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응급실 앞.밖에서 기다리는 최하준의 두 주먹이 굳게 쥐어져 있다. 반 시간쯤 지났을까, 의사가 응급실에서 나왔다.“한 시간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생명엔 지장 없습니까?”휴우… 최하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심장도 이제야 좀 정상적으로 뛰는 것 같았다.“네, 하지만 신체 기능이 매우 저하된 상태라 열이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의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아마 최소한 사흘은 물을 못 마셨을 겁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상한 음식을 먹였나 봅니다. 보름쯤은 푹 쉬어야 회복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김상혁도 놀라 혀를 끌끌 찼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최하준의 얼굴에 살기가 스쳤다.“오늘 일 기자들에게 알려. 그 집안 사람들의 실체를 알려주자고.”“알겠습니다.”******여름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곧 죽을 것 같던 찰나, 누군가의 뜨거운 품 안에 안겼다. 그 사람이 자신을 꼭 안아 붙들어 주었다. 너무나도 따스한 느낌, 마치 생명의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들어보니… 아직 살아있다.‘아직 살아있네.’눈을 떴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몸엔 따뜻한 이불이 덮여 있고 작은 나이트 스탠드가 켜진 병실엔 히터도 돌아가고 있었다.그 음산한 폐가가 아니다. “드디어 깼니!”눈물이 그렁그렁한 윤서가 와락 안기며 울먹였다.“왜 자꾸 병원에 들락거리고 그래! 상태도 점점 더 심각하고, 아주 심장 떨어지겠어.”“네가 날 찾은 거야?”머리가 무척 어지러웠고 열이 심하게 났던 것 같다. 배도 뒤틀리듯이 아팠고…. 그게 기억나는 전부다. 여름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고프고 춥고 목마르고….“아냐, 하준 씨가 널 살렸어. 너희 집으로 찾아갔는데 네가 없는 거야. 바로 너희 남편에게 연락했지. 밤에 널 구해 나왔어. 이제까지 그 동네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안정되었다고 해서
“알면 됐습니다. 그런데 강여름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종잇장처럼 삐쩍 마른 그녀를 보자 최하준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혼인 신고한 이래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잖습니까! 강여름 씨가 죽으면 경찰이 가장 먼저 심문할 사람이 나라는 건 압니까?”“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예요.”여름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참으려고 창백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최하준도 마음이 불편했다. 윽박 지르려던 건 아니지만 그래야 여름이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았다.“내가 사준 핸드폰은 어째서 그 집에 둔 겁니까?”“엄마한테 속아서 뺏겼어요.”“바봅니까?”“…맞아요, 이제부터 강바부탱이라고 부르시면 되겠네요.”“…….”이지훈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병실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됐어, 그만 자극하라고. 부모님한테 그런 일을 당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여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최하준이 인상을 풀었다.“죽기 싫으면 이제 그 집 사람들한테서 멀리 떨어지십시오.”“하긴.” 이지훈이 끄덕였다.“앞으로 우리 하준이 밥 좀 부탁합니다. 보세요, 며칠 제수씨가 해주는 밥을 못 먹으니 성질이 점점 괴팍해지고 있지 않습니까?”“이지훈”최하준이 노려보자 지훈은 말을 멈췄다.여름이 참지 못하고 살짝 웃었다.“얼른 돌아가서 해줄게요.”“됐습니다. 본인 몸조리부터 합시다.”내내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쭌,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한주그룹.한선우가 인터넷에서 그 뉴스를 본 지도 이틀이 지났다. 포털엔 이미 전문의의 진단서까지 공개돼 있었다.충격에 한동안 멍해 있던 한선우는 차를 몰아 강여경의 집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분노를 억누르며 따져 물었다.“여름이를 폐가에 두고 물도 없이 쉰 밥만 주셨다는 게 사실입니까?”“그게 말이 되나? 자넨 어려서부터 우리를 봐 왔잖나, 우리가 그런 사람인가, 어디?강태환은 울컥했다.
