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여름은 입원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퇴원을 했다.최하준이 직접 차를 가지고 마중을 오자 이런 스페셜한 대접이 조금 뜻밖이라 여름은 놀랐다.그런데 컨피티움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대형 마트 주차장으로 직행하는 게 아닌가.최하준은 해맑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며칠 동안 밥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입맛 까다로운 지오가 밥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적당히 재료 좀 사다가 맛있는 걸 해주시죠.’“⋯⋯.”여름은 아무 말 없이 우아하게 오만한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맛 까다로운 것이 과연 지오인지 최하준인지“왜 멍하니 있습니까? 얼른 다녀와요.”며칠 동안 김상혁이 가져다주는 걸 먹었더니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네.”여름은 할 수 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최하준의 도움도 받았고 안 그래도 맛있는 식사로 감사 표시를 할 참이었다.마트로 들어가면서 머릿속에 몇 가지 메뉴가 떠올랐고 지오를 위한 메뉴도 생각해 두었다.사야 할 재료도 많았지만, 여름은 요구르트, 우유, 과일, 간식거리까지 골랐다.한 바퀴를 돌고 났더니 카트가 넘치고 있었다. 이걸 다 들고 갈 수는 없었다.잠깐 생각해보다가 최하준에게 톡을 보냈다.“쭌, 너무 많이 사서 못 들고 가겠어요. 와서 좀 들어줄래요?”5분을 기다려도 답이 안 왔다.여름은 한숨을 쉬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최하준은 애초에 ‘배려’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쪽에 그늘이 지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훤칠한 최하준이 앞에 서 있었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고 흰색 니트만 입고 있어 더욱 산뜻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여름은 넋을 잃고 쳐다봤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빛나는 미모에 뭘 입어도 잡지 모델이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정신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한 최하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름의 시선에는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기분이 좋았다.“간단하게 식재료나 몇 가지 살 줄 알았더니 이게 다 뭡니까?”평소 근검절약하는
여름이 덧붙였다.“그리고 요리하는데 필요한 양념 하고요. 국수도 샀어요. 야근하고 와서 배고플 때 해줄게요. 휴지랑 키친타월도 다 써가고요.”최하준은 여름이 집안 살림을 구석구석 챙기는 와이프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 참!여름이 곽 티슈를 가리켰다.“이건 차에 두고 쓰세요. 주유소에서 준 공짜 휴지 쓰지 마시고요. 이건 부드럽고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내가 언제 주유소에서 준 휴지를 썼습니까?”“차에 있던데요. 계속 있었어요.”그렇다고 무시하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여름이 존경스럽다는 듯 덧붙였다.“그래도 근검절약하는 모습은 너무 좋더라고요. 이렇게 알뜰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런 것도 매력적이에요.”갑작스런 칭찬에 최하준은 고개를 숙였다. 여름이 촉촉한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자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아픈 모습보다는 당찬 쪽이 아무래도 마음이 편했다.“디자이너인 줄 알았더니 순 아첨꾼이군요.”여름이 헤헤거리고 웃었다.“아첨은 당신에게만 떨어요.”“계산이나 하러 가시죠.”최하준이 돌아서 앞장섰다. 여름은 은근슬쩍 올라가는 최하준의 입꼬리를 보지 못했다.계산대 앞에 다 왔을 즈음 이벤트 도우미가 두 사람을 잡았다.“안녕하세요, 초박형 디럭스 콘돔 들여가시겠어요? 지금 행사 중이라서 1+1이거든요.”여름은 이벤트 도우미가 든 상자를 보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뇨. 필요 없어요.”“아~ 신혼부부라 임신 계획 있으시구나.”도우미가 ‘알지, 알지’ 얼굴을 했다.“아, 네.” 도우미에게 붙잡힐까 봐 여름은 되는 대로 대충 대답을 하고 최하준을 잡아당겼다.“우리가 아이 계획이 있군요?”최하준이 의미심장하게 여름을 쳐다보았다.“그냥 하는 소리죠. 왜요? 쓰시게요?”여름이 아무렇게나 대답했다.“쓸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는 안 쓸 겁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리 속에는 교태스런 여름의 모습을 떠올리는 최하준이었다.‘젠장, 어쩌자고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 보니까 저쪽은 나랑 써보고 싶은
