전 여친이랑 똑닮은 사람을 밤낮으로 끼고 다니는 주제에 입으로는 날 사랑한다네? 정말 더러워.”하준은 흠칫했다. 놀라움과 당황이 눈을 스치더니 곧 싸늘한 시선이 백소영을 향했다.“네가 말했나?”백소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름이 그 앞을 막아섰다.“영하를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데 백소영 씨가 그런 말 나한테 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랑 백지
“그만, 제발 그만하고 우리 집으로 가자.”여름이 침착을 찾을수록 하준은 더욱 당황했다.그러나 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려 입가에 조롱하듯 웃음을 띠었다.“당신 전 여친 때문에 내가 백소영이랑은 친구가 될 수 없다니 그렇게 백지안을 못 잊겠으면 대신 그냥 지다빈이랑 살아요. 흔쾌히 이혼해드릴게요.”“왜 이래, 정말. 지금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야.”하준은 머리가 아팠다. 이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여름이 믿어줄지 알 수가 없었다.“그래, 나를 사랑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백지안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인 거야.”여름이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오늘은 지안이 닮은 지다빈이라지만, 내일 또 얼마나 더 지안이 닮은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지. 나는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대용품일 뿐이에요. 난 이런 상태로 계속 살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당신은 아픈 사람이니까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병은 앞으로 내가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부디 스스로 몸 잘 돌보세요.”“아니야, 아니야. 당신은, 강여름은 이 세상에 하나뿐이야.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 가지마. 제발 가지 말아줘.”하준은 있는 힘껏 여름을 안았다. 이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 아이처럼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이 차가운 세상에서 여름만이 자신이 곁을 지켜주었다. 이제 여름이 떠나가면 하준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이제 그만 해요.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야. 당신 친구들도 나를 비난하고, 당신은 툭하면 사람을 감금하지. 이젠 친구 사귀는 것까지 당신이 동의가 있어야 하다니… 이젠 다 그만두고 싶어.”여름은 힘껏 하준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하준은 여름을 더 한껏 껴안았다.“가지 마. 난 당신이 없으면 안 돼. 다빈이는 가라고 할게, 응? 우리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하준은 너무나 두려웠다. 여름과 이런 지경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그저 아무것도 아닌 부부싸움이었는데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