잠시 멍해 있던 한선우는 여름이 한 짓을 생각하자 금세 냉정함을 되찾았다.분명 여름이를 매우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내가 방법을 모색해 보겠네.”강태환이 말했다.******여름은 입원한 지 3일 만에 퇴원했다. 요즘 병원에 너무 자주 입원했기 때문에 이제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컨피티움으로 돌아와 보니, 그동안 보살핌을 못 받아 야위었을 거라 예상했던 지오가 뜻밖에도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다.저녁에 돌아온 최하준은 여름이 지오에게 먹이를 주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지오야. 다이어트 좀 하자. 네 배 좀 보라고, 임신한 것 같잖아.”최하준은 뜨끔했다.‘후우, 지오 배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네. 곧 알게 되겠어.’어쨌든 집에 사람이 있으니 집에 돌아왔을 때 썰렁하지 않아서 좋았다.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여름이 이미 밥상을 다 차려 놓고 있었다.구해준 데 대한 보답인지 모두 최하준이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최하준은 한 번 쓱 보더니 찌푸리며 말했다.“찜이나 볶음 말고 이제 가끔 국물 있는 걸 하면 안 되겠습니까?”여름은 당황스러웠다. 전에 찌개를 끓여준 적이 있지만, 많이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자주 하지 않았던 건데 오해였던가 보다.“알았어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사골국이나 삼계탕, 오리탕도 좋습니다. 인삼, 소꼬리, 동충하초, 이런 몸에 좋다는 거 좀 사 오십시오. 내 카드 쓰면 됩니다.”몸 보양 잘 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거라는 의사 얘기를 대체 들은 건지 만 건지 답답했다. ‘아직 젊은 거 하나 믿고 이렇게 철이 없어서야.' “네.”여름은 순순히 대답했다.최하준이 말한 식재료는 모두 몸보신에 쓰는 것들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원래 몸에 좋다는 건 죄다 사다 먹는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식탁을 치우며 최하준이 오늘 반찬을 다 먹은 걸 보고서 그제야 깨달았다. 반찬이 지겨웠던 게 아니란 걸.‘맞다, 몸보신이 필
말 하는 중에 커다란 손이 여름의 입을 막았다.최하준의 손에서 마른 소나무 향기가 시원하게 났다. 그윽하니 좋았다.하지만 너무 뜨거웠다, 으아!“그만.”안경 렌즈 뒤, 남자의 눈 밑으로 빛이 반짝였다.여름은 얼굴이 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하준이 손을 치우자 그제야 죽을 책상에 놓고는 말했다.“오래 일하길래 배고플 것 같아서요.”다진 쪽파가 송송 뿌려진 죽이 최하준의 식욕을 당겼다.“강여름 씨, 날 찌워서 잡아먹을 계획입니까?”“아뇨, 몸매는 지금 딱 좋은데요.”여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하지만 쪄도 난 상관없어요. 쭌 좋다는 여자가 없어지면 나한테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최하준은 여름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입가에 싫은 티 역력한 웃음을 지었다.“됐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입원하는 여자는 못 데리고 삽니다.”“뭐 상관없어요. 내가 곧 돈 벌어서 부양할 테니.”여름이 큰소리를 쳤다.“내가 눈감기 전에 그런 날이 오려나….”최하준은 숟가락을 들어 죽을 저었다.완전히 무시당한 여름은 찝찝한 기분으로 서재를 나왔다.‘날 무시했어? 두고 봐, 증명해 보일 테니.’******새벽 1시.여름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얼른 등을 켰다. 등불의 따뜻한 기운에 차츰 마음이 안정됐다.또 그 어두컴컴한 폐가에 갇히는 꿈을 꿨다. 오싹한 소리가 들려오는 밤이었다. 여름은 두려움에 몸을 웅크렸다. 도저히 혼자 잠이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가 초조하게 안방 문을 두드렸다.“누구야?”한밤중에 깬 최하준의 목소리에는 심한 짜증이 베여있었다.“나예요.”안에선 한참 적막이 흘렀다. 여름이 거의 포기하려고 할 때쯤 방문이 휙 열렸다.머리에 까치집이 진 최하준이 문에 서 있었다.“날 설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잘못 채워진 최하준의 잠옷 단추를 보고 있었다. 급하게 입고 나왔음이 분명했다.“무서워서….”힘없이 눈을 드는 여름의 얼굴은