오후가 되어 휴대 전화를 개통하고 났더니 부재중 전화가 열 개도 넘게 떴다.윤서부터 아버지, 어머니까지 여기저기서 많이도 왔다.‘혹시 다들 그날 일을 알고 그러나?일말의 기대감을 감추고 발신을 눌러보았다.“엄마….”“드디어 전화했구나.”날카로운 이정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밖으로 돌아다닐 거니? 당장 집으로 돌아와!”‘집으로’라는 말에 여름은 씁쓸해졌다. “거기가 아직 저에게 집이긴 한가요?”“강여름,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못 돌아올 줄 알아라. 우리도 딸 하나 없는 셈 치면 그만 아니겠니?”이정희는 이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잠시 고민하다가 여름은 집에 일단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어쨌든 이제껏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들이다. 정해천의 녹취 파일을 가져가 강여경의 실체도 밝혀야 했다.******한 시간 후,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다.고작 한 달여만인데도 어쩐지 많은 게 달라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집으로 들어서니 거실에 강태환과 이정희, 강여경이 모두 있었다.강여경의 얼굴을 보자 가슴 속 깊은 데부터 증오가 치밀어 올랐다. “강여경이 제 작품을 훔친 거 알….”“여름아, 밖에서 날 욕하고 다니는 건 그냥 넘어갈게. 하지만 집에서까지 이래야 하니?”강여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적 없다고 했잖아.” 이정희도 정색하며 거들었다.“오자마자 시비니? 언제까지 이럴래?”“증거가 있어요.”여름은 핸드폰을 꺼내 녹음된 음성을 틀었다.정해천의 목소리가 나오자 강여경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더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대체 누굴 시켜 조작한 거니? 정해천이 누군데? 난 모르는 사람이야.”여름은 고개를 돌려 붉어진 눈시울로 강태환을 바라보았다.“강여경이 정해천이란 사람 계좌로 1억을 입금했어요. 조사해 보시면 금방 나올 거예요.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랐고 나중에 아빠가 찾으신 다음에야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벌써 그렇게 복잡한 디자인을 할 수 있겠어요
“다 네가 자초한 거다.”이정희가 쌀쌀맞게 답했다.“저러니 선우한테도 차였지.”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약간의 기대마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바보같이…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강태환과 이정희에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 부부에게 강여경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핸드폰 돌려주세요”자포자기한 듯 여름은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갈게요. 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딸, 이제 다시 이 집에 발 들이는 일 없을 거예요.”“흥, 나가서 계속 우리 얼굴에 먹칠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려고?” 이정희가 쏘아붙였다.“얌전히 집에서 반성하고 있어. 언제 내보내 줄지는 너 하는 거 봐서 결정하마.”‘탁탁’ 손뼉 소리와 함께 보디가드 몇이 달려와 여름을 붙들었다.“무슨 짓이에요, 이건 감금이라구요!”미칠 것 같았다. 가족이 자신에게 이 정도로 심하게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내 딸 제대로 교육하려는 거다. 2층으로 데려가 문 잠가!”강여경이 거들었다.“아빠, 이러지 마세요. 철이 없어 그런 건데요. 그리고 우리 집은 손님도 많이 오잖아요. 2층에서 소리 지르고 그럼 어떡해요.”그 말에 강태환도 흔들렸다.“하긴 그렇구나. 아예… 평안리에 있는 집으로 보내야겠다.”완전히 멘붕이었다. 평안리 집은 예전에 제사 때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5, 6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집이다. 한 번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마을 자체가 워낙 외지고 삭막한 곳이었다.강여경이 거드는 척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강여경, 이 나쁜….”이정희가 소리 질렀다.“도와주려고 애쓰는 애에게 욕을 해? 어째 그렇게 못 돼먹었니!”“당장 데리고 가.”강태환이 손을 내저었다. 여름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형편없어진 걸까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차를 타고 얼마나 갔을까, 여름은 시골집에 버려졌다.현관은 보디가드들이 재빨리 걸어 잠갔고 창문마저 못으로 단단히 박아버렸다. 더 황당한 건 전기도 물도, 덮