“지금 한 말 잊지 마십시오.”최하준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여름은 쪼르르 달려가 최하준의 침대 옆에 이불을 깔았다.최하준은 처음엔 잠깐 경계했으나 여름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고는 곧 잠들었다.그러다 얼마나 잤을까,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열어줘요… 제발… 문 좀… 너무 추워… 무서워… 무서워.”최하준은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비추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름의 모습이 달빛에 어렴풋이 보였다.“일어나요, 꿈입니다.”최하준이 침대에서 내려와 여름의 손을 귀에서 뗐다.그러나 여름은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웅얼거렸다. 조그만 얼굴이 핏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별수 없이 최하준은 여름을 품에 안고 어깨를 도닥였다.“걱정 말아요. 괜찮아요….”부드럽고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해 있던 여름의 몸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어깨와 뺨에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품에 폭 안긴 작디 작은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몸에선 화려하진 않지만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는 아니었다. 집에서 쓰는 샴푸 향이다.전에는 그 샴푸 향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었다.향기에 취한 채 최하준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원래는 여름이 잠이 들면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두 사람은 베개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여름은 몸 반쪽을 최하준의 가슴에 기대고 달게 자고 있었다, 평온한 웃음을 띤 채.최하준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달달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잠시 후, 그는 이불을 살살 걷어냈다.그리고 여름의 잠옷 앞 섶이 거의 다 풀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그때, 여름이 스르르 눈을 떴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여름의 동공이 확장됐다.자신이 최하준의 품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은 여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쪽으로 피했다.“아니, 왜 남이 침대에 들어와 있어요?”“…….”최하준은 어이가 없어 웃
“됐어요. 나한테 뭐라고 할 순 있지만 여자라서 그런 걸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되죠.”“좀 하면 어떻습니까?최하준의 말투에 화가 가득했다.“아 진짜….”여름은 열이 확 뻗쳤다. 갑자기 최하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하준은 깜짝 놀랐다.‘설마 강제로 키스라도 하려는 거야?’머릿속은 젤리처럼 도톰한 여름의 입술로 가득했다. 그런데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뺨에서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이럴 수가… 꼬집었다.최하준은 여름을 힘껏 밀쳐냈다. 꼬집힌 자리를 문질렀다.젠장, 정말 아팠다.“강여름 씨! 내가 당신을 어쩌지 못할 줄 알고 이러시나 본데?”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여름은 몸이 떨렸다. 어쩌자고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질렀을까?“어… 내 얘기 좀 들어봐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쭌을 사랑해서….”여름은 더듬거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그런 말도 있잖아요.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고.”최하준이 다가와 이를 꽉 물며 말했다.“누굴 바보로 아는 겁니까?”“그럼 쭌도 한 번 꼬집어요.”여름은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 사랑하는 만큼 꼬집어요. 사랑하는 만큼 세게 꼬집기!”“…….”최하준은 30년 인생 처음으로 욕이 나오려 했다.‘진짜 이런 식으로 도발해도 내가 어쩌지 못할 줄 아나 본데?’최하준이 왼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여름의 뺨을 꽉 꼬집었다. 핑크빛 뺨은 찹쌀 모찌처럼 부드러웠다. 그대로 놓고 싶지 않았다.아악!최하준은 보드라운 얼굴이 빨갛게 된 걸 확인하고서야 놓아주었다.“이제 잊지 마십시오. 벌입니다.”여름은 아픔을 참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뇨, 이건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죠.”“꿈 깨시죠.”차가운 웃음과 함께 최하준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얼굴에 벌건 자국이 거울에 비췄다. 당장 나가서 어떻게 해주고 싶었다.망할.평상시라면 마스크를 써도 된다. 하지만 오늘은 재판에 출정해야 한다. 어느 변호
이지훈이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들고 와 최하준과 구민상에게 건네며 달랬다.“여긴 무슨 일이야?”최하준이 무신경하게 말했다.“나 참, 나도 오늘 2호 법정에서 재판 있어.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지?”이지훈이 투덜댔다.“그런데 그 마스크는 뭐야? 감기 걸렸어?”“…….”“남한테 전염될까 봐? 그런 세심한 구석이 있었어? 동성 오더니 철 좀 드는구나”10분 후, 법정 심문이 막 시작되려 할 때 최하준은 마스크를 벗었다. 퍼런 멍자국을 보고 이지훈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이게 뭐야….”“부딪혔어.”침울하게 한 마디 내뱉고 최하준은 법정으로 서둘러 들어갔다.이지훈은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여자에게 꼬집힌 자국이 분명했다.‘저 재미없는 녀석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이라니, 이따가 몰래 찍어 단톡방에 올려야겠다,’……여름은 집에서 며칠 쉬었다. 얼굴에 멍자국이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일을 찾으러 나섰다.하지만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죄송합니다. 표절한 디자이너는 채용할 수 없습니다.”“강여름 씨, 이미 이쪽 바닥에 소문이 파다해요. 아무도 뽑지 않을 거예요.”“TH에서 업계에 쭉 통보했거든요. 그런데 누가 겁도 없이 강여름 씨를 뽑겠어요?”“…….”지원했던 회사를 나서며 강여름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는데 이제 일자리마저 찾을 수 없다니.‘이제 어떻게 한다? 업종을 바꿔야 하나?’“빵빵!”옆에서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는데 여름이 반응이 없자 누군가 소리 질렀다.“여름! 오랜만이다.”여름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고급 SUV에서 훈훈하게 생긴 얼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선배, 어떻게 여기 계세요?” 놀랍게도 유학 시절 선배 도재하였다. '재하 선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우리 회사도 이 건물이야. 여기서 나오던데 무슨 일이야?”도재하는 차를 세운 뒤 타라고 손짓했다.여름은 차에 올라, 쑥스럽게 말했다.“입사 지원하러 왔는데
‘뭐가 ‘또’야?’여름은 억울했다.‘내가 요즘 만날 집에서 밥만 했지 한 발자국도 안 나갔다고, 어?’“그냥 전에 같이 유학했던 선배랑 밥 한 끼 먹으려는 거예요.”최하준이 웃었다.“그러니까 이번엔 대학 동문이란 말이죠, 지난번엔 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당하더니.”“어쨌든, 그런 줄 아세요.”여름은 더 열 받고 싶지 않아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름이 씩씩거리는 걸 보고 도재하는 궁금해졌다.“새 남친? 아니면 남편?”여름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그럴 리가요, 제 룸메이트예요.”‘호적상으로 남편이긴 한데 그 사람은 절대 인정 안 하거든요. 유명무실이랄까.’도재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꼭 부부끼리 하는 대화 같아서.”“그, 그런가요?”여름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럴 리가, 최하준과는 늘 이런 식으로 대화했는데 같이 살다 보니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가 싶었다.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저녁을 9시까지 먹은 후 도재하는 컨피티움 입구까지 바래다줬다. “잊지 마, 내일 아침부터 출근이야. W팰리스 리모델링 건 오더 받은 게 있거든. 내일 가서 실측 좀 해줘.”“네!”여름은 손을 흔들다가 도재하가 탄 차가 떠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최하준이 계단 위에서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품 안에는 졸린 눈의 지오가 늘어져 안겨 있었다.“선배라더니, 남자였습니까?” 최하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눈을 구겼는지 파리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오늘 자기 저녁 식사는 형편없었는데 여름이 남자랑 맛있는 거 먹으며 시시덕거렸을 걸 생각하니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 학교 선배….”최하준이 말을 끊었다.“강여름 씨, 처음에 당신이 결혼하자고 한 겁니다. 경고하는데 아무리 계약 결혼이지만 행동 좀 주의해 주시죠. 와이프 바람 났단 소린 듣고 싶지 않습니다.”웃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뭘 그렇게 오버해요? 선배랑 밥 한 끼 먹은 거 가지고.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막돼먹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