최하준이 일을 마치고 귀가했다. 저녁에 국제 금융사기 건으로 술을 좀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불을 켜자 지오가 ‘냐아옹’하며 달려와 그의 다리를 잡고 계속 울었다.“녀석,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최하준은 부드럽게 지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지오가 코를 텅 빈 밥그릇에 비비는 걸 보고서야 분명히 깨달았다.‘굶은 건가?’ ‘강여름이 밥을 안 준 거야?’얼른 사료를 담아 주니 지오는 무척 배가 고팠던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최하준은 방을 한 번 둘러봤다. 여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이 사람이 대체, 입원했을 땐 그렇다 치고 이제 퇴원도 했겠다, 지오 좀 잘 챙겨달라니까.’‘게다가 지금이 몇 시야? 아직도 안 오다니.’휴대 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최하준은 핸드폰을 꺼내 위치를 추적해 보았다. 마침 오늘 여름에게 핸드폰을 줄 때 어젯밤과 같은 상황이 있을까 봐 위치 추적 앱을 깔아 놓았었다.위치를 찾은 후 김상혁에게 톡을 보냈다.—여기가 어딘지 알아봐.곧 김상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강여름 씨 부모님이 사는 집입니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니 화가 치밀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좀 잘해줬더니 이제 막 나가는군. 전화 한 통 없이 그냥 가면 끝인가? 핸드폰까지 꺼버리고.’‘오전에 가져간 녹취 파일로 용서 받은 건가? 그러니까 이제 돌아올 필요 없다 이거지?’‘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이제 다 써먹었으니 버리시겠다?’‘잘났군, 영원히 돌아오지 마. 이젠 죽는 시늉을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테니.’ 하지만 여름이 이렇게까지 칼같이 연락을 끊은 건 너무 의외였다. 3일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니. 더욱 환장할 일은 3일 동안 자신이 밥을 잘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지훈이 극찬하는 동성 최고의 맛집을 가도 맛이 없게 느껴졌다. 가끔 무슨 일 있나 싶기도 해 위치를
“그건 모르지. 윤서 씨 말로는 그 집 편애가 장난 아니라던데”“됐어, 내가 조사해 보지.”최하준은 황급히 김상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강여름 행적 다시 추적해 봐. 마지막 위치가 어디인지.”한 시간 후, 김상혁에게 연락이 왔다.“3일 전에 집으로 갔는데 들어가고 얼마 후 차 한 대가 나왔습니다. 그 차가 곧바로 평안리의 어느 시골집으로 향한 걸 보니 아마 거기 있을 것 같습니다.”“그 말은 그러니까, 갇혔다고?”“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 댁은 제사 때 말고는 거기에 안 갑니다. 워낙 외진 깡촌이거든요. 핸드폰을 쥔 최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와서 나 픽업해줘.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평안리는 꽤 멀었다. 김상혁은 세 시간을 꼬박 운전했다.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최하준은 차에 내려서야 이곳이 얼마나 외진 곳인가를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주위는 온통 산인 데다 불빛 하나 없었다.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대문도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최하준은 그냥 담을 넘었다. 착지하는 순간 등불 하나가 다가왔다.“뭐 하는 사람인데 이 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오는 거유.”돌아보니 한 노인이 손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아까는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도 안 나오시길래….”“여긴 나뿐이우. 얼른 나가슈.”노인이 최하준을 밀치며 말했다.최하준은 노인을 밀치고 손전등을 낚아챈 뒤 집 쪽을 비춰 보고는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일 층이고 이 층이고 창문마다 못이 박혀 있었고 현관은 잠겨 있었다.“빨리 나가요. 안 그럼 경찰을 부를 테니.” 노인은 더욱더 세차게 밀었다.“그러시죠. 아니면 불법감금죄로 되려 잡혀갈 겁니다.”당황하는 노인의 기색을 보자 최하준은 더욱더 확신이 생겼다.성큼성큼 걸어가 세게 문을 걷어찼다. 한참을 차도 열리지 않자 한쪽 옆에 놓여있던 도끼로 창문을 뜯었다.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기조차 안 들어오는 집이었다. 최하준은 방을
병원 응급실 앞.밖에서 기다리는 최하준의 두 주먹이 굳게 쥐어져 있다. 반 시간쯤 지났을까, 의사가 응급실에서 나왔다.“한 시간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생명엔 지장 없습니까?”휴우… 최하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심장도 이제야 좀 정상적으로 뛰는 것 같았다.“네, 하지만 신체 기능이 매우 저하된 상태라 열이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의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아마 최소한 사흘은 물을 못 마셨을 겁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상한 음식을 먹였나 봅니다. 보름쯤은 푹 쉬어야 회복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김상혁도 놀라 혀를 끌끌 찼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최하준의 얼굴에 살기가 스쳤다.“오늘 일 기자들에게 알려. 그 집안 사람들의 실체를 알려주자고.”“알겠습니다.”******여름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곧 죽을 것 같던 찰나, 누군가의 뜨거운 품 안에 안겼다. 그 사람이 자신을 꼭 안아 붙들어 주었다. 너무나도 따스한 느낌, 마치 생명의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들어보니… 아직 살아있다.‘아직 살아있네.’눈을 떴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몸엔 따뜻한 이불이 덮여 있고 작은 나이트 스탠드가 켜진 병실엔 히터도 돌아가고 있었다.그 음산한 폐가가 아니다. “드디어 깼니!”눈물이 그렁그렁한 윤서가 와락 안기며 울먹였다.“왜 자꾸 병원에 들락거리고 그래! 상태도 점점 더 심각하고, 아주 심장 떨어지겠어.”“네가 날 찾은 거야?”머리가 무척 어지러웠고 열이 심하게 났던 것 같다. 배도 뒤틀리듯이 아팠고…. 그게 기억나는 전부다. 여름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고프고 춥고 목마르고….“아냐, 하준 씨가 널 살렸어. 너희 집으로 찾아갔는데 네가 없는 거야. 바로 너희 남편에게 연락했지. 밤에 널 구해 나왔어. 이제까지 그 동네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안정되었다고 해서
“알면 됐습니다. 그런데 강여름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종잇장처럼 삐쩍 마른 그녀를 보자 최하준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혼인 신고한 이래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잖습니까! 강여름 씨가 죽으면 경찰이 가장 먼저 심문할 사람이 나라는 건 압니까?”“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예요.”여름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참으려고 창백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최하준도 마음이 불편했다. 윽박 지르려던 건 아니지만 그래야 여름이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았다.“내가 사준 핸드폰은 어째서 그 집에 둔 겁니까?”“엄마한테 속아서 뺏겼어요.”“바봅니까?”“…맞아요, 이제부터 강바부탱이라고 부르시면 되겠네요.”“…….”이지훈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병실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됐어, 그만 자극하라고. 부모님한테 그런 일을 당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여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최하준이 인상을 풀었다.“죽기 싫으면 이제 그 집 사람들한테서 멀리 떨어지십시오.”“하긴.” 이지훈이 끄덕였다.“앞으로 우리 하준이 밥 좀 부탁합니다. 보세요, 며칠 제수씨가 해주는 밥을 못 먹으니 성질이 점점 괴팍해지고 있지 않습니까?”“이지훈”최하준이 노려보자 지훈은 말을 멈췄다.여름이 참지 못하고 살짝 웃었다.“얼른 돌아가서 해줄게요.”“됐습니다. 본인 몸조리부터 합시다.”내내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쭌,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한주그룹.한선우가 인터넷에서 그 뉴스를 본 지도 이틀이 지났다. 포털엔 이미 전문의의 진단서까지 공개돼 있었다.충격에 한동안 멍해 있던 한선우는 차를 몰아 강여경의 집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분노를 억누르며 따져 물었다.“여름이를 폐가에 두고 물도 없이 쉰 밥만 주셨다는 게 사실입니까?”“그게 말이 되나? 자넨 어려서부터 우리를 봐 왔잖나, 우리가 그런 사람인가, 어디?강태환은 울컥